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작
<브루클린에서 온 안나>의 지나 롤로브리지다
우리는
매일 샤워를 합니다. 가끔 욕조에 물을 받고 목욕도 합니다.
공중
목욕탕에 다녀오면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 속 거품 목욕 장면은 깨끗함과 아름다움의 상징처럼 묘사됩니다.
몸을
씻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라는 건 너무 당연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양에서 목욕이 보편화된 것은 고작 100여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전 시대 사람들은 몸을 물로 잘 씻지 않았습니다.
깨끗한
물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몸을 씻는 것에 대해
나쁜
속설이 퍼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물에
몸을 담그면 위생상 좋지 않다." "땀구멍을 때와 기름으로 막아야 질병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다." "목욕은 신경과 인대를 헐겁게 하고, 머리가 증기로 채워져 통풍에 걸릴 수
있다."
중세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인과 미국인들은 목욕을 터부시했습니다.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말이지만 고정관념은 힘이 셉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도 한 달에 한 번만 목욕했습니다.
고급
목욕 시설을 갖춰놓고도 일부러 씻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여왕이니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목욕을 한 것입니다.
다른
귀족들은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루이 13세는 7살 때까지
한
번도 목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문명화된 유럽인들은 발가벗고
물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야만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에게
대중목욕탕은 중동의 미개인들이나 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귀족이나 일반인이 안 씻으면 냄새가 나고
지저분한
일 정도로 그치겠지만
만약
의사가 잘 씻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수술
집도를 해야 하는 의사가 손을 씻지 않고
메스를
잡았다면요? 실제로 20세기 전까지 의사들이 그랬습니다.
수술을
하는 외과 의사가 손을 씻지 않고 수술실에 들어갔습니다.
왜냐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세균이라는 단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이유 없이 죽어갔습니다.
산부인과에선
산모 사망이 흔한 일이었고요.
죽어가는
산모들
1847년
헝가리 의사 이그나즈 필리프 제멜바이스는
산모들의
원인 모를 죽음에 의심을 품었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출산한 산모가 산욕열로 죽어가는 이유를 파헤쳤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한 가지 알아냈습니다.
아기를
받은 의사들이 시체를 연구하기 위해
분만실과
시체실을 부지런히 오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제멜바이스는 시체의 무언가가 산모에게로 옮겨오고 있다고 결론을 냅니다.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막연히 직감으로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그는 의사들에게 환자를 진료하기 전 손을 씻으라고 권하고 다녔습니다.
전염병이
창궐할 때 손을 씻자는 말은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얼마전
메르스 사태가 터졌을 때도 우리는 손 청결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제멜바이스의 손씻기 처방은 의사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됐습니다.
손만
씻으면 해결된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거죠.
당시
의사들에게 손을 물로 씻는다는 것은
의사답지
못한 행동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손이
더러워야 진짜 의사라는 거죠. 수술도구가
지금처럼
정교하거나 날카롭지 않고
마치
공구 같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결국
제멜바이스의 주장은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병
원에서
산모들은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산욕열로 죽어갔습니다.
제멜바이스의
말을 들었다면 많은 산모들의 목숨을 구했을지도 모르죠.
의학계가
제멜바이스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가 사망한 뒤였습니다.
세균학의
발달로 박테리아의 존재가 밝혀지자 비로소
의사들은
손씻기 절차를 의무화합니다.
인간은
별 것 아닌 것도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뒤늦게 깨닫곤 합니다.
손만
씻으면 어느 정도 해결될 일인데, 산욕열을 없애는 약을 개발한다고
발버둥치고
있었으니 고정관념이 그만큼 무섭고 어리석습니다.
한
세기 만에 바뀐 ‘목욕’의 지위
19세기
목욕에 대한 터부를 깬 혁신가들이 있었습니다.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런던의 집에 냉수 샤워장을 마련해 매일 샤워했습니다.
그는
샤워가 위생에 좋고 몸에 활력이 생긴다고 전파하고 다녔습니다.
이후
사람들은 입소문을 통해 목욕의 장점을 알게 됐습니다.
20세기
들어 사회개혁가들은 청결이야말로 문명사회를 위한 가치라고 역설했습니다.
사회
기반 시설이 갖춰지면서 사람들은 욕조를 채울
수돗물을
집 안까지 끌어올 수 있게 됐습니다.
1913년
조지 버드나 쇼는 희곡 [피그말리온](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원작)에서
주인공
히긴스 교수가 시골에서 온 처녀 둘리틀을 상류사회 여성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그녀를 욕조 안에 집어넣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이후
그 장면은 비슷한 로맨틱코미디 영화에서 관습적으로 차용되면서
'거품목욕=신분상승'
공식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목욕을 할 수 있는 깨끗한 수돗물은 언제부터 가정에 배달되기 시작한 걸까요?
과거
도시는 지금처럼 1000만명 이상 거주할 인프라를 갖출 수 없었습니다.
200만명
정도가 한계였습니다.그 이상 인구가 몰려든 곳은 배설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콜레라,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창궐했고, 거리는 오물과 쓰레기로 더럽혀졌습니다.
런던,
파리, 뉴욕 같은 대도시가 그랬습니다.
인간이
정착 생활을 하면서 배설물을 처리할 곳을 결정하는 문제는 비바람을 피할 집이나
사람이
모일 광장을 만드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도시가
팽창하기 위해서는 오물을 처리하고
깨끗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상하수도 시스템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상하수도의
발명
엘리스
체스브로는 시카고의 하수처리 감독관 위원회 소속 공학자였습니다.
