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쉰들러와 크라쿠프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1994년 개봉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등 7개 부문에서 수상을 한 감동의 작품이다. 이 영화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이유는 픽션이 아니라 실제있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오스카 쉰들러(리암 니슨 분)는 사업상 이유로 나치당에 가입한 독일인이다. 그는 전쟁 전에는 돈, 술,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실제로 그는 전쟁이 이 모두를 탐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나치의 폴란드 침공 직후 그는 사업 기회를 찾아 크라쿠프를 찾는다. 그리고는 나치에게 뇌물을 주고 금속 조리기구 공장을 인수했다. 독일군에 납품할 물건들을 만든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큰 돈을 벌기 시작했다. 높은 이익을 창출해 낸 이유에는 게토 또는 강제 수용소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고용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쉰들러 외에도 폭스바겐, 바이엘, IG 파르벤 등 독일의 주요 기업 모두가 강제 노동을 이용해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유대인 노동자들은 잘 먹지도 못하고 매일매일 고된 작업을 해야만 했다. 먹을 것은 부족하고 일이 힘에 부치니 작업 중 쓰러지거나 사망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 때 쉰들러는 유대인 회계사 스턴(벤 킹슬리 분)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그를 통해 유대인들의 참혹함을 확실하게 인지하게 됐다.
크라쿠프의 역사는 7세기로 거슬러 올라 가야 한다. 이후 1596년 까지 폴란드의 수도이기도 했다. 13세기에는 상업도시로 발전하여 유럽에서 가장 큰 광장과 시장이 있는 도시가 됐다. 1364년에는 카지미에시 대왕이 야기에우워 대학을 설립한다. 당시 대학에는 인문학, 의학, 법학 등 3개 학부를 갖추고 있었다. 이 대학은 폴란드의 고등 교육기관 중에는 가장 오래된 것이며 중앙 유럽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대학이다. 이렇게 해서 크라쿠프는 폴란드에서는 가장 중요한 도시이자 교육과 문화의 중심도시가 된 것이다. 도시에는 옛부터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다. 당시 게토였던 유대인 지구는 지금도 유대인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장도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수많은 게토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1945년에는 소련군이 들어 와 나치의 지배하에 있던 폴란드를 해방시킨다. 공산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1978년에는 크라쿠프 역사 센터와 성모 승천 교회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됐다. 이것은 전쟁기간 동안 연합군의 폭격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폴란드는 1989년 공산주의가 몰락할 때까지 소련의 지배하에 있었다.
크라쿠프에는 총 27개 노선, 길이 216마일의 트램 노선이 있다. 크라쿠프의 구석구석을 트램이 가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다. 1882년부터 트램이 달리기 시작했다고 하니 139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트램 중에는 1954년형이 있는가 하면 21세기에 제작된 신형트램도 있다. 파란색과 하얀색이 잘 조화된 트램은 크라쿠프 시민들은 물론 관광객들에게도 없어서는 안될 교통수단이다. 가격이 저렴하고 고풍스러운 도시를 천천히 감상할 수 있는 특권까지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티켓을 구입하고 트램을 타면 반드시 티켓 펀칭을 해야 한다. 만약 펀칭을 하지 않고 검사원에게 걸리면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한다. 펀칭하지 않은 티켓으로 또 다른 트램을 이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트램을 타고 크라쿠프 시내를 한바퀴 돌아 본 것은 나에게 있어서 굉장한 즐거움이었다. 트램의 장점은 옛전차를 기억하며 오래된 추억에 젖을 수 있는 행복감에 있다.
구시가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중앙 광장이다. 광장에는 성모 승천 교회, 바벨 대성당, 바벨성, 직물회관, 역사 박물관, 차르토리스키 미술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미술관은 오래전 차르토리스키 가문이 설립한 곳으로 폴란드에서는 가장 오래된 미술관이다. 미술관에는 렘브란트가 1638년에 그린 ‘선한 사마리아인이 있는 풍경’과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490년에 그린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등이 소장돼 있다. 나는 다빈치의 거의 모든 작품을 감상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이 작품이다. 다빈치 특유의 신비감과 순결을 상징하는 담비, 파란색, 빨간색, 검은색의 조화가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당시 절세 미인으로 불리던 체칠리아 갈레라니를 그린 그림이다. 체칠리아는 밀라노의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자의 총애받는 여인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1491년 루도비코 공작의 아이를 낳았으나 후에는 버림받고 말았다. 공작이 다른 귀족의 딸과 정략결혼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성모 승천 교회는 광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예배당의 중앙제단에는 독일 조각가 바이트 슈토스가 1489년에 제작한 황금빛 제단이 화려한 빛을 발하고 있다. 그 위로는 세 개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고 천장은 파란색으로 그려 놓았다. 그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나는 제단과 스테인드글라스와 천장을 바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유럽의 대성당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장인들의 섬세한 손길이다. 그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속에서 나온 놀라운 솜씨인 것이다. 바벨 대성당은 400년 동안 폴란드 왕들의 교회였다. 1320 년 브와디스와프 1세의 대관식 이후 두 명의 왕을 제외한 24명의 왕들이 모두 이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폴란드 역사에 있어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왕족들의 결혼식, 침례식, 장례식도 모두 이곳에서 치렀으며 왕과 왕족들의 무덤도 모두 지하에 있다. 지하 무덤에는 또한 폴란드의 영웅, 크라코프가 자랑하는 위대한 시인 두 명 그리고 크라코프 대성당 주교들의 무덤도 만들어져 있다. 성 베드로와 바울 교회 앞에는 유다를 제외한 11명 사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교회 지하에는 폴란드를 빛낸 유명인들이 잠들어 있다. 그 중에는 수학자 스와보미르 므로제크, 수학자 마리아 레예프스키 그리고 작가이자 교수였던 피오트르 스카르가가 있다. 특히 스카르가는 1579년 빌노 아카데미의 초대총장이었으며 후에 크라쿠프 예수회 대학에서 봉사한 훌륭한 사람이다. 그는 크라쿠프 시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큰기둥 위에 올려 놓은 동상이 교회 광장 앞에 세워져 있다.
크라쿠프에 있는 쉰들러의 금속 조리기구 공장은 사람들이 ‘오스카 쉰들러의 펙토리’라 부른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영화에서도 쉰들러의 펙토리는 등장한다. 공장 벽에는 쉰들러가 전쟁중 공장을 운영했으며 그가 태어난 날과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을 적은 동판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벽 창문에는 쉰들러에 의해 목숨을 건진 유대인들의 사진이 빼곡히 전시돼 있다. 1944년 쉰들러는 유대인의 참혹함을 인지한 후 돈 보다는 직원들을 살릴 방법을 찾는다. 비참히 죽어가는 유대인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 직원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지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944년 가을, 나치는 게토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이송하도록 명령한다. 이에 쉰들러는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1,100명의 유대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 목록을 작성했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돈과 영향력을 사용 체코슬로바키아에 건설 중인 새 공장으로 그들을 이송하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일하던 유대인 여성들이 실수로 아우슈비츠로 이송됐을 때도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나치 장교에게 엄청난 뇌물을 제공한 후 유대인 여성들을 구했다. 지옥에 있던 자신의 직원들을 천국의 문으로 인도한 것이다. 쉰들러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수많은 유대인들을 살렸으나, 전쟁 후에는 이때의 막대한 지출이 사업 실패로 이어졌다. 이후 쉰들러는 이스라엘 정부의 초청을 받고 이스라엘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말년에는 독일과 이스라엘을 오가며 살았다. 쉰들러는 1974년,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예루살렘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