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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서남쪽으로 95km 떨어진 가흥(중국식으로는 자싱)은 남호라는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절강성 가흥...
김구선생님과 임시정부 식구들이 3년간 절체절명의 시기를 보냈던, 한국인과 중국인의 목숨을 건 우정이 녹아 있는 도시입니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중국침략 일본군 육군사령관을 비롯해서 주요 일본요인들을 폭살시킨 윤봉길의사 의거가 있었습니다.
일제는 즉시 김구선생님과 임시정부를 배후로 보고 검거를 위해 날뛰었지요.
김구선생님에게 걸린 현상금만 지금 우리 돈으로 600억원...
그 절박한 상황에서 뜻밖의 은인이 나타났으니 하늘이 도운 것이지요.
중국인 저보성선생님... 김구선생님과 임정식구들에게는 구세주와도 같았습니다.
저보성선생님의 도움으로 김구선생님과 임정식구들은 4월29일과 5월1일 사이에 황급히 상해를 빠져나와 가흥으로 피했습니다.
가흥은 저보성선생님의 세거지였습니다.
김구선생님은 항주로 임시정부청사를 옮기고 업무를 보게하는 한편, 동지 몇명과 가흥으로 피신했습니다.
저보성선생님은 상해 법과대학 총장을 역임하고 상해 항일단체회장, 절강성장을 지낸 유력인사였습니다.
상해도 일제천지여서 발각되면 목숨은 물론 가문이 쑥대밭이 될 위험이었지만 저보성선생님은 주도면밀하게 임정식구들을 지원했습니다.
가흥에는 남호에 접한 저보성선생님의 본가와 두 아들이 운영하는 종이공장, 실공장이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경제공항의 여파로 공장이 파산상태였지만, 임정식구들이 숨어지내기에는 좋았습니다.
저보성선생님은 일단 김구선생님을 가흥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첫째 며느리의 고향 해염의 별장으로 피신케하고,
나머지 임정식구들을 가흥 은신처에 따로 숨겨주었습니다.
김구선생님은 해염 별장에서 6개월을 지내고 가흥 저보성선생님의 둘째 아들 집으로 피신했습니다.
이어 저보성선생님의 주선으로 남호의 여자뱃사공 주애보님과 부부로 위장해서 지내게 됩니다.
도처에 암살단이 깔려있던 시기...
김구선생님과 임정식구들은 3년을 숨어지내고 1935년 남경으로 떠나게 됩니다.
주애보님은 남경까지 따라가 김구선생님과 함께 지내다가 남경에서 헤어지게 됩니다.
가흥시에서 김구선생님과 임정식구들의 은거지를 정비해 2005년 절강성보호문화재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김구선생님 은거지: 매만가 76호
임정식구 은거지: 남문가 일휘교 17호
매만가 입구...
두 곳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습니다.
매만가 거리...
김구선생님과 임정식구들이 가슴을 졸이며 다녔던 곳...
김구선생님은 낮에는 주로 배를 타고 남호에서 지내고 밤에만 은거지에서 잠을 자는 생활로 3년을 견뎠습니다.
김구선생님 은거지.
이곳은 저보성선생님의 둘째 아들이 살던 건물이었습니다.
둘째 아들부부 집의 한쪽 모퉁이가 김구선생님의 피신처였지요.
은신처 입구의 김구선생님.
남호쪽에서 본 저보성선생님 본가.
왼쪽에서 두번째 작은 2층집이 김구선생님 은신처.
당시 생사를 같이 했던 동지들.
저보성선생님의 가족들과 함께.
앞줄 오른쪽 두번째가 저보성선생님의 첫째 며느리 주가예님으로,
가흥 동쪽에 있는 해염 친정별장으로 김구선생님을 피신시켜 6개월을 지내도록 도운 여인입니다.
저보성선생님의 첫째 며느리 주가예님과 딸.
백범일지에는 목숨을 건 저보성일가의 도움에 깊이 감사하는 김구선생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주가예님에 대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훗날... 우리나라가 독립이 된다면, 우리 자손이나 동포 누가 주부인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모하고 존경치 않으리오.
