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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8 걷는일 1만5천보 연일정씨 문중산 배산산책
2023 계묘년 토끼해가 밝아오더니 세월은 쉼없이 흘러가는구나.
조동화는 아침 기상과 동시에 오늘도 걷는일로 오늘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는구나.
나만의 생활습관일까? 그렇다.
인체의 핏줄은(동맥, 정맥, 모세혈관의 총길이) 120,000km이다.
지구둘레가 40,008km이니까, 지구를 3바퀴 돌 수 있는 거리이다.
놀라운 건 혈액이 몸을 한 번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46초 정도밖에 안 걸린다.
이렇게 긴 핏줄을 이해한다면 피가 맑아야 병이 없고 오래살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혈관질환은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동맥경화 심근경색 협심증 (스탠스 : 좁아진 혈관을 넓혀주는 시술로 스탠스 혈관부착→5-15년)등으로 혈액순환이 원활치 않아서 발생되는 질환을 말하는 것으로 암다음으로 죽을 확률이 많다는 질환이여.
혈관의 길이가 12만키로 되니 혈관이 막히고 좁아질 확율이 많음으로 70대에는 걷고 걷는일 실천해야지요.
내발길 가는데로 걷는일 두시간 반 1만오천보, 천연보약 먹은 거지.
이른 아침 어떤사람들은 테니스장에서 테니스하는 사람들, 어떤이들은 축구하는 사람들로 배산체육공원은 운동하는 사람들의 군상이 보이는구나.
오늘은 문득 배산에 오르고 싶은 충동이 생겨 97m의 배산 정상에 올라 익산시가지를 구경하고 한바퀴 돌으며 걷는일 하였지.
익산의 유일한 산 작은산 배산!
배산이 어떤산이길래 느낌표까지........
조동화의 어머님 정순봉의 뿌리가 연일정씨이며 배산은 연일정씨 문중산으로 나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의 묘역이 있다.
그러거 본게 배산은 조동화와 인연이 깊은산이로구먼.
고려 조선시대에 연일정씨 관리가 나라에 공을 많이 세워 임금이 사패지를 포상하여 그래서 배산이 연일정씨 문중산이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배산 중턱 묘지군락에는 나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묘역이 안치 되어 있기에 묘역을 지나며 잠시 들러 상석을 사진 촬영하고 추모하였다.
상석에 세겨진 외할아버지는 이름이 정자 옥자 규자이시며 1930.11.13 돌아가시었으며, 외할머니는 나와 같은 김제 조씨이시며 내가 이세상에 태어나 네살적 1954년 6월12일 돌아가시었고 외삼촌 정진산은 각종악기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는데 2008년 3월25일 돌아가시었다.
배산 97m밖에 않되는 산이지만 노송들이 많아 솔향기가 그윽하여 맑은 공기를 머금고 두어시간 1만오천보 산책하고 집에 오니 피곤함이 싹 가시고 몸이 가벼워짐을 느낄수 있었으며 기분이 상쾌해짐을 느낄수 있었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아야지요.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되찾을 수 없는게 세월이니, 덧없고 부질없는 삶의 여로에서 좋은일 많이 많이 하시고, 시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하루 하루가 소중한 시간 되자구랴.
<2023.1.8.아침 배산정상에 오르다.
배산정상에는 연주정 정자가 우뚝 서있다.
배산정상 연주정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다.
조동화는 배산정상에 올라 무슨생각을 했을까?
조동화만의 인생의 삶이기에 2023년에 무엇을 실천하는 것이 나의 흔적을 남길까 고민하는 시간이었지요.>
<2023/1/8 아침 배산 정상 연주정에서 바라다본 익산시가지 모습입니다.
해는 떠올랐으나 이른 아침이라 쁘엿게 시가지가 보이는구나.
삼양라면 부근의 재개발 현장이 보이는구나.
익산시내 곳곳이 재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다.
빛내서 아파트 분양받을수는 없지.
분양이 될지는 미지수여.>
<배산 연주정아래 쉼터의자에 앉아 조동화는 무슨생각을 하고 있을까?
2023년의 작은 실천으로 좋은일 하고자 하는 나의 다짐이 있었다.
누가 내마음을 아랴.
좋은일 많이 많이 하자.
기분 좋은일하면 엔돌핀이 생성된다 하였지.
두다리 만능자가용이 쓸만하여 걷는일을 할수 있어 감사하고 감사하자.
