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 고택에서 찾은 조상들의 ‘여유’와 ‘배려’
-논산 명재 고택을 다녀와서
20100630 역사학과
조동우
Ⅰ. 들어가며
지난 6월 11일부터 1박 2일간 ‘조선시대 생활사’ 수업으로 충남 논산시에 위치한 명재 고택을 다녀왔다. 그동안 역사학과 학생으로 네 차례 정기 답사를 다녀왔지만 이번 답사와 같이 고택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기회는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답사를 앞둔 상황에서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곧바로 학기를 마치는 기말고사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기말고사는 마지막 학기이기에 좋은 성적에 대한 욕심이 있었고, 명재 고택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의 마음은 더욱 무겁고 복잡했다. 하지만 막상 명재 고택에 도착했을 때 고택이 반기는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이러한 마음들을 가라앉혀 주었다. 산의 품에 안겨있는 듯한 고택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Ⅱ. 명재 윤증 (明齋 尹拯)
명재 윤증은 윤선거(尹宣擧)의 아들이자 성혼(成渾)의 외증손이다. 그의 가문은 조상부터 대대로 높은 관직을 지내온 명망 높은 가문이었다.
윤증은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라고 평가된다. 그것은 아버지 윤선거와 송시열(宋時烈)이 서로 대립한 일로 말미암아 벌어진 ‘회니시비(懷尼是非) 논쟁’ 때문이다. 본래 당대 최고의 학자로 칭송받던 윤휴(尹鑴)와 송시열이 경전주해를 둘러싼 문제로 사이가 나빠졌는데, 평소 윤휴와 친분이 두텁던 윤선거가 윤휴를 변론하게 되면서 윤선거 역시 송시열과 멀어지게 된 것이었다. 윤선거 사망 후 윤증이 자신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에게 부친의 묘갈명을 작성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송시열이 묘갈명을 무성의하게 짓고, 윤선거를 폄하하는 내용을 포함한 일이 벌어졌다. 이후로 윤증과 송시열이 서로를 비방하게 되었고, 각각의 제자들이 이 논쟁에 동참하게 되면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하게 되었다.
윤증은 ‘백의 정승’이라 불렸으며, 평생동안 관직에 나갈 기회들을 모두 사양하고 선비의 예절을 지키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Ⅲ. 고택
중요민속문화재 190호로 지정되어 있는 명재 고택은 18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윤증의 제자들이 지어준 집이다. 스승이 평생을 근검·절약하며 살아왔기에 말년을 조금 더 편하고 좋은 집에서 보내시라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집을 선물 받은 윤증은 이 곳으로 이사하여 살지는 않았고, 기존에 자신이 살던 허름한 초가집에서 머무르며 가끔 왕래하였다고 한다. 윤증의 아들 또한 아버지가 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명재 고택을 비워두었고, 손자 대에 와서야 입주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윤증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주택에 거주하며 관리를 하였고 이러한 노력 덕분에 아름다운 조선시대의 한옥을 오늘날까지 잘 보존하며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되었다.
명재 고택은 입지적인 면에서 특별함을 갖고 있다. 고택을 중심으로 양 옆에 노성 향교와 노성 궐리사가 자리잡고 있다. 또한 고택 뒤에 있는 작은 산이 세 단계의 층으로 내려와 고택을 감싸 안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며 굉장히 좋은 풍수지리적 입지를 가졌다고 한다.
명재 고택은 조선시대 양반의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적 자료이면서 외관적으로는 조선 한옥의 우아함과 전통적인 멋을 갖고 있었다. 이 외에도 건축 요소마다 과학적이며 각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여유’와 ‘배려’라는 키워드로 정리해보았다.
ⅰ) 여유
조선시대 양반들은 자연과 어우러져 즐거움과 여유를 찾는 문화가 있었다. 이러한 문화는 조선 산수화에서 많이 등장하는 ‘와유(臥遊)사상’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와유사상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에 종병이란 자가 평소 산과 자연을 좋아했었는데, 나이가 들어 직접 다니지 못하니 산의 그림을 방에 붙여놓고 누워서 바라보면 마치 자신이 그 산에 있는 것과 같은 기쁨을 준다고 하여 나온 말이다.
명재 고택에서도 이러한 와유사상을 떠오르게 하는 도가적이며 ‘여유’를 상징하는 요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금강산을 형상화한 석가산(石假山)
첫 번째는 사랑채 앞에 놓인 석가산이다. 석가산은 주로 차경을 위해 정원에 돌을 쌓아 올려 만든 가짜 산을 의미하는데, 명재 고택에서는 사랑채의 누마루 앞에 금강산 일만 이천봉을 형상화한 돌을 세워 석가산을 만들었다. 이는 조선시대 가장 유명하고 사랑을 받았던 산 중의 하나인 금강산을 자신의 집에 미니어처로 두어 오며가며 잘 볼 수 있게 하여 기쁨과 여유를 찾으려한 모습이다.
