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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우리 아이들한태 뭐했냐구?? 이 글은 미즈넷 에 올렸던 글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반평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사춘기를 마~악 지나 별천지 꿈을 꾸면서 단봇짐 싸들고 친구의 말대로 꿈을 이루 겠다고 간 크게 겁도 없이 미국이라는 곳을 왔씁죠 근데 저의 작은 두뇌로 그리면서 온 미국은 나에게 그야 말로 물없는 사막 이였습니다 무슨 금덩이가 쏫아질것만 같았던 헛된꿈. 나의 꿈을 맘껏 이룰수 있다는 미국은 내가 맘 먹은대로 이뤄 지지 않았지요 너무 힘들고 배도 곺으고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건 고독과 언어장애 였지요 너무 힘들어서 너무 배고 곺아서 꿈은 어디로 달아나 버리고 결혼을 했지요 살아남기 위해서 한 결혼 20년동안 술만 먹으면 괴롭히는 남편 땜에 죽어 버리고 싶었지만 아이들 보호막이 되어야 하기에 입술을 깨물고 참고 견디며 살면서 나보다 더 힘든 사람 찾아다니며 도우미로 살면서 시간이 흘렀고 아이들이 어지간이 자랐을때 전 두 조카들을 한국에서 대려 오게 되었어요 누나와 남동생 처음 대려 왔을때 육개월 동안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누나는 한국에서 중학생 13살 이였고 남동생은 11살 국민학교 6학년 남자애는 그런대로 공부를 잘 하는지 못하는지 항상 제가 공부 할만하니? 하고 물어면 영어만 잘하면 할수 있을것 같아요 똑 같은 대답을 6개월 . 누나는 공부 욕심이 많은 편이라 지고는 잠을 못자는 정도로 한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이곳에 와도 영어가 부족하니까. 당연히 못할수 밖엔 없었지요 아침 에 눈만 뜨면 이유없이 훌쩍 훌쩍 말도 없이 울기만 하는게 6개월 . 항상 첫 교실은 건너뛰고 2교실에 대려다 교실안에 넣어주며 교실에 대려다 주기 전에 교무실에 들러서 늦은 이유를 말하고 허락서를 받아서 대려다 주곤 하면서 6개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럭 저럭 시간은 흘러갔고 공부도 A급 반에 서 정말 잘해서 고등학교 때는 몇백명에서 1.2등 자리에서 공부를 잘했습니다 지난 십년동안 엄마 아닌 엄마 노릇하면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울기도 무지 울면서 나름대로 잘 보살필려고 노력하면서 길렀습니다 여기는 한국처럼 버스가 있는것도 아니고 집과 어느 거리가 있으야만 학교버스가 픽업을했기 때문에 일일이 운전해서 대려다 줘야 하는 거리에 살았지요 그 가운데에서 인내가 부족했던 난 그 아이들을 키우면서 인내 하는 사람으로 많이 변해 가드군요 막내로 자란 동생 아이 들인데 아이들이 자라면서 최고로 힘든 사춘기 때는 정말 너무 너무 힘들었어요 저에게도 아들이 셋이나 있었고 작은 사업도 하고 있을때 였지요 우리 아이들에겐 하고 싶다는 야구 음악 못대려다 줘도 그애들 하고 싶다는 건 우리 아이들 시켜서라도 가르치며 길러다 보니 우리 아이들 의 불만 도 이만 저만 이 아니였구요 다행히도 우리 아들들은 잘 이해 하면서 십년이란 시간을 잘 참고 잘 자랐지요 제 동생 하고 힘들었던 또 다른 문제는 생활비 문제 였지요 일일이 글로써 다 쓸순 없지만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생할 방식과 생활비 역시 이곳과 같지 않았고 작게 주던 많이 주던 항상 서로 찝찝한 가운데에서 십년이란 시간이 흘렀지요 두 아이들 고등학교 졸업을하고 동생의 태도 가 차갑게 변하드라구요 두애들다 그래도 미국에서 수준있는 고등학교 에서 장학금 받아서 대학을가게 되었지요 뉴욕 에 있는 뉴욕 주립대학 . 