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이상들을 실현할 수 있는 틀
2-1. 새로운 법
완전해지기 위해 우리는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이상을 갖고 있어야 하고 그것을 지키며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규율’,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지켜야 할 일반적인 규범과 기준이 있다. 그러한 규율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교적 영적 교리와 근간이 되는 폭넓고 보편적인 규범을 몇 장에 걸쳐 성찰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거룩하게 되기 위한 그릇된 방법을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에 이르기 위한 교회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기억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각각의 그리스도인을 개별적으로 소집하시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소집은 부르심이자 ‘소명’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리스도께로부터 이 소명, 곧 당신을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가끔 우리는 그 소명을 성직자나 수도자들의 특권으로 여기곤 한다. 그들이 완전에 이르는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들을 특정한 방법으로 봉헌한다. 그러나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아닌 다른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리스도를 따르며, 자신의 삶이 허락하는 한 그분의 모범을 따라 마침내 성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기도를 많이 하거나 9일 기도를 많이 바치는 것, 성상 앞에 초를 밝히고 기도로 밤을 새우는 것, 또는 금요일에 금육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단순히 미사를 드리거나 특정한 자기 부정의 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맥락에서 볼 때 매우 바람직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런 맥락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이것들은 종교적인 의미가 결여된 텅 빈 제스처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스도께 응답한다는 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고 실행하기 위해 우리의 책임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과 죽음과 부활의 본질이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에 따르셨다(마태 26,42; 루가 2,49; 요한 5,30; 히브 10,5-8 등).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삶은 아버지의 뜻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한다. 그 뜻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에 명확하고 뚜렷하게 나타나 있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선 바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몸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라는 단 하나 위대한 계명에 가장 완전하게 요약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소유하시고자 죽으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지금,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법이 되어야 한다. 이 내적인 법, 순수한 사랑의 법인 ‘새로운 법’은 ‘자녀 됨’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 8,14-15).
성령은 외적인 계명인 옛 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이 옛 법을 내면화시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일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자연스레 우러나는 사랑으로 하도록 만든다. 성령은 우리가 익숙한 법들과 상치되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시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그분은 우리가 규범을 더욱 잘 지킬 수 있게 하시고, 가족, 직장, 각자가 선택한 삶, 사회적 관계, 기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하느님과의 내밀한 대화 등의 의무를 사랑으로써성취하게 하신다.
성령은 교훈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지는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라고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하느님의 섭리로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도 사랑을 다해 그분의 뜻을 실천하라고 가르치신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애정이 깃든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은총이 가득한 그 뜻을 충실한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완전함은 결국 충실함과 사랑의 문제, 특히 무엇보다도 의무에 대한 충실함, 그리고 모든 관계 안에서 표출되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된다. 사랑은 어떤 것을 우선시하는 것이고, 우선권을 둔다는 것은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하느님의 뜻을 우선시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뜻을 보류하고 희생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애정 어린 순종과 거리낌 없는 포기의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자신의 뜻을 꺾으면 꺾을수록 더욱더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가 될 것이다. 또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욱더 일치하게 될 것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진정한 자녀가 될 것이며,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에 더욱더 가까워질 것이다.
2-2.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어떤 체계적이면서도 조직적인 방법이 없을까 하는 것이다. 신비롭고 거룩한 그분의 뜻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는가? 내 희생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흡족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내 의지가 빚어 내는 허상일 뿐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것은 확실히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짧은 생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예를 들어, ‘하느님의 뜻’을 감지할 수 있는 거짓되고 과도하게 단순화시킨 방법을 고안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죄로 물든 나의 의지는 당연히 하느님 뜻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그 상황을 고치기 위해서 나는 항상 나 자신의 자발적인 욕구나 개인적인 관심사와는 반대되는 것을 행하여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항상 악에 더 이끌리게 되어 있어, 자연적인 욕구는 무엇이나 다 죄스러운 것이라는 이런 추론은 일종의 마니교도적인 가정이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지 않다. 즐거움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자발적인 욕구가 모두 이기적인 것은 아니다. 원죄의 교리는 인간의 본성이 완전히 부패하였고 인간의 자유 의지는 항상 죄로 이끌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악마도 그렇다고 해서 천사도 아니다. 사람은 순수한 존재는 못 되지만 육과 영을 모두 가진 존재이다. 인간은 실수와 악의에 찬 감정의 지배를 받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진리와 선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사람은 확실히 죄인이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사랑과 은총에 반응한다. 또한 선과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도 응답할 줄 안다.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그리스도교적 방식은 추상적인 논리의 추론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 있는 몸의 한 일원이고, 그가 하느님의 뜻을 인식하는 정도는 그가 같은 몸을 구성하는 다른 일원들과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위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살아 계시며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뜻도 서로를 통해 신비롭게 전해진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완성한다. 하느님의 뜻은 이러한 상호 의존성에서 찾을 수 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몸은 한 지체로 된 것이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해서 발이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해서 귀가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온 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또 온 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진 여러 지체를 우리의 몸에 두셨습니다. 모든 지체가 다 같은 것이라면 어떻게 몸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는 것입니다.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1고린 12,12-21).
