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때는 괜찮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뭐가 괜찮았다는 것일까? 그리고 여기서 "지금"은 언제일까?
고문 수사관 이근안으로 나온 이경영은 폭행으로 상처가 난 김근태 역 박원상의 몸을 살펴보면서, 차갑고 절도 있게 명계남을 비롯한 남영동 수사관들에게 경고한다. 고문폭력과 그로 인한 살해에 대해 문제 제기조차 하지 못했던 박정희 때와는 달리, 전두환 정권 시기에는 고문 폭력의 증거가 드러나 시위를 통한 집단항의 사태가 나는 경우 문책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박정희 때는 그랬다. 물론 전두환 때에도 그런 일이 중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에서 뚜렷이 드러났던 것처럼, 자기 고향 대구-경북 출신의 젊은 지식인들을 사형판결 후 곧장 처형대로 끌고 가도록 명령을 내린 박정희의 통치는 한 시대를 공포로 몰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딸이 대권을 향한 선거운동 전면에 나서는 역사를 목격하고 있다.
누구도 선뜻 말하려 들지 않았던 역사
겨우 한 달간에 걸친 촬영기간에 이만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놀랍기 짝이 없다. 전작 <부러진 화살>도 그랬지만, 이번 <남영동 1985>도 시대의 침묵을 깨고 나선 정지영 감독의 영화적 투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분단의 계곡에서 죽어간 빨치산 <남부군>, 월남전의 비극 <하얀 전쟁>을 비롯해서 그는 누구도 선뜻 말하려 들지 않은 역사의 대목을 서슴없이 짚는다.
칠성판 위에 발가벗겨진 채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는 박원상의 모습은 처절했다. 김종태라는 이름으로 글자 하나를 바꾼 김근태는 박원상을 통해 다시 역사의 현실에 환생했고, 그가 겪은 고통과 죽음의 얼굴은 우리에게 또렷하게 말하는 듯하다. "이 일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망각은 바로 저들이 원하는 바입니다." 그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실로 고통스럽지만, 어디 김근태가 치렀던 것만 하겠는가?
"박정희 대통령 각하와 전두환 대통령 각하에 대들었던 당신 같은 사람들이 여기 와서 다들 생각을 고쳐먹고 나가지요." 남영동을 총괄하는 인물로 나오는 문성근은 박원상에게 타이르듯 말한다. 자신도 경기고등학교 출신의 엘리트라며, 민주화 운동은 북한과 연계된 빨갱이들의 소행이라는 주장을 거듭 강조한다. 이 나라의 민주화는 그런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 영화 <남영동 1985>. ⓒ아우라픽처스
"대통령직을 사퇴"한 박근혜
"오늘로 지난 15년 동안 국민의 애환과 기쁨을 같이 나누어 왔던 대통령직을 사퇴하겠습니다." 박근혜의 국회의원직 사퇴 기자회견의 "실수" 발언이었다. 그러나 실수로 보기에는 예사롭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꽉 박힌 단어가 무엇인지 우리는 여기서 확인하게 된다. 그 15년은 민주정부 10년을 거치고, 5년간의 무식하고 야만적인 권력의 폭행을 견뎌온 시간이었다.
박근혜는 이 시기,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기여하거나 이명박 정권의 폭력과 부패를 저지하는 일에 노력한 바가 없다. 박정희가 공포정치로 이끌었던 시대에 대한 사과도 밀리고 밀려 마지못해 했고, 이후 보인 모습은 언제 그런 말을 했던가 하는 식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측근들은 냉전 이데올로기를 동원해서 경쟁상대에 대한 폭언을 퍼붓기를 일상으로 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바로 그런 냉전사고와 폭언이 도달한 지점이 무고한 이들에 대한 고문이었다. 이제 고문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하지만 경쟁상대를, 안보를 위협하는 자로 몰아세우고 짓밟았던 폭력은 그 형태만 달리했을 뿐이지 언어의 무차별한 폭력으로 둔갑해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들이 권세를 쥐는 세상이 어떻게 되어갈지 보지 않고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과 민주주의, 그리고 고문
목욕탕에서 아들과 함께 물장구 장난을 벌이던 김근태의 모습은, 물고문의 장면과 겹치면서 우리에게 인간의 삶에 기본조건으로 필요한 물을 인간을 말살시키는 도구로 변모시키는 자들의 냉혈적 면모를 직시하게 한다.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있는 대로 짓밟아 비굴하게 만들고 영혼을 팔게 하는 이들은 악마와 다를 바 없다. 민주주의는 결국 악마와의 싸움이었다.
