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동향 同鄕의 처녀
또 다른,
한 무리의 페르시아 출신 천축인들은 ‘사카’(Saka)라고 하였다.
사카 'Saka'란 ‘활쏘는 궁수 弓手’란 뜻의 스키타이(Scythian)와 같은 페르시아 단어다.
그들 부족의 통칭이었다.
인도에는 지금도 사카족이란 아주 큰 부족이 있다.
중국 관리는 처음 듣는 단어라, 그냥 발음이 비슷한 사이(塞 :변방)로 알아 들었는데, 후일 ‘색’ 索이라 칭하였다.
‘색’ 무리들은 일찍이 페르시아에서 뛰어난 제철 기술을 갖고, 천축국으로 남하하여 타밀 지역에 왕국을 건설 하였으나, 쿠산 왕조에 밀려 대륙의 사천성으로 오게 된 것이다.
두 무리 중, 지도급 인사 50여 명만 장안으로 데려가고, 나머지는 그 지역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몇 년 후 세금 문제로 보주 허씨들이 주동 主動이 되어 민란 民亂이 일어났다.
그래서 보주와 멀리 떨어진 장강 하류, 강하 江夏(형주성에 속한 고을)로 7천여 명을 강제 이주시켰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4년 후 또, 허씨들의 주동(주모자 허성 許聖)으로 대규모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후에도 3차례나 천축인들의 주도로 민란이 발생하였다.
페르시아 유목민들의 반골사 反骨史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도 사천성 보주 주변에는 보주 허씨들이 15만 명 이상 살고 있다.
장안에 도착한 ‘허’씨와 ‘색’씨 족은 당시의 권력자인 김씨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색씨 索氏 일족은 마신 馬神으로 알려진 투후 김일제의 직계 후손들이 담당하고,
허씨 무리는 김 윤(김일제의 동생)의 후손들과 지내게 되었다.
당시 춘추전국 시대처럼 식객 食客들이 융슝한 대접을 받는 시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외래인 外來人에 대한 접대를 소홀히 하지 않는 유목민의 관습이 남아 있는 슝노의 집안에서는 이들을 하대 下待하지 아니하고 보살펴 주었다.
흉노인들 중에는 당시에도 서역인 西域人들이 가끔 눈에 띄었다.
관할 지역이 넓으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천축국에서 온 이방인들은 나름대로 제철 기술이나 길쌈 짜는 방법 등, 좋은 기술을 갖고 있었고, 사교성 社交性이 좋아 현지인들과도 잘 어울렸다.
전한 말기에는 외모 外貌가 뛰어난 허씨들의 외세 外勢가 상당하였다.
왕망과도 친인척 관계로 권력의 중심부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신나라가 망하자 ‘허’씨와 ‘색’씨 족들도 투후 일족과 함께 산동성에서 대릉하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후한 後漢의 추격병들이 만리장성 근처인 난하 부근까지 출몰하자, 이에 위험을 느낀 동이족과 흉노족은 급히 부족장 회의를 열었다.
먼저, 김윤의 증손자인 김청예 金靑裔, 일명 一名 수릉 首陵이 십칠 선생 등과 함께 대릉하에서 멀리 떨어진, 먼 동쪽으로 신천지 개척을 위해, 한반도의 남해지역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한반도의 남해지역은 신 新 말기부터 투후부에서 지속적으로 왕래하며, 눈여겨 둔 지역이었다.
후한 後漢과의 지리적 거리도 상당히 떨어져 있고 또, 바다를 건너야 하는 안전한 지역으로 여기고 있었다.
십칠 선생 동방 호의 가문 家門은 동쪽 방면에 뜻이 있다하여, 예전부터 성씨 姓氏도 동방 東方 씨로 불리어왔으며, 동생을 포함한 그의 일족 一族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동방의 사로국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기원 42년 (광무제 18년) 3월.
