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 공산성 앞의 금강과 금강교. 금강교는 일제가 충남도청 이전에 대한 무마책으로 놓아준 다리다. |
공주 시내에서 우금치를 넘었다. 2차선 지방도와 비포장 흙길을 달리니 KTX 공주역이 나타났다. 역사가 위용을 드러냈다. 선로 아래 역사가 있는 ‘선하(線下)역사’였다. 논밭 위에 홀로 서 있어 실제보다 더 커 보였다. 주소는 충남 공주시 이인면 신영리. 공주역은 3월 KTX 호남고속철 개통을 기다리고 있다.
기자를 태우고 간 택시기사 이모(58)씨는 “공주역이라고 하지만 사실 공주역이라고 하기 뭣하다”고 아쉬워했다. 공주토박이라는 이씨가 못내 아쉬워한 까닭은 공주역 개통에 대한 기대가 커서였다. 공주 시내 가까이에 들어올 줄 알았는데 접근성이 떨어지는 우금치고개 너머로 가는 바람에 이용하기가 불편하다고 했다. 우금치터널이 뚫려 있어 택시로 15분 거리에 불과하지만 심리적으로는 먼 거리다. 공주 시내 남쪽의 우금치는 공주 시내와 외곽의 심리적 경계선이다.
공주역은 공주에 들어서는 첫 기차역이다. 구한말인 1899년 국내 최초 철도인 경인선(서울~인천) 개통 이후 공주는 지지리도 철도와 인연이 없었다. 경부선(1905년)과 호남선(1914년), 충북선(1921년), 장항선(1922년)이 줄줄이 개통됐지만 철로는 요리조리 공주를 피해 갔다.
오는 3월 호남고속철이 개통되면 서울용산역에서 공주역까지는 KTX 고속철을 타고 58분 만에 도착한다. 지금은 철도가 없어 서울(반포)에서 공주까지 고속버스로 1시간50분이 걸린다. 광주(광주송정)에서 공주까지 거리는 42분으로 줄어든다. 지금은 광주에서 공주로 오는 직행버스가 없어 대전(유성)을 거쳐 빙빙 돌아와야 한다. 오시덕 공주시장은 주간조선에 “115년 만에 진정한 고속철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고 했다.
한때 충청도 제1의 고을이었던 공주는 현재 인구 11만명의 소도시에 불과하다.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한 직후에는 일부 지역을 떼어주면서 시세(市勢)가 더욱 줄었다. 지금은 인구감소와 노령화로 시(市) 지위 유지마저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 됐다.
황량한 논밭 위에 공주역이 들어선 까닭도 공주 자체의 수송수요가 부족해서다. 인구 11만인 공주만으로는 수송수요를 맞출 수 없어 인근의 논산(13만), 부여(7만), 계룡(4만), 청양(3만) 등지의 수송수요를 모두 끌어모은 것. 다 모아봤자 38만명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5개 시군의 한가운데 지점인 공주시 이인면에 역사를 낙점했다.
그래도 한국철도시설공단(KR)에서 예측하는 공주역의 오는 2025년 일평균 수송수요는 2219명에 불과하다. 호남고속철 선상에 있는 비슷한 규모의 전북 정읍역(4024명) 절반에 불과하다. 익산역(1만8300명), 광주송정역(1만2875명)에 비해서는 턱없이 못 미친다. 유령역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우려는 이래서 나온다. 공주역 일대의 역세권도 별 반응이 없다. 공주 부동산랜드의 한 관계자는 “공주역 일대는 8~9년 전부터 거래가 거의 없다”며 “세종시 빼고는 거래가 안 된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한때 ‘교육도시’란 명성을 구가했지만 이마저도 예전같지 않다. 공주에서 만난 한 택시기사는 “여름·겨울방학 때 학생들이 서울로 올라가 버리면 공주 시내가 텅텅 빌 정도”라고 말했다. 공주는 인구 11만 소도시에 불과하지만 공주대(국립·옛 공주사범대)를 비롯해 공주교대(옛 공주여자사범대) 등의 대학이 있다. 또 공주한일고, 충남과학고, 공주사대부고 등 공주 소재 고등학교들은 지금도 충남 전역은 물론 서울에서도 유학올 정도로 교육도시 지위를 누린다. 하지만 시세가 줄면서 공주대 역시 공주를 떠나 천안으로 이전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2005년에는 천안공업대가 공주대와 통합하면서 교명 변경과 천안 이전론도 힘을 받는다. 또 공주시에 있던 옛 공주영상대(현 한국영상대)는 아예 세종시로 편입돼 버렸다.
