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11:13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까마귀 종류와 ... 박쥐니라]
'까마귀'는 노아의 홍수에서 맨처음으로 등장하는 '부정한 새'이다.
당시 세상이 너무나 악하고 타락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고 [홍수]로 심판을 하신다.
하늘의 창들이 열리고 땅의 샘들이 터져서 사십 주야를 비가 쏟아졌는데, 이때 방주 안에 있었던 노아의 여덟 식구만 구원을 받는다.
노아는 비가 그치자 어느날 방주의 창을 열고 물의 감함을 알고자 하여 '까마귀'한 마리를 날려보냈는데, 그 '까마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까마귀'는 왜 구원의 방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까? 그것은 세상에 나가보니 자기가 좋아하는 죽은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그것을 뜯어먹느라고 방주로 돌아갈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창8:7 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박쥐]는 날 짐승이지만 새 중에서 유일하게 포유동물이다.
보통 날짐승은 알을 낳고 알에서 나온 새끼를 어미가 먹이를 물어다가 키운다.
그런데 [박쥐]만은 그렇지가 않다. [박쥐]는 직접 새끼를 낳고 자신의 젖을 먹여서 새끼를 키운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박쥐]는 땅에서 네 발로 다니는 들짐승과 다름이 없지만,다만 [박쥐]에게는 양손에 비막이 있어서 공중을 마음대로 날아다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쥐]는 날 짐승이면서 '새'도 되고, 어느날 포유동물로 '들짐승'으로도 취급을 한다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은 두 짐승을 예를 들어서 우리의 신앙을 말씀하고 있는데, [까마귀]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의 방주 안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무사히 넘겼지만, 다시 세상으로 나가서 썩어 진 육신의 것들을 취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벧후2:20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게 응하였도다]
그러면 [박쥐]는 어떤가? 그 역시 분명한 자신의 [캐릭터]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새의 모임에 가면 새가 되고, 들짐승의 모임에 가면 들짐승이 되어' 그들과 똑같이 새끼를 낳고 젖을 먹이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양과 염소는 비슷하여 구분이 안되며 육안으로도 식별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그 날! 양은 우편으로, 염소는 좌편으로 나뉘어서 각자의 길로 영원히 갈 것이다.
[마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