신천지 新天地 개척을 위해 떠나가는 한 무리가 범선 帆船을 타고 대릉하 항구에서 출항 出港할 때, 성공을 기원하며 배웅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 허씨의 무리도 있었는데, 그중 황옥 黃玉이란 늘씬하고 아리따운 처녀도 항구에 나와 있었다.
금성부 金城府의 부주 성한도 배웅을 나갔다.
모두 하나 같이, 출항하는 범선이 바다를 순항 順航하여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여 신천지 개척에 성공하기를 빌고 있었다.
많은 무리가 항구에서 출항하는 개척자들을 응원하며 배웅하고 있었다.
쫒기고 있는 도주자의 입장 立場에서는 개척자들이 안전한 신천지를 신속히 발견. 정착하여야만 자신과 동료들 그리고, 이 세 二世 들의 안전을 보장 받을수 있다.
작금 昨今의 상황은 불안한 처지였다.
배행 陪行나온 자들 중에 투후의 금성부에 속해 있던, 또 다른 페르시아 출신의 ‘색’ 족 중에 기골이 장대한 ‘토해’ 吐解도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토해는 항구에서 신천지 출항선 出港船을 배웅하며, 손을 흔드는 아리따운 허황옥을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처음 본 순간, 영혼까지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허황옥은 이미 어려서부터 김청예와 이웃에서 함께 자라나, 친하게 지내던 김청예와 이미 정혼 定婚한 상태였다.
이를 알 리 없는 토해는 출항선을 배웅하고, 허황옥을 뒤따라가 거처와 출신 성분을 수소문하였다.
출신이 자신과 같은 페르시아계 천축국 출신이란 사실을 알고는 토해는 ‘허황옥을 알게 된 것은 내 운명이며 하늘이 맺어줄 인연이다.’라고 홀로 생각하였다.
공부와 대장간의 일을 포기하다 시피하고, 허황옥만 생각하고 허황옥을 만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장간에 필요한 연장과 자재 품질 관계로 청예의 대장간을 찾아가게 되었다.
마침,
대장간 부근에서 허황옥을 만나게 된 토해는 같은 페르시아계 천축국 출신의 동족임을 알린 후, 허황옥에게 구애 求愛를 하였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같은 동족을 만나 반갑기는 하나, 허황옥은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말한다.
자신은 이미 김청예와 정혼 定婚한 사이이며, 멀지 않아 김청예가 해외 海外에서 자리를 잡으면, 결혼을 하기로 약속하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듯한 충격과 실망감을 느낀 토해는 집으로 돌아와, 허황옥을 잊으려 대장간에서 큰 망치로 쇠붙이들을 이리 두드리고 저리 두들겨 보았으나, 도저히 허황옥의 크고 푸른 눈망울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다시 청예의 대장간을 찾아가니, 김청예는 한반도의 남해 바닷가에서 대장간을 크게 운영하여, 선진기술인 철기 鐵器를 이용하여 농기구 農器具와 연장, 무기들을 생산 공급하여 토착민들에게 많은 호감을 얻어, 그 고을의 우두머리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먼발치에서 허황옥의 모습을 잠깐 본, 토해는 다시 상사병 相思病이 도졌다.
죽간 竹簡은 내친지 이미 오래되었고, 대장간일 조차 손에 잡히질 않는다.
선철 銑鐵 제조 기법은 이미 선대 先代 때 졸업했고,
지금은 선철의 단점인 강하지만 잘 부러지는 약점을 없애는 방도를 강구 講究하는 중이었다.
즉, 강철내 탄소를 축출 逐出시켜 이를 연철화 軟鐵化시켜, 내구성 耐久性과 인장력 引仗力을 높이는 야금술 冶金術을 연구 중인데,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기술적인 발전이 있을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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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회 (68회) 부터는 격일제로 연재하겠습니다.
농번기이기도 하고,
내용이 여러 사료 史料들과 비교 분석이 필요한 시점이어서 그렇습니다. -- 元甫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