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국보 역사유적 (2)
(1) 북한국보 68호 해주 부용당
부용당은 1500년 해주성의 누각으로 세웠다.
임진왜란 때 조선 인조가 태어난 곳으로,
6.25전쟁 때 파괴되어
터만 남아 있었으나 2003년에 복원되었다.
‘부용당’은 조선에 하나밖에 없는 수중루정으로.
‘해주팔경’의 하나로 전해져온다
부용당은 못에 박은 33개의 돌기둥 우에 떠 받들려 있다.
(2) 북한국보 118호 경성읍성(鏡城邑城)
(鏡城은 저의 고향입니다)
경성읍성은 1107년에 축조된 토성인데
1434년(세종 16)에 김종서가
절도사로 와서 이 성을 중심으로
국방을 더욱 튼튼히 하였고,
1616년경에(광해군 8) 이미 있었던
성을 확장하여 읍성을 고쳐쌓았는데
유성 혹은 치성이라고도 부르며 성문,
성가퀴, 해자, 못, 우물 등을 갖추었다.
성의 사방에 각각 하나씩의 성문을 냈는데
지금은 남문만 남아 있다
사진을 보면 넓은 평야지대에
경성읍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평지읍성의 전형이 아닌가 생각한다.
경성읍성은 북으로는 청진,
남으로는 길주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상 요충지로서 방위상 유리한 자연지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벽은 장구 모양으로서,
그 높이는 약10m에 달하고 아랫부분은
한 변이 1.5m 되는 대리석으로 쌓았다고 전한다. ,
성 밖에는 5~6m 깊이의 참호를 파서
성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3) 북한국보 119호 鏡城읍성 南門
경성읍성남문은 조선시대 중반기에 축조된 경성읍성의 남문으로
경성남문 또는 수성문(守城門)이라고도 한다.
성읍성남문은 1756년홍예문으로 개축되었고 1838년에
다시 중수되었으며 그 후 수성문(守城門)의 현판을 달았다
북한에서는 국가지정문화재 국보 제119호로 지정해 놓고 있다.
(3) 북한국보 20호 청류정
평양 모란봉 청류벽 위에 있는 현재 청류정 자리는
원래 고구려 시기
평양성 내성의 동쪽 장대(將臺, 장수의 지휘소)터였다.
청류정에 올라 앞을 바라보면 청류벽을 감돌아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의
푸른 물이 내려다보이고 강위로는 금릉동굴들과 연결된 다리들이
문수거리로 시원스럽게 뻗어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청류정은 다른 누정(樓亭)들과 다른 구조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누정들에 비해 가운데 칸이 매우 넓은 것이다.
청류벽 벼랑에는 천연기념물인 청류벽 회화나무가 자라고있다.
청류정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단층 누정이다.
(4) 북한국보 97호 표훈사
신라 문무왕 10년, 서기 670년에 창건된 표훈사는
금강산의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사찰로 역사적인 사료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현재 반야보전등 7개의 건축물이 남아있어 삼국시대
건축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20여채의 건물로 이루어져있었으나
지금은 반야보전, 령산전, 명부전
, 릉파루, 어실각, 산신각, 판도방 등만 남아있다.
반야보전은 잘 다듬은 돌로 쌓은 밑단우에 서있는 넓이가
서로 다른 앞면 3간,옆면 3간의 건물이다.
웅대한 건물규모에 알맞게 장식부재들도
굵직굵직하게 되여있다.
표훈사 보덕암
표훈사 보덕암(表訓寺 普德庵)은
조선왕실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고
귀중한 유물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구려시대에 처음 세웠다고 전해지며,
현재 건물은 167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절벽에 높게 걸린 암자로 그 아래에
구리쇠 기둥 하나를 받쳐 놓았는데
그 길이가 약 7m이고, 절벽의 높이는 20m가 넘는다.
구리기둥 위에는 사가집•배집•합각지붕을 섞어서
지은 3층 암자를 앉혔다
보덕암은 황해도 장수산에 있는 현암(懸菴)과
더불어 절벽에 의지하여 지은
희귀하고도 특이한 다락건물로 구리기둥으로
3층이나 되는 집을 떠받들고 있는 건축기교와
지붕을 만드는 데 전통적 건축양식 등을
보기 좋게 배합한 점이 특징
(5) 북한국보 40호 묘향산 보현사
보현사는 평안북도 묘향산에 위치한 불사이다.
784년에 의상에 의해 세워지고,
고려 때인 1024년에 복원되었다.
원래는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팔만대장경은
1984년에 옮기고, 지금은 북한불교의
종교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6) 북한국보 144호 보현사 팔각13층탑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 앞뜰에 있는 돌탑이다.
