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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神勒寺)를 찾아서 - 주말 나들이
-敬山 김 보경 씀-
우리 부부가 운동화와 등산화를 신고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주말 나들이에 나섰다. 경기도 여주 남한강 가의 신륵사(神勒寺)를 찾은 것이다.
시집간 딸은, “기독교인이 웬 절에 가시느냐?”고 핀잔을 준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렴풋한 옛 기억을 더듬어서 신륵사와 그 주변의 평화스러운 남한강의 풍광을 보고자하는 평소의 충동이 내재(內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변두리는 물론 성남과 광주를 통과하는 도로는 주말의 교통 혼잡으로 점신시간을 한참 넘긴 후에야 여주시내에 도착하여, 그곳의 남한강 다리를 건너면서 신륵사 입구에 도착하고 보니, ‘여주 도자기 축제’가 막 끝난 주간이고 하여, 비교적 신륵사와 그 주위는 의외로 조용한 분위기이다.
남한강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예쁜 일주문을 통과하여 오른쪽으로 평지의 비포장 길을 따라 걸어서 신륵사 앞에 다다르니, 푸르고 싱싱한 나무그늘 아래는 아직도 부드러운 야생초와 갖가지 풀꽃들이 흰나비를 유혹하고, 남쪽으로 시원하게 보이는 강가의 백사장과 푸른 강 물길을 배경으로 하여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펼쳐주고 있다.
사찰의 경내를 들어서자 오른 쪽으로 갖가지 높은 고목나무 아래를 지나가면서 강변의 바위 위에 자리한 팔각 정자(江月軒)로 발길이 이끌린다. 강월헌은 나지막한 봉미산(鳳尾山)의 남단에서 남북으로 흐르는 남한강변을 따라 암벽이 둘러싸인 맨 끝의 암반 위에 심을 박고, 신륵사를 배경으로 하여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명당 바위 위에 지은 정자이다. 여기에서 고려 말 저 유명한 나옹 선사(懶翁禪師)가 한동안 거처(軒)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옆으로는 마치 경주 남산에서나 볼 수 있는 풍화가 심각한 삼층 석탑이 있고, 또 돌계단 길 위로는 위용이 장대한 다층 전탑(塼塔)이 소나무,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들에 둘러싸여 우뚝 솟아있다. 경주의 분황사지의 옛 벽돌 탑 같은 이 다층 전탑은 보물(보물 제22호)로서 화강석으로 된 7층의 기단과 6층의 연화 모양의 벽돌로 쌓은 탑신부(塔身部)를 가진 약 10m 높이의 아름다운 전탑이다.
이 전탑(塼塔)은 남한강변에 우뚝 솟아 있어서 십리 밖에서도 아주 잘 보인다. 여주의 인근에서는 옛 부터 쉽게 벽탑(壁塔)이라고 불러왔는데, 옛날 목선들이 곡물과 목재 같은 화물들을 잔뜩 싣고 충주나 단양 쪽에서 서울의 마포나루터를 향하여 노를 저어나갈 때에, 그 근처 암벽 아래 회돌이 용소(龍沼)의 위험한 물길을 피하도록 멀리서 등대 역할을 하여 주었다고 한다. 그러기에, 뱃사공들은 여주나루까지 무사히 도착하여 좀 쉬었다가, 또 여주, 이천 지역의 기름진 쌀을 싣고는 서울(마포나루)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탑은 이곳 여주에서, 아니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내륙운하(內陸運河) 격의 뱃길에서 자연적으로 수호신적인 등대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신륵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분사(分寺)인 용주사(龍珠寺)에 속하는 사찰로서, 신라 진평왕(AD579~631제위)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고증(考證)이 확실치 않은 상태이고,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壁寺)’라고도 불렀다는데, 벽사는 고려시대에 사찰 경내의 동쪽 바위 언덕에 벽돌로 된 다층 전탑이 세워지면서 붙여지게 된 이름인 것이다.
