|
제1절 역사공정에 대한 우리의 대응
우리 역사학계의 상고사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우리 역사학계는 일본제국에 의해 만들어진 식민사관을 따르는 역사학자들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조선이나 대한제국이라는 국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온 ‘조선’을 ‘이씨조선’이라하여
일개 제후국과 같이 폄하하고, 우리 강토도 대륙에서 융기한 우리 땅을 자신들의 온전한 섬에 비해 반쪽자리라고 비하하는
투의 반도에 국한시켜 놓았으며, 우리 역사서도 자신들의 역사시기에 맞추어 잘라버려서 고려조에 기록된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마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백제의 근초고왕 이전의 기록은 믿을 수 없는 전설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우리의 고대사와 우리말까지 말살하려한 일제가 ‘고기’나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등은 모두 위서라고 하면서, 보이는 족족 수거하여 없애버리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일제 총독부의 조선사 편수관으로 일하며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춰 우리역사를 편집한 이병도씨를 정점으로 하는 소위
강단사학자 들이 학계를 장악하면서, 우리 민족 대대로 기록하고 가르쳐온 우리의 정통역사를 연구하는 사학자들은
제도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시골에서 옛 이야기나 하는 재야사학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형편이다.
▪ 최태영(1900~2005)선생은
- 광복 후, 사법시험에 국사 과목을 포함시킨 것은, 어찌 자기 역사도 모르면서 사법부의 일을 할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에서
선생이 강력히 주장하셨다고 하며,
- 김구(1876~1949) 선생의 야학이나(선생의 부인은 김구 선생의 수제자임), 구한말과 국권을 유린당한 그 당시만 해도,
단군조선에 대해, 서당이나 사학이나, 야학에서 역사사실로 가르쳐 왔다고 하셨다.
- 따라서 당연히 선생이 배웠던 그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리라고 생각 했는데, 은퇴 후 우리 역사 교과서를 보니,
우리 역사가 아니고 일본 역사를 가르치고 있더라고 하셨다.
- 그래서 우리 역사를 바로 살려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이병도(1986~1989)씨를 설득하여 함께 《한국상고사입문》을
쓰셨다고 했다. 이는 이병도씨에게는 천운으로 민족 앞에 속죄할 기회를 가지게 된 일이었다.
《한국상고사입문》 (1989.1.3)은 이병도씨에게는 아흔의 연세로 민족 앞에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속죄하는 일이였으며,
정인보등 쟁쟁한 역사학자들이 있어서 맡겨두고 신경을 쓰지 않은데 대한 최태영선생의 안타까움이 담긴 책이다.
통탄스러운 일은 이병도 선생은 자신의 친일 사관에 따른 고대사 연구의 잘못된 점을 인정하고 참회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가 주축이 된 우리 강단 사학자들은
“우리 선생님이 노망이 드셨다.” 하면서, 선생께서 일본의 식민사관으로 잘 못 정리하셨다고 참회한 바로 그 이전의
연구 성과로 우리 고대사는 모두 정리되었으니 더 이상 연구할 것이 없다고 하니 이 얼마나 기막힐 일이 아니겠는가?
어찌 역사연구에 끝이 있는 것이며, 스스로 연구할 생각도 없이 일본역사학자의 주장만 외워서 전하는 것이 우리 역사학자인가?
이들 강단사학자 들은 ‘부도지’나 ‘한단고기’ 등 위서라고 하는 우리 옛 역사서를 읽어보기라도 한 것일까? 읽어 보았다면,
어떤 점이 거짓이고, 과장된 것이거나, 전설일 뿐이라는 등의 비판을 하여야할 것이며, 이러한 일 또한 역사연구의 중요한
부분임을 모르는 것인가?
이전에 역사사실로 가르치던 ‘단군세기’가 단순한 ‘단군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화에 내포된 진실은 없는지
살펴볼 필요도 없는 것인가? ‘단군세기’에는 1세 단군으로부터 47세 단군까지의 역대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일본서기”의 ‘권제1. 신대 상’ ‘권제2. 신대 하’에 번역서로 100쪽 분량으로 기록된 신화·전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년대와 기사가 정확히 기술 되어 있다.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인은 백제가 멸망 한 후 비로소 ‘일본서기’를 기록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가야와 백제를 본국으로 생각해온 일본인이 자기 나름의 고토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고 그 땅에
정착하며 옛 역사를 신화의 형태로 기록하여 남긴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단군세기’를 중심으로 일본서기의 신대기와 중국의 신화를 비교 연구하면 소득이 없을까?