돌을 팔각형으로 다듬어 13층으로 쌓은 것으로
고려 시대의 석탑으로는 층수가 가장 높으면서도
형태가 완벽한 탑이라고 한다.
돌의 추녀 끝마다 작은 종이 달려있다..
(7) 북한국보 31호 성불사(成佛寺)
성불사(成佛寺)는 사리원정방산 기슭에 있는 사찰이다. .
. 사리원시 북쪽으로 약 8km 떨어진
울창한 수림 속에 자리잡고 있다.
898년에 도선이 창건하고 고려말기에
나옹이 중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극락전, 웅진전, 청풍루, 명부전, 운하당,
산신각과 5층 석탑이 남아 있다.
중심 건물인 극락전은 한국전쟁때 파괴된 것을
현대에 복구한 것이며,
목조 건물인 웅진전은 고려충숙왕때 세워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 성불사와 고려 시대 양식으로 추정되는
성불사오층석탑은 국보이다
"성불사 깊은 밤 그윽한 풍경소리"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가곡 〈성불사의밤〉의 무대로도 유명하다.
성불사의밤
이은상작시 홍난파작곡
성불사 깊은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성불사 응진전(成佛寺應眞殿)은 성불사의 대표적 건물이며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의 하나로 고려시대를 대표한다.
응진전은 극락전과 함께 고려 후기의 건물이고
, 그 밖의 건물들은 조선시대에 세웠다.
(8) 북한국보 119호
온달장군과 평원왕공주의 묘
평양 중심에서 남동쪽으로 22㎞ 떨어진
동명왕릉 옆에 있는 진파리 4호분은
북한 학계에서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곳이다.
북한에서는 이 무덤이 시조왕인 동명왕릉과 같은
구역 안에 있다는 점과
호화로운 벽화 내용으로 미루어 무덤의 주인공은 여자,
특히 평원왕의 공주로 추정하여 이 무덤을
평원왕의 공주와 그 남편인
온달장군의합장묘로 추정한다.
(9) 북한국보 145호 사리원 경암루
황해도 사리원시 경암동 경암산 북쪽 기슭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
1798년(정조 22)에 지은 봉산군의 관아를
사리원으로 옮긴 뒤
1917년 객사(客舍)·아사(衙舍) 등의
건물을 일반인에게 공매하였는데,
지방유지들이 아사 건물의 문루를 사서
경암루를 지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다락건물의 일반형을 보여주는
건물로서 6·25 때 파괴되었으나
1955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여 옛모습을 되찾았다.
(10) 북한국보 127호 개성 성균관
성균관(成均館)은 고려 말부터 이어진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이다.
그 명칭은 고려 충렬왕 때 국학(國學)을
성균감(成均監)으로 개명한 데서
비롯하였다가 이어 충선왕 때
성균관(成均館)으로 개명하였다.
공민왕 때는 한 때 국자감(國子監)이라 부르다가
곧 성균관으로 복귀되었는데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
조선 일대를 걸쳐
한국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다.
(11) 북한국보 128호 승양서원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서원으로
정몽주의 옛 집터라 전한다.
1573년(선조 6) 문충당(文忠堂)을 창건하고
정몽주(鄭夢周)·서경덕(徐敬德)의 위패를 모셨다.
1575년에 '숭양'이란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했다.
1668년(현종 9)에 김상헌(金尙憲)을,
1681년(숙종 7)에 김육(金堉)을,
1784년(정조 8)에 우현보(禹玄寶)를 추가 배향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그대로
남아 있던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다.
(12) 북한국보 125호 관음사 대웅전
관음사는개성시 산성리 대흥산성 안에 있는 사찰로
박연폭포에서 1km쯤 올라가면 있다.
고려 초기(970년)에 처음 세우고 1393년 그 규모를
확장한 뒤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쳤으며 현재의 건물은
1646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관음사에는 대웅전·요사·부속건물과 7층돌탑 등이 있다.
(12) 북한국보 42호 보현사 축성전
상원암의 바로 옆에 1875년에 지은 축성전(祝聖殿)이 있다.
명성황후가 왕세자를 낳은 후 그의 장수를 빌기 위해
금강산과 묘향산 등에 여러 개의 불전을 지었는데 축성전도
그 중 하나로, 공사를 시작한지 10개월 만에 완공했다고 한다.
(13) 북한국보 13호 법운암
법운암은 평양직할시 만경대구역 용봉리에 위치한 사찰로
원래 평양 모란봉에 있었던 평양 제일 가람 영명사 부속암자다.
한국전쟁 당시 전소된 것을 복원했다.
김구 선생이 만주로 떠나기 전 법운암에 머물며 2년간
삭발염의하고 스님생활을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원래 대동강변 부벽루에 있던 영명사의 부속암자로,
고구려 때 창건하고 조선시대에 중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