그리스도교적 ‘방법’이란 전례의 준수, 고행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과 그의 형제간의 객관적인 관계가 요구하는 자발적인 사랑이라는 가치의 문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형제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또 가시적(可視的)으로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그러나 잠재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그 몸의 일원이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에 의해 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보다도 사랑의 계명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명시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강조하신 말씀은 누구든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는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 주실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1-17).
이것이 주님께서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수덕(修德) ‘방법’이다. 모든 사람은 다론 이들의 벗이 되어 줌으로써 그리고 자신의 원수마저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진정한 벗이 된다(마태 5,43-48 참조). 불의와 폭력 앞에서도 희생과 인내와 온유함의 정신으로 처신할 수 있으려면,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에게 좀더 관대하고 친절해야 하며, 서로를 향해 모욕하거나 악의 섞인 말을 해서는 안 된다(마태 5,21-26 참조).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적 ‘방법’은 거룩하고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뜻을 그리스도 신비체의 실질적인 구성원과 잠재적인 구성원들 간의 상호 관계 안에서 찾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서로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서로 협력하기를 바라신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추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 삶 안에서 우리가 구원의 도구가 되어 주어야 할 사람들을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만나게 해 준다. 그리고 성령 또한 우리가 준 사람에게서 받고, 받은 사람에게 주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삶은 성령의 활동에 의한 초자연적인 사랑으로 하나가 된 그리스도 신비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보다도 각각의 개인이 가장 자유롭게 ‘일치의 끈’이신 사랑의 성령과 협력하는 것이다.
이 일치는 살아 있으며 유기적이다. 교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단순한 외적인 일체감을 부여하는 조직 이상의 것이다. 교회는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각자의 존재 깊숙이 살아 활동하는 생명에 의해 구성원들을 일치시킨다. 이 생명이 그리스도교적 사랑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신비체의 구성원들 안에서 끝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은 각자가 능력에 따라 자신의 역할과 신분에 맞게 자신의 모든 형제들, 특히 사랑의 질서상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구원과 봉사에 투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 부모, 자녀, 친척과 친구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결국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뻗어 가야 한다.
이제 우리의 희생을 평가하고 진단할 수 있는 규범이 되는 것은 사랑의 질서라는 분명한 가치다.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보다 보편적인 상위의 선을 위해 우리가 개인적인 이익을 포기한다면 하느님 보시기에 만족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희생이 다른 이들의 행복과 교회의 선(善)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희생의 가치는 우리가 감당한 고통의 크기가 아니라 분열의 벽을 깨는 힘, 상처를 치유하는 정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질서와 일치를 복원하는 힘으로 가늠할 수 있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만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모두 찍혀 불에 던져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행위를 보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12-21).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누가 너를 고소하여 그와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서 얼른 화해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형리에게 내주어 감옥에 가둘 것이다. 분명히 말해 둔다. 네가 마지막 한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풀려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3-26).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이제 제물 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 초하루와 안식일과 축제의 마감날에 모여서 하는 헛된 짓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너희가 지키는 초하루 행사와 축제들이 나는 정말로 싫다. 귀찮다, 이제는 참지 못하겠구나.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 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오라, 와서 나와 시비를 가리자.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3-18).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기본적인 원칙은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한 우리의 필요와 그들을 섬겨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자각하는 데 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이 기본적인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때에 비로소 명백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몸을 이루는 구성원이자 우리와 동일한 인생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구성원들에 대해 중대한 의무가 있고, 또한 그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히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2-3. 사랑과 순종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에서 사랑의 우선권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짊어져야 할 다른 의무들에 대한 열쇠를 제공한다. 교회는 외적인 법과 규범들을 갖고 있어야 한다. 또한 조직적인 규범과 예식과 교도권을 반드시 이용해야 한다. 교회 안에는 교계 제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것의 존재 이유인 사랑 가운데 일치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게 된다면, 우리는 교회와 교회가 추구하는 삶에 대해 매우 왜곡된 개념을 갖게 될 것이다.
교회의 법과 조직이 사랑의 내적인 삶을 보존하기 위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법은 무용지물이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피상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 법을 피상적으로 준수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진지하고도 겸손되이 헌신적인 애덕(charity) 안에서 일치하지 않더라도 만족할 것이다. 이런 이들은 피상적인 법과 조직에 몰두한 나머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애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조차 잊게 된다. 그것은 결국 순수한 성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데, 거룩함이야말로 충만한 삶, 넘치는 사랑 그리고 우리 안에 숨어 계신 성령의 발산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적 사랑은 분명히 그리스도적 순종을 요구한다.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더 완전한 고차원적 의지들의 결합은 순종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초적인 의지들의 결합 없이는 불가능하다. 순종을 배제한 채 사랑만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순종이 마치 같은 것인 양, 사랑의 실천을 순종으로만 생각하는 것 역시 잘못된 것이다. 사랑은 순종보다 더 깊은 그 어떤 것이지만, 순종으로 내면의 영적 깊이를 열어 놓지 않는 이상 사랑은 피상적이고 감상적이며 감정적인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순종은 사랑이 극단적인 형식주의가 갖는 격식들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는 힘을 준다. 순종이 없으면 우리의 애덕은 주관적이고 불확실한 것이 될 것이다. 사랑의 힘이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하여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규범이 필요하다. 순종은 우리에게 이러한 객관적인 기준들을 제시해 준다.