2006년에는 재유치를 타진하던 충남도청마저 신생도시인 내포신도시(충남 홍성·예산)에 빼앗겨 버렸다. 충남도청은 원래 공주에 있었다. 공주 출신인 심대평 전 충남지사(현 지방자치발전위원장) 때 이뤄진 충남도청 내포신도시 이전 결정으로, 심대평씨는 공주인들의 ‘공적(公敵)’이 돼버렸다. 한 택시기사는 “심대평은 공주에 와서 얼굴도 못 들 것”이라며 “왜 지역구(공주·연기)를 버리고 세종에 가서 낙선했겠냐”고 말했다.
“신생도시 세종시에 흡수·통합돼야 공주가 살 것”이란 얘기도 공주시민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나온다. 2012년 7월 출범한 세종시 인구는 지난해 말 15만명을 돌파해 공주를 훌쩍 넘어섰다. 공주시청에서 세종청사까지는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불과 100여년 만에 철도로 인해 비롯된 변화다.
원래부터 공주가 이랬던 것은 아니다. 강종원 충남역사박물관장은 주간조선에 “공주는 통일신라 때부터 충청도의 중심이었다”고 말했다. 공주가 최초로 부상한 것은 고구려 장수왕에 패한 백제가 서울(위례성)을 버리고 금강 이남으로 천도해 64년간 공주(웅진)를 도읍으로 삼으면서다. 지금 공주 구시가가 있는 공산성 일대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후 백제는 도읍을 공주에서 금강 하류에 있는 지금의 부여(사비)로 옮겨 갔다.
삼국통일과 나당(羅唐)전쟁 이후에 공주의 시세는 오히려 더 커졌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를 무력점령한 신라는 공주를 웅주(熊州)로 개칭해 충청도 일대를 관할케 했다. 이후 공주는 줄곧 충청도의 중심이었다. 충청도 관찰사가 주재하는 충청감영 선화당이 지금의 공주사대부고 자리에 있었다. 조선 말인 1896년 13도(道)로 행정체계가 바뀐 후에도 충남도청은 공주에 있었다. 금강 수운(水運)을 이용한 공주의 장시는 대구, 평양과 함께 3대 장시로 꼽혔다.
하지만 구한말 경부선 철로가 부설되면서 상황이 뒤바뀌었다. 당초 가장 유력했던 경부선 노선은 서울~수원~천안~공주를 거쳐 부산까지 내려가는 노선이었다. 각 지역의 행정경제 중심지를 연결하는 노선이었다. 하지만 ‘괴물’ 같은 철도가 들어온다는 소식에 전국 각지의 유생(儒生)들의 반발이 격렬했다. 유생들은 곧 지역유지들이었고, ‘충청도 양반’의 도시 공주의 반발이 특히 심했다.
유림의 반발에 구한말 철도 부설을 총괄했던 일제는 천안에서 공주로 가는 노선 대신, 천안에서 조치원을 지나 대전으로 가는 노선을 잡았다. 대전의 경우 당시만 해도 논밭에 불과해 철도 부설에 대한 반발이 덜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904년 러일전쟁의 개전과 함께 병참수송을 위해 철로를 최대한 빨리 부설할 필요도 맞물렸다. 결국 공주를 비껴간 경부선 철도는 1904년 11월 완공해 1905년 1월 1일 개통했다.
