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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정은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
개는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는 나의 견해가 아니고, 조주스님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러면 유정은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 열반경 삼본(6권 40권 36권본)에 모두 실유불성悉有佛性은 128번 나오고, 개유불성皆有佛性은 40번 나온다. 이에 실유불성을 표준으로 삼는다.
1) 법상종法相宗과 법성종法性宗
유정의 불성과 관련하여 법상종法相宗과 법성종法性宗은 그 견해가 확연히 다르다. 인도 나란타사那爛陁寺의 계현戒賢스님은 법상종의 종조가 되고, 지광智光스님은 법성종의 종조가 된다. 그 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법상종은 호법護法보살과 난타難陁보살이 있고, 그 위에 무착無著보살과 천친天親보살이 있으며, 다시 미륵보살이 있다. 또 법성종은 청목靑目보살과 청변淸辯보살이 있고, 그 위에 용수龍樹보살과 제바提婆보살이 있으며, 다시 문수보살이 있다. 미륵보살과 문수보살은 극위極位보살이라 다시 말할 것이 없고, 무착보살과 용수보살도 또한 후인이 초지보살이라 추앙하거늘, 어찌 그 견해에 다름이 있으랴. 후대에 확립된 법상종과 법성종은 그 불성과 관련하여 견해가 명백히 다르다고 언급했다. 그 차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법상종과 법성종의 종취 중에 어떤 주장이 상호 대치하는가? 법상종은 세존이 제일시第一時에 아함 등 소승을 설하시고, 제이시第二時에 반야경 등 불요의경不了義經을 설하셨으며, 제삼시第三時에 해심밀경 등 요의경了義經을 설하셨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하여 법성종은 제일시에 아함 등 소승을 설하시고, 제이시에 해심밀경 등 불요의경을 설하셨으며, 제삼시에 반야경 등 요의경을 설하셨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첫째 차별상이다.
둘째 법상종은 오성삼승五性三乘을 주장하고, 법성종은 일성일승一性一乘을 주장한다. 일차 논란은 해심밀경과 반야경이 주인공이었다면, 이차 논란은 능가경과 화엄 열반 법화경 등 일승경이 주인공이다.
2) 불성법문佛性法門의 출처
나는 이 글을 쓰기 이전에는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라는 말이 열반경에 처음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동진東晉 법현法顯스님의 불설대반니원경佛說大般泥洹經에 “다시 어떤 비구는 여래장경如來藏經에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라는 말씀을 널리 연설했느니라.”(復有比丘廣說如來藏經言一切衆生皆有佛性)라는 구절에 의거하면, 열반경 이전에도 불성법문佛性法門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구부경九部經 중에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九部經中一切衆生皆有佛性)라는 명문에 의거하면 그 출처가 광범위廣範圍함을 또한 알 수 있다.
또 동진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삼장이 번역한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에 “이와 같이 내가 들었도다. 한때 부처님이 왕사성 기사굴산 중 보월강당寶月講堂 전단중각栴檀重閣에서 성불하신지 10년에 대비구중大比丘衆 백천인百千人과 함께하셨느니라. 60항하사수의 보살마하살은 모두 다 광대한 정진력을 성취하시고, 이미 일찍이 백천억 나유타 제불께 공양을 올렸으며, 모두 다 불퇴전법륜不退轉法輪을 굴리셨느니라.”(如是我聞 一時佛在王舍城耆闍崛山中 寶月講堂栴檀重閣 成佛十年 與大比丘衆百千人俱 菩薩摩訶薩六十恒河沙 皆悉成就大精進力 已曾供養百千億那由他諸佛 皆悉能轉不退法輪)라는 문장에 의거하면, 최소한 성불하신 뒤 10년 이후에는 불성법문을 연설하셨음을 알 수 있다. 구부경 또는 십이부경十二部經은 모두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말한다.
당대唐代 불공삼장不空三藏이 번역한 대방광여래장경大方廣如來藏經에 “선남자여, 여래는 청정안清淨眼으로 일체 유정이 여래장如來藏을 구족하고 있음을 보고, 이 때문에 보살을 위하여 묘법을 선설宣說하셨느니라.”(善男子 如來以清淨眼 見一切有情具如來藏 是以爲於菩薩宣說妙法)라는 여래장법문이 있다. 여래장이 바로 불성이다.