우리인간들은 사소한 것으로 시간 낭비하고 박터지게 싸우곤 한다.
이세상 그려려니 생각하고 살면 되야.
웃는일과 감사란 말이 행복입니다.>
<큰배산 정상에 세워진 "연주정(聯珠亭)" 편액에 아래와 같이 연주정 내력이 적혀져 있다.
"연주정(聯珠亭)"
연주정(聯珠亭)은 배산(盃山)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배산은 두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 작은 배산, 큰 배산이라고 부른다. 큰배산 봉우리에는 연주정(聯珠亭)이, 작은 배산에는 배산정(盃山亭)이 건립되어 휴식 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산의 소유주인 연일정씨(延日鄭氏) 문중에서 1926년에 건립한 일주정이 폐사된 후 휴식 공간을 필요로 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익산시와 전라북도의 협조를 얻어 1979년 이리청년회의소(JC)가 창립15주년 기념사업으로 건립하였다.
여덟개의 기둥이 있는 팔각형 2층 정자로 사방이 탁 트여 남쪽으로는 익산 시가지가 내려다보이고 서북쪽으로는 호남평야가 펼쳐진다.
배산 전체가 공원으로 가꾸어져 있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발길이 잦은 곳이다.>
<작은 배산에는 배산정(盂山亭)이 있다
관한약수터에서 오르막을 길을 지나 좌측으로 올라서면 작은 배산이 있고 우측으로 100m 올라가면 큰 배산 연주정이 나온다.
작은 배산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대구 달성서씨 묘소와 제각이 있다.
배산정(盂山亭)은 작은 배산의 바위위에 세워진 정자로 1926년 연일정씨 문중에서 정자를 세워 일주정(一株亭)이라 하였는데 세월이 흘러 헐리게 되자 그 자리에 1980년도에 김병량시장 재직시 시비로 건립한 정자이다.>
<작은 배산 배산정자 안 상부에 “배산정기” 편액이 걸려 있다.
"배산정기(盂山亭記)" 편액에 아래와 같이 기록이 전하고 있다.
이리의 명소로 알려진 이배산은 큰 배산 작은배산으로 불리워지고 있는데 산상은 모두 바위로 덮어져있는 것이 특색이다.
특히 이 작은 배산은 반석이 넓게 깔려 있어 많은 사람들이 앉아 놀수있게 되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산상에 올라서면 약진하는 이리시가 한눈에 보이고 비옥한 들이 끝없이 펼쳐져있는 광경을 맞보게되는 것도 또한 감탄한일이다.
더욱이 세속을 떠나 한때 나마 이곳에 발걸음을 멈추게 되어 맑은 공기속에 풍겨오는 소나무의 향기를 맞보게 되는 쾌감은 신기할 따름이다.
지난번 이반석위에 우령대(禹靈臺)가 있었는데 이것은 중국 하우씨(夏禹氏)가 9년 치수를 이곳에서 했다는 고사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한편 1926년 연일정씨 문중에서 일주정(一株亭)을 지어 지나는 사람들에게 이 기관을 바라보게 하였는데 풍마우세로 30여년만에 헐리게 된 것은 가석한 일이다.
지난번 이리시에서는 큰 배산에 이리청년회의소의 협조로 연주정(聯珠亭)을 지였고 이번에 또 작은 배산에 시비(市費)로 배산정을 지어 이리시의 공원으로 면모를 일신한것은 서로 기뻐할일이다.
이리시민은 모두 이 배산을 소중히 여겨 돌 한덩이 나무 한포기에도 사랑의 손길이 뻗혀지기를 바라옵고, 이 배산정에 올라 신선한 향기속에서 번영하는 이리시의 새모습과 광활한 평야를 굽어보면서 호연의 기상을 기르기를 원하는 바이다.
배산정의 건립을 기리기 위하여 그 전말을 써서 기록하는 바이다.
서기 1980년 9월 15일
이리시장 김병량
<연일정씨 종중산 배산 산책 중 "나의 어머님 정순봉의 뿌리 조동화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합장묘역을 지나다."
배산 중턱 관한약수터부근 묘지군락에는 나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묘역이 안치 되어 있어 묘역을 지나며 잠시 들러 상석을 사진 촬영하고 추모하였다.
인간의 근본은 어머니로부터 세상에 나왔기에 어머니는 이세상을 떠나갔지만 언제나 어머니를 사모하면서 세상을 개척하며 살아간다.
