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왕산 대전사(周王山大典寺) /전통사찰
- 경북 청송군 주왕산면 상의리
672년(문무왕 12)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919년(고려 태조 2)에 주왕(周王)의 아들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자세한 역사 기록은 남은 게 없고, 임진왜란 때 타버린 뒤 조선 현종 때 절을 다시 지었다.
주왕산과 대전사, 주왕암(주왕굴) 등 이곳은 중국 주나라와 이어진 설화를 가지고 있다.
폭악한 하나라 주왕(紂王)을 몰아내고 무왕이 세운 나라가 주(周)나라다. 기원전 1046년~기원전 256년, 800년쯤 나라가 유지되었다.
주왕산의 주왕은 주나라의 주왕과는 거리가 멀고, 후주(後周, 기원후 951년~960년)와 연관하기도 뭔가 맞지 않다는 느낌이다.
신라(기원전 57년~ ), 고구려(기원전 37년~ ), 주나라가 망한 기원전 256년은 고조선시대였을 것이다.
주나라 아들이 이곳에 왔다는 것은 시기상으로 전혀 맞지 않는다.
후주 창업자는 곽위(태조)며 그는 아들이 없었고 양자 시영(세종)이 왕위를 물려받고 39세에 사망, 7세 아들 시종훈이 등극하였지만
권력가인 조 씨에게 왕위를 선양하였다. 송나라다.
이렇게 글을 쓰고 주왕산을 검색하니 이런 글이 나온다.
중국 당나라(618년~907년)때 주도(周鍍)가 후주천왕(後周天王)라 스스로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안록산란를 타파한 곽자의 장군에게
패하여 우리나라 석병산(지금 주왕산)으로 도망한 주도를 주왕이라 칭한다. 혼자 도망한 게 아니고 아들 대전도군과 딸 백련도.
딸은 연화굴에서 성불하였고, 백련암은 공주 백련과 연관 짓는다.
사실이 아닌 전설, 설화이고 이런 설화가 왜 만들어졌을까?
이 설화를 기록한 책은 언제 누가 지었을까?
절은 통일신라 때 세워진 것 같기도 하지만 창건 당시 이름은 알 수 없고, 어떻게 부침을 하였는지도 모른다.
제천 월악산 마이태자와 공주 이야기가 생각난다. 동정심에서 만든 이야기가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닐까?
2019년 3월에 부동면(府東面)에서 주왕산면으로 바뀌었다. 부남면이 이해가 된다.
대전사는 자주 왔지만 법당 안을 본 기억이 없다. 영덕 달산면에서 청송 현동면과 안덕면, 현서면을 가려면 주왕산면을 지난다.
지나는 길이기 때문에 들른 것은 아니다. 조금더 자세히 대전사를 보고픈 마음 때문이다.
국립공원공단 상의주차장은 공사 중이라 주차할 수가 없어 절까지 차를 가지고 갔다. 막는 사람이 없다.
상가는 문을 닫은 곳이 많고, 관광객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지난달 경북지역 산불은 주왕산을 비켜가지 않았다. 산림청이나 소방서에서 산불을 잘 저지하였다.
화재 진압 뒤에 주왕산 입산 통제를 하였고, 4월 22일부터 용추폭포까지 통제를 해제하여 오늘 그나마 관광객이 있다고 한다.
주왕산 능선 곳곳에 화재 흔적이 보인다. 자연재해는 과거도 현재도 두렵다.
심검당 앞에 주차하고 기암을 보니 멋지다.
범종루와 회연당(카페 겸 갤러리), 장군봉
대전사 보광전(大典寺普光殿) /보물
임진왜란 때 대전사는 모두 불에 타버렸다. 임진왜란 뒤에 대전사를 중창(다시 건축)하였다.
1976년 보광전을 고칠 때 본 상량문(上樑文)에 적힌 글로 확인되었다.
‘歲在康熙十一年壬子五月初十一日(세재강희11년임자5월초11일)’ /강희 11년은 서기 1672년으로 조선 현종 13년이다.
연등 때문에 전각을 정면에서 볼 수 없다.
다포식 맞배지붕이며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보광전 앞 삼층석탑은 문화유산은 아니다. 부재는 거의 잃었고, 위 받침돌과 3층 지붕돌 등만 남았다.
네 면, 각 한 면마다 2점씩 부조하였다.
보광전 석조여래삼존상 /경북 유형문화유산
복장조상기문이 나와 1685년(숙종 11)에 조각한 조선 후기 석불이다.
석가불(현재), 제화갈라(과거 연등불)보살, 미륵(미래)보살 등 삼존불이다.
대전사 신중도 /경북 유형문화유산
경상도 사불산화파(四佛山畵派)의 대표적 화승(畵僧)인 신겸(愼謙, 1790∼1830년경 활동)이 관여하여 그린 것으로 여김.
다섯 폭의 비단을 잇대어 하나의 화폭을 이루고 있는 채색 불화이며, 대체로 보존 상태는 좋은 편이다.
관음전
봉향각
수선당
석탑 몸돌에 쓰인 부재일까?
산령각
명부전
명부전 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경북 유형문화유산
지장삼존상(3軀), 시왕상(10軀), 판관(2軀), 사자(1軀), 금강역사상(2軀) 등 모두 18구로 구성되어 있다.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에서 발견한 조성발원문엔 1703년에 수화승 수연(守衍)이 만들었다고 적었다.
수연은 17세기 대표적 조각승인 승호(勝湖)의 제자이다.
이 불상들은 수연이 제작한 작품 가운데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시대 불교조각사 연구에 큰 가치가 있다.
응진전
탐진당
수월당, 종무소로 쓴다.
백련암 가는 길, 백련암 주위를 공원으로 가꾸고 있다. 백련암과 대전사만으로 좋은 공원이 될 수 있다.
기암을 여러 방향에서 보는 맛도 있다.
백련암
예전에 본 기억이 없는 부도가 있다. 자세히 보면 모두 당호가 써져 있으나 미천한 실력으로 읽을 수가 없다.
조선 후기나 일제강점기 때, 아니면 광복 이후에 만든 것이 아닐까?
대전사를 보고 회연당(會緣堂) 갤러리에 그림을 보러 들어갔다.
법호가 도안인 승려가 불화를 그렸다. 옆에 붙은 설명을 봐도 나는 그림을 이해하기 어렵다.
도안과 이야기를 나눠지만 나는 승려와 이야기가 힘든다. 확증편향 성향을 가진 사람과 대화는 늘 힘든다.
불법이 참다운 진리라고 삶을 바친 사람과 어떤 한 사람의 견해라고 생각하는 나와의 대화는 거의 불가능하다.
나는 승려와 논쟁하고 싶지도 않다. 아니 논쟁할 만큼 내 그릇이 크지 않다. 논쟁할 만큼 그릇을 키우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는 불법을 절대 진리라고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절대 진리는 이웃과 어떻게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냐는 것이다.
교리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고차원(?)의 교리를 배우라고? 왜? 그럴 시간에 나는 밥벌이를 해야한다.
그가 아는 승려가 와서 나는 자리를 피하여 백련암으로 갔다가 다시 회연당에 들었다.
무상주보시로 받은 향과 맛이 좋았던 아메리카노 한 잔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기 위하여서다.
팔고 있는 잔이 있다 10,000원이다. 집에 나는 컵이 많지만 고마움을 표할 방법은 이 잔을 사는 것이다. 시주함에 넣다. 나도 무상주보시다.
심검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