또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에 “선남자여, 비유하면 어떤 여인이 빈천하고 추루하여 중인衆人이 싫어하는 바이지만, 귀자貴子를 회임하여 응당 성왕聖王이 되고 사천하四天下를 임금노릇하는 것과 같으니라. 이 여인은 지나오며 겪은 시절인연을 알지 못하고, 항상 하열하다 여기고 빈천한 아들을 낳았다고 생각하느니라. 이와 같구나, 선남자여, 여래는 일체 중생이 생사를 윤회하며 갖가지 고독苦毒을 받지만, 그 전신全身에 모두 여래보장如來寶藏이 있음을 관찰하나니, 마치 저 여인이 또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과 같구나. 이 때문에 여래는 널리 설법하여 말해주느니라. 선남자여, 스스로 경멸하며 비천하다고 여기지 말라. 너희들 자신이 모두 불성이 있느니라. 만일 부지런히 정진하여 모든 과오를 없애기만 하면, 바로 보살이나 세존의 명호를 받고 무량한 중생을 화도化導하여 제도할 것이니라.”(善男子 譬如女人貧賤醜陋衆人所惡 而懷貴子當爲聖王王四天下 此人不知經歷時節 常作下劣生賤子想 如是善男子 如來觀察一切衆生 輪轉生死受諸苦毒 其身皆有如來寶藏 如彼女人而不覺知 是故如來普爲說法言 善男子 莫自輕鄙 汝等自身皆有佛性 若勤精進滅衆過惡 則受菩薩及世尊號 化導濟度無量衆生)라는 불성법문이 있다.
또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에 “여래의 불성은 마치 저 제호와 같이 자성이 청정하지만, 번뇌의 과오 때문에 어떤 이상異相이 나타나느니라. 비유하면 사람들이 대해의 물은 짜다고 말하지만, 일체 대해의 물이 모두 짠맛인 것은 아니니, 그 가운데 또한 팔미八味의 공덕수功德水가 있느니라. 비유하면 설산에 갖가지 독초가 많지만, 저 설산에는 그보다 먼저 양약이 있느니라. 일체 중생의 몸도 또한 이와 같나니, 사대로 화합하여 비유하면 독사와 같지만, 그러나 이 몸 가운데 그보다 먼저 불성이 있느니라.”(如來之性如彼醍醐 自性清淨 煩惱過故 有異相現 譬如人言大海水醎 非爲一切其水悉醎 其中亦有八味之水 譬如雪山多諸毒草 而彼雪山先有良藥 一切衆生身亦如是 四大和合譬如毒蛇 然此身中先有佛性)라는 불성법문이 있다.
또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다시 알지만 보지 못함(知而不見)이 있느니라. 무엇을 지이불견知而不見이라 이르는가?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는 줄을 알지만, 갖가지 번뇌가 가리고 감추어 볼 수 없기 때문이니, 이를 지이불견이라 일컫느니라. 또 알면서 조금 보는 것(知而少見)이 있느니라. 십주보살마하살 등은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는 줄을 알고 보지만 명백하지 못하니, 마치 암야闇夜에 보는 것과 같아서 명백하지 못하느니라. 다시 또한 보고 또한 아는 것(亦見亦知)이 있으니, 이른바 제불 여래는 또한 보고 또한 아는 바이니라.”(復有知而不見 云何知而不見 知諸衆生皆有佛性 爲諸煩惱之所覆蔽不能得見 是名知而不見 復有知而少見 十住菩薩摩訶薩等知諸衆生皆有佛性 見不明了 猶如闇夜所見不了 復有亦見亦知 所謂諸佛如來亦見亦知)라는 불성법문이 있다.
여래장경은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과 대방광여래장경大方廣如來藏經 두 본이 있다. 대동소이하다. 중생은 지이불견知而不見하고, 십주보살은 지이소견知而少見하며, 제불은 역견역지亦見亦知한다. 이 십주보살은 삼승의 권설이다. 중생도 두 부류가 있다. 선근중생은 지이불견하고, 불선근중생은 부지불견不知不見할 것이다.
3) 수자의어隨自意語와 수타의어隨他意語
이상에서 확인하는 바와 같이 부처님은 여러 경에서 불성법문을 언급하셨다. 다시 묻는다.
“그러면 유정은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
이 유정의 불성 유무에 대하여 부처님은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가섭보살품迦葉菩薩品에서 상세히 연설하셨다. 아래와 같다. 수隋나라 장안관정章安灌頂 법사法師의 대열반경소大般涅槃經疏를 곁들이며, 간략히 관정소灌頂疏라 호칭한다.
