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터키, 그리스 24- 이코니온
성 바오로 기념 성당
7월 12일. 맑고 쾌적함. 다시 사도 바오로의 발자취를 따라서...
카파도키아에서 지금의 콘야, 사도 바오로 시대의 이코니온까지는 버스로 3 시간이 조금 더 걸립니다. 카파도키아 지역을 벗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넓은 평야가 나타납니다. 버스로 가는 방향에서 왼쪽, 말하자면 남쪽으로는 안티타우루스 산맥이 멀리 살짝 봉우리들을 보이다가 조금 가까이 다가서며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 보여주기도 하고, 큰 호수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풍경은 평온하기 그지없는 평야를 바라보며 저는 바오로 일행이 잠시 오로마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편안하게 버스로 가는 것이 바오로에게 미안했나봅니다.
버스에서 요한 씨가 콘야에 대해 설명하면서 콘야는 이슬람교가 아주 강한 곳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메브라나 종파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이야기했지요. 메브라나는 이슬람교 중에서 신비주의 종파라고 했지만, 사실 종파라기보다는 독특한 수도회를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메브라나는 이슬람에서 가장 위대한 수피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슬람교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는 ‘한 손에 코란, 한 손에 칼’이라는 표어가 바로 이슬람교이라는 잘못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래의 이슬람교는 하느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넓은 포용을 지닌 종교였지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슬람교의 순수성과 포용적인 모습이 변질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미 11 세기부터 이슬람 내부의 분파적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낀 많은 무슬림들은 마치 초대교회의 사막의 은수자들처럼 칩거 생활을 하면서 본래의 정신을 되찾고자 하였지요.
우리는 그들을 ‘수피(Sufi)’"라고 부르지요. 그들은 명상과 기도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본래의 이슬람의 정신에 다가가려 했습니다. 그러다가 13 세기에 위대한 수피가 등장합니다. 바로 메브라나 잘랄레딘 루미입니다. 그는 1206년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의 발흐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후에 아버지를 따라 셀주크조의 수도였던 지금의 콘야로 이주해 왔습니다.
13 세기 지금의 터키는 셀주크조는 십자군 전쟁에 이어 몽골군의 침략으로 다시 한 번 전 영토는 약탈과 살육이라는 끔찍한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더우기 제국 내에서는 왕자들 간의 권력투쟁과 주변 부족들의 반란으로 극심한 내분에 휩싸이고 있었답니다. 이러한 혼란과 암흑의 시대에 고통 받는 민중들을 위한 영적인 돌파구를 마련해 준 사람이 바로 메브라나 루미였습니다.
당시 아랍어로 씌여진 하느님의 말씀인 코란은 일반 민중들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언어로 쉽게 범접하기 힘들었습니다. 메브라나 루미는 코란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도 누구나 단순한 영적인 수련을 통해 신의 영역에 들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바로 세마라는 독특한 회전 춤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단순히 경건한 마음으로 춤을 출 때, 거기서 알라 신의 의지를 경험하고 궁극적으로는 신과 일체감을 이루면서 이슬람의 오묘한 진리를 체득케 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원효의 사상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겠지요. 단순히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나미아미타불로 부처님께 귀의하듯이 세마 춤으로 알라 신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과 인류에 열려 있는 사람이었고, 신비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사상은 민중들에게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당시 민중들에게 커다란 영적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는 무슬림 아닌, 그들이 볼 때, 이교도나 무신론자들에게까지도 온전히 열려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인류 공동체가 이해와 화해를 통해 함께 사는 진정한 지혜를 제시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말했다고 합니다.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느냐. 그들이 신에게 다가가는 길도 그만큼 많을 수 밖에 없지 않느냐.”
그가 님긴 유명한 7가지의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에게 친절하고 도움주기를 흐르는 물처럼 하라.
연민과 사랑을 태양처럼 하라.
남의 허물을 덮는 것을 밤처럼 하라.
분노와 원망을 죽음처럼 하라.
자신을 낮추고 겸허하기를 땅처럼 하라.
너그러움과 용서를 바다처럼 하라.
