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뮤지컬 <캣츠>를 보러 나갔습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작품 대부분을 봤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캣츠>
항상 제 마음속 앨범에 순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예전 윤복희씨가 그라지엘라 역을 맡았을때도 보았고
런던에서 2번 뉴욕에서 1번 그렇게 4번을 보았던 뮤지컬 작품이지만
볼때마다 느낌이 다릅니다. 이번엔 오리지널 작품 그대로 초연을 하는 경우라
그 느낌이 해외에서 본 것과 그리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6시에 도착해서 로얄석 티켓을 받아쥔 후
요기를 하러 바깥에 있는 노천 카페에서 샌드위치랑 커피를 마셨습니다.
최근 한국 연극계는 뮤지컬이 성업입니다.
그만큼 돈이 되기 때문인데, 문제는 이로인해 정극 대부분이 죽어간다는
사실이죠. 극의 전개 상 사실 노래로 끌어가야 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구조를 가진 작품도
뮤지컬로 포장해서 무대에 올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이런 이유로
정극은 정극대로 씨가 마르고, 무분별한 뮤지컬 시장의 확대는 계속되고 있지요.
해외여행이 자유롭고 외국에서 실제로
실제 뮤지컬 작품을 보고 온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오리지널 캐스팅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볼때 느끼는 마음은, 감동과 더불어
한국 배우들이 등장하는 작품에 대해 '돈이 아까운것'은 아쉽게도 사실입니다.
발성도 부족하고 성량은 절대적으로 따라가지 못하고 거기에 안무는 더할 말이 없겠지요.
군무를 안무하는 방식을 보면, 각 장별로 얼마나 촘촘하게 육체가 엮여 들어가는지
마치 신체가 캔버스위에 영혼의 물감을 풀어놓는 붓처럼 느껴집니다.
뮤지컬 '캣츠'는 T.S. 엘리어트의 시집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에 나온
각 고양이들의 성격을 바탕으로 이를 무대화한 것입니다. 시집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고양이들의
풍모와 개성을 통해 인간세상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죠. 젤리클 축제를 배경으로
고양이들의 이야기와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20개의 스토리로
엮여 있고 이를 통해 인간의 내면 속에 감추어진 욕망을 이야기합니다.
시인 엘리어트는 고양이 매니아였습니다.
친구들은 그를 가리켜 늙은 주머니쥐(Old Possum)이라 불렀지요.
작가에게 고양이란 대상은 까실까실한 혀로 자신의 몸을 핱으며
그르릉 울음을 우는 동물이 귀족적이면서도, 한편 극단적으로는 길고양이로
변할수 있는 가능성이랄까, 이 두가지 요소가 주는 극단의 멋이 있는 존재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공중에 높이 치켜 던지면 땅에 닿을 때는 낙하산 보다 가볍게 떨어지는 고양이의 모습, 꽃밭 그늘의 달콤한 잠에
빠져있는 듯 하면서도 자신의 선호를 명확히 구분해 그르릉 소리를 내는 고양이.
이 고양이를 보며 인간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은 어쩔수 없나 봅니다.
일년에 단 한번 젤리클 파티에 모여 자신들이 젤리클 고양이임을
자부하며 공동체 의식을 자랑하는 이들. 그들에게는 3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집에서 불리는 것과, 격식을 갖춘 것, 그리고 비밀의 이름이지요. 엘리어트의 시집 속
고양이들은 우리 인간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자 일종의 자기 현시입니다.
우리 모두 편하게 부르는 이름과 사회적 위치가 만드는 이름,
우리 내면이 간직하고 싶은 이름이 있으니까요.
다양한 직업군의 고양이가 무대에 나옵니다.
배우, 기차 검사원, 상류층 부자, 극장주, 도둑, 한물간 배우도 등장합니다.
무대위에 펼쳐지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세월의 흐름을 속일수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까칠해진 내 안의 숨겨진 가시같은 모습을
찾을때면 약간의 두려움도 생깁니다.
1981년 런던에서 초연된 이후로 전세계 6,500만의
관객을 끌어모은 초대형 작품입니다. 그 오랜 세월 이 뮤지컬이 왜 사람들의
공감을 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진실을 한번 보기만 하면 인간은 어느 곳에서나 존재의 소름끼치는 부조리를 깨닫게 된다.
