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신대(挺身隊) 가담자 뒤늦게 전범으로 규정
미국 법무부는 1996년 12월 '일본인 전범 용의자 16명에 대한 입국 금지' 조치를 내렸다.
법무부의 이 조치로 미국에 입국하려는 모든 일본인은 앞으로 "바로 당신은 일본제국 군대의 조증으로... 정신대 또는 생체실험 등의 장학행위에 직, 간접적으로 참여한 적이 있는가?"라는 문구가 적힌 비자 신청서에 사인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신대와 생체실험에 가담한 일본 군국주의 시대 전범 용의자 16명의 미국 입국이 금지되었다. 그동안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시 독일 나치스 정권에 협조한 사람에 대해서는 입국을 금지시켰지만, 정신대와 생체실험 등 일본 제국주의 군대 관련자를 '전범(戰犯)'으로 규정하여 입국 금지 조치를 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뒤늦게나마 미국 정부가 일본군 강제 종군위안부 관련자를 '전범'으로 인정하게 되어 전후(戰後) 반세기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일제(日帝)의 야만적인 행위가 심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일제의 조선 여성 강제 종군위안부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일본군의 생리적인 욕구를 처리하는 수단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조선 민족 말살을 기도하는 음모가 숨어 있었다.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말기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조선의 청장년을 징병과 징용으로 끌어가고 젊은 여성들을 종군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강제로 동원했다. 이에 따라 조선 민족의 대를 이을 젊은 남녀 대부분이 끌려감으로써 이 땅에는 어린이와 노인들만 남게 되었다. 더욱이 강제 종군위안부에 동원된 정신대 여성들은 건강한 젊은 여성이 1차 대상이 되었다. 만약 일제(日帝)의 패망이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조선인의 인구 출산율은 급격히 떨어지고 우리 민족은 단절의 위기를 맞게 되었을 것이다. 정신대로 끌려간 조선인 처녀들은 이른바 '천황(天皇)의 공물(貢物)'로 일본 군인들에게 배당되었다. 당초에는 '니꾸이찌'라 해서 일본군 29명 앞에 위안부 1명의 비율로 배당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기준'도 쉽게 무너지고 끌려간 조선인 처녀들은 하루에 50명에서 100명까지도 상대하는 처참함을 겪어야 했다. 일본군은 공공연하게 '조 센진 아라다시 이찌방(조선 숫처녀가 제일이다)!"따위의 말을 지껄이며 조선 여성들을 겁탈하였다. 당시에 일본 군인들에게는 조선 숫처녀와 성교한 후 전쟁터에 나가면 목숨이 무사하다는 미신이 만연되어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조선 출신 정신대 여성에 부대에 배치되면 가장 먼저 장교들이 겁탈하고, 다음에 계급순으로 배당되었다.
정신대 여성들은 조선 각지에서 끌려올 때 이미 일본군 동원 요원들에 의해 짓밟히거나 輪姦을 당한 뒤에 일선 부대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전방부대에 배속이 될 때는 이미 심신이 찢길대로 찢긴 상태에 있었다. 전방부대에 배속된 정신대 여성들은 그야말로 '인간지옥'을 겪어야 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에 복무했던 이토 게이찌가 쓴 '병사들의 육군사'에 기록된 '위안소' 이용의 규정을 보면 조선 여성들의 처참한 실상을 살필 수 있다.
'첫번째, 본 위안소는 일본 육군 및 군속 외에는 출입을 금함. 입장자는 위안소 출입증을 제시할 것.
두번째, 입장자는 반드시 접수계에 요금을 지불하고, 입장권과 실버텍스(콘돔) 1개를 배급받을 것.
세번째, 입장료는 부사관, 병사, 군속 각 2엔, 장교 3엔임
네번째, 입장권의 효력은 당일 당시에 한하며, 입실하지 않을 때는 현금 교환 가능. 단 상대 여자에게 준 후는 현금 반환 불가
다섯번째, 입장권을 산 사람은 지정 호실로 들어갈 것. 단 시간은 30분으로 규정함.