있는 대로 보고, 보는 대로 행하라.
제가 1996년 콘야에 갔을 때, 밤에 세마 춤을 추는 곳을 갔고, 깊은 인상을 받아 ‘메브라나 찬미가’라는 졸시를 썼었지요.
메브라나 찬미가
나 그대를 찬미하노라, 메브라나
그대 안에 하느님이 계시나니
찬미하노라, 나 그대를
그대 안에 사람들이 있나니
찬미하노라, 나 그대를
그대의 춤사위 안에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 이루어지나니
찬미하노라, 나 그대를
그대는 다만 은총의 통로
그대가 지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찬미하노라, 나 그대를
그대 흐르는 음악 선율에
죽음은 새로운 선율로 이어 지나니
죽음도 하느님의 은총이어라
너풀거리는 옷자락 속에
우주는 돌고 도나니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분은
하느님이어라
그대의 춤은 기도이어라
서로가 나누는 인사, 거기
당신 하느님이 계시어라
스승과 제자의 입맞춤, 거기
당신 하느님이 계시어라
옮기는 걸음걸음, 거기
당신 하느님의 음성이 담기었어라
그대를 따르는 소년의 춤사위 안에
그대, 하느님과 인간을 하나로 이어주나니
찬미하노라, 메브라나 그대를
성 바오로 기념 성당 내부
성당 창문과 수사님
이콘니온은 중요한 사도 바오로의 선교지이지만 바오로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1910년에 프랑스가 터키에 철 도를 놓아주면서 자국 인부들을 위한 성당을 지었습니다. 그것을 성 바오로 기념성당이라고 부릅니다. 저희는 그곳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2년 전에도 그곳에서 미사를 드렸고, 그곳에 계시는 두 수녀님을 만났었는데,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반갑게 만나리라고 생각했는데 부재중이었습니다. 마침 본국으로 휴가를 가시고 대신 어느 수사님이 잠시 봐 주시고 계셨습니다.
두 수녀님들은 이탈리아에서 오신 ‘예수의 작은 자매회’ 수녀님들입니다. 성당 옆의 정원이 아름다웠고, 꽃이 예쁘게 피어 있었습니다. 마치 그곳 이교도 국가에서 ‘성 바오로 성당’을 지키며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수녀님들의 마음처럼. 수녀원 현관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샌달 네 켤레를 보며 청빈하고 정갈하게 사시는 수녀님들의 삶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정원
수녀원
저는 미사에서 위의 ‘메브라나 찬미가’와 더불어 간단하게 사도 바오로가 제 1 차 선교 여행에서 이곳 이콘니온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나누었지요.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코니온에서도 전과 마찬가지로 유다인의 회당에 들어가 설교하였다.그리하여 수많은 유다인과 그리스인이 믿게 되었다. 그러나 믿기를 거부한 유다인들은 다른 민족 사람들을 자극하여 형제들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만들었다. 그래서 바오로와 바그나바는 그곳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주님을 의지하며 담대히 설교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통하여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시어,당신 은총에 관한 그들의 말을 확인해 주셨다. 그리하여 그 도시 사람들이 둘로 갈라져, 한쪽은 유다인들의 편을 들고 다른 쪽은 사도들의 편을 들었다. 그런데 다른 민족 사람들과 유다인들이 저희 지도자들과 더불어 사도들을 괴롭히고 또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일을 알아채고 리카오니아 지방의 도시 리스트라와 데르베와 그 근방으로 피해 갔다. 그들은 거기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다. (사도 14, 1-7)
위의 사도행전 내용는 제 1 차 선교여행 때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앞의 13장 마지막을 보면,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내쫓자,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이코니온으로 갔습니다. 저희는 이코니온에서 이제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가게 되니, 저희가 순례하는 방향은 제 1차 선교여행만 놓고 보면 사도 바오로 일행의 선교 경로와는 역방향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제 2, 3차 선교여행의 경로를 생각하면 순방향이지요.
다음은 사도 바오로의 긴 강론이 역사의 숨결을 따라 흐르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