경문: “선남자여, 여래는 다시 수자의어隨自意語가 있느니라. 여래의 불성은 곧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유성有性이고, 둘째 무성無性이니라.”(善男子 如來復有隨自意語 如來佛性則有二種 一者有 二者無)
나의 견해: 후문을 직역하면 “첫째 있고, 둘째 없다.”라고 할 수 있다. 불성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성이 있는 것이다, 또는 없는 것이라 말하면 조금 이상하다. 그래서 유성이고, 무성이라 번역했다.
관정소: 처음 여래 불성의 유성과 무성을 확정하고, 둘째 천제 불성의 유성과 무성을 천명했다. 처음 여래 불성을 밝힘에 또한 둘이 있다. 하나는 유성 무성을 밝히고, 다음은 유례類例를 들어 해석했다. 처음에 또한 둘이 있으니, 하나는 무소유無所有를 밝히고, 다음은 유소무有所無를 밝혔다.(初就如來佛性有無 二明闡提佛性有無 初明如來又二 初明有無 次類例釋 初又二 初明無所有 次明有所無)
나의 견해: 무소유無所有와 유소무有所無는 해석하기가 까다롭다. 아래에서 해석해 볼까 한다.
경문: “유성이란 것은 이른바 삼십이상과 팔십종호, 십력과 사무소외四無所畏, 삼념처三念處와 대자대비, 수릉엄 등 무량삼매無量三昧와 금강 등 무량삼매, 방편 등 무량삼매, 오지인五智印 등 무량삼매이니, 이를 유성이라 일컫느니라.”(有者 所謂三十二相八十種好 十力四無所畏 三念處大慈大悲 首楞嚴等無量三昧 金剛等無量三昧 方便等無量三昧 五智印等無量三昧 是名爲有)
관정소: 첫 문단은 십력과 사무소외 등이니, 모두 없다가 있다.(初文者 十力無畏等 並是無有而有)
나의 견해: 아래 소문疏文에서 무성은 유소무를 밝힌 것이라 하니, 이 유성은 무소유無所有를 밝힌 것임을 알 수 있다. 상호相好와 삼매 등은 불성이 있으니, 이 공덕장엄이 있는 때를 기준하면 이전에는 없었지만 지금은 있는 것이다. 이를 선무금유先無今有 또는 본무금유本無今有라 한다. 이 때문에 무소유無所有를 “없다가 있는 것이다.” 바로 본무금유本無今有라 해석할 수 있다.
경문: “무성이란 것은 이른바 여래의 과거와 미래의 모든 선과 불선 무기의 업인業因과 과보, 번뇌와 오음五陰의 십이인연 등이니, 이를 무성이라 일컫느니라.”(無者 所謂如來過去諸善不善無記業因果報 煩惱五陰十二因緣 是名爲無)
관정소: 다음은 유소무를 밝힌 것이니, 불선 무기와 일체 번뇌 등은 모두 옛적에 있다가 지금은 없다.(次明有所無者 不善無記一切煩惱等並是昔有今無)
나의 견해: 유소무有所無도 “있다가 없는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유성은 현성賢聖의 일용사日用事이고, 무성은 범부의 일용사이다. “옛적에 있다가 지금은 없다.”(昔有今無) 이 석유금무를 본유금무本有今無 또는 선유금무先有今無라 말하기도 한다.
이 본유금무 게송은 유래가 있다. 열반경에 이 사구게四句偈가 네 차례나 나온다. 36권본을 의거하면 9권 보살품菩薩品에 초출初出하고, 15권 범행품梵行品에 재출再出하며, 25권과 26권 사자후보살품師子吼菩薩品에 삼출三出 사출四出한다. 이에 사출게四出偈라 말하기도 한다.
본래 있지만 지금은 없고,
본래 없지만 지금은 있다.
삼세에 이 법이 있다면,
옳은 곳이 없느니라.
本有今無 本無今有 三世有法 無有是處
역대로 이 게송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상세한 해석은 생략한다. 이 법은 초구와 이구를 말한다. 무유시처無有是處는 경전의 관용어로 바로 앞에 글을 전적으로 부정한다. 하나도 옳은 데가 없다는 일무시처一無是處 또는 마침내 옳은 곳이 없다는 종무시처終無是處와 그 뜻이 같다. 이 때문에 제3구 삼세유법三世有法은 절대 부정되어야 옳다. 제4구는 제3구를 부정하고, 제3구는 제1구와 제2구를 부정한다. 형식은 그러하지만, 실제는 3구와 4구가 함께 1구와 2구를 부정한다.