여섯번째, 입실과 동시에 입장권은 여자에게 제출할 것.
일곱번째, 실내에서는 음주(飮酒)를 금함.
아홉번째, 규정을 지키지 않는 자와 군대 질서를 지키지 않는 자는 즉시 퇴장을 명하고 처벌함.
열번째, 용무를 볼 때는 반드시 실버텍스를 사용할 것.
열한번째, 이용시간은 병사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부사관은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군속은 오후 1시부터 밤 9시까지, 장교는 밤 12시까지임.'
이 기록에는 정신대 여성들이 '요금'을 받는 것처럼 되어 있다. 그들이 만든 규정에도 요금 지불이 명기되어 있다. 그러나 일선 부대장들은 정신대 여성들에게 돌아가야 할 요금을 중간에서 가로채거나, 군인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아예 무료로 위안 행위를 하도록 했다. 또한 규정에는 군인들의 계급 순위에 따라서 시간이 배정된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하루종일 위안 행위가 강요되었으며, 심지어는 위안 행위 도중 주먹밥으로 허기를 달래야 하는 처참한 경우도 다반사였다. 이런 참상으로 정신대 여성들 대부분은 국부(局部)가 손상되거나 성병에 걸려 고통을 당했으며 병에 걸려서 위안부 노릇을 못하게 되면 어디론가 끌려가 실종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들이 죽으면 '소모품'으로 처리해 버리면 그뿐이었다.
◆ '야계' 또는 '조 센삐'
일선에 배치된 조선 여성들은 그야말로 육체적인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일본 군인들은 통상 위안부라든가 위안소라고 부르지 않고 '조 센삐'라고 불렀다. 조 센삐에 대한 어원의 해석은 영어의 매음부[prostitute]라는 말의 머릿글자를 따서 삐라 부른 것이다. 일본군 장병들은 자신들의 성욕을 동물적으로 처리하면서도 상대를 비하해서 이렇게 불렀다. 일본군은 또 위안부를 '야계(野鷄)'라고도 불렀다. 이것은 병사와 위안부의 행위가 닭이 교미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단순한 배설행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비칭이었다. 이래저래 조선 여성들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들이 일본군에게 당한 몇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임종록(林宗綠)이 1974년 3월자 아세아공론(亞細亞公論)에 게재한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라는 글의 일부분이다.
'거의 모두가 한국 처녀인 한떼의 여자들이 트럭에 실려왔다. 여자 정신대라고 불리는 위안부들이었다. 막사를 모포 따위로 칸을 막아서 한 칸에 한 사람씩 배치한 다음 전 장병을 광장에 집합시켰다. 부대장은 한바탕 연설을 늘어놓은 다음, 여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막사 속으로 사라졌다. 병졸들은 막사 앞에 열을 짓고 자기 차례가 되기를 목마르게 기다렸다. 한 사람이 들어가서 볼 일을 보고 나오는데 십 분이 채 안 걸렸고, 길어야 십오 분이었다. 십 분이 지나 십오 분 가량 되면 기다리는 병졸들의 입에서는 욕설이 마구 튀어나왔다.
여자들은 속치마를 입었다가 벗었다가 할 사이도 없었다. 천장을 향해 벌거벗은 채 드러누워 있을 따름이었다. 마치 나체(裸體) 인형과 같았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여자들의 하복부는 피로 물들어갔다. 줄을 선 병졸들이 삼분의 일도 줄어들기 전에 여자들은 의무실로 실려나갔다.'
