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적 시골의 여름에는 요즘은 별미로 먹는 보리밥이 주식이었다. 당시 가을에 추수한 쌀이 떨어지고 보리가 나기까지 5~6월을 춘궁기 또는 맥령기라고 불렀다. 쌀도 보리도 없는 이 춘궁기에는 허기를 채우기 위하여 구황작물을 데쳐 먹거나 나무껍질을 벗겨 삶아먹기도 하였다. 고대시대부터 이조시대까지 심한 경우에는 진흙을 걸러 가라앉은 입자를 쪄 먹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흙은 심각한 변비를 일으켜 변을 보기 위해 힘을 주면 항문이 찢어지기까지 했다. 우리가 보통 "똥구녕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은 이 경우를 말한다. 작물이 풍족하지 않던 옛날에는 많은 백성들이 기아에 시달렸고 여기에 흙을 걸러 먹다보니 역병까지 생겨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비참한 기아시대를 겪기도 했다.
이 보릿고개 때는 미처 다 여물지 않은 보리를 베어서 말린 후 도리깨로 보리알맹이만 나올 때까지 두들긴다. 이렇게 해서 겉보리를 만든다. 겉보리를 물에 불려 나무 절구통에 넣은 후 손으로 절구를 잡고 껍질을 벗겨 보리쌀이 될 때까지 빻는다. 이 때 한 손으로는 절구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겉보리를 찧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주걱같이 생긴 도구로 겉보리를 골고루 뒤집어 준다. 이렇게 껍질이 벗겨져 보리쌀이 될 때까지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어머니는 힘이 드시는 지 절구질을 할 때마다 "쉿, 쉿" 하는 기압을 넣으셨다. 힘을 모으는 일종의 구령이다. 이렇게 하여 껍질이 다 벗겨지면 소쿠리에 넣고 물로 겨를 걸러낸다. 이게 보리쌀이다.
이 보리쌀을 무쇠 솥에 넣고 적당히 물을 부은 다음 아시로 익힌 후 소쿠리에 담아놓았다가 조석 때가 되면 다시 솥에 넣고 적당히 물을 부은 다음 약간 질척하게 보리밥을 짓는다. 보리밥은 질게 지어야지 꼬슬하게 지으면 설컹대서 먹기가 불편하다. 그리고 적당한 건건이를 만들어 먹는 데 대부분 물에 말아먹거나 비벼서 먹는다. 지금은 별미로 먹는 보리밥에 여러 가지 나물과 반찬이 딸려 나오지만 옛날에는 주로 열무김치와 고추장을 적당히 섞어 비벼서 먹었다. 그것도 큰 양푼에 비벼서 여러 식구가 상에 둘러앉아 숟갈로 퍼먹었다. 먹을 것이 없던 그 옛날에는 그 보리밥마저 꿀맛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이 어렵게 살았지만 식성들은 좋아서 밥그릇은 컸고 그 큰 밥그릇에 또 한 그릇의 밥을 얹어 놓은 듯이 고봉으로 퍼서 먹었다. 현재의 공기 밥 한 그릇은 대부분 200g 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식량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700g 정도나 됐고 고려시대에는 무려 900g까지 먹었다고 한다. 현대인의 세 배 정도가 되게 많은 양을 먹었다. 주식 외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라 생각된다. 보리밥에서는 가난의 냄새가 났다. 배고픈 냄새가 났다. 끈끈한 가족사랑 냄새도 났다. 하지만 보리밥은 소화가 어찌나 잘 되는지 밥을 먹고 돌아서서 방귀 한 번만 뀌면 금방 소화가 다 되어 배가 고팠다. 해방 후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국민들은 배고픔에 시달렸고 그래서 1961년 5.16군사정변 구호 4항에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라는 구절이 들어가기도 했다. 요즘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로 시작되는 유명가수의 노래 '보릿고개'가 유행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야사에 의하면 정순황후가 영조의 눈에 들게 된 계기가 '보릿고개라'는 말을 처음 썼는데 영조가 간택령에 뽑혀 모여진 규수들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고개가 무엇인가?"라고 묻자 규수들이 저마다 높은 고개 이름을 댈 때 정순왕후 김씨만 "보릿고개야 말로 제일 높은 고개인 줄로 아뢰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는 데 연유한다고 한다.
고향집에서 중고등학교가 있는 읍내까지는 우리 집에서 왕복 20km가 넘었다. 아침에는 별을 보고 집을 나서고 저녁에는 별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향학열이 높아 한산이씨 집성촌으로 30여 가구 남짓 모여 사는 동네지만 읍내까지 통학하는 학생들이 20~30명이나 되었다. 우리 집에는 위로 두 형과 나, 그리고 여동생까지 네 명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왕복 오 십리 길을 하루같이 걸어서 통학을 하였다. 당시 고향이 농촌인 학생들이 대부분이어서 점심에 먹을 도시락을 싸오면 넉넉한 집은 흰 쌀이 듬성듬성 섞인 밥을 싸오지만 대부분의 학생은 꽁보리밥을 싸가지고 왔다. 그나마 보리밥도 없어 점심을 굶고 물로 배를 채우며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은 보리밥에 대부분 반찬으로 간장종지에 고추장을 넣어주셨다. 하여 학교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으려고 도시락을 열어보면 꽁보리밥에 고추장이 범벅이 되어 고추장 비빔밥이 되었는데 어찌나 심하게 삭았는지 꼭 파리가 빨아먹은 밥 같았다. 친구들 볼까봐 창피해서 학교에서 점심을 먹지 않고 퇴교 후 셋째 형과 함께 집으로 오는 도중에 미루나무가 서 있는 개울 근처에서 도시락을 허겁지겁 먹었다. 그렇게 고생고생 하며 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에 진학해서 가정교사를 할 때 생전 처음 흰 쌀밥에 맛있는 반찬까지 배불리 먹어 보았다.
지금 우리는 2020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9위이고 국민소득 30000불에 5000만 인구를 가진 소위 3050클럽 7개국 중 하나다. 가난에 쪼들리며 고생하던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어머니가 비벼주시던 보리비빔밥이 한없이 그리워지고 호강 한번 못하시고 보릿고개를 넘기시던 어머니 생각에 이 글을 쓰는 동안 가슴 한 구석이 아리어 옴을 금할 수 없다. 교장선생님의 사모님이면서도 베잠방이에 벼 수건 하나로 뙤약볕을 견디시며 보리이랑을 매시고 보리방아를 찧으시던 어머니께서 살아생전 "이 좋은 세상 3년만 더 살다 갔으면 좋겠다"고 푸념하시던 그 모습이 안개처럼 아른거린다. 지금은 보리밥을 별식이나 건강식으로 먹고 파랗게 물든 보리밭이 관광 상품이라니 그 모두가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전설 같은 얘깃거리가 되고 말았다. (20
21.12.8. 서울자치신문에 게재)시조시인 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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