그때 이러한 의지의 가장 위험한 순간에 치료의 마술사인 예술이 다가와서
그 구토의 발작을 상상력으로 바꾸어 놓기만 하면
우리는 그것으로 살 수가 있다. - 니체 -
무대 위 고양이들은 바로 지금 2008년 혼돈의 서울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 혼돈의 버겨움을 견디게 해준 예술이 있어
뮤지컬을 보는 순간만큼은 모든 걸 잊게 되니까요. 그래서 더욱 큰 공감을 자아내나 봅니다.
고양이들은 자신을 고양이들의 천국으로 보내줄 선지자를 기다립니다.
그의 이름은 올드 듀터로노미. 오랜 세월을 살아온 현자답게 갈색빛 털을 휘날리며
무대 위에 앉아 자신이 구원해야 할 고양이들을 지켜봅니다.
그를 기다리는 고양이의 모습은 흡사 부활한 예수를 기다리는
성도들의 모습같이 비추어지기도 합니다.
아.....올드 듀터로노미를 맡은 배우가 한국사람입니다.
성악을 전공한 사람인데, 성량이 외국배우와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테너음성이 보여줄수 있는 견고함이 발성 곳곳에 베어나오죠.
생각해보면 외국에서 이 작품을 볼때도 항상 듀터로노미는 동양사람이 역할을 했네요.
왜 그럴까요? 결국 서구를 껴안는 것은 동양적 가치이기 때문일까요?
작품을 볼수록 이 부분이 궁금하더군요.
예쁘게 춤추는 하얀 고양이
빅토리아와 도둑 고양이 몽고제리와 럼플티저
허리를 동글게 말고서, 도도하게 꼬리를 흔들며 춤을 추는 모습이 인상적이죠.
전체적으로 안무가 너무 뛰어납니다.
<오페라의 유령> 안무를 맡았던 릴리언 질의 연출로 구성되는
밀도높은 육체의 향연은 단순히 재즈풍의 안무를 떠나, 발레와 아크로바트, 재즈가 어우러진
한편의 칵테일을 맛보는 듯한 느낌을 선사하지요.
늙고 쇠락해버린 창녀 고양이 그라지엘라
추억만을 곰삭이며, 행복을 기다리는 그녀의 목소리엔
생에 대한 갈망과 함께 추억만을 행복의 레시피로 삼아 의존하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들을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헛헛한가 봅니다.
공연 후 포토 존에서 사진을 찍고 있네요.
한국 공연을 시작한지 꽤 되었는데도 연일 만석을 차지한다니
그 인기를 새삼 알듯 합니다. 미국에서는 공식적으로 캣츠의 공연을 완결했지만
아직까지도 <캣츠>에 대한 애정은 식을줄 모른다죠. 올 봄 상하이에서도 선보이던데,
이번 서울 공연이 더 무대의 역동성이나, 안무가 더욱 정교합니다.
고양이는 흔히 9개의 목숨을 가지고 있다고 하죠.
사람들은 고양이를 험한 풍파로 가득한 세상에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내는 어떤 존재로 받아들이려 하나 봅니다.
눈동자가 낮에는 작아지고 밤에는 커지는 고양이의 눈. 고양이의 적응력은 명암의 촛점 맞추기에 있습니다.
고양이에게 길을 묻는 것은 바로, 다양한 화두와 이슈들이 정치적 풍경을 침식하는 지금,
어디에 촛점을 맞추어야 할지를 물어보고 초점을 맞추어보기 위함입니다.
하긴 지금 한국사회에 가장 필요한것이 고양이란 사실 다 아시죠?
캣츠가 인기를 끄는 건 아무래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쥐를 빨리 잡아야 할테니까요.
공연평점은 별 다섯개로 할께요. 너무 잘봤습니다.
12만원이 솔직히 아깝지 않았습니다. 공연 한편 본 소감으로 남은 6월 견뎌내야죠.
행복의 조건을 찾아, 추억을 회상하는 고양이처럼,
야옹.. 소리 내며, 그렇게 강인하고 우아하게 말입니다.
음악은 Memory와 Journey to the Heavenside를 올려놓겠습니다.
공연 앞에 나오는 제리클 송도 너무 신이나도 좋은데요. 이건 동영상으로 올려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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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혹자는 30만원 또 어떤분은 14만원 ~ 난 디비디나 하나 챙겨야겠네요. 가까이서 호흡하며 같이 봤슴 정말 짱이겠습니다. 덕분에 문화생활 똑 소리나게 해 봅니다.
이럴땐 시골에 사는것이 넘 싫다... 디비디도 볼려면 시내로 가야하니.... 에구....
브로드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