일상의 삶에서 잊혀지고 있는 단순하고 기초적인 이 같은 원칙들을 기억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거룩함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이상으로 보이는 것은 이러한 참다운 전망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적 거룩함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랑을 잃어버리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길이 멀고 내밀한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앞에 있는 것임을 망각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러한 삶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에서 제시하신 단순함과 일체성을 잃어버리게 되어 연관성 없는 개념들, 교리, 수덕의 원칙들, 도덕적 사례들, 심지어 법률적이고 전례상의 기술적인 문제들이 얽히고 설킨 미로가 되어 버릴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를 서로 일치시키며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애덕과의 연결이 약해지는 만큼 이해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우리는 정리도 안 되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영성 생활의 복잡함과 난해함에 당황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적 거룩함을 무슨 섬세한 수행 원칙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 전문가만이 그것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다고 믿어 버리게 된다.
분명 신학적인 지식과 수덕 생활의 경험은 그리스도적 사랑의 삶에 도움이 된다. 또한 법과 전례적인 규범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알기 위해 충분히 공부하는 것 역시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12세기 시토 수도회 작가였던 페르세느의 아담이 말하듯 “법은 단지 우리를 구속하고 의무를 지우는 사랑(Lex est amor qui ligat et obligan)일 뿐”이라는 사실에 귀착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스도적 삶 안에서 사랑의 중요성을 잊음으로써 생기는 혼란과 오해는 우리에게 환멸감을 안겨 주어 거룩해지기는커녕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우리의 이상은 자칫하면 쉽게 패할 수도 있는 격렬한 시험을 당하게 된다. 이 시험은 ‘더 많은 노력’이나 ‘의지력’으로 해쳐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지성적이며 영적인 빛이야말로 성화의 소명과 심지어는 그 사람의 신앙 자체를 구원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진리가 없는 ‘의지력’은 효과적이지 못하고 진리가 없는 사랑은 감상에 불과하다.
2-4. 성숙한 그리스도인
너무 왜곡된 나머지 현실적으로 거짓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교회와 하느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에 대한 견해들을 억지로 받아들이려다 신앙마저 잃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교회에 대한 이 같은 비현실적인 견해를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정신에 관한 불완전하고 부족한 개념은 우리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신앙을 더 빨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잃게 만든다. 그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억지나 자책, 이류(二流)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을 맞추는 잘못된 노력이 아니라, 진정한 주제를 명백하게 가려내고 진실한 견해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우리의 이상은 가장 철저한 시험을 거쳐야 한다. 우리는 이 시험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거룩함과 (유치함이 빚어 내는 허상을 두려움 없이 벗어 던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함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시정하고 새롭게 해야 할 뿐 아니라, 일생 동안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과 부대끼며 맞서 나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확실한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소위 말하는 그리스도교적 사회 속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까지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폐단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사회’라는 개념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부유하고 안전한 현대 유럽과 미국 사회는 확실히 순수한 그리스도교적 사회라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전통의 흔적에 매달려, 자신들이 아직 그리스도교적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19세기와 20세기의 실용주의와 세속주의 정신은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정신의 깊은 곳까지 침투하였다. 한편, 프랑스 혁명과 그 영향에 격렬하게 대항하던 19세기의 교회가 얻은 것은 경직된 사고와 새로운 발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의 삶 안에 많은 갈등과 명백한 모순을 배태(胚胎)하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교회는 그 역사상 가장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모든 측면에서 폐단과 양심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조만간 다른 사람에게서든 자신에게서든 그리스도인들의 단점들과 맞부딪치게 되는 것은 정상적이며 필연적이다. 교회의 삶과 활동은 언제 어디서나 이상적인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교회에서 신앙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부정직하고 신실치 못한 자세이다. 역사가 그 반대의 사실을 증명한다. 불행하게도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하느님과 진리의 이름을 내건 채, 은밀한 방법으로 편견과 타성과 정신적 마비 상태에 머물러 있다. 거룩함 대신 심각한 도덕적 무질서와 불의가 기세를 떨치고 있다. 분명 교회가 스스로 오류를 가르치거나 불의를 조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이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용하여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많은 오류와 부정직과 불의의 요소를 양산한다. 또한 교회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무시해 버리는 습성에 빠져 영적인 영역에서든 사회적 영역에서든 그 안에서 정의와 진리를 수호해야 할 자신들의 마땅한 의무를 저버리고 있다.