어머니가 계시었기에 조동화도 이세상에 존재하며 이세상의 희노애락을 즐기며 사는 것이다.
고마운 마음과 감사를 드리며 어머니의 뿌리를 찾아보았다.
나의 어머님 연일정씨(延日鄭氏) 정순봉(鄭順奉)께서는 모현동 옥구동에서 1928년도(소화3년) 음력 8월15일(양력 9월28일)에 태어나 1996년5월5일(양력, 음력은3월18일) 69세에 사망하시었다.
나의 어머님께서는 두 살때 아버지(나의 외할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머니(나의 외할머니)를 26살 때 여의시었다.
부 정옥규(나의 외할아버지)는 1890년(개국499년, 명치23년) 익산군익산면고현리29번지(현 모현동)에서 출생하시었으며 1930년 40세에 사망하시었다.
모 조숙희(나의 외할머니 김제조씨)는 1903년1월16일(명치36년) 김제군백구면월봉리에서 출생하시었으며, 1920년(대정9년) 17세에 정옥규(나의 외할아버지)와 혼인하여 1남2녀를 두었으며, 1954년6월12일(음) 51세의 나이에 사망하시었다.
나의 어머님 정순봉께서는 초여름쯤 되면 해마다 모 조숙희(나의 외할머니)기일에 고기나 생선을 준비하여 옥구동으로 가시어 기일을 추모하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외할아버지 정옥규와 외할머니 조숙희는 13년 나이 차이가 난다.
외할아버지 정옥규와 외할머니 조숙희는 1남2녀를 두시었는데, 어머님의 오빠가 정진산이고 언니가 정순례, 그러니까 나의 어머님 정순봉이 막내이시었다.
오빠 정진산은 1923년(대정12)익산군익산면고현리29번지(모현동)에서 출생하여 2008년 85세에 사망하시었다.
오빠 정진산은 7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어 어린나이에 가장노릇을 하였으며 31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여 두 여동생들을 극진히 보살피었다.
언니 정순례는 1925년(대정14년)11월2일 출생하시어 황등면 방아다리로 출가하시었다.
나의 이모님 정순례(鄭順禮)께서는 방아다리에서 김동수 동구 동식 동만 아들 넷을 두어 장남 김동수(나의 이종동생)는 경기도 마석에 자리잡았다.
나의 어머님 정순봉은 1928년생으로 오빠 정진산이 다섯 살 위이시고 언니 정순례는 세 살 위이시었다.>
※참고(대한제국 국권상실1904-1910 일제강점기 한일합방 1910-1945)
개국(開國) : 조선의 연호 1392년을 시점으로 함
(개국이란 朝鮮의 개국 연도인 1392년을 기준)
명치(明治) : 1868년이 원년-1912년까지(45년간 사용)
대정(大正) : 1912년부터-1926년까지(15년간 사용)
소화(昭和) : 1926년부터-1989년(64년간 사용)
<배산입구에는 연일정씨 정진희(鄭鎭禧) 처(妻) 조명희 정열각이 자리하고 있다.
조명희 열녀문 정렬각(貞烈閣)을 관찰한 느낌
연일정씨(延日鄭氏) 배산문중(盃山門中) 정진희(鄭鎭禧) 처(妻) 평양조씨(平壤趙氏) 조명희 정렬각 세워진지73년, 배산입구에 홀연희 열녀의 정열각이 비바람에 싯겨 초라한 모습으로 방치되고 정렬각(貞烈閣) 주변이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볼성 사납네.
조선중기 이후 우리의 역사 속에서 남편을 사별할 경우 그 부인이 따라 죽는 것을 미덕처럼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었을 경우 비통해서 죽음을 맞이한 여인에게는 열녀라는 수식어가 붙어 열녀문을 세워줬지요.
열녀를 칭송하며 미화하는 시대의 자화상이 많은 열녀가 탄생되여 열여각이 세워지곤하였다.
조선시대 시대상이 연일정씨(延日鄭氏) 정진희 처 평양조씨 조명희의 삶을 26세의 나이에 정지시키고 말았구나.
조선시대 제도와 관습이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는 여인의 삶이 미덕으로 칭송되었던 시절,
열녀라는 말로 과대 포장되고 미풍양속이란 말로 미화되었던 과거의 모습이 26세의 삶에 딸을 하나 남기어 놓고 종지부를 마치었다니 가슴아픈 과거세상의 모습이로구나.
그 딸도 세월의 수레 바뀌속에 칠십객으로 변하였겠고만.