일제의 황실 보물창고 ‘정창원’에는 백제 무령왕이 하사한 칠지도를 비롯한 많은 보물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일본의 천황이 즉위 하면 가장 먼저 읽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천왕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이 기록에는
분명 천황가의 출자에 대한 비밀이 기록되어 있을 것인데, 혹시 이 기록에는 우리의 ‘비류백제’나 더 나아가 우리의 ‘고기’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사정은 일본이 ‘內鮮一體’의 정책을 펴오다가 이차대전 패망 직전 후환을 두려워한 군부가 조선을 분할할 것을
건의 하였으나 천황이 반대하여 조선을 계속해서 일본 내지군의 관할로 유지해오다가, 소련이 참전하는 때를 기다렸다가
천황의 제가도 없이, 38도선 이북을 내지군 관할에서 관동군 관할로 바꾸어 소련에 항복한 사실에 미루어 짐작할 바 있을
것이다.
▪ 정소문 정해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바로 읽기]의 정해자의 말에 의하면 “우리 고대사는 압록강 이남이
‘이상적인 강역’이라는 정약용의 설이 일제의 각광을 받으면서 식민사관이 확립되었고, 이에 물이 든 최남선 같은 학자들이
‘단군의 백두산 개국설’을 들고 나와---일제의 주장에 동조함으로써 우리의 역사영역은 압록강 이남으로 국한되었다“고 하며,
이에 반발한 단제 신체호 선생이 《조선 상고사》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태영의 《한국 상고사》나 신체호의 《조선 상고사》 등은 일제 식민사관에 따라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강단 사학자
들에게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재야의 이설로 취급당하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책이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하여서도 잘 알 수 있다.
필자는 2006년 이러한 강단사학자 들의 역사관을 비판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관심이 있으신
분은 아래를 참고 하여 주시기 바라는 바이다.
▪ 우리 역사학계는 우리 고대사의 강역을 한반도로 제한하고 있는데, 뒤에서 정확한 논증을 통해 밝힐 것이나, 우선 과연
우리 고대사는 한반도에 국한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라도 가지고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논증은 뒤로
미뤄두고 우리민족이 천산으로부터 동진하여 두 갈레로 갈라져 한 갈레는 황하 이북으로, 한 갈레는 황하이남 지금의
호북 안휘 산동 일대로 옮겨왔음을 추측 할 수 있는 자료가 있어 여기에 소개 하는 바이다.
- 김효신 신부는 《상고연구 자료집》 (1992년. 도서출판 새남)에서 중국의 〈魏書〉와 우리의 〈古記〉등을 인용하며,
지명에 대한 언어학적 분석을 통해 ‘아사달’과 ‘평양’의 위치를 고증하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주변에 늘려있는
우리말 지명을 통해 우리 민족이 모여 살던 터전과 이동 경로를 추정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총 956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다 난해한 언어학적 분석에 대해 자세히 검토해 볼 수 없었지만,
중국 대륙 깊숙이 남아있는 우리말로 해석해야만 그 뜻을 알 수 있는 지명을 중심으로 흥미있는 부분만 간추려 보고자 한다.
- 신부께서는 “한웅이 3,000여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에 내려오시니 이곳을 신시라고 하였다.“는
최초의 阿斯達(아사달)의 위치를 찾으시며, 신강성 서쪽 중국과 소련의 국경 부근 천산 아래를 지목하셨다.
“天山은 옛날에는 白山 또는 雪山이라 부르다가 唐 때에는 析羅漫山(해발 6,995m)이라 불렀으며, 여름에도 눈이 덮여 있어,
匈奴들이 이곳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엎드려 절을 하고 간다는 汗虅格里山(한둥거리뫼)를 뫼뿌리로 하고,
동남의 阿克蘇河(악〈수〉물)와 서북의 帖克斯河(적스물)의 앛(시작)이 되고 동으로는 那拉特山(나락뫼)이 되어
신강 남북 두 길을 이루게 한다.“하시고
- “汗騰格里 天山(白山) 서남쪽 崑崙山(곤륜산) 서북 머리에 7,719미터로 솟은 뫼를
公格爾山(공격이산)으로 부르는데, 唐韻· 集韻· 正韻에서 公은 弓과 같고, 格은 ‘고’ 또는 ‘各’으로 ‘格爾’는 ‘골, 롤, 홀’의
소리이고, 우리는 ‘忽(홀)’을 ‘훌,골’로 읽으므로 三國遺事의 ‘弓忽山’과 ‘公格爾山’의 소리가 같으므로, ‘궁골산’을 ‘弓忽山’ 또는
‘公格爾山’으로 적은 것이 틀림없다”고 하셨다.