진리와 하느님 교회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진지하고 겸손한 관심을 갖고 이러한 문제들과 대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오류를 시정하는 일에 협조하는 법을 배워야 하되, 경솔하고 반항적인 열성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 교만함은 절대 은총의 징표가 될 수 없다. 11세기 성 베드로 다미아노는 교회 안에 만연된 악습에 격분한 수도자들에게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먼저 하느님 앞에서 거룩해야 하고, 약점을 지닌 형제들 앞에서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 성인은 전체 그리스도인들에게 임의적이며 일반적으로 가해지는 엄중한 처벌에 반대하였고 무력을 이용한 종교 개혁이 성공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정신은 사랑과 겸손과 봉사의 정신이지 전제주의와 권력을 방어하기 위한 폭력의 정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단체 심지어 교회 내에도 악습은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우리는 정직함과 겸손과 사랑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것을 숨기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들 각자는 한 개인으로서 이해하기 힘든 광대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것을 자신들의 내적인 삶을 위한 좋은 목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순종의 정신, 교회에 대한 초자연적인 사랑을 순수하게 단련시킬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여 이용할 수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문제를 직접 바라볼 능력조차 없다. 그들은 그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자기 가슴을 쥐어뜯는 번민을 피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 번민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를 수 있으나, 번민은 계속된다. 한편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이 보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심각한 수치가 된다. 그들은 그 상황에 대항하고, 교회를 저주하며, 심지어 거기서 빠져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그리스도적 소명의 참된 의미에 가까이 다가섰으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요구되는 희생을 치러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그 희생이란 곧 자신과 다른 이들, 그리고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불완전함과 부족함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불완전함에 관한 진실과 마주하여 교회가 단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해주기 위해, 평화롭고 안전한 안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우리를 피동적으로 성화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반대로 이제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 공동체에 자신을 내주어야 하며 교회 안의 모든 고통에 적극적으로 관대하게 동참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 눈에 무가치하게 보이는 이들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 이 점을 기억하십시오. 각각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내야지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충분히 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것을 넉넉하게 가질 수 있고 온갖 좋은 일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2고린 9,6-8).
이웃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특히 상황이 절망스럽고 불만족스러우며 자신의 희생이 대부분 쓸모 없는 일이 되어 버릴 때, 이런 때일수록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그분은 우리의 희생을 보고 계시며, 그것이 사람의 눈엔 아무 쓸모 없이 보이고 절망스러울지라도 결실을 맺게 하실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은총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의 두 눈이 열려 실제적이고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선을 다른 사람들 안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며, 이 같은 우리의 소명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게 될 것이다.
2-5. 영적 삶에서의 현실주의
존 타울러는 한 설교 중에, 하느님이 우리의 영혼을 찾으시는 것은 복음의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여인이 잃어버린 은화를 찾기 위해 온 집 안을 뒤집어엎는 것과 같다고 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을 이렇듯 ‘뒤집어 놓는 것’은 성장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영적인 완전함에 대한 환상을 품은 채 편안히 안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것을 수동적인 정화를 뜻하는 ‘어두운 밤’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일에 대해 갖고 있던 인간적인 관점들을 버리게 되고 사막으로 인도되어 그곳에서 빵만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양식으로 자라나게 된다. 현대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적 거룩함이 완전한 성숙에 이르기 위해 수동적이며 신비적인 정화가 필요한 것인가 하는 문제로 오랫동안 공방을 벌였다. 여기서 양측의 공방내용을 굳이 거론할 필요는 없다. 단지 진정한 거룩함이란 우리 삶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전히 표출하는 것이고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익숙하고 정상적이라 여겨지는 것들의 죽음이며, 새로운 차원을 살아가기 위하여 매일 일상의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이 새로운 차원의 삶이 우리가 매일 경험하고 있는 본래의 자아를 되찾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부활하는 것은 내가 잘 알고 있는 나 자신이다. ‘새로운 인간’으로 완전히 변화되기는 했지만, 나는 여전히 같은 사람이다. 나는 영적으로 변했고 하늘의 아버지는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다(divinized).”라고 인정해 주실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만족하지 못하거나 역겨운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도망치게 만드는 ‘이상들’을 간직하는 것이 쓸데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완전해지려면 도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 삶에 대해 온전히 책임지며, 그 모든 장애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정화와 변화의 손길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함으로써만이 성인이 될 수 있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선한 의도를 지니고 있지만 잘못 인도되고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절망과 파멸에 이르는 것을 봐야 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런 젊은이들은 일단 종교적 헌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본다. 그들이야말로 어떤 면에서는, 완전함을 제일 갈구하는 이들처럼 보인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씌운 철창을 부수려는 진지함과 열성은 그들을 도우려는 사람들의 연민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가끔 영적 지도자들은 이 불쌍한 수난자들이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는 대신 모든 문제의 원천이 되고 있는 거짓 이상을 고무시키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간혹 겸손으로 오인되기도 하는 자신에 대한 병적인 증오심은 유익하지 않다. 육신과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마니교도적 미움으로 얼룩진 영적인 이상은 희망이 없다. 유치한 자아 사랑을 개량한 천사주의 역시 우리를 영적인 자유나 거룩함으로 이끌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격정을 다스리기 위하여 투쟁해야만 하고 깊은 겸손과 극기 안에서 우리의 영을 고요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터무니없는 욕구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수련을 위해 자신의 정당한 욕구마저 희생해야 한다.