유일한 후손 그 딸은 화산으로 시집가서 살면서 일년에 두서너번 다녀가며 정열각 주변을 정리하고 갔었는데, 요즈면 몇년간 발길이 뜸하다 하는구먼.
1947년(정해년) 연일정씨 정진희의 처 평양조씨 조명희가 죽은 이듬해 정열각을 세웠네
1948년에 세워진 평양조씨 조명희 정여각은 연일정씨 정진희에 대한 정절을 기려 세웠건만 세월이 흘러도 기념물로 지정도 않되고, 안내판 하나 없이 관리도 허술하게 방치되여 잡초만 무성하여 눈살을 찌푸리는구나.
평양조씨 조명희씨여!
구름처럼 바람처럼 우주의 깃발로 저하늘나라에서 행복하시오.
2023.1.8. 연일정씨 정진희 처 평양조씨 조명희 열녀각을 지나며..... 조동화
※정열각(貞烈閣)
정려각(旌閭閣), 열려문(烈閭門) 같은 의미로 열여를 칭송하고 정절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살던 고을 입구에 세운 붉은 비석 또는 문을 가리킨다.
정려문(旌閭門)은 충신, 효자, 효부,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정려기(旌閭記)를 게시한 문을 지칭한다.
정려기를 대문에 걸면 정려문이라고 하고, 독립된 건물형태에 게시하면 정려각(旌閭閣)이 된다.
마을 어귀에 세워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도록 하는 경우는 정려각의 형태로 한다.
※참고 : 현대상식과 동 떨어진 조선시대 여자에 대한 규범
⇒삼종지도(三從之道)란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라야 한다”
⇒칠거지악
①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不順舅姑), ②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無子), ③ 음탕한 것(淫行), ④ 질투하는 것(嫉妬), ⑤ 나쁜 질병이 있는 것(惡疾), ⑥ 수다스러운 것, ⑦ 도둑질하는 것(盜竊) 등이 그 내용을 이루고 있다.>
배산입구 연일정씨 정진희 처 평양조씨 조명희 열녀 정려각 내용
한문으로 세겨진 열녀 평양조씨의 정려각을 더듬더듬하여 한글로 바꾸어 정려각 내용을 보니 비극이였다.
남편이 병사하였다고 남편이 죽은 다음날 죽음으로서 사랑을 표현하였다니 지극한 사랑이었네.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가에서는 부인의 정절을 기려 열녀문을 세우곤 하였지요.
《열녀 평양조씨 조명희(趙明姬)는 수원의 명문가정에서 1922년8월9일(임술년) 태어났다.
연일정씨 정진희(鄭鎭禧)와 수원전문학교(현서울농대)재학당시 수원에서 결혼하여 남편과 같은 학교를 졸업한 후 정진희는 전남지방의 금융기관에 재직했다.
평양조씨 조명희 남편 정진희(丁巳年 1917.11.21.-丁亥年1947.2.19)는 홍문관 대재학을 지낸 학포(學圃) 정숙주(鄭叔周)의 후손이다.
열부 조명희는 당시 고향에서 노부모를 모실 때에 정성을 다하여 극진한 효도를 다했다.
그리고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두 시동생을 교육시키면서도 불평하거나 힘에 겨운 표정하나 없이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나가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그후 남편은 이리농림학교로 옮겼는데, 1947년2월19일 평소 지병이던 복막염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조씨는 그 자리에서 남편의 뒤를 따르겠다고 하여 남편이 죽은 다음날 1947년2월20일 음독 자결하였다.
이때 나이 꽃다운 26세였다.
무자년 1948년 중추절 세움》
<배산입구의 원모인 마을은 연일정씨 집성촌이다.
지금은 도시화로 인하여 외지인들이 많이 들어와 연일정시 집성촌이라고 부르기에는 옛날 씨족사회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시비를 지원 받아 원모인마을 이야기책을 발간한다고 플랭카드가 걸려 있다.>
♧연일정씨 문중산 배산입구 부근 옥호동마을이 조동화외가집이 있었다.
옥창산(옛 철도아파트)아래 동쪽에 자리한 옥호동마을은 어머님의 친정마을이며 나의 외가집 마을이다.
고현초등학교 뒤 옥창산 동쪽 기슭에 있는 마을이름이다.
옥창산에 명당혈이 있는데 이를 금반옥호(金盤玉壺)라 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옥호동이라 하였다. 금반옥호란 금으로 만든 쟁반에다 옥을 갈아 만든 병을 받쳐 놓은 형국이란 뜻이다.