하지만 그동안 많이 자란 누나는 한국엘가서 서울대학에 들어가 지금 장학금 받아가면서 열심히 공부 하고 있구요 남동생역시 이곳에서 장학금 받아가면서 대학을 다니고 있습니다 두 아이들 다 우리집에서 떠나 각자 대학 을 들어가게 되자 돌변한 동생 . 자녀들을 낳아 길러 보신분들은 저의 심정을 아시리라 믿습니다 아이들이 밥만 먹여 주면 자라든가요? 대화 없이 가지 처주는 역활 없이 곧게 자라던 가요? 제가 아무리 바빠도 생일날 케이크 마켓에서 사는건 약 간 밀가루 냄새 나는것 같아 성의 껏 케이크도 직접 구워 주고 미역국 꼬박 꼬박 십년을 챙겨 주며 길렀는데 아이들 전화 하지 않는것 까지 이해가 가는데 동생 나에게 가슴에 비수를 꽂는말 언니가 그동안 우리 아이들 한태 뭐 했는데 난 입을 딱 벌린체 아무 말도 못한체 할말을 잊고 큰 충격을 받았지요 어렸을때 이곳에 와서 30년 을 넘게 이곳 생활에 젖어 살아온 난 한국 에 살고 있는 사람을 이해 할수 없는 나였고 동생 역시 이곳 생활을 이해 할수 없기에 난 아무런 그기에 대한 반발도 변명도 할수 없어 그냥 입을 다물고 살아가고 있은지가 2.3년이 지났내요 처음엔 속이 상하고 마음이 너무 아파 한동안 밥도 못먹고 숨이 탁 탁 막히는것 처럼 너무 힘들어서 눈물도 안나오드라구요 그동안 다른사람 보기엔 너무 부러워 보였고 제가 너무 착한 사람으로 비춰젔나봐요 속은 새까맣게 타 버린지가 오래 되었는데 친정 오빠들 한태도 엄마 한태도 힘든다는 말 한마디 할수가 없었지요 저 혼자 결정하고 받아 들인 일이니까요 지금 아이들은 공부도 너무 잘해서 장학생으로 하나는 서울 대에서 하나는 이곳에서 름름한 성인으로 성장 했지요 한국에 있는 딸아이는 명절이 되어도 전화 한통화 없구요 그래도 여기 있는 남자아이 는 가끔씩 전화도 하곤 합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가족이 미국에 계셔서 아이들 유학생으로 맡기실려고 하시는 분계신다면 전 말리고 싶습니다 아무리 사랑했던 형제들 이였을지라도 아무리 잘 보살핀다 할지라도 자녀들은 낳은 엄마 아빠의 몫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건 90%가 형제간에 원수처럼 되어 버린 사람들 부지기 수입니다 부탁 드립니다 ^^*일류 대학 나와도 3류 인생 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고 삼류 대학 나와도 일류 인생 으로 살아가는 분들 많습니다 ^^ |
첫댓글 깊은 사연 가슴이 아픔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 마음 캍지 않으니..이젠 모든 짐 내려 놓으시고 편안한 여생 보내요.
감사합니다거운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눈물이 줄줄 나네요. 그래도 미국서 자라도록 사랑을 주셨잖아요. 그것 하나만으로도 천국에서 상급이 크신 거예요.
무조건적인 아가페 사랑이라지만 때로는 남녀간의 에로스적인 열정도 없을 때가 많구요. 부모의 스톨게적인 사랑도 계산적이구요. 친구간의 필레오적인 우정도 적으로 변할 때도 있지요. 그저 주신 은혜가 쌓여져 하나님의 보상으로 돌아가길 기도드립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소설을 쓸려면 3권은 족히 될것 같은 이야기 들이죠
고생 많으셧습니다 감동으로 깊이 생각 하며 감상했습니다
살아가면서 그고마운 마음 잊지못하겟지요?
언젠가는 다알고 이해하게 될나이가있겟지요?
따뜻한 사랑 베풀어주신 것에대한 보람과 행복
희망은 나뿐 길로빠지지않고
건강 한모습으로 잘자라준것 만으로도 모두위로와 격려가되겟지요?
감사합니다.서울대학 다니면서 열심히 교회에도 다니고 곁길로 가지않고 공부하고 있는것으로 만족해야죠 뭐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