타협 없이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세상을 끊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희생과 기도 그리고 세속에 대한 거부를 포함한 완전함에 이르는 길을 묵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는 실제로 단식하고 기도하며 자신을 부인하고 내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완전함이 실질적인 작업에 의해서, 다시 말해 순명에 의해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들과 규칙들을 준수하는 것 그 자체로 우리의 삶 전체를 그리스도 안에서 능히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하느님을 위해 단순히 외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진정한 완전함을 이루는 데 필요한 내적인 사랑이 결핍되어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랑은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을 알려 하고 기도 안에서 그분과 대화하며 관상 속에서 자신을 그분께 봉헌하기 위하여 애쓰는 것이기도 하다.
제3부 길이신 그리스도
3-1. 구성원을 성화시키는 교회
완전함이란 주님과 일치하는 데 합당하게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밖에서 구해야 할 어떤 도덕적 장식품이 아니다. 완전함은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손수 완수하시는 작업이다. 완전함은 성령의 은총으로 완성되는 온전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그분을 위해서 좀더 완전하게 사는 길을 볼 수 있는 그분 가르침과 교회의 성사와 교훈들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다. 완전함으로 특별히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서약과 함께 종교적인 신분이 주어진다. 교회의 가르침 아래 우리는 성령이 주시는 영감에 따르려고 부단히 애를 쓴다. 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영(Spirit of Christ)의 인도를 받고 외적으로는 가시적인 교계 제도, 법, 가르침, 성사와 전례의 보호를 받으며, 우리는 ‘하나의 그리스도(One Christ)’로 성장해 간다.
우리는 교회를 단순히 어떤 기관이나 단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가르침과 통치와 예배 방식 안에서 확실히 가시적이며 명백하게 인식 가능한 실체다. 이러한 외적인 특징들을 통해 우리는 내적으로 교회의 혼이 지니는 빛을 볼 수 있다. 교회의 영혼은 인간적일 뿐 아니라 신적인 것이다. 그것은 성령 그 자체다. 교회는 그리스도처럼, 인간적인 동시에 신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고 활동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이 불완전함은 그분의 완전함과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일치되어 있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과 살아 있는 유대를 맺고 있는 한, 우리는 그분의 힘으로 지탱되고 그분의 거룩함으로 정화된다. 전능하신 구세주께서는 교회의 구성원들을 통해 구성원인 우리 자신을 확실하게 성화시키고 인도하시며, 우리를 이용하시어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참다운 본질은 하나의 몸 안에서 모든 구성원들이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며’ 서로에 대해 거룩한 섭리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성인들의 통공에 전적으로 동참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누구보다 거룩한 이들이다. 그들의 기쁨은 생명의 강이라는 순순한 흐름을 맛보는 것으로 그 강물이야말로 하느님 도시 전체를 기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의 완전함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통해서 그분과의 교류를 심화시킴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 가는 문제이고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삶에 얼마나 능동적으로 깊이 참여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들과 더욱 가까운 유대를 맺어야 함을 의미하며, 살아 있고 성장하고 있는 신비체라는 영적인 조직 안에서 그들과 더욱더 충실한 일치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영적인 완전함이 ‘사회적 순응’의 문제라는 말은 아니다. 종교라는 효율적인 기계 안에서 잘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된다고 해도 우리가 자신의 영혼이라는 지성소에서 내적으로 하느님을 추구하지 않는 이상 결코 성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교도권에 의해 축복받은 전통적인 규범의 규제를 받는 수도자의 평범한 일상은 확실히 가장 값진 성화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수도자의 신분을 드러내는 근본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역시 하나의 틀에 불과하다. 그 규범들은 목적을 갖고 있고 목적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 건물을 짓느라고 설치한 임시 장치를 실제 건물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실질적인 건물이라고 하면 사랑과 희생, 그리고 자기 초월로 가득한 마음들 간의 일치인 것이다. 이 건물의 건실함은 성령이 우리 각자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정도에 달려 있는 것이지, 체계에 의해 정돈되고 규제되는 외적인 행위들에 따라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인 삶은 필수적으로 특정 질서를 요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의 형제를 사랑하는 이들은 그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것이다. 그러나 질서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으며 단순히 질서정연하다고 해서 그것을 거룩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영적인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건물 자체에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임시 장치를 영구적으로 더욱 단단하고 안전하게 세우는 데에만 너무 많은 노력을 쏟아 붓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고독하고 내면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지녀야 할 진정한 책임에 대해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과 대화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쩌면 어느 누구에게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지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이 옳은지 또는 그른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이 내면적인 영역에서 진보나 완전함을 증명할 만한 것을 찾기는 쉽지 않다. 반면 외적인 영역에서의 발전은 쉽게 측정될 수 있고 결과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다른 이들에게 보여져 인정과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하고 진실되며 지속적인 작업은 자신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조차 알아볼 수 없다. 오직 하느님만이 아신다. 이 작업은 명백하고 일반적인 기준에 대한 충실함이라기보다는 믿음에 대한 충실함이다. 그분이 세우신 권위에 순종하는 것뿐만 아니라 존재의 심연에서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끌어안음으로써 우리 자신을 하느님이 전적으로 지배하도록 수락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내적이고 고통스러우며 극단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는 작업이다. 우리가 전례 때마다 교회와 함께 자랑스럽게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각자 내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내놓았을 경우에 한해서만 진실하고 타당한 것으로, 그 뜻은 외적으로는 교회와 그것의 위계로 나타나고 내적으로는 은총이 주는 영감에 의해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란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투항하는 것이고 우리의 모든 희망을 그분과 그분의 교회에 거는 것이며,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으로부터 모든 힘과 거룩함을 기대하는 것이다.