배산 연일정씨 집성촌이었으나 지금은 타지역으로 많이 떠나 외지인들이 들어와 도시화로 변하고 말았다.
배산 일대는 세종 때에 나라에서 연일정씨(延日鄭氏)에게 내려준 사패지지(賜牌之地)이며, 또한 연일정씨의 세천지지(世阡之地)로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賜牌之地(사패지지)란 나라의 임금이 내려 준 땅을 말하며 가족들이 터를 잡아 농사를 짓고 살았으며, 자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고려의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도 같은 연일정씨라 마음의 사표로 삼으며 연일정씨 배산문중은 종중에 대한 애착심이 대단하다.
⇒아래 한 장의 사진은 옥호동 외가집에서 외할머니가 51세(1954년)의 이른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 외할머니 환갑날(1963년)에 가족들이 모여서 음식을 장만하여 추모하고 기념사진을 남겼나보다.
그 시절에는 대가족시대로 외삼촌은 7남매 딸 다섯과 아들 둘을 키웠다.
조동화는 당시 복장을 보니 이리중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구나.
꿈이 많았던 조동화는 그시절을 회상 해 보았다.
사진속 나보다 키가 큰 모든사람은 이 세상을 떠나고 없구나.
세상살이가 사연이 많고도 많아 어찌 말로 다할수 있으랴.
그도 이제 흐르는 세월을 어찌할수 없어 70을 넘은 노년으로 변해 버렸다.
세월 무상이어라.
익산 배산(盂山)
배산(盂山)은 세종시대 연일정씨가 나라에 공적을 세워 임금님으로부터 하사 받은 사패지로서 연일 정씨 배산문중의 소유이며, 97m의 작은산으로 편백나무와 노송들이 많아 익산시민들이 즐겨찾는 유일한 휴식처이고 운동장소이다.
큰 배산의 정상에는 1910경 지어진 정자가 있었는데 오래되여 철거하고 1979년 연주정(聯珠亭)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작은 배산의 정상에는 1980년 배산정(盂山亭)을 이리시비로 건립하여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용하고 있다.
익산 시내에 있는 유일한 산 97m의 배산!
배산 산책로 곳곳에 앉아서 쉴수 있도록 의자도 설치해 놓았다.
배산의 편백나무 숲에는 시민들이 쉴수 있도록 편백나무로 만든 벤치형 침대들도 있고 여럿이 앉아 쉬어 갈수 있는 평상도 설치되여 있어 휴식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매년 1월1일 해맞이축제가 열리고 있는 곳이 큰 배산(盂山) 연주정(盂山亭)이나 2023년에는 코로나19 감염위험으로 열리지 않았다.
배산공원은 익산시민의 유일한 힐링장소로 익산시에서는 많은 예산을 투입해 배산정상에 편리하게 올라갈수 있도록 데크계단을 설치하고, 야간에도 이용할수 있도록 조명등을 설치해 놓았다.
♤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오늘! ♤
"매일(每日)을 마치 그것이 네 최초(最初)의 날인
동시에 네 최후(最後)의 날인 것 같이 살아라."
하우프트만의 말입니다. 그는 1921년 사망했습니다.
그의 이 말은 참으로 힘찬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기는
쉽지만 이렇게 살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매일 매일을 내 생의 최초의 날인 동시에 최후의
날처럼 산다는 것은 자기의 인생을 최고도의 성실과
정열과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없이 진지한 인생의 자세입니다.
오늘이 나의 인생의 최초의 날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큰 희망과 많은 기대와 진지한 계획과 더할 수
없는 충실감 속에서 하루의 생활을 시작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우리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조심할 것이요 잘해 보려고 애쓸 것입니다.
오늘이 나의 인생의 최후의 날이라고 생각합시다.
우리는 빈틈없는 마음과 절실한 감정과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나의 하루를 살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열애자(熱愛者)가 될 것입니다.
모든 일에서 깊은 의미를 찾고 일 분 일 초를
헛되이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이 마치 영원히
계속할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오늘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오늘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동시에 마지막인 날입니다.
절대로 두 번 있을 수 없는 오늘입니다.
내일은 내일이지 결코 오늘이 아닙니다.
내 인생의 최초의 날이자 최후의 날인 것처럼
성실과 정열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내 인생 남이 살아 줄 수는 없습니다.
ㅡ 좋은 글 중에서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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