혜원慧遠스님은 대반열반경의기大般涅槃經義記에서 “삼세에 이 법이 있다면, 옳은 곳이 없다고 한 것은 그와 같은 정의定義를 타파하지만, 이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만일 구족하고자 하면 응당 ‘삼세에 이 법이 없다면, 옳은 곳이 없다.’라고 말해야 한다.”(三世有法無是處者破他定義 此言不足 若具應言三世無法亦無是處)라고 했다. 이를 갖추어 말하면 다음과 같다.
본래 있지만 지금은 없고,
본래 없지만 지금은 있다.
삼세에 이 법이 없다면,
옳은 곳이 없느니라.
本有今無 本無今有 三世無法 無有是處
삼세유법三世有法과 삼세무법三世無法은 상반된다. 이 때문에 이 게송은 3구와 4구가 함께 1구와 2구를 전적으로 긍정한다.
경문: “선남자여, 예컨대 유有와 무無, 선善과 불선不善, 유루와 무루, 세간과 비세간非世間, 성聖과 비성非聖, 유위와 무위, 실實과 부실不實, 적정과 비적정非寂靜, 쟁諍과 비쟁非諍, 계界와 비계非界, 번뇌와 비번뇌非煩惱, 취取와 비취非取, 수기와 비수기非受記, 유有와 비유非有, 삼세와 비삼세非三世, 시時와 비시非時, 상常과 무상無常, 아我와 무아無我, 낙樂과 무락無樂, 정淨과 무정無淨, 색수상행식과 비색수상행식非色受想行識, 내입과 비내입非內入, 외입과 비외입非外入, 십이인연과 비십이인연非十二因緣이니, 이를 여래 불성의 유성 무성이라 일컫고, 더 나아가 일천제 불성의 유성 무성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善男子 如有無 善不善 有漏無漏 世間非世間 聖非聖 有爲無爲 實不實 寂靜非寂靜 諍非諍 界非界 煩惱非煩惱 取非取 受記非受記 有非有 三世非三世 時非時 常無常 我無我 樂無樂 淨無淨 色受想行識非色受想行識 內入非內入 外入非外入 十二因緣非十二因緣 是名如來佛性有無 乃至一闡提佛性有無 亦復如是)
관정소: 다음은 유무有無나 선불선善不善과 같다. 아래 22쌍의 법을 들고서 쌍으로 앞에 유성 무성의 이사二事를 비류比類했다. 유루와 무루는 어떠한가? 유루는 유소무有所無에 비류하고, 무루는 무소유無所有에 비류한 것이며, 세간은 유소무에 비류하고, 비세간은 무소유에 비류한 것이다. 아래 유례는 모두 이와 같다. 다음 일천제 불성 이하는 바로 천제 불성의 유성 무성을 천명한 것이니, 모두 다 위에 여래 불성의 유성 무성과 상반相反된다. 여래는 선성善性이 있지만 천제는 곧 선성이 없고, 여래는 악심惡心이 없지만 천제는 바로 악심이 있는 것이다.(次如有無善不善 下舉二十二雙法雙類前二事 有漏無漏者 有漏類有所無 無漏類無所有 世間類有所無 非世間類無所有 下去皆爾 次一闡提佛性下 是明闡提佛性有無 皆悉反上如來有無 如來有善闡提即無 如來無惡闡提即有)
나의 견해: 유루와 세간은 유소무有所無와 비교할 만하니 본유금무本有今無 하고, 무루와 비세간은 무소유無所有와 비교할 만하니 본무금유本無今有하다.
경문: “선남자여, 내가 비록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말하지만, 중생은 여래의 이와 같은 등 수자의어隨自意語를 이해하지 못하느니라. 선남자여, 이와 같은 수자의어는 최후신보살最後身菩薩도 오히려 이해할 수 없거늘, 하물며 이승이나 그밖에 보살들이겠느냐. 선남자여, 내가 지난 어떤 날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미륵보살과 세제世諦를 함께 담론談論할 때 사리불 등 5백 성문은 이런 일의 진행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출세간의 제일의제第一義諦이랴.”(善男子 我雖說言一切衆生悉有佛性 衆生不解佛如是等隨自意語 善男子 如是語者 後身菩薩尚不能解 況於二乘其餘菩薩 善男子 我往一時在耆闍崛山 與彌勒菩薩共論世諦 舍利弗等五百聲聞於是事中都不識知 何況出世第一義諦)
나의 견해: 사중事中은 자주 쓰지 않는 용어이다. 사전事前과 사후事後 중간의 일을 사중이라 한다.