활동사진이 있다면 찍어두면 좋겠지만... 문자로나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글을 쓴다."
해염 주가예님의 친정 별장.
가장 절박했던 시기에 김구선생님이 6개월을 지낸 곳입니다.
김구선생님을 5년 동안 뒷바라지한 고마운 여인 주애보님...
훗날 하늘나라에서도 감사드리고 싶은 분이지요.
김구선생님 은신처 정원.
왼쪽이 목욕실, 정면이 응접실과 부엌, 오른쪽이 남호로 연결되는 비밀통로, 2층이 침실.
1층 응접실.
1층 식당.
1층 부엌.
저보성선생님의 둘째아들 부부가 사용하던 부엌으로 이들이 김구선생님의 식사를 준비해주었습니다.
1층 목욕실 욕조.
2층 침실로 올라가는 계단.
2층 침실.
김구선생님이 사용하셨던 침대.
침대 옆에 있는 비밀비상구.
위급할 때 사다리를 놓고 아래로 내려가 쪽배를 타고 남호로 피신하는 구조입니다.
피신 쪽배.
낮에는 주애보님과 이 배를 타고 남호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남호 쪽에서 바라본 은신처.
김구선생님 은신처에서 5분 정도 거리의 임정식구들 은신처.
이곳 2층 방 4개에서 4가족이 3년 동안 은신했습니다.
차례대로 이동녕가족, 엄항섭가족, 김의한가족, 김구선생님 모친 곽낙원여사와 둘째 아들 김신이 은신했던 곳.
방 입구마다 거처했던 가족들 명패를 달아놓았습니다.
어머니 곽낙원여사와 김구선생님 둘째 아들 김신이 거처했던 방.
곽낙원여사와 김구선생님 첫째 아들 김인은 1940년-1945년 중경 피난시기에 돌아가셨습니다.
김구선생님 부인 최준례여사는 1924년 상해에서 둘째 아들 김신을 출산한 후 산후조리가 미흡해 돌아가셨습니다.
최준례여사는 상해 만국공묘(송경령능원)에 묻히셨는데...
묘비에 "최준례 묻엄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편 김구 세움"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묘비를 중심으로 김구선생님, 어머니, 두 아들이 둘러선 모습이 마음을 짠하게 합니다.
1948년 둘째 아들 김신이 어머니 유해를 모셔 귀국하였는데, 땅속에 묻었다고 하는 이 묘비는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1924년 1월 1일, 35세의 나이로 늙은 시어머니와 어린 두 아들, 그리고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유랑하는 남편을 두고...
차마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았을 김구선생님 부인 최준례여사... 주님 안에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당시 만국공묘는 중국에서 돌아가신 외국인들의 묘역이었고 한국인들도 이곳에 묻혔습니다.
김구선생님 부인 최준례여사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돌아가신 독립투사들도 이곳에 묻히셨지요.
중국 건국의 아버지(國父)로 추앙받는 손문(1866-1925)의 부인인 송경령(1893-1981) 묘가 이곳에 조성되면서 이름이 송경령능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최준례여사 묘는 1948년에 둘째 아들 김신에 의해 한국으로 이장되어 묘자리는 없고, 임정 주요인사 5분의 묘역이 있습니다.
5분의 묘비석을 물수건으로 닦아드리고...
함께 갔던 사제, 수도자들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저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1. 박은식(1859-1925, 황해 황주출신):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2. 신규식(1879-1922, 충북 청원출신): 임시정부 제7대 국무총리
3. 노백린(1875-1926, 황해 송화출신): 임시정부 군무총장.
4. 김인전(1876-1923, 충남 서천출신): 임시정부 국무위원. 목사.
5. 안태국(1880-1920, 평남 평양출신): 임시정부 위원.
한 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애쓰시다 광복을 보지 못하고 머나먼 타국에서 망국의 한을 품은 채 돌아가신 분들...