호남선 부설 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손정목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에 따르면, 호남선 부설을 앞두고 조선총독부가 당초 검토했던 안(案)은 조치원(현 세종시 조치원읍)에서 분기하는 노선이었다. 조치원에서 분기한 뒤 당시 수운의 중심인 금강을 따라 내려가다 금강을 건너 공주에 기착한 후 논산 방향으로 내려가는 노선이었다. 오송역에서 분기하는 현재 호남고속철 노선과 거의 흡사한 노선 설계다.
하지만 일제는 최종적으로 조치원이 아닌 대전 분기를 택했다. 러일전쟁 동안 막대한 전비(戰費) 지출이 일제의 발목을 잡았던 것. 공주를 경유할 경우 금강을 건너는 교량을 건설해야 했는데, 교량건설에 따른 막대한 비용은 물론 공기가 늘어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반면 대전에서 호남선을 분기시킬 경우 금강 교량을 별도로 가설할 필요가 없었다. 비용과 공기를 절약할 수 있었던 셈이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모두 비껴간 공주는 쇠락에 쇠락을 거듭했다. 대전은 반대로 급성장을 구가했다. 지수걸 공주대 교수에 따르면, 호남선 개통 직후인 1914년 직후 공주 시내와 대전 시내 인구는 약 6000명으로 엇비슷했다. 하지만 이후 대전에 정착하는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급증하자 1937년에는 대전시가지 인구가 4만여명으로 공주(1만2000여명)의 4배 가까이 압도했다.
애당초 충청도에 진출하는 일본인들도 처음에는 대전이 아닌 공주에 둥지를 틀었다. 지금도 공주 출신의 일본인들이 ‘공주회’란 향우회를 조직해 공주를 정기적으로 찾아올 정도다. ‘마음의 고향’인 옛 백제의 수도였던 까닭도 있다. 하지만 일본인들 역시 철도교통이 편리한 대전으로 점차 옮겨 갔다. 더욱이 토착 양반들이 적어 배외(排外)감정이 덜한 대전이 편할 수밖에 없었다. 강종원 충남역사박물관장은 “주(州) 자가 들어가는 큰 고을은 대개 배타적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교통이 쇠퇴하면서 1932년에는 충남도청마저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해 버렸다. 충남도청을 이전한다는 소식에 공주 지역의 반발은 조선총독부에서도 골치를 앓았을 정도로 격렬했다고 한다. 급기야 일제가 도청 이전에 대한 반대급부로 1933년 금강교(등록문화재 232호)를 가설해 주고, 1938년 공주여자사범대(공주교대의 전신)를 신설해 주고서야 무마됐다.
지금 공주 시민 가운데는 당시 공주 유림들의 이 같은 결정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높다. 김병렬 공주시청 시정담당관은 “당시 결정이 아쉬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공주의 한 택시기사는 “양반들이 많아서 제대로 되는 게 없다”며 “뭐 좀 해볼라고 하면 상놈들이 하는 짓이라고 한다”고 욕을 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1970년대 말 한국조폐공사 조폐창이 이전할 때도 공주가 거론됐었다. 하지만 문화재 보호와 ‘돈을 찍는다’는 유림들의 반감 탓에 공주가 아닌 부여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2010년 부여에 들어선 롯데리조트 역시 당초 거론된 것은 공주 곰나루 일대다. 무령왕릉 인근에 있는 곰나루는 금강변의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곳. 하지만 문화재 보호와 위락시설에 대한 반대 여론 탓에 무산됐다. 결국 롯데리조트는 금강 하류 부여에 자리 잡았다. “공주는 말만 백제의 옛 도읍이지 외지인들이 오면 볼 것도, 놀 것도, 잘 곳도 없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말이었다.