3-2. 우리의 거룩함이 되시는 그리스도
지금까지 한 이야기들로, 그리스도교적 거룩함이 단순히 도덕적인 완전함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졌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덕을 포함하고 있지만 덕들을 모두 합친 것 이상이다. 거룩함은 선행이나 도덕적인 영웅심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존재론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거룩한 삶에 대한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의미에 관해 교리적으로 명확하게 밝힌 다음, 그 결론으로 윤리적 가르침을 주고 있다. 사도 요한 역시, 우리 삶의 영적인 열매들은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또한 그분의 신비체에 통합됨으로써 나오는 결실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포도나무의 가지가 그 몸에 붙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요한 15,1-11 참조). 그렇다고 이 사실이 덕행과 선행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새로운 존재에 견주어 본다면 이것은 이차적인 것일 뿐이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행동은 그것을 행하는 존재를 그대로 반영한다(Actio sequitur esse).’ 라고 하였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수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내적으로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 다음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령에 따라 살 수 있게 되는데, 성령은 새로운 생명의 영이자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우리의 존재론적인 거룩함은 바로 성령과의 살아 있는 일치를 말한다. 성령께 순종하려는 노력만이 우리를 윤리적 선(善)으로 이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저런 규칙, 일련의 윤리적인 실천 사항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 태어나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는 것”(갈라 6,15 참조)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하여 드러나는 믿음”(갈라 5,6)으로 그리스도와 일치할 때 비로소 모든 덕행과 사랑의 원천이 되는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인의 삶은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 덕행을 실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케 된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기인하는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새로운 존재를 덕행의 실천을 통해 표현하는 삶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모든 열성을 다해 그분이 당신의 덕과 당신의 거룩함을 우리의 삶 속에서 표출하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노력은 이기심과 불순종이라는 장애물과 그분의 사랑에 어긋나는 모든 집착을 없애 버리는 쪽으로 집중되어야만 한다. 교회가 대영굉송 가운데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이라고 노래할 때, 거룩한 모든 것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만 거룩한 것이라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거룩함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세상에 전달되고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먼저 거룩해지셔야 한다. 우리가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분이 우리의 거룩함이 되셔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1고린 1,24.30)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반드시 우리의 동의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을 요구한다.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그분 스스로 하고자 원하시어 그분께서 보내시는 빛 가운데서가 아니면, 어느 누구의 눈으로도 볼 수 없고 어떠한 머리로도 관상할 수 없는, 모든 시대를 지배하시고,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는, 불멸의 왕이신 아버지의 감추어진 거룩함의 계시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은 자신의 영광을 구할 수 있는 윤리적인 모험이나 성취가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로서 그의 아들을 통해 성령의 힘으로, 우리의 영혼을 숨어 있는 거룩한 신비의 심연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신비적인 삶에 깊이 헌신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대단히 신비적인 종교인 까닭이다. 그렇다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현대의 기술 사회가 바라는 ‘신비가’는 아니며 신비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과 통교를 이루고 하느님을 계시하는 신비의 차원 안에서 살고 있으며, 신비의 차원을 살아야만 한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목표인 동시에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의 목표이기도 한 구원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1베드 2,9)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삶과 희망을 그리스도의 신비에 두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된다(divinae consortes naturae)”(2베드 1,4 참조).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사랑의 힘과 하느님 빛의 에너지는 우리의 삶 속에 침투하여 성령의 작용하심으로 우리 삶의 ‘밝기’를 한 단계 더 높여 준다. 그리스도인의 성덕의 뿌리와 근본은 여기에 있다. 이 빛, 우리 삶의 이 에너지를 보통 은총이라고 부른다.
은총과 사랑이 성령에 의해 한 몸으로 부름받은 형제적 유대 안에서 빛나면 빛날수록 그리스도께서 세심에 더 많이 드러나시게 될 것이고 아버지께서 그만큼 더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들이 “회복됨”(에페 1,10 참조)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그만큼 더 최종적인 완성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3-3. 은총과 성사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영혼들 안에 생생하게 현존하심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분의 모상(likeness)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상이야말로 하느님의 눈에 ‘의(義)가 되는 것’이고 참사랑과 다른 모든 덕의 뿌리요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다. 그것은 거룩한 유산으로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은 결코 소진되지 않는 보물이며 ‘영원히 솟아나는’ 살아 있는 샘물이다. 사도 베드로의 첫째 편지 서두는 하느님 자비로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생명의 은총에 대한 기쁨에 찬 찬가로 시작하고 있다. 이 은총은 우리가 죄 중에 죽어 있었을 때에 주어진 것으로 하느님 사량에 충실하기만 하다면, 그리스도를 부활케 하신 바로 그 힘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켜 구원으로 이끌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합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다시 낳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하여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도 않는 분깃을 하늘에 마련해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힘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넘쳐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결국 영혼을 구원하였기 때문입니다”(1베드 1,3-9).