김대상(金代商)이 쓴 '일제(日帝) 치하 강제인력수탈사(强制人力收奪史)'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김양은 집안이 매우 가난했다. 어느날 일본 순사와 면서기가 아버지를 찾아와 딸을 정신대에 보내자고 강요했다. 아버지가 난색을 표하자 일본 순사는 딸을 정신대에 보내지 않으면 큰 아들을 강제 징용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딸을 정신대로 보낸다면 월급 5백원을 선불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김양은 오빠를 전쟁터로 보내는 것보다 자기가 공장에 가서 일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여 정신대로 나갈 결심을 했다. 김양은 일본 어느 항구를 거쳐 종군위안부로 남양 섬의 한 부대로 끌려갔다. 약속된 공장은 구경도 못해 보았다. 그 부대에서 20여명의 조선 여자들은 1천여명이 넘는 1개 대대의 병사들을 상대로 살점이 찢기는 노리개감이 되고 있었다.'
일본군의 만행과 잔학상은 중국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 고참들은 초년병들에게 여성을 强姦하는 방법과 잔인성을 가르쳤다. 종군위안부가 배속되지 않은 부대의 병사들은 중국 여성을 예사로 强姦하고 학살했다. 일본군 병사들이 중국 여성을 붙잡으면 발가벗겨 차례로 輪姦을 하는 것이 예사였다. 임종국(林鍾國)이 편역한 '정신대(挺身隊)'라는 서적에는 일본 군인들의 야만적인 행동과 잔인성의 극치를 드러낸다.
'輪姦을 한 다음에는 총검(銃劍)으로 찔러 죽여 버리는 것이 통례였다. 어떤 고참병은 농가로 뛰어들어가 네명의 초년병이 서 있는 앞에서 젊은 중국 부인을 强姦하려고 덤벼들었다. 그러자 잠들었던 어린 아이가 눈을 뜨고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고참병은 어린 아이를 들어올려 한쪽 부엌의 펄펄 끓는 솔 속에 집어 넣고 뚜껑을 닫고는 태연하게 强姦하는 것이었다.'
◆ 병들어도 고향에 안 보내고 불에 태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위안소에 들어간 조선 여성들은 하루에도 수십명씩의 일본군 병사를 상대했기 때문에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자궁에서 피가 흐르고, 이로 인해 곧 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군의병들이 약을 발라주기도 했지만, 형식적이거나 아무리 발라도 아물 틈이 없었다. 이런 처지에서도 행위는 계속되어 돌이킬 수 없는 불상사를 낳고 말았다. 정신대 여성들이 성병에 걸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일본군 병사들에 의해 감염된 성병은 그녀들의 육체를 부패시켰다. 정신대 여성들이 생명을 잃은 질병 가운데는 성병 외에도 폐결핵과 동통이 있었다. 지금은 폐결핵이 대단한 질병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치명적이었다. 제대로 영양섭취를 못하는 형편에 심한 육체적, 정신적인 피로에 싸인 여성들이 결핵에 감염되면 쉽게 약화되고, '폐기처분'되기 십상이었다. 또 동통에 걸린 여성도 많았는데, 이것은 유방의 질병으로 원인은 뻔했다.
일본군에 의해 동원된 정신대 여성들의 육체는 사용하고 버린 '공동변소'와 같았고 육체가 찢기고 병에 걸린 여성들이 치료를 위해 고향으로 보내 줄 것을 애원해도 일본군은 군사비밀의 누설이라는 올가미를 씌워서 보내주지 않았다. 순진한 여성들을 붙잡아다 야수적인 행동으로 몸을 망가뜨려 놓은 행위 자체가 벌써 '군사기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갈 곳은 죽음뿐이었고 죽으면 매장하거나 불에 태워서 '소모품'처럼 처리되었다.
◆ 일본군 있는 곳에 '조 센삐'가 있었다.
구리다 노보루[要田登]라는 전 일본 해군 견습사관은 자신의 수기 '일본군 있는 곳에 조 센삐가 있었다.'는 글을 남긴 바 있다. 요지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945년 1월말 나는 일본 해군의 견습사관으로 있었다. 내가 속한 부대는 고웅(高雄)시에서 어웅도(魚熊島)라는 조그마한 섬으로 이동했다. 부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전에 먼저 그곳에 위안소를 설치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내가 그 일을 맡게 되었다.