관정소: 내가 비록 불성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하는, 다음 중생은 여래의 이와 같은 수자의어를 이해하지 못함을 밝힌 것이니, 또 둘이다. 먼저는 이해하지 못함을 바로 드러냈고, 나중에는 석성昔聖을 인증引證했다. 첫 문단에 둘이 있으니, 처음은 이해하지 못함이고, 다음은 심행深行을 들어서 천행淺行과 비황比況했다. 심행보살도 오히려 명백하지 못한데 하물며 천행의 삼승인三乘人이랴. 다음은 내가 지난 어떤 날 이하는 인증이다. 부처님이 세제를 말씀하시는데 성문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두 가지로 해석한다. 첫째 해석은 세제의 종류별 각사各事가 업행業行의 인과와 연관하여 심오은회深奥隐晦하기 때문에 난해하다. 둘째 해석은 응신應身이 세제가 되기 때문에 이승은 명백히 알지 못한다.(我雖說下 次明衆生不解如來是語 又二 初正出不解 次引昔證 初文有二 初不解 次舉深況淺 深行菩薩尚自不了 況復淺人 次我往一時下引證 佛說世諦聲聞不解者 二解 一云 世諦種別事關業行因果深隱故難解 二云 應身爲世諦故二乘不了)
나의 견해: 보살을 대보살大菩薩과 소보살大菩薩로 나누는데, 대보살을 심행보살이라 한다. 나누는 방법이 많지만, 그 중에 하나를 들면 지상보살地上菩薩을 대보살이라 일컫고, 지전보살地前菩薩 곧 삼현보살三賢菩薩을 소보살이라 일컫기도 한다.
경문: “선남자여, 간혹 이런 불성이 있으니, 일천제一闡提는 있고 선근인善根人은 없으며, 간혹 이런 불성이 있으니, 선근인은 있고 일천제는 없으며, 간혹 이런 불성이 있으니, 두 사람이 모두 있고, 간혹 이런 불성이 있으니, 두 사람이 모두 없느니라. 선남자여, 나의 모든 제자들이 만일 이와 같은 네 구절의 뜻을 이해하는 이라면, 응당 일천제인一闡提人은 반드시 불성이 있다거나, 단정적으로 불성이 없다고 논란論難하지는 않을 것이니라. 만일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를 여래의 수자의어라 일컫느니라. 여래의 이와 같은 수자의어를 중생이 어떻게 곧바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善男子 或有佛性 一闡提有 善根人無 或有佛性 善根人有 一闡提無 或有佛性 二人俱有 或有佛性 二人俱無 善男子 我諸弟子若解如是四句義者 不應難言一闡提人定有佛性 定無佛性 若言衆生悉有佛性 是名如來隨自意語 如來如是隨自意語 衆生云何一向作解)
관정소: 흥황법랑興皇法朗스님의 해석이니, 이는 일구一句로부터 칠구七句까지 있다. 일구는 단지 중도中道일 따름이다. 이구는 여래와 천제의 불성이니, 네가 있으면 네가 없다. 삼구는 삼종어三種語이니, 부처님의 수자의어隨自意語라면 천제는 불성이 있고, 수타의어隨他意語라면 천제는 불성이 없으며, 수자타의어隨自他意語라면 또한 있고 또한 없기도 하다. 사구는 이 가운데 사구이다. 칠구는 칠중생七衆生이니, 앞 이인二人은 악성惡性이고, 뒤 오인五人은 선성善性이다.(興皇釋此從一句至七句 一句只是中道 二句是如來闡提佛性 若有若無 三句是三種語 佛自語闡提有性 他語闡提無性 自他語亦有亦無 四句是此中四句 七句是七衆生 前二人是惡後五人是善)