하지만 공주의 유림들은 여전히 지역 여론을 좌우할 정도의 무시 못할 세(勢)를 과시 중이다. 기호(畿湖)학파의 총본산인 공주 시내 곳곳에는 충현서원, 용문서원, 명탄서원 등 유림의 거두들을 배향한 유교 서원들이 그대로 기능하고 있다. 서원에서는 지금도 후손들이 모여서 정기적으로 제사를 올린다. 공주 구시가에 있는 공주향교에서 만난 한 관계자는 “지금도 대제(大祭) 때가 되면 300명 정도는 찾아오신다”고 말했다.
공주시 상왕동의 용문(龍門)서원서 만난 이정우(75)씨에 따르면, 초려 이유태 선생의 9대손인 성암 이철영 선생은 일제가 부설한 경부선 철로가 공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고 한다. 이유태 선생은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 등과 함께 ‘충청오현’으로 불리는 유림의 거두다. 이정우씨는 이유태 선생의 12대 종손으로 경주이씨 국당공파 화수회장을 지냈다. 당시만 해도 철도는 일제의 수탈도구였고 이에 반대하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이다. 이정우씨는 “이철영 선생이 서울로 상경해 10부 대신들을 일일이 찾아갔다”고 말했다.
게다가 일제는 이유태 선생 묘역 앞으로 철도 노선을 계획했다. 민정희 충남역사박물관 문화사업팀장에 따르면, 일제는 경부선·호남선 철로를 부설하면서 공교롭게도 조선 유학자들의 무덤과 서원 옆으로 노선을 냈다. 조선 예학(禮學)의 거두인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부자를 모신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 바로 옆으로도 호남선 철로가 지나간다. ‘조선의 기맥을 끊기 위해 철도를 낸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었다.
초려 선생 일문은 1966년 박정희 정부에서 추진하던 조치원~판교(충남 서천) 간 철도부설도 막아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경부선과 충북선의 분기점인 조치원에서 공주를 거쳐 충남 서천의 판교면(현 장항선 판교역)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계획했었다. 기존의 충북선(조치원~청주~충주)과 이어져 충남 일대를 동서로 가로질러 서해로 빠지는 노선이었다. 하지만 조판선 노선이 재차 이유태 묘역을 지나가려고 하자, 경주이씨 일문을 비롯 지역 유림들이 들고일어났다. 사실 조판선도 일제가 1930년대 충북 지역 물자를 수탈해 군산항까지 실어 나르려던 목적으로 계획한 중부횡관철도가 모태다.
조판선(조치원~판교) 부설을 지역 유림들이 막아서자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공주로 직접 보냈다고 한다. 이정우씨는 “아버지가 귀한 분(이후락)이 오셨다고 참외 수박을 따오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당시 경주이씨 문중의 반발로 인해 조판선 계획 역시 무산됐다. 후일 조판선 노선은 서천~공주 간 고속도로(151번)에 의해 비슷한 노선으로 구현됐다. 하지만 조치원(세종시 조치원읍)에서 공주에 이르는 문제의 구간에는 아직도 고속도로가 없다.
이정우씨는 “북한의 김일성 다음으로 철천지원수가 왜놈들이여. 몇 해 전인가 부여문화원장이 일본인 학자 2명을 데리고 우리 집에 찾아왔는데, 우리 집안에 얽힌 이야기를 따끔하게 해줬지. 요즘 일본에 아베(총리)인가 뭔가가 하는 짓을 보라고. 왜정 때 배일운동 하는 바람에 집안이 크게 기울었지만, 공주에 철도가 안 놓였다고 공주가 기울었다고 하는 것은 뭣들 모르고 떠드는 소리들이여”라고 말했다.
오시덕 공주시장은 “공주는 전통적으로 양반의 도시로 철도가 대전으로 개통된 것도 지역 유림(儒林)의 반대가 거셌기 때문”이라며 “지금으로서는 아쉬운 결정이었지만 일제의 야욕을 위해 추진되던 철도 건설을 반대한 것은 당시 양반들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