그리스도교가 신비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곧 성사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성사는 ‘신비’로서,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활동하시고, 우리의 영혼이 그분과 함께 그분의 거룩한 사랑의 자극 아래 활동한다. 우리는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영적으로 자유롭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징이 성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시적이며 외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성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도록 ‘만드는’ 무엇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작용하여 은총을 받을 수 있게 한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무상으로 주신다는 표징이다. 그 표징은 우리에게는 필요하지만 그분께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슴과 영혼이 그분의 활동에 반응하게 만든다. 그분의 은총은 아무런 외적인 표징 없이도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으나 그럴 경우 우리들 대부분은 그 선물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고, 효과적으로 반응하지 못하며, 또 마음을 다해 응답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러한 성스러운 표징들이 우리에 대한 은총의 근거로는 필요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야 할 근거로 내세울 수는 없다. 참으로 대비되지 않는가!
만약 하느님께서 당신의 형용할 수 없는 빛을 우리에게 전하시고 당신 생명을 우리와 공유하고자 하신다면, 당신이 직접 이 전달과 공유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을 결정하실 것이다. 그분은 인간에게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부터 하신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받아들인다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다면, 우리는 세례반(盤)으로 나아간 것이고 우리를 씻어 주시는 보속의 강물에 다다른 것이다. 우리는 축성된 성체로부터 자양분을 얻으며 성체를 통해 주님의 몸을 참된 영적 양식으로 먹는다. 성체는 영원한 구원의 보증이며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영적 혼인을 보증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신앙뿐만 아니라 성사적 일치를 통해서도 ‘그분께 나오기를’ 바라신다. 모든 성사들, 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분명히 그분 신비 안에서 하나 됨을 뜻하고 상징할 뿐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실제로 실현시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56-57).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행위는 성찬 전례의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것으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게 되며, 영과 진리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과 신앙의 성사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교회의 성사와 예배를 통해 구현되며 충족된다. 그러나 그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세례를 통해 우리의 영혼은 죄를 씻고 이기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며 부패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살아 계신 하느님 자녀로서 찬미를 드릴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신비, 곧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신비의 길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성사의 신비가 마술 같은 것이라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한다. 만약 성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응답 여부에 상관없이 무조건 은총을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틀림없는 마술이다. 성사를 받는 사람들이 열렬한 헌신이라는 주관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사는 그 성사가 표시하는 효과를 낸다(ex opere operanto). 다시 말해, 성사는 어떤 상황에서건 객관적으로 효력을 나타내지만, 성사가 표시하는 은총은 적절치 못한 사람에게는 전달되지 못한다. 성사는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 예비 신자가 물로 세례를 받게 되면 그는 내적으로 깨끗해지고 성령에 의해 변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선택과 헌신이 전제되어 있으며 의무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교적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전제로 한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자신을 영원히 그리스도께 바치지 않는 이상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은 죄를 거부하고 사랑의 삶에 헌신함을 의미한다. 성사적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는 새 존재의 존엄성에 걸맞게 사는 것을 의미하며, 하느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요한 1,12-13).
“하느님은 빛이시고 하느님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하느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쫓아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서 살고 있으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줍니다. 나는 믿음의 자녀인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혹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1요한 1,5-7; 2,1-2).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때에 비로소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집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자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은 진실로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가 하느님 안에서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1요한 2,3-6).
3-4.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성령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은 추상적인 법규를 충실히 지키는 것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죄의 암흑에서 이끌어 내주신 살아 계신 하느님, 거룩한 인간,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근간으로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윤리적 삶은 율법주의가 되어서도 안 되고 단순히 의무에 대한 충실함의 여부로 판단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감사와 사랑과 찬미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성찬 전례의 감사 윤리(eucharistic morality)로서, 그리스도에게서 받게 된 우리의 새 생명에 대한 공동의 감사와 올바른 평가를 바탕으로 하는 사랑의 법전이다. 이러한 감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 함께 불러모으신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내포한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매 순간우리 모두 안에서 활동하시며 풍성케 해주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이라는 것을 영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그리스도교 윤리는 사랑과 찬미에 중점을 두고, 부활한 주님이시자 구원자이신 그분께서 우리의 삶과 공동체 안에서 영광받으시는 것을 보고자 하는 갈망에 그 핵심을 두는 윤리이다.
