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이 좀 어렵기는 하지만...
칼융
그림자는 '우리가 직시하고 있고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영역" 집단무의식안에 있음.
그림자속에 있는 금지된 것들의 저장고를 집단무의식의 일부라고 봄.
무의식은 원래 상스럽고 미개하다. 우리의 지성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우리의 무의식은 정글에 남아 여전히 나무에서 줄타고 있다. 그림자 측면을 살펴보는 시간은 얌전을 떨거나 비위가 약한 척하는 시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시간도 아니다. 무의식에서의 상징은 상징일 뿐이며, 천성자체가 원시적이다. 상징을 무의식으로 다룬다면 상징으로 인해 제약을 받기보다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림자는 공포의 근원
자아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림자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그림자 인정하기
우리가 무의식속에 감추고 있는 공포도 감정성장에 장애가 된다. 그렇듯 우리가 직시하고 있고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영역을 칼융은 "그림자 shadow"라고 명명했다. 융은 자아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림자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모두의 내면, 즉 융이 "집단 무의식"이라 부른 것속에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것들이 모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융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세상과 투사해 세상을 악으로 보고 규탄하면서 세상속의 악과 싸우는 일이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자신의 내면에 그런 생각과 충동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 문제다. 생각과 충동은 인정하면 조용해진다. 일단 조용해지면 우리는 더 이상 그 생각과 충동에 무의식적으로 휘둘리지 않는다.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미지의 것에 대해 느끼는 공포를 잘 살펴볼때는 유머감각을 갖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일단 잘 살펴보고 인정하면 그림자는 더이상 힘을 쓰지 못한다. 사실 유일하게 그림자에 힘을 부여하는 것은 그런 생각과 충동에 대한 공포 자체다. 일단 자신의 그림자와 친숙해지면 더 이상 자신의 공포를 세상에 투사할 필요가 없어져 공포가 신속하게 사라진다.

어떤 매력이 있기에 갖가지 형태의 아수라장을 다루는 텔레비전 프로가 끝도없이 나올까? 화면에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안전한 장면들이 모두 우리의 정신속에서 금지되어 있는 무의식적 환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이라는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동일한 영화를 잘 살펴보고
그런 영화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고자 한다면, 이런 오락이 갖는 매력은 사라진다.
자신의 그림자에 담긴 내용을 인정한 사람은 범죄와 폭력, 무서운 재앙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타인의 의견을 두려워하는 것도 마음속 공포와 친숙해지는데 장애가 된다.
마음속에서는 타인의 동의를 기대하는 공상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권위있는 인물을 포함한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고 그 의견까지 합쳐 자신의 의견처럼 마음속에서 듣는다.
공포를 살펴볼때, 칼융이 그림자속에 있는 금지된 것들의 저장고를 집단무의식의 일부로 보았다는 점을 기억해 두면 좋다. 집단 무의식이라는 용어는 그런 생각과 공상이 모든 사람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누구나 감정을 상징으로 표현한다. 또한 누구나 자신이 멍청하고 못생겼으며 귀여운 데라고는 없는 실패작이라는 공포를 남모르게 내내 품고 있다.
무의식적 마음은 예의를 모른다. 지극히 무례한 개념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노숙자를 죽여라'라는 말을 떠올리면 무의식은 말 그대로 의도를 갖는다. 운전할때 누가 끼어들면 자기 내면을 깊숙히 들여다보면서 상대를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아주 솔직하게 마음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상상해보라. 상대방 차를 도로밖으로 밀어내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주 박살내버려 절벽끝으로 밀어버려. 이렇지 않은가? 그것이 무의식의 사고방식이다.
유머감각이 도움이 되는 까닭은 잘 살펴보기만 하면 그런 이미지가 웃길 따름이기 때문이다.
하나도 무서울 것이 없다.
무의식이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이 그럴뿐이다.
내가 형편없는 인간이거나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간의 동물적 마음이 무의식의 차원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정직하게 직시했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 이미지가 떠오른다해서 스스로 멜로드라마를 연출하거나, 자기비판에 열을 올리거나 비극적인 기분을 느낄 이유는 없다. 무의식은 원래 상스럽고 미개하다. 우리의 지성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우리의 무의식은 정글에 남아 여전히 나무에서 줄타고 있다. 그림자 측면을 살펴보는 시간은 얌전을 떨거나 비위가 약한 척하는 시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시간도 아니다. 무의식에서의 상징은 상징일 뿐이며, 천성자체가 원시적이다. 상징을 무의식으로 다룬다면 상징으로 인해 제약을 받기보다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림자를 계속 감추고 그 많은 공포를 억제하려면 에너지가 많이 든다. 그 결과 에너지는 줄어들고 감정면에서 사랑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의식의 세계에서 감정은 유유상종하는 법이라 공포는 공포를 끌어당기고, 사랑은 사랑을 끌어당긴다. 공포를 많이 품을수록 무서운 상황을 삶에 더 많이 끌어당긴다. 각각의 공포에는 방어장치를 만들어낼 에너지가 더 필요해져 에너지가 전부 방어조치를 확대하는 일에 소모된다. 자발적으로 공포를 유심히 살펴 공포에서 벗어날때까지 공포를 연구대상으로 삼으면 즉시 보상을받는다.
사람들의 내면에는 의식적으로 억제하거나 무의식적으로 억압해 공포를 쌓아 놓은 저장소가 있다. 이런 다량이 공포가 삶에 흘러넘쳐 경험하는 모든 것을 물들이고 삶의 환희를 퇴색시키고 안면 근육에 반영되어 외모에 영향을 주고, 체력이나 신체장기의 건강상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특히 만성 공포는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억제한다. 신체운동학의 테스트 방법을 사용하면, 두려워하는 생각은 근력을 크게 떨어뜨리며 경락을 따라 주요장기로 가는 에너지의 흐름을 어지럽힌다는 사실을 즉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공포가 인간관계와 건강, 행복 등 모든면에서 해롭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공포를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
왜 그럴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하는 공상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공포덕분이다.
공포는 생존기제 전부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된 방어기제인 공포를 놓아버리면 어딘가 취약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공포로 인해 우리는 삶에 위협이 되는 것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공포야말로 몸에 닥치는 가장 큰 위험요소다. 공포와 죄책감이야말로 만사에 실패를 부로고 질병을 발생시킨다.
보호하기 위해 똑같이 하는 일이라도, 공포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할 수 있다.
자기몸을 보살피는 일도 질병과 죽음의 공포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몸의 가치를 알고 몸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삶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는 것도 그들을 잃을까봐 겁나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르는 사람에게 예의바르고 공손하게 대하는 것도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까봐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보살피는 마음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을 잘해내는 것도 우수한 성과를 원하고 동료를 위하는 마음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업무를 문제없이 수행하는 것도 실직의 공포나 야망추구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로 혜택을 받을 사람때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겁나는 경쟁보다는 협력을 통해 더 큰 성취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운전을 조심해서 하는 것도 사고가 겁나서가 아니라 자신을 깊이 존경하기에 안전을 위해 할 수 있지 않을까?
영적인 차원도 마찬가지다. 같은 인간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자기의 일처럼 느끼기에 타인을 보살피는 것이 신에게 벌을 받을까봐 두렵기에 사랑하려 애쓰는 것보다 진보가 빠르지 않을까?
첫댓글 자신의 마음이라는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동일한 영화를 잘 살펴보고 그런 영화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고자 한다면, 이런 오락이 갖는 매력은 사라진다.
자신의 그림자에 담긴 내용을 인정한 사람은 범죄와 폭력, 무서운 재앙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