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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보다 크신 아들
히브리서 3:1~6
오늘 본문 말씀은 히브리서 기록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천사보다 훨씬 탁월하신 분으로 소개한 히브리서 1장과 2장에 이어서 위대한 신앙 지도자 모세와 비교하여 훨씬 더 위대하신 분으로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그 당시에 구약 율법으로 회귀하려고 하는 당시 히브리인 기독교인들에게 흔들리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기억하며 오직 복음을 계속하여 굳게 붙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 절씩 읽어가면서 히브리서 기록자의 가르침을 배워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히브리서 3:1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러므로’라는 말씀은 히브리서 2장 전체를 이어받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2장은 예수께서 구원의 창시자로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그를 믿는 자들의 구원의 선구자가 되셨으며, 그를 믿는 자들의 형제가 되어주셨으며, 함께 혈과 육에 속하여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잡은 자 마귀를 무력화시키고 죽음의 공포에 늘 사로잡힌 그들을 해방시켜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구원하시어 죽음의 세력에 눌린 자들을 해방시키시고 붙들어 주신 것은 천사를 위한 것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자손 곧 구원받기로 작정된 하나님의 택정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시험받는 택한 백성들을 능히 도우시는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라는 말의 뜻은 ‘이렇게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하시며 우리의 형제가 되시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주신 자비롭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므로’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맥락 가운데 히브리서 기록자는 편지를 받는 히브리 성도들을 향하여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먼저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주님의 형제들인 것입니다. 특별히 ‘함께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호칭을 쓰고 있는데, 성도의 각 개인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성도의 공동체성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본향을 향하여 함께 가는 자들입니다. 상속을 함께 받는 공동상속자들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기업을 형제들과 함께 받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만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0:24 말씀에서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라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이름이 그러하듯이, 신자의 구원은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로서의 결단도 있어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맏형이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써 거룩하여진 형제들과 끝까지 함께감으로써 우리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나 홀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천성을 향하여 함께 가는 신앙의 동지 의식을 항상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절에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믿는 도리’란 신앙 고백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입술로 함께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을 처음 선포해주신 분입니다. ‘사도’라는 말의 원래 뜻이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와서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가르쳐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자기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죽을 줄 알면서도 이 진리를 증거하신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또 친히 자기의 생명의 피를 흘려 죄에서 구원하신 완전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래서 그의 형제 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렇게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깊이 생각하라’는 이 헬라어 단어는 ‘카타노에오’인데, 이 단어는 ‘관찰하다, 성찰하다, 알아보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사용된 성경의 예를 보면 누가복음 12:4 말씀에,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는 말씀의 ‘생각하라’는 단어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12:27 이하의 말씀에서도 이어서 이르기를,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도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는 문장에서 다시 이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단지 힐끗 쳐다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깊이 관찰하고 깊이 성찰하여 생각해봄으로써 거기에 담긴 영적인 의미와 교훈들을 마음에 되새김질하는 깊은 성찰과 사색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항상 우리의 구원의 창시자이시며 우리의 형제가 되시며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해내주신 신실하고 자비로우신 구주 예수님을 깊이 바라보고 생각하고 그가 가져오신 놀라운 은혜들을 늘 성찰하기를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히브리서 기록자는 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세와 비교하면서 모세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분이라고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2절로부터 6절 상반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여기서 히브리서 기록자가 모세를 불러내어 예수님과 비교하면서 예수님의 탁월성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이는 그 당시 히브리서의 수신자가 되는 초대 교회 성도들이 크게 존경하는 신앙의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참으로 하나님의 온 집에서 신실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신실함, 곧 충성스러움을 인정하신 말씀이 민수기 12장에 나옵니다. 민수기 12장을 보면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그 형 아론이 합세하여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을 인하여 비방하자 하나님께서 갑자기 그 세 사람을 회막으로 부르시어 구름 기둥 가운데 강림하셔서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들이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를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그리고 하나님께서 미리암과 아론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가시자 그 즉시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버렸습니다. 이 사건 가운데 하나님이 모세를 두고 하신 말씀에 모세는 하나님이 온 집에 충성하였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히브리서 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신실하셨다는 것은 이 말씀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신실하다’는 헬라어 단어 ‘피스토스’가 바로 ‘충성되다’라는 히브리어 ‘네에만’의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견고하여 흔들림없이 섬기는 것이 이것이 충성됨입니다. 그렇게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 곧 구약 교회인 출애굽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를 섬기는 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충성스럽게 섬겼는데, 그와 같이 예수께서도 하나님께 신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주의 백성 공동체를 섬기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기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시면서까지 충성하셨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기록자는 모세와 예수님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충성하였음을 동일하게 인정하였으나 곧장 모세보다 우리 예수님이 더욱 영광을 받아야 한다고 3절에서 차별화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집을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과 같다는 것입니다. 집마다 다 지은 이가 있지 않습니까?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만물이 아무리 아름답고 대단하고 놀라운 신비로움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거대한 바다를 만드셨고 이 크고 높은 산악을 만드셨고 저 하늘의 별과 달과 해를 만드셨고 저 광활한 우주를 만드셨습니다. 인간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인간에게 놀라운 재능과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제 2의 창조자로서 일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놀라운 지혜와 능력과 업적을 생각하면서 인간 자신도 존경과 찬사를 돌림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은 바로 그 모든 것을 만드시고 지혜와 재능을 주신 하나님이심을 늘 기억합시다.