1993년 정부는 이분들의 유해를 한국으로 이장해 국립묘지에 모셨습니다.
중국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송경령...
중국 광동성 대부호 송요여에게는 재색을 겸비한 세 딸이 있었습니다. 송애령, 송경령, 송미령.
다함께 미국 위슬리대학을 졸업한 재원이었으나 이들의 인생길은 서로 달랐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송애령은 돈을 사랑하였고, 송경령은 조국을 사랑하였으며, 송미령은 권력을 사랑하였다고 말합니다.
송애령은 산시성 대부호 공상희와 결혼하여 중국 경제를 좌우하는 대부호가 되었고...
송경령은 중국 건국의 아버지 손문과 결혼하였으며,
송미령은 대만총통 장개석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송경령은 22세의 나이에 49세의 손문과 결혼하여 불과 10년의 결혼생활을 하였습니다.
손문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중화민국 초대대통령이 되지만 1925년에 죽고, 후에 장개석이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1923년 모택동을 중심으로 중국공산당이 결성되고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 전체가 혼란의 도가니였습니다.
남편 사후에 송경령은 장개석정부, 모택동공산당, 일제침략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중국의 재건에 온힘을 다했습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모택동을 택한 송경령은 마침내 장개석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설의 주역이 되어 국가부주석을 역임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인생길이 자매의 연마저 절연시켰던 것이 중국현대사의 아픔이었지요.
중국사람들은 송경령을 중국 명예주석으로 최고의 존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중국 현대사를 수놓은 세자매... 송애령, 송경령, 송미령.
가흥에서 김구선생님을 모셨던 엄항섭.
역시 김구선생님을 모셨던 김의한.
생사를 같이했던 평생동지들이시지요.
추사 김정희(1786-1856)는 과거에 급제한 후 병조참판(국방부차관)까지 역임했지만...
냉혹한 당쟁에 휘말려 도합 12년의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유배가 54세에 제주도에 위리안치(가시로 둘러친 공간에 연금)된 9년이었는데...
어려운 시기에도 잊지 않고 변치않는 의리를 보여준 제자 역관 이상적에게 세한도(국보 180호)라는 그림과 멋진 글로 감사를 드러냈습니다.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한겨울 추워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된다.)
얼마나 쉽게 자기 이익에 따라 신의를 저버리는 오늘의 세태인데...
임정식구들의 부엌과 식당.
임정식구들의 은인 저보성선생님.
함께 갔던 신부, 수녀님들과 정중한 감사의 인사를 드렸더니 보고 있던 중국인들이 감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1996년에야 저보성선생님께 우리나라에서 건국훈장을 드렸습니다.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이 몇일동안 인터넷 검색1위을 했습니다.
얼마전 대선후보 TV토론에서 이정희후보가 박근혜후보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외교의 기본은 주권을 지키는 것이다. 충성혈서를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누군지 알 거다. 한국이름 박정희. 군사쿠데타하고 굴욕적인 한일협정 밀어붙인 장본인이다.”
당시 일본군 장교 박정희 전대통령은 일본천황에게 혈서로 '견마의 충성'이라는 말을 써서 충성맹세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오늘 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 천황 폐하께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충성을 다할 것으로 다짐합니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을 위해 굳건히 결심합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박정희의 이 혈서는 당시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에 보도되었습니다.
견마(犬馬)의 충성... 일본천황에게 개와 말처럼 충성하겠다...
얼마 뒤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이 알려지자 이름을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꾸었다고 하지요.
엄혹했던 시절... 각자 삶의 길이 달랐겠지만...
박정희 전대통령이 몸담았던 일본군에 쫓겨다녔던 김구선생님의 운명과 대비되는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가흥에는 김구선생님과 임정식구들의 절박했던 사연이 녹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나누어주신 귀한 정보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역사의식이 부족한 저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셨어요. 많은 국민들이 이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많이 아타깝습니다.
김구선생님 저변에서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이 계셨었군요~
귀중한 자료들이 놀랍고..진정한 나라사랑이 무언지 생각하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