이 절이 대찰(大刹) 역할을 하게 된 연유는, 고려 말 우왕 때에 왕사인 나옹화상(懶翁和尙-慧)勤)이 연로(年老)하고 병이 든 상태에서, 당시 부패한 불교계와 정계의 무리들에게 탄핵을 받게되자, 왕명으로 양주(楊州)의 천보산 아래에 있는 회암사(檜巖寺)에서 추방당하자, 자기의 죽음을 사전에 예고한 듯이 열반문(涅槃門)을 가마를 타고 나와서, 밀양의 영원사(瑩源寺)로 거처를 옮기고자 가는 도중에, 이곳 여주의 신륵사에서 갑자기 입적하게 된 뒤부터라고 한다.
사학자(史學者)들은 고려 말 공민왕이 시해 당한지 2년 만에,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이 여주 땅을 지나가다가 신륵사에서 급사(急死)하였다는 사실은 정치적인 음모가 숨어있는 것이 아닌지 추측케 한다. 즉, 당시 불교계는 새롭게 등장한 이성계 일파의 개혁세력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받으면서, 혹세무민(惑世誣民)으로부터는 자연히 유리(遊離), 고려 국에 뿌리박은 나옹의 기반이 약화되는 상황 하에서, 보수적인 불교계는 한계에 처한 것 같다.
어쨌든 삼국시대와 고려시대까지 약 일천년 동안의 숭불(崇佛) 국가에서 마지막 불교국의 왕사로서, 나옹의 이러한 의지는 당시 여말(麗末)에 비대해진 사회의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다소 모순이 있었던 불교계의 정신적인 리더(leader)로서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고려 말에 무학 대사는 나옹의 수제자로서 법계(法戒)의 의발(衣鉢)을 전수(傳受) 받으면서도, 나옹선사의 불교(조계종)를 당시 정치에 편승하여 이에 협력하지 않으려 하였던 면모가 드러나고 있다. 나옹 선사는 고려 말 대 변혁기의 혼돈 속에서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불교계의 거장(巨匠)으로서 고뇌의 참모습을 신륵사에서 보는 것 같다.
시닉(scenic)하고도 아이러니칼(ironical)하게도, 위에서 언급한바 고려 말 공민왕의 왕사는 나옹 선사이며, 이씨조선 개국 이 태조의 왕사는 무학 대사인데, 이 두 분은 사제지간(師弟之間)임에 비추어 무학 대사는 배불(排佛)을 하고, 이씨조선 건국 초기부터 왕사로서 태조를 앞세워서 억불정책을 선두에서 주도한 진원자(震源者)이며 정책 입안자(立案者)임이 틀림이 없다.
고려 말의 대 변혁기를 살다간 나옹 혜륵(懶翁慧勒)은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숭불(崇佛) 왕조의 대 선사(禪師)이었다. 그는 고려 말(공민왕20년) 잠시 전라도의 송광사에 머물 때,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이듬해 양주의 회암사로 옮겨와서 스승인 지공스님으로부터 ‘삼산우수지기(三山雨水之記)를 받았는데, 이 뜻을 계승하여 회암사를 4년여에 걸쳐서 몸소 중수하고, 1376년 초에 낙성하게 되자, 회암사는 당대 고려 말과 이조 초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제일의 명찰(名刹)이었으나 지금은 전란으로 전소 상태인 것이다.
회암사는 고려 말 당시의 서울인 개경(開城)과 한양에서도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나옹선사의 후광으로 백성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를 본 우왕은 두려워서 폐업(廢業)할까 우려하여 병약한 나옹을 밀양의 형원사로 추방시켰다는 것이다. 회암사와 고려 말의 왕사인 나옹 선사, 이조 개국의 태조와 그의 왕사인 무학 대사, 무학 대사의 스승인 나옹 선사! 그들은 격변기에 나옹 선사의 회암사에서 자주 만났던 것이다. 나옹 선사는 말년에 주로 양주 땅 회암사에서 고뇌(苦惱)하고 천년의 호국불교 정신을 꺼지지 않도록 수도하며, 나라 걱정을 제일 많이 한 오늘날의 추기경 보다 위대한 인물인지도 모른다.