그리고 여기서 모세는 집을 지은 자는 아니고 하나님의 집에서 섬기는 종이지만 예수는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의 집을 지은 자로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 구약 교회를 섬기는 종으로 충성하였지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옆구리의 창자국과 손과 발의 못자국을 통하여 낳은 교회 곧 교회를 친히 그 온 몸을 내어줌으로써 낳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지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집을 지은 자로서 하나님의 집에서 섬긴 종인 모세보다 더 존귀하고 더 큰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5절을 보면, 모세가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 신실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래에 말할 것은 곧 최종적 구원의 진리이신 우리 주님과 그의 복음을 말씀합니다. 그는 우리 주님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집의 종으로서, 구약의 선지자로서 충성스럽게 증언하였습니다. 그 때에 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다고 하였는데, 5절 원문에 보면 ‘안에서’라고 하는 전치사 ‘엔’이 써 있습니다. 모세가 아무리 탁월한 지도자일지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온 집 곧 하나님의 구약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섬기는 봉사자로서 충성스럽게 일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와 차원이 다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교회를 신실하게 섬겼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신실하셨습니다. 6절 전반절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집을 맡은’이라고 하는 원문의 문장을 보면, 하나님의 집 위에서 다스렸다는 의미를 가지는 전치사 ’에피‘라는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에 속한 여러 종들 가운데 하나로서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전체적으로 지배하는 관리자로서 섬기는 봉사자로서 신실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모세가 하나님의 집 교회 안에서 일하는 종으로서 충성하였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지은 자요 그 집 전체를 관리하는 아들로서 충성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모세가 훌륭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종일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세보다 더 훨씬 더 위대하고 탁월한 자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집 안의 신실한 종이요 모세가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부름받은 자라면, 우리 주님은 그 장래에 말할 것을 오셔서 친히 성취하신 말씀의 성취자요 구원의 완성자요 하나님의 집을 친히 지은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주요 형제요 신실하신 대제사장이요 말씀의 성취자요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를 친히 그 몸으로 지으신 분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기억하고 다른 데로 우리 마음을 절대로 돌이키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6절 하반절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적 권면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소망의 확신과 자랑이란 받은 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받은 바 구원의 도리인 복음을 기뻐하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이것을 굳게 잡으라고 권면합니다. ’굳게 잡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카타코‘로서 견고하게 꽉 붙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이 복음 다른 델도 구원이 없음을 확고하게 믿는 이 믿음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구약 율법으로 돌아가며 모세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고 있던 히브리인 기독교인들에게 이 강력한 권면이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주님의 탁월함, 그의 위대함을 항상 기억합시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생명의 복음 곧 우리를 위하여 피로써 값주고 자기 형제로 사서 죄를 사해주시고ㅕ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자유케 하시고 장차 올 세상을 상속할 권세를 주신 이 복음을 다른 어떤 것과 절대로 바꾸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히브리서 기록자의 권면대로 우리 모두 항상 예수를 깊이 생각합시다. 모세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교회에 충성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몸된 교회에 더욱 충성합시다. 그리고 어떤 시험과 박해와 유혹이 와도 이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들고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붙잡읍시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주님의 형제 공동체요 하나님의 집의 사람들의 삶의 증거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