- 아사달의 위치는 어디일까?
지명대사전에는 신강성 합밀현 서 80리에 지금은 ‘二堡’로 지도에 적혀 있는 곳을 ‘阿斯塔納(아사탑납)이라고 적고 있으며,
여기에서 동남으로 신강성과 감숙성 가에 또 다른 백산이 보이며, 머지않은 곳에 돈황읍이 위치하고 있다.
阿斯達· 阿斯塔은 Asta 곧 아스따⇒ 압땅 =압뜰 =앞뜰 이며,
‘阿斯塔納’은 ‘阿斯達那’ 곧 ‘阿斯達氏那(아사달씨네)’로 阿斯達川 께에 사는 이들의 마을, 또는 아사달천 유역을 뜻하는 글로
풀이된다.
- 그래서인지 이 고장의 지도를 보면 우리말과 오가는 말이 너무 많다.
吐魯番(Turpan) 들판,
烏魯木齊(Urumuchi) 오르목제(께),
塔里木(Tarim) 다리목,
吉木乃 길목내, 達板城 들판(성),
紫達木盆地 자달목,
托什干河 터주간물,
阿克蘇 악소(雄牛, 수소),
烏吐布拉克 웃불락(上部洛)
(註. 악소는 桓雄과 관련된 말인데, 연어학적 해석에 대해서는 차후에 소개할 것이다.)
▪ 대구의 앞산 아래 조폐공사에서 동을 취급하던 직원들을 온산으로 집단 이주 시켰더니, 그 동네에 있는 산을 앞산이라
불럿다고 한다. 이와 같이 지명이 사람들의 이주와 함께 따라서 옮겨 간 예는
중국 湖南省 동정호 안에는 舜임금의 두 왕비 아황과 여영의 二妃陵이 있는 群山島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群山市 부근에는 이렇다 할 큰 湖水가 없음에도 군산 이남이 湖南으로 불리는 것은 이러한 지명이 그대로
옮겨온 것이 아닌지 의심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4편 금문의 해석을 통해 그 연관성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밝다는 뜻의 桓都城(아사달, 평양)과 함께 나타나는 白山(밝산), 흰머리산(白頭山)은,
히말라야산(흰머리산 白頭山)에서부터 시작하여, 신강성의 아사달 뒤의 天山(白山, 雪山)을 거쳐, 돈황의 白山으로 이어지고, 하남의 太白山 우리나라의 白頭山(長白山)까지 그 이름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 중국의 동북공정, 즉 동북삼성의 고구려 발해 역사에 대한 역사공정에 대해서는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것이며,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대비하여야 할 문제는 그야말로 성동격서(聲東挌西)의 전략으로 동북의 역사에
대해 떠들면서 중국 서북의 고원지대로 부터 중원을 거쳐 동북까지 이동하며 발전시켜 그 지역에 남겨 둔 우리의 옛 문화까지
모두 자기 들이 발전시킨 중국고유의 문화로 독차지 하려고 하는 文化工程에 대비하는 것이다.
중국이 김치와 한복의 원조라고 하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로, 특허권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일상 생활에서 만들어 쓰는
사람이 주인인 것이며, 사용하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많이 만들어 먹고 입다 보면 개선된 음식이나 복식이 만들어질 수 있으며,
그렇게 변화된 종류의 음식이나 복식에 대한 원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사용해온 것이 부럽고 좋아서 쓰겠다면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제대로 만들어 쓸 수 있도록 가르쳐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만큼 발효음식을 많이 만들어 먹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 간장, 된장, 고추장 같은 장류뿐만 아니라, 오이지나 무우 마늘
깻잎 매실장아찌까지도 간장을 다려서 붓거나 식초나 꿀을 타거나,
참기를이나 들기름을 바르기도 하여 숙성시켜 먹는 것으로, 단순히 체소를 소금에 절여 먹는 ‘파오치’와 같은 음식과는
비교 할 수도 없는 것이며, 바로 담아 먹는 겉절이도 아니고, 초겨울에 온갖 양념을 첨가하여 한 해 동안 먹을 김장 김치를
담그는 것은 아예 차원이 다른 것이다.
한복이 중국의 전통의복이라고 한다면 오죽 내세울 전통의복이 없어서 그러나하고 애잔한 마음으로 제조 방법을 가르쳐 줘서
우리 옷을 많이 입게 하여 우리 문화가 퍼져 나가는데 대해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케이 팝’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음식
이나 의복 문화까지 세계로 퍼져나가는 일이야 말로 자랑스러워 할 일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