다시 세 가지로 해석하겠다. 첫째 총괄하여 제의諸義를 취하고, 둘째 이성의 안팎을 취하며, 셋째 홀로 이성의 안만을 취한다. 총괄하여 제의를 취한다고 한 것은 무엇인가? 이성은 선악이 없지만 그러나 선악의 두 가지 용처가 있다. 선근인에 있는 이성은 선용善用이 있고, 천제인에 있는 이성은 악용惡用이 있다. 모두 이성이 있다는 것은 각각 일변一邊이 있고, 모두 이성이 없다는 것도 각각 일변이 없다. 다음 이성의 안팎을 취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불성은 본래 얻는다거나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인연을 준거한다면, 이 때문에 얻는다거나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이성의 밖이라면 천제는 불성을 얻을 수 있고, 이성의 안이라면 불성을 얻을 수 없다. 선근인이 있는 불성은 얻을 수 없는 이성이고, 천제가 있는 불성은 얻을 수 있는 이성이다. 모두 이성이 있고 모두 이성이 없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다음 홀로 이성의 안만을 취한다는 것은 이러하다. 천제는 곧 선성비구이고, 선근인은 바로 라훌라존자이다. 이는 순역順逆의 두 가지로 응화應化한 것이다. 천제 선성비구는 역연逆緣으로 응화하여 불선不善한 이성이 있고, 선근인 라훌라존자는 순연順緣으로 응화하여 선법善法의 이성이 있다. 모두 이성이 있고 모두 이성이 없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이른바 이는 잘 이해한다거나 이해하기 어렵다는 양설兩說이다.(復作三種釋 一總就諸義 二就理內外 三單就理內 通就諸義者 理非善惡而有善惡二用 善根人有有善用 闡提人有有惡用 俱有者各有一邊 俱無者各無一邊 次就理內外者 佛性本非得無得 約緣故有得無得 理外闡提是有得 理內是無得 善根人有無得之性 闡提有有得之性 俱有俱無如上說 次單約理內 闡提即是善星 善根人即是羅云 此是順逆二化 闡提有逆化不善之性 善根人有順化善法之性 俱有俱無如上說 謂此爲能解難解之說)
지금 천명하니, 이 문단을 의거하여 사구四句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천제인이 있는 이성은 단지 잠몰潛沒에 있을 뿐이고, 선근인이 있는 이성은 오직 출현出現에 있을 따름이다. 이인二人이 함께 있는 이성은 모두 항하수恒河水에 있고, 이인이 함께 없는 이성은 모두 피안에 이르지 못한다. 구句를 헤아려 만들고자 하면 또한 무량수無量數에 수응隨應할 것이지만, 약설略說하여 이와 같이 드러낸다. 또 삼제三諦를 준거하는 것이니, 천제인이 있는 이성은 세제의 악인惡因이고, 선근인이 있는 이성은 출세간의 선인善因이다. 이인이 함께 있는 이성은 모두 세제 과보가 있는 보신報身이고, 이인이 함께 없는 이성은 모두 중도가 없는 인과이다.(今明 欲依此文作四句者 闡提人有但有於沒 善根人有但有於出 二人俱有俱在恒河 二人俱無俱不到岸 欲思作者亦應無量 略出如此 又約三諦者 闡提人有者世諦惡因 善根人有者出世善因 二人俱有俱有世諦果報之身 二人俱無俱無中道因果)
나의 견해: 소문이 장문이라 나의 해설은 생략한다. 아래 청량국사의 해설을 곁들인다.
4) 이성理性 행성行性과 과성果性
청량국사는 화엄현담華嚴玄談에서 이성을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또 불성을 말한다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이성理性이고, 둘째 행성行性이다. 이성은 반드시 있고, 행성은 어떤 때는 없기도 한다. 이 말이 옳다고 할 만하다. 이 때문에 열반경에 이르기를, ‘간혹 이런 불성이 있으니, 선근인은 있고 천제인은 없다.’라고 하니, 곧 행성이고, ‘간혹 이런 불성이 있으니, 두 사람이 다 있다.’라고 하니, 바로 이성이다.”(若謂佛性有二 一者理性 二者行性 理性定有 行性或無 斯言可爾 故涅槃云 或有佛性 善根人有 闡提人無 卽是行性 或有佛性 二人俱有 卽是理性)
나의 견해: 법상종法相宗에 이종불성二種佛性이 있다. 이불성理佛性과 행불성行佛性이다. 이성은 이불성을 말하고, 행성은 행불성을 말하는 것 같다.