나옹선사는 여주 땅 신륵사에서 당시 향년 57 세로 아무런 말도 없이 많은 의문을 남긴 체, 그가 어릴 때 목은 이색과 사이좋게 서도를 같이 하였다는 신륵사의 토양 속에 파묻혔다. 한편 그는 고려 말과 이조 초기에 당대 제일의 대범(大凡)한 풍류(風流) 시정(詩情)을 가진 대 선사이기도 하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 靑山兮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蒼空兮要我以無堠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聊無愛而無憎兮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如水如風而終我
신륵사의 부흥은 1379년 고려 우왕(5년)때 각신(覺信) 등이 절의 북쪽 봉미산록에 봉안한 부도(浮屠)와 나옹의 초상화를 모신 선각진당(先覺眞堂)을 세우면서, 많은 전각(殿閣)들을 신축하고 중수하고 부터였다고 한다. 1382년에는 二층의 대장각(大藏閣)안에 고려 말 대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하여 만든 대장경을 봉안하였다. 이조(李朝) 때에는 억불(抑佛)정책으로 인하여 절이 한동안 위축되기도 하였으나, 1469년(예종 1년)에 영릉(英陵-세종대왕 능)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72년(성종 3년)에 절이 대폭 확장됨에 따라 다음해에 정희왕후가 절 이름을 보은사로 개칭하였다. 이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兩亂)으로 절이 일시에 폐허가 되었으나, 1671년(현종 12년)에는 계헌(戒軒)이, 1702년(숙종 28년)에는 위학(偉學), 천심(天心) 등이 중수하였다. 현존 당우(堂宇)로는 금당(金堂)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조사당(祖師堂 - 보물 제180호), 명부전, 삼경당, 노전(爐殿), 칠성각, 종각, 구룡루(九龍樓), 사왕전 등 우아한 건물들이 있다.
사찰 경내의 문화재로서 극락보전 앞에 있는 조선 전기의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보제존자(普濟尊者) 석종(石鐘 - 보물 제226호) 등도 눈여겨 볼만하다.
남한강변의 다층 전탑(塼塔) 뒷산 비탈에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石鐘碑), 즉, 1379년에 건립된 나옹화상의 묘비(墓碑 : 높이 212cm 너비 61cm -보물 제229호)가 지대석(址臺石) 위에 3단의 대석(臺石)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위에 대리석의 비신(碑身)을 얹었다. 장구한 세월 속에서 풍마(風磨)된 비석을 보호하기 위하여 목조건물의 공포(栱包)와 기왓골을 조각한 옥개석(屋蓋石)을 얹었다. 신라시대 이래 일반화된 형식의 귀부(龜趺)는 고려 말기에 대석과 옥계석으로 변형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이러한 경향을 대표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목은 이색이 직접 지었고, 글씨는 해서체로 한수(韓脩)가 썼다는 바, 다행히도 이 비문을 통하여 신륵사의 내력을 결정적으로 밝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극락보전 뒤의 조사당 뒷산(鳳尾山)으로 계단 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石鐘 - 보물 제 228호)과 그 앞에 흡사 불국사의 다보탑 앞의 석등과 같은 모양의 고려시대의 석등(보물 제 231호)이 화강석으로 정교하고 우아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만들어져서 자세히 볼만하다. 석등은 팔각 지대석 위에 기단부는 상대, 중대, 하대가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팔각의 하대석에는 목련(木蓮)이, 상대석에는 앙련(仰蓮)이 도식적(圖式的)으로 조각되어 있다. 석종의 각 면에는 꽃무늬가 장식된 아자형(亞字型) 안상(眼象)이, 각 모서리에는 연주형(連珠形) 우주(宇宙)가 새겨져 있다. 이 석등은 보제존자 석종 앞에 있음으로 보제존자인 나옹 선사의 부도가 세워진 1397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을 정신없이 자세히 둘러보고 풍성한 녹음이 욱어진 숲속으로 좁다랗게 보이는 길을 따라 봉미산 정상에 올라서서, 신륵사를 넘어 멀리 보이는 남한강 줄기와 그 옆으로 전개된 풍요로운 여주 평야를 잠시 내려다 본 후에, 황급히 미로의 산길을 뛰다시피 내려 와서, 아직도 극락전의 다층 석탑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가족과 합류한다.