1856년
그는 배수 처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시카고를 위해
하수
처리 시스템을 연구합니다.
체스브로는
철도 건설에 쓰던 잭으로 도시 자체를 들어올리는 과감한 발상을 합니다.
도시를
들어올려 그 아래에 하수구를 짓고 다시 도시를 내려놓는다니 엄청나지 않나요?
그는
하수처리를 하기 전에 철도를 건설했던 이력이 있기에
이런
대규모 착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시카고
도심 곳곳에서 공사가 시작됩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나날이 계속됩니다.
1860년엔
한 구역의 절반을 통째로 들어올렸는데 5층 건물이 들어선
4000제곱미터의 땅을 6000개의 잭으로 떠받치는 식이었습니다.
1857년
시카고의 브리그스하우스 호텔을 잭으로 들어 올리는 모습
엄청난
공사 끝에 도시 전체에 하수 시설이 완공됐습니다.
이
대형 공사는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문명화란
건물을 위로만 키우는 것뿐만 아니라
지하에도
엄청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수공사로
촉발된 도시의 ‘지하화’ 연구 덕분에 1863년 런던에선 증기기관차가
지하
터널로 운행하기 시작했고, 1900년 파리에선 최초의 지하철이 개통됩니다.
1863년
영국 런던의 최초의 지하 터널. 열차는 존 파울러가 설계한
증기기관차
'파울러의 유령'
1900년
프랑스 파리 오페라광장의 지하철 건설 현장
시카고라는
도시에 하수도가 생겼습니다. 시민들은 고층빌딩의 오염수가
도시의
뒤쪽 시카고 강으로 흘러들어가 도시 자체가 깨끗해진 것에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강이 오염되다보니
식수로
써야 할 물이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체스브로가
배설물과 쓰레기를 흘려보낸 시카고 강은 시카고 시민이
마시는
물의 수원지이기도 했거든요.
물론
처음엔 상수도를 상류에, 하수도를 하류에 설치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방식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시카고는 평평한 땅이라서 폭우가 오면
언제라도
배설물이 식수로 휩쓸려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상수원을
정화시키는 방법을 찾아낸 사람은 뉴저지의 의사 존 릴이었습니다.
존
릴의 아버지는 오염된 식수를 마셔 고통스럽게 죽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수 밖에 없었던 릴은 오염된 물을
정화시키는
방법을 평생에 걸쳐 연구했고 1898년, 마침내 염소가
물을
소독시켜준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염소를
구성하는 성분 중 차아염소산칼슘은 놀라운 살균 처리 효과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코를 찌르는 악취 때문에 사람들은 이 성분에 거부감을 보였고
식수에
섞는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릴은 염소가 깨끗한 물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당시
인구 20만 명이 사는 저지시티의 식수관리자였던 릴은 확신을 증명하기 위해
무모한
실험을 계획합니다. 정부의 허락과 시민의 동의 없이
저지시티
급수장에 염소를 투입한 겁니다.
만약
투입되는 염소의 양을 정확하게 조절하지 못한다면
도시
시민 전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재앙으로 번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테러가 될 수 있었던 이 무식한 실험은 멋지게 성공합니다.
석
달 후 릴은 법정에 섰고 검사와의 공방이 이어졌습니다. 릴은 법정에서
자신의
실험이 공중위생의 혁신을 위해 불가피했다고 주장했고 결국 승소했습니다.
검사
측에서 실제로 테스트를 해봤더니 물에서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릴이
식수에 염소를 탄 덕분에 몇 년 뒤 저지시티에선 장티푸스
같은
수인성 질병이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릴이
이 기술을 특허로 등록하지 않은 덕분에 전국 수도회사와
지자체에서도
염소를 사용해 물을 정화했고 그 결과 1900년부터 1930년 사이
미국
도시에서 총사망률은 43%, 유아사망률은 74% 낮아졌습니다.
청결해진
도시
물이
깨끗해지자 사람들은 수영장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도시
곳곳에 공공 수영장이 생기면서 여성의 패션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여성들은
1920년대 중반 무릎 아래 다리를 드러내더니,
몇
년 뒤엔 목선이 넓게 파인 수영복을 입었고,
1930년대엔
등을 훤히 드러낸 원피스 수영복,
곧이어
1930년대말엔 비키니가 등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불과
100여 년 사이에 청결은 도시인들에게 중요한 가치로 자리잡았습니다.
20세기
초에는 개인을 위한 위생 용품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합니다.
표백제,
비누, 리스테린 등은 가히 폭발적인 매출 성장을 기록합니다.
사람들은
씻고 닦고 뿌리고 발랐습니다. 깨끗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러운
것은 미개한 것으로 취급됐습니다. 그것이 문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문과
방송 광고도 위생 용품으로 도배됐습니다. 'Soap Opera'라는 단어도 이때 생겼습니다.
당시
드라마를 보려면 비누 광고를 봐야 했는데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Soap Opera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비누가 잘 팔렸던 시기입니다.
상수도와
하수도의 발견은 도시의 규모를 키웠습니다.
이젠
1000만명이 넘는 도시라고 해도 위생으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가끔
통제 범위를 벗어난 전염병이 창궐하지만 이내 잠잠해집니다.
기대수명도
늘어났고, 유아가 사망하는 일도 줄어들었습니다.
그
뒤에는 몇몇 혁신가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제멜바이스,
체스브로,
존 스노, 존 릴의 이름은
에디슨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많은 생명을 구한 혁신가들이었습니다.
BY
양유창
(참고자료:
스티븐 존슨 저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
첫댓글 아주 멋지고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인류의 문명은 이렇게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온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