위안소에 들어갈 40명의 여자는 내가 직접 모집했다. 고웅에서 적당한 여자를 골라 직접 겪어본 후에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상부에 제출했다. 그렇게 해서 조선인 15명, 대만인 15명, 일본인 10명을 선발했다. 위안소의 이용시간은 10시부터 2시까지는 일반병, 2시부터 5시까지가 부사관, 6시 이후는 장교의 시간으로 되어 있었다. 장교들은 일본인 위안부를 상대했고, 일반병과 부사관은 조선인이나 대만인을 상대했다.
위안소는 일부러 막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만들어 놓았다. 위안소는 이틀만에 지어졌다. 방과 방 사이에 칸막이도 간단하게 만들어졌다. 말을 타고 중앙통로를 지나면서 "좀더 빨리 끝내"라고 재촉할 수 있도록 돼 있었다. 그런 통에 사병들은 바지를 완전히 벗지도 못하고 조금만 내린 상태에서 일을 끝내야 했다. 1~2분내에 끝내는 극히 짧은 용무였다. 병사들은 부대에서 허가증을 받고 위안소에 오면 실버텍스는 접수실에서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1엔 50전의 요금은 군표가 아니라 일본 돈으로 지불됐다.
내가 만든 위안소는 방이 40개 이상 있었는데 방 하나의 크기는 다다미 4장 반 정도였다. 방안에는 나무로 만든 침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접수실 근처에 소독실이 있어 한번 일이 끝나면 그곳에서 소독하도록 했다. 부대에 위안소를 두지 않았다면 민간인을 强姦하는 등 여러가지 심각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우리 부대의 대대장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고지식한 사람이었으나 위안소에 적지 않은 신경을 썼다. 여자관계로 인해 사고라도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날 17~8세 정도의 소년 항공병이 위안소에서 처음 알게 된 여자를 껴안은 상태에서 폭격을 받고 죽은 일이 있었다.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우리는 술과 여자에 집착했다.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 위안소란 '공중변소'와 같았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씩 장교들의 여자 쟁탈전 같은 일이 일어날 분이었다. 일본 여자는 전문 매춘부로서 대부분 30세 전후였으나 대만인, 조선인은 20세 전후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고작해야 22, 23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대만인이나 조선인 위안부들은 일본인 위안부보다 일이 능숙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염려하고 있었던 것은 성병이었다. 매주 금요일마다 대만 출신의 군의관이 여자들의 몸을 검사했다. 군의관은 병사들에게도 "일이 끝나면 30초내로 뒷정리를 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우리 부대에는 매독에 걸려 고생하다가 자살한 부사관도 있었다. 부대에서는 폭격을 받고 죽었다고 했지만 사실은 매복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던 것이다. 일본이 패전한 후 대만의 여자들은 거의 모두 고향으로 되돌아 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 여자들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 증거 없애려 동굴에서 집단 학살
일본군은 전쟁 막바지에 태평양 군도의 여러 곳에서 어김없이 종군위안부를 잡아들였다. 그리고 연합군에 기지가 점령되기 전에 이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최남단 기지 라바울은 육해군 장병 약 17만명이 주둔한 최대 전방기지였다. 네개의 비행장과 약 300대의 비행기를 보유한 이 비행장 건설에는 조선인 징용자들이 투입되었다.
이 기지에도 조선 여성들이 끌려왔다. 1942년 2월에 조선 여성 14명이 위안소에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한 날, 위안소 앞에는 병정들이 겹겹이 줄지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있었다. 제1진으로 도착한 여자들은 날마다 생지옥에 시달렸다. 이 곳에서 살아서 돌아온 한 여성 피해자는 하루 90여명을 상대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일본군은 여자들에게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줄을 지어 달려들었다. 일본군은 이처럼 야수적인 잔학행위를 저지르고도 패퇴할 때는 대부분의 조선인 위안부들을 처참하게 학살하였다. 물론 연합군의 공습으로 일본군과 함께 죽은 사람도 많았지만 일본군은 철수하거나 패주할 때면 죄상의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어김없이 정신대 여성들을 잔인하게 죽였던 것이다.