우리는 우리의 덕행과 선행이 비인격적인 규칙을 냉정히 지킴으로써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 모든 것은 거룩한 사랑으로 가득 찬 성심의 요구에 대해서 각자가 대답하는 사랑의 응답이다. 부활하신 구세주의 성심은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 안으로 은총과 사랑의 미소한 자극을 전달해 주시는데, 이를 통해 그분은 당신의 신적인 생명을 우리와 나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반응이란 우리에 대한 주님의 인격적인 사랑의 따스하고 섬세한 자극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의 시선을 우리 자신에게서 그분께로 옮겨 갈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더욱 깊고 생생한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우리 마음에 더욱 풍부하고 역동적인 신앙을 일깨워 준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표현할 길 없는 감사의 정으로 채우고 하느님 자녀가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극명하게 인식시켜 준다. 이는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당신의 사랑과 일치하기를 바라시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죄에서 구원받은 것에 감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도 바오로가 확인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감사가 밑바탕이 되는 사랑이라는 ‘성찬 전례적’인 윤리는 도저히 피할 수 없던 갈등에서 해방되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더욱 성장한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율법의 지배를 받을 때는, 거룩하게 된다는 것과 율법의 엄격한 요구를 채운다는 것이 우리의 능력 밖의 일임을 깨달을 뿐이었다고 말한다(로마 7,13-25 참조). 그러나 지금은 사랑이신 구세주의 은총으로 그 율법을 지키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완전한 사랑 안에서 그 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마음속의 죄를 죽이시고, 우리 가운데 사랑을 낳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율법의 요구를 지킬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우리는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법들을 충실히 지키려고 마음을 쓰는 대신, 선한 것에 대한 사랑을 깨우쳐 주고 ‘모든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성령의 현존과 사랑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완덕의 길은 모든 면에서 사랑과 감사와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길이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일에서든 우리 자신의 힘이나 빛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당신 몸인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빛과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께 의지해야 한다. 언제나 우리 마음과 교회 안에 머무시는 성령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주님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데, 그것은 얼마만큼 사랑으로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의 몸이신 교회의 지체로서 얼마만큼 생기 있고 활발한 일원으로 사는가에 비례한다.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서 특별히 계시되는 그분의 뜻에 지속적으로 사심 없이 충실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비록 죽음의 어두운 길을 걷고 있을지라도 오직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이 생명이시며 진리시라는 것을 알며 그분이 이끄시는 곳이라면 아무런 잘못도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신뢰하는 데에 윤리 생활의 모든 것이 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받는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룩하셨습니다”(로마 8,1-3).
3-5. 육(肉)과 영(靈)
사도 바오로가 우리에게 권고하는 것은 ‘육(flesh)’ 이 아닌 ‘영(spirit)’을 따라 ‘걸으라’(여기서는 살라는 뜻)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육이란 육체적인 삶이 아니라(성령께서는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성화시키셨으므로) 세속적인 삶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육’에는 욕정이나 방탕함뿐 아니라, 세속적인 기준에 맞추어 사는 것, 인간적인 관점이나 사회적 통념을 근간으로 하는 활동들까지도 포함된다.
우리가 편견, 자기 만족, 편협함, 집단적인 오만함, 미신 숭배, 야망 또는 탐욕의 논리를 따른다면 우리는 ‘육’을 숭배하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함이 진실한 마음에서가 아닌 위선적인 가식에서 비롯된다면 그것은 ‘육’적인 것이다. ‘육적인 편향’은 그것이 비록 사람들의 찬사를 불러일으킬 만큼 용기 있고 매혹적인 행위일지라도 하느님의 눈에는 이미 죽은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인간들을 향한 것이다. 그것은 그분의 영광을 쫓지 않고 우리 자신의 만족을 구한다. 반면 ‘영’은 우리를 생명과 평화의 길로 이끈다.
‘영’의 법은 겸손과 사랑의 법이다. 영의 목소리는 육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영혼의 깊은 지성소로부터 우리에게 들려 오는 것이다. ‘육’은 우리의 외적인 자아이며 거짓 자아이다. ‘영’은 우리의 참 자아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하고 있는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inmost being)이다. 우리 존재 안의 이 감추어진 지성소에서 울려 나오는 양심의 목소리는 우리 자신의 내적 목소리인 동시에 성령의 목소리가 된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존재’가 되면 더 이상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고,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며 다스리신다. 그리스도교적 덕은 이러한 내적인 일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우리의 자아는 영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우리의 생각은 그리스도의 생각과 같아지며 우리의 바람은 그분의 바람과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과 온전히 하나가 된 삶이 되고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부터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삶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의 삶이고, 완전한 영적 진지함이며, 이로 말미암아 영웅적인 겸손함을 함축하는 삶이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진리 역시 먼저 우리 자신에게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무가치하고 하찮은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아야 하고, 자기 자신의 덧없음을 사랑하고 인정할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삶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받아들여 당신 자신의 형상과 모상으로(in his own image and likeness) 변화시키고 성화시키고자 하시는 바로 그 실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 안에 현존하는 악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신뢰하는 가운데 참을성을 가지고 악과 겨룰 수 있을 만큼 차분하고 객관적일 수 있게 된다. 성령을 따른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육적인 것을 거부하고, 우리의 선한 의도를 지켜 나가고, 잘못된 외적 자아의 요구를 부정하며, 우리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활동에 우리 마음의 전부를 내어 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은 이미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은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로마 8,9-11).
우리가 세례와 신앙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일치하였다 하더라도 우리의 몸과 마음 안에는 여전히 악한 경향들, 즉 과거의 삶에서 기인하는 ‘죽음’의 씨앗과 뿌리가 사라지지 않고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의 은총은 그것이 자라는 것을 막아 주고 우리가 이런 경향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구원이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보시는 것’은 우리의 악한 성향이라기보다는 당신께서 주신 선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