국가보안법은 이 악마들이 활개 치도록 만든 법이었다. 그리고 고문을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게 했고, 그러다가 죽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까지 주었던 법이다. 사형 판결을 받기도 전에 사형이 가능하게 하도록 한 것이 바로 국가보안법이 해온 일이었다. 그것은 국가를 보안한 것이 아니라, 악마의 권력을 지켜온 법이었다. 고문은 이 권력이 애용한 수단이었다.
고문은 폭력으로 자백을 받아내는 방식이 아니다. 정지영 감독은 고문의 정의가 달리 규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고문은 있지도 않은 사실을 조작해내는 수법입니다. 강제로 자백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시대는 한 사회 전체가 바로 이 고문에 시달렸다. 권력이 입을 봉쇄하고, 귀를 막고 눈을 가렸다. 그리고 진실을 왜곡하고 있지도 않은 일들을 조작,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때 박근혜는 이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여성 대통령론을 내세운다면 생명이 당하는 고통에 민감해야 할 텐데, 그녀에게서는 그런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기껏 말하는 것은, "산업화 시대에 본의 아니게 상처받은 사람들"이라는 표현뿐이다. 고문은 본의가 아니었다? 죽은 자들도 있는데 상처 받았다? 김근태는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다가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라는 개념을 통해, 고난에 처한 이들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인간은 그 순간 비인간화된다고 말한다. 고통을 겪는 이들을 외면하는 것은, 악마와 손을 잡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나치스가 학살한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는 그런 시대가 오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본능적으로 굳히게 된다. 마주보지 않으면 그건 견고해지지 못한다.
정지영 감독은 고문 장면을 촬영할 때마다 오케이 사인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아니 이 자들이 이렇게 고문했단 말이야?" 하고 고통스러워했다. 영화이고, 연기라고 여기면 되겠지만 촬영은 실제와 거의 방불했고 과거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감독 자신도 고문의 현실을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그 시대에 책임 있던 자들이 다시는 역사의 무대에 오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렇게 해서 단단해져갔다.
우리가 <남영동 1985>를 봐야 하는 이유
우리는 왜 이 영화를 봐야 하는가? 그리고 이 영화는 어째서 청소년도 볼 수 있는 15금인가?
야만의 시대를 미래의 유산으로 남겨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가슴속에서부터 진실로 반성하고 성찰하지 않는 자들이 권력을 잡는 일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안철수가 본 이 영화를 박근혜는 끝내 외면했다. VIP 시사회 초대에 그녀는 응하지 않았다. 그 까닭을 우리가 모르지 않는다.
<남영동 1985>를 보는 일은 우리가 발언하는 일과 같다. 대선 국면에서 우리의 의사를 확실하게 밝히는 일과 다르지 않다. 집단관람이 줄을 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토론하는 거다. 청소년과 청년 세대가 이 영화를 보고, 자신들이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게 되었는지 알도록 했으면 싶다. 이들이야말로 다시는 역사의 후퇴가 생겨나지 않도록 책임져야 할 미래의 주역들 아닌가.
영화가 기록한 어둠의 시대,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그 어둠을 뚫고 나갈 길을 보여주는 방향타이기도 하다.
그제, 농부 철학자 윤구병, 영화감독 정지영, 서울시 진보 교육감 단일후보 이수호와 함께 화천의 감성마을 이외수와 새벽까지 춤과 노래를 곁들인 이야기꽃을 피웠다. "음(陰)의 시간은 양(陽)을 기르는 시간입니다." 이외수의 이 말이 가슴에 꽂혔다. <남영동 1985>을 관람하는 시간은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미래를 기르는 시간이 될 것이다. 관람하는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는 더더욱 확고해져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