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법의 요체는 일체중생 모두가 이미 깨달아 있는 부처라는 것이다. 다만 망상 분별심으로 인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생각 속에서 둘로 나누고 쪼갬으로써 무수한 차별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본래성불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부자도 아니고 가난한 것도 아니다. 행복한 것도 아니고 불행한 것도 아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이대로일 뿐이다. 지금 이대로의 존재는 부자거나 가난한 것도 아니고, 행복하거나 불행한 존재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나와 상대를 둘로 나누어 놓고 비교하고 차별함으로써, 최초에 분별심을 일으킨다.
옆집 친구는 월급이 나보다 많다는 것을 보고 나와 비교함으로써 나는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이라고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처럼 괴로움이란 누군가와 나를 둘로 나누어 놓고 비교 분별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일 뿐, 비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저 지금 이대로 존재할 뿐이다.
연봉을 5000만원 받는 사람은 1억을 받는 사람에 비하면 가난하지만 3000만원을 받는 사람에 비한다면 부자일 것이다. 그러나 5000만원 받는 사람은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면 연봉이 많은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고 가난한 자도 아니며, 행복하거나 불행한 사람이 아니다. 다만 그저 그만큼의 연봉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연인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옆집 친구가 1억을 받거나, 7,000만원 연봉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와 비교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바로 그 분별심으로 인해 나는 가난하거나, 돈이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여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괴로움은 바로 이러한 분별심에서 시작된다. 분별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존재일 뿐이다.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기에 더 잘났거나 더 못난 것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일 뿐이다.
이 때 비로소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 때 우리는 타인에게 영향받지 않으며, 타인과 비교되지 않으며,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이대로 충분한 존재 그 자체가 된다.
법성게에서는 ‘법성원융무이상’이라고 하여, 진리의 성품은 원융하여 둘로 나뉘는 상이 아니라고 설한다.
금강경에서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라는 아상을 타파할 것을 설하며, 제상이 비상임을 깨달을 때 곧 여래를 보리라고 한다.
육조혜능스님은 불법은 불이법이라고 하여 둘로 나누지 말 것을 설하고 계신다. 여기서 말한 분별심이 바로, 육조스님이 말씀하신 이법이다. 불이법이나 법성원융무이상에서도 설하는 것처럼 둘로 나누게 되면 차별적인 관념이 생긴다. 상이 생기는 것이다. 나와 너를 둘로 나눌 때 아상과 인상이 생겨난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일즉일체다즉일이라고 설한다. 본래는 둘로 나뉠 수 없는 하나이지만, 우리가 분별심을 일으켜 온갖 상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사는 세상은 둘로, 셋으로, 수천, 수만가지로 쪼개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즉일체고 일체즉일이라는 법에서 보듯이, 수천 수만으로 쪼개어지는 것 자체가 실체가 있어서 그렇게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마음 안에서 허망하게 일어난 분별심을 뿐 그 본질에서는 하나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것들은 다 이렇게 우리가 마음으로 쪼개어 놓은 것들이다. 실체가 아니다. 분별심으로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그래서 그 본성은 다 공하다. 이를 반야심경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며 수상행식 역부여시 혹은 오온개공이라고 설하고 있다.
둘로 셋으로 나누어 분별하지만 않는다면, 세상은, 삶은, 있는 그대로 완성되어 있다.
[불교방송 라디오 평일 오전 07:50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중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분별심을 일으키니 행복하지 않아요. 행복하고프거든요...
모든 갈등과 번뇌 고통의 원인...
알아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안다고 알고있는 분별심!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