질문: “이미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고 말했는데. 어째서 열반경은 간혹 이런 불성이 있으니, 천제인은 있고 선근인은 없다고 했는가?”(問 既云一切衆生 皆有佛性 云何涅槃經云 或有佛性 闡提人有 善根人無等)
답변: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 경에서 설한 선善과 악惡 무기無記 이성理性 과성果性 등을 준거하면, 유성有性과 무성無性을 교대로 연설했다. 천복소薦福疏에 이르기를, ‘지금 경을 준거하여 불성을 천명하자면 대략 다섯 가지가 있다. 이른바 선과 불선 무기 그리고 이성과 과성 등이다. 지금 일천제는 있고 선근인은 없다고 말한 것은 무엇인가? 이는 불선불성不善佛性이다. 그러나 선근인의 유성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욕離欲 선근인이니, 이욕은 일체 불선을 끊었기 때문이다. 둘은 오주五住 이상의 보살이니, 오주 이상은 불선성不善性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인二人은 모두 불선성이 없다. 선근인은 있고 천제인은 없다고 말한 것은 무엇인가? 이는 선불성善佛性이다. 천제는 일체 선을 끊었기 때문에 무성이라 말한 것이다. 이인이 모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성과 무기이다. 이인이 모두 없는 것은 무엇인가? 모두 과성果性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다.”(答 一切衆生 實有佛性 經約善惡無記理果等 互說有無 薦福疏云 今准經明佛性 略有五種 謂善不善無記 及理果等 今言一闡提有善根人無者 此是不善佛性也 然善根人有其二種 一是離欲善根人 離欲斷一切不善故 二是五住已上 五住已上無不善性故 此之二人俱無不善性也 善根人有闡提人無者 此是善佛性也 闡提斷一切善故云無也 二人俱有者 理及無記也 二人俱無者 俱無果性故)
나의 견해: 청량국사는 화엄경소초에서 천복법사薦福法師의 천복소薦福疏를 자주 인용한다. 그러나 천복법사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대천복사大薦福寺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답변: “열반경 상문上文에 이르기를, ‘여래의 불성佛性은 곧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유성有性이고, 둘째 무성無性이니라. 유성이란 것은 이른바 삼십이상 내지 무량삼매이니, 이를 유성이라 일컫느니라. 무성이란 것은 이른바 여래의 과거와 미래의 모든 선과 불선 무기의 업인業因과 과보, 번뇌와 오음五陰의 십이인연 등이니, 이를 무성이라 일컫느니라. 더 나아가 천제의 불성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라고 한다. 이는 곧 위에 부처님부터 아래 천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유성과 무성의 이성二性이 있고, 전무성全無性은 없다. 선근인과 일천제인은 유성 무성의 이성二性이 다르기 때문에 사구四句를 얻을 수 있다. 이 중에 불성이 여러 가지라 유성과 무성의 같지 않음이 있음을 밝힌 것이고, 중생이 여러 가지라 유성과 무성이 같지 않음을 밝힌 것은 아니다. 알 수 있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경에 이르기를, ‘간혹 이런 불성이 있으니, 선근인은 있고 천제인은 없다.’라고 한다. 이 때문에 간혹 있지만 선근인은 불성이 있고 천제인은 불성이 없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涅槃上文云 如來佛性則有二種 一有二無 有者所謂三十二相 乃至無量三昧 是名爲有 無者所謂如來過去諸善不善無記業因果報 煩惱五陰十二因緣 是名爲無 乃至闡提佛性亦爾 是則上從乎佛下至闡提 皆有有無二性 無全無性 由善根人與一闡提有無二性異故 得有四句 此中明佛性多種有無不同 不明衆生多種有性無性 所以得知者 經言 或有佛性 善根人有闡提人無等 故不言或有善根人有佛性 闡提人無佛性)
나의 견해: 열반경에 ‘알 수 있다’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品에 천제의 본심本心 곧 불선불성不善佛性과 관련한 명문이 있다. 아래와 같다.
“무엇을 안다고 일컫는가? 나도 없고 아소我所도 없는 줄을 알고,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는 줄을 아느니라. 불성이 있기 때문에 일천제 등도 그 본심만 버리면, 모두 응당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할 수 있느니라. 이와 같은 모든 것을 성문이나 연각은 알 수 없는 것이고, 보살만이 알 수 있느니라.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예전에는 알지 못하던 바이나 지금에는 알 수 있다고 하느니라.”(云何爲知 知無有我無有我所 知諸衆生皆有佛性 以佛性故 一闡提等捨離本心 悉當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如此皆是聲聞緣覺所不能知 菩薩能知 以是義故 昔所不知而今得知)
천제는 선근을 끊었기 때문에 성불하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천제의 본심本心은 선근이 없고, 이를 불선성不善性 또는 불선불성不善佛性이라 말한다. 이를 버리면 곧 천제의 본심은 다시 선성善性이 되고, 또 선불성善佛性이 되기 때문에 바로 성불할 수 있다.