다음은 태평양 최대의 일본 해군기지 트랙섬에서 있었던 참상이다. 1944년 2월 중순, 연합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은 일본군 사령부는 이곳에 끌려온 위안부들을 없앨 계획을 세웠다. 이때의 상황을 니시구지[西口]는 '곽(槨)'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공습이 중단된 사이에 비밀 명령을 받은 시와 소위는 두명의 부하를 데리고 여자들이 들어 있는 동굴로 다가갔다. "들어라! 대답은 필요없다. 절대로 말을 해선 안된다. 점잖게 해치우는 거다. 저것들은 보통 계집들이 아니고 매춘부들이야. 적군이 상륙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국가의 수치다. 알았나!"
긴장한 소위의 속삭임에 두 병사는 조용히 들었다. 신발소리를 죽이고 동굴 입구에 다가선 소위는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은 후 휘파람을 불었다. 동굴 속에 정말 여자들이 있는가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동굴 속은 인기척이 없이 죽은 듯 고요했다. 이번엔 낮게 기미가요를 불렀다. 그러자 아무 반응이 없던 굴 속에서 돌연 짐승의 소리와도 같은 울음소리가 일제히 터져나왔다. 그리고 더움 속에서 방공수건을 머리에 쓴 5~6명의 여자들이 와르르 입구로 달려나왔다. 그러자 소위의 경기관총에서 불이 뿜어나왔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그들은 몸을 뒤틀며 쓰려졌다. 동시에 소위와 두 병사는 굴 입구로 돌진, 다음 여자가 나오기 전에 캄캄한 굴 속을 향해 마구 기관총을 쏴댔다. 귀를 찢는 듯한 총성에 섞여 비명소리가 처참하게 들려 나왔고 신음소리도 한참 들렸다.
이윽고 미친듯이 총을 쏴대던 소위가 방아쇠 당기는 것을 중지했을 때, 텅빈 굴의 내부에는 문자 그대로 죽음의 침묵만이 고요히 얼어 붙어 있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계속 2~3분간 귀를 기울이고 서 있던 소위는 그때서야 생각이 난듯 몸에 지닌 회중전등으로 동굴 내부를 비춰보았다. 그것은 아비규환의 참상이었다. 도마뱀처럼 흙벽에 붙은 채 피투성이가 된 여자, 그리고 서로 한 덩어리가 되어 부둥켜 엉킨 채 죽어 있는 여자, 나무통과 같이 뒹구는 여자... 이런 상태의 시체들이 전등불에 비친 것만 60~70명가량 됐다. 그들은 완전히 숨이 끊어져 있었다.
"임무완료, 이번엔 우리들의 차례다. 돌아가자." 소위와 두 사람의 병사는 구보로 돌아갔다.'
일본군의 이같은 만행은 패전(敗戰)과 함께 거의 모든 전선(戰線)에서 자행되었다. 일제(日帝)는 조선 여성들을 끌고가 온갖 만행을 다 저지르고 난 후 이러한 집단 학살로 '증거'를 완전히 없애버린 것이다. 나라를 잃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망국의 비애를 겪지만 여성들은 성(性)을 짓밟히는 치명적인 상처를 이중으로 겪게 된다. 일제강점기 강제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의 딸들은 이렇게 치욕을 당하며 죽어갔다. 하지만 이것을 어찌 여성들만의 치욕이고 비극이라 할 수 있을까?
출처; 사람과 지식 版 '日帝는 식민통치를 하면서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해설; 김삼웅(金三雄) 친일 반민족행위 문제 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