▲사랑채 앞에 있는 우물과 작은 정원
두 번째는 아름다운 연못과 정원이다. 집 앞의 넓은 바깥 마당에 인공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어두었는데, 이번 답사에서는 물이 말라 그 아름다운 모습을 실감하지는 못했지만 물이 차올라 있었을 때를 상상해보면 도원과 같이 느껴질 것 같았다. 또 사랑채 앞에는 우물과 함께 작은 나무들이 무성히 펼쳐져있었다. 이는 사랑채에 서서 바라보면 아기자기하고 앞선 인공 연못과는 또 다른 여유를 느끼게 해주었다.
▲창을 통해 본 바깥 풍경
이러한 연못과 정원의 아름다움은 고택 건물에 수많은 창들을 통해 극대화되었다. 명재 고택은 여러 답사들을 통해 보았던 한옥보다 창이 더욱 많아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창들을 통해서 본 바깥 풍경은 마음의 평안과 여유로움을 가져다주었다. 집안 어른은 생각을 하고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방에서 창을 열어 정원과 연못의 경치를 보며 다시 여유를 찾았고, 자식들은 학문을 닦다가 지쳤을 때 창을 통해 바깥 세상을 보며 여유를 찾았다고 한다.
ⅱ) 배려
명재 고택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배려’를 꼽을 수 있다. 집 안 곳곳에서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해주거나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건축학적인 요소들을 설치했는데, 특히 명재 고택에서는 여성 배려적인 부분들이 돋보였다.
▲ 주인 어른만 사용할 수 있었던 작은 댓돌
첫째는 사랑채로 들어갈 때 신발장으로 쓰였던 댓돌이다. 이 댓돌은 큰 댓돌과 작은 댓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큰 댓돌은 손님들이 사용하고 작은 댓돌은 사랑채의 주인 어른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작은 댓돌에 주인 어른 신발의 유무에 따라 사랑채 안에 계신지 안 계신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손님들은 이를 보고 주인 어른을 기다릴 것인 지 등 자신의 시간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중문 안에 놓인 내외벽
둘째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의 내외벽이다. 안채로 가기 위해 중문에 들어가면 외부에서 안채가 보이지 않게 중문 크기의 벽이 있다. 내외벽이 존재하기 때문에 외간 남자나 외부인들은 안채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내외벽 아래에는 작은 공간이 뚫려있는데, 이는 안방 마님이 들어오는 손님들의 신발을 보고 신분을 빠르게 파악해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이다. 신발에 따라 높은 신분을 가진 손님이 왔을 경우 안방 마님이 직접 응대했고 낮은 신분을 가진 손님이 왔을 경우에는 집안의 하인들이 맞이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안방 마님은 갑작스런 손님의 방문에 당황하지 않고 응대할 수 있었다.
▲ 안채를 둘러싼 낮은 담장
셋째는 안채에 있는 낮은 담장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의 여성들은 자유롭게 밖으로 출타하는 것이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생활가사 노동을 하며 지친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으로 안채의 담장을 낮게 지었다. 여성의 키보다 낮게 지어진 이 담장을 통해 명재 고택의 여성들은 바깥 풍경과 세상을 언제든지 볼 수 있었다.
넷째는 안채 대청마루의 기둥이다. 대청마루의 기둥들은 주로 사각기둥인 경우가 많았는데 ,명재고택 안채 대청마루에서 방향을 전환하는 부분의 기둥들은 모두 팔각기둥으로 되어있었다. 이는 대청마루에서 많이 움직이는 집안의 여성들이 기둥에 부딪혀도 위험하지 않고, 대청마루를 오르내릴 때에도 손에 잡기 편하도록 배려한 부분이다.
Ⅳ. 마치며
명재 고택에서의 하룻밤은 조상들이 가졌던 삶의 지혜와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집 안 곳곳에 존재하는 전통 한옥의 과학적이고 배려적이며 여유로움이 있는 요소들은 조상들에 대한 감탄을 자아냈다. 특히 남성 위주의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명재 고택의 여성 배려적 차원 건축 양식들은 새롭고 파격적이었다. 또한 정신없이 살아가며 삶의 배려와 여유가 부족한 현대인들에게 명재 고택이 전해주는 교훈들은 다시 한 번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주었다.
이번 답사가 비록 대학 생활의 마지막이었지만, 그간의 답사와는 달리 전통 한옥에서 하루를 보낸 특별한 경험이기에 더욱 의미 있었고 최고의 답사로 기억될 것이다.
20100630 역사학과 조동우 답사보고서.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