답변: “생공生公이 이르기를, ‘무릇 품질稟質의 이의二儀는 모두 열반의 정인正因이다. 천제도 중생의 부류인데, 어찌 홀로 불성이 없을 수 있는가? 어쩌면 경의 전래傳來가 미진할 따름이다.’라고 한다. 이 말을 제창한 인유로 무구산武丘山으로 쫓겨나갔다. 이후 대경大經이 이윽고 이르렀는데, 성행품聖行品 아래 과연 이르기를, ‘일천제인이 설령 선근을 끊었을지라도 오히려 불성이 있느니라.’라고 한다. 이에 공경대부가 경괘輕快한 나룻배로 영접하고, 이 열반경을 제창提唱하시라 간청했다. 매양 천제도 불성이 있다는 문장에 이르면, 제덕諸德도 손목을 불끈 쥐지 않는 이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없다는 뜻을 품고 있는가?”(生公云 夫稟質二儀 皆是涅槃正因 闡提含生之類 何得獨無佛性 蓋是此經來未盡耳 由唱此言 被擯武丘 後大經既至 聖行品已下 果云一闡提人雖復斷善猶有佛性 於是諸公輕舟迎接請唱斯經 每至闡提有佛性之文 諸德莫不扼腕 何以至今猶存無義)
나의 견해: 청량국사의 답변이 장문이라 여러 문단으로 나누었다. 품질稟質은 타고난 천성을 말하고, 이의二儀는 천지 양의를 말하니 곧 청탁淸濁이다. 이를 중생에 대입하면 바로 선과 불선이 된다. 무구산武丘山은 호구산虎丘山이라 일컫기도 하며,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에 있다. 도생법사가 돌 앞에서 설법하자 돌이 머리를 끄덕였다고 전한다.
성행품聖行品 아래 과연 이르기를, “일천제인이 설령 선근을 끊었을지라도 오히려 불성이 있느니라.”(一闡提人雖復斷善猶有佛性)라고 한다. 열반경에서 위 문구를 확인하지 못했다. 고귀덕왕보살품高貴德王菩薩品에 아래와 같은 글이 있다.
“선남자여,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을 수행함에 듣지 못하지만 듣는 것이라 하는가? 십이부 경은 그 뜻이 매우 깊어서 옛적부터 듣지 못 했지만, 지금 이 경 때문에 구족하게 들을 수 있느니라. 먼저 설령 들었을지라도 단지 경명經名만 들었을 뿐이지만, 지금 이 대열반경에서 바로 그 본의本義를 들었고, 성문이나 연각도 오직 십이부경의 경명만 들었고 그 본의을 듣지 못 했지만, 지금 이 경에서 구족하게 들을 수 있으니, 이를 듣지 못하지만 듣는 것이라 일컫느니라. 선남자여, 일체 성문경聲聞經이나 연각경緣覺經 중에 일찍이 부처님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 있다거나, 필경 입멸入滅하지 않는다거나, 삼보의 불성에 차별상差別相이 없다거나, 네 가지 중죄를 범하고, 방등경을 비방하며, 오역죄를 짓고, 일천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 했지만, 지금 이 경에서 이 법문을 들을 수 있으니, 이를 듣지 못하지만 듣는 것이라 일컫느니라.”(善男子 云何菩薩摩訶薩修大涅槃不聞而聞 十二部經其義深邃昔來不聞 今因是經得具足聞 先雖得聞唯聞名字 而今於此大涅槃經乃得聞義 聲聞緣覺唯聞十二部經名字不聞其義 今於此經具足得聞 是名不聞而聞 善男子 一切聲聞緣覺經中 不曾聞佛有常樂我淨 不畢竟滅 三寶佛性無差別相 犯四重罪 謗方等經 作五逆罪 及一闡提 悉有佛性 今於此經而得聞之 是名不聞而聞)
이 문단의 제명이 바로 “유정은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이다. 유정중생은 대별하면 선근인과 불선근인不善根人이 있고, 불성도 또한 이 이인二人의 유무에 따라 네 가지가 있으며, 이 때문에 시비가 끊어지지 않는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처방은 무엇인가? 바로 수자의어隨自意語와 수타의어隨他意語이다.
2023년 1월 16일 74세 길상묘덕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