신륵사 경내에서만 몇 시간을 보냈음으로 절을 나와서 조촐해진 배를 채우기 위하여, 신륵사 입구 쪽에 많은 입간판을 내걸고 있는 식당들의 메뉴들을 둘러본 후에 파전과 골뱅이, 그리고 쌀 막걸리로 유명하다는 ‘똥배네집(구 대림정)에 들려 야외의 통나무 테이블에 우리는 마주 앉아서 각 메뉴 하나씩을 대표적으로 지목하고, 여주 막걸리 반 되박을 주문한다.
주로 여주 들판에서 잡았다는 자연산 골뱅이 된장국이 여주의 옹기 뚝배기에서 펄펄 끊고 있는데, 작은 알(새끼)을 잔뜩 품은 큰 씨알의 골뱅이들만을 우선 그 속에서 골라내어 나무 바늘로서 기술적으로 속살을 틀어 빼내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늦가을 추수가 막 끝난 후에 어깨동무들과 물 논을 헤매고 돌아다니며 잡은 골뱅이들을 신나게 집에 가지고 돌아오자, 어머니께서 삶아주시던 추억의 맛을 나 혼자만이 상념에 잠겨 생각을 하여본다.
고향이 아닌 이곳에서 옛 모습의 골뱅이를 처음 대하고 보니 나는 신기하기도하고 궁금하여 골뱅이를 발라먹으면서 여자 주인께, “이것이 진짜 자연산 골뱅이가 맞습니까?’하고 묻는다. 식당 주인인 창씨 부인이 명함을 나에게 내밀며, “맞고 마다요. 수년 전부터 여주 뜰을 뒤지고 다니면서 자연산 골뱅이만을 잡아서 우리 식당에만 대주는 마을 할아버지가 있지요. 아주 추운 겨울 한두 달만 제외하고 그분은 팔을 걷어 부치고 아주 나서서, 논이 아니고 도랑이나 물고 같은 데를 주로 돌아다니며 전문적으로 씨알 좋은 골뱅이만을 골라잡아서 벌써부터 우리 식당에만 단골로 공급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염려마시고 언제라도 들리시면 맛있는 골뱅이 요리를 선사할 테니까요.”라는 것이었다. 나는 구수한 맛의 독특한 여주 막걸리를 한 사발 마시고 여주 파전을 곁 드려 먹은 후에도, 반백년 만에 맛본 자연산 골뱅이의 쫄깃한 풍미(風味)를 잊을 수 없다.
우리들은 신륵사의 저녁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직전에, 사찰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남한강 다리를 넘어 여주 시내 가까이의 ‘명성왕후 생가’나 ‘세종대왕 능(영릉)’을 들려보고, 근처에서 두견새 우는 소리라도 듣고자 애초에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그날은 이미 시간이 너무 늦었기에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불현듯 떠난 이번 주말의 여주 신륵사 나들이를 오랜만에 매우 즐기었음으로 우리들은 스스로 감사할 다름이다. (끝)
敬山 2008. 6. 2l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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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모님과 함께 나서는 여행길이 참으로 보기에 좋습니다. 저는 85년도로 기억 하는데 아내와 만나 연애할 때 신륵사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천년고찰에서 느껴지는 느낌과 도도히 흐르는 남한강과 백사장이 기억속에 아련히 남아 있네요~~ 시간나는대로 옛추억을 떠 올리며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 골뱅이에 소주도 한 잔 하면서 ...사모님과 함께하긴 멋 진 여행길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