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삶의 의미
철학자·문필가·의사...저마다 달랐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인간은 의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삶의 의미에 대해 회의적 생각이 들면 공허하고 무력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이 말한 ‘누제닉 신경증(noogenic neurosis, 존재 인성 신경증)’이다.
빅터 프랭클은 “가치와 의미의 요구를 받는 것이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보았다. 융 또한 사람은 의미 없는 삶은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아들러 역시 인간은 의미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은 무언가에 절망감을 느꼈거나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뿐이라고 하며,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는 암묵적일 수도 있고 사람마다 다르며 누구도 절대적 의미를 알고 있거나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면서 명쾌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프로이트는 삶의 의미를 묻는 철학적 질문은 답이 없는 문제에 답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의 조카의 손녀인 마리 보나파르트(Marie Bonaparte)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순간 사람은 병든 것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인간의 본성을 연구한 프로이트는 막상 삶의 철학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을 제시하지 않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이 철학이건만 막상 철학책을 뒤져도 와닿는 답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삶의 현실은 문제 해결과 적응의 연속이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단순히 당면한 문제 해결과 현실 적응만으로 보는 것은 어딘가 미흡하다. 현실적 삶이 안정된 후에도 마음 한구석 삶에 대한 허무한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 주인공 필립과 시인이자 인생 선배이기도 한 크론쇼가 삶의 의미에 관해 대화하는 대목이 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크론쇼가 묻자 필립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 하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것이라며 모범 답안을 말한다.
이에 크론쇼는 냉소적 반응을 보이면서 진정한 행복이란 없고 삶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고 쾌락이 곧 행복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은 자유로운 행위자처럼 행동하지만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없으며 자신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환상을 믿고 있을 뿐이라고 역설하고, 인간이 이기적이란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적 얘기를 덧붙인다.
크론쇼는 자신의 생각에 선뜻 동의하지 않고 회의적 태도를 보이는 필립에게 삶의 의미를 알고 싶으면 박물관에 가서 페르시아 카펫을 보라고 말한다.
고전적 명화 반열에 오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살다(生きる)’ (1952)는 제목 그대로 삶의 의미를 생각케 하는 대표적 영화다. 볼품없고 초라해 보이는 노년의 시청 공무원인 만년 과장 와타나베는 어느 날 위암 선고를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다.
30년 세월을 직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서류에 도장만 찍으면서 자리를 지키고 살아왔다. 누가 봐도 재미없고 무의미한 삶이었다. 살았으나 산 게 아니다. 오죽하면 별명이 미라일까. 지나온 삶이 허무하고 바보같이 살았다는 자괴감이 든다.
아내를 일찍 여의고 그저 아들 하나 바라 보고 열심히 돈만 저축했을 뿐, 어울리며 놀거나 자신을 위해 돈 한 번 쓸 줄 몰랐다. 어느 날 평생 모았을 목돈을 찾아 자신을 위해 써 보기로 마음먹고 무작정 집을 나선다.
선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삼류 소설가에게 돈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삼류 소설가는 “위암이 당신 인생에 눈을 뜨게 해 줄겁니다”라면서 인생의 주인이 되라고 말한다.
그리고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인생은 즐기는 것이 미덕이라며, 함께 술에 취해 접대부와 어울리고 유흥가를 전전한다. 그러나 와타나베의 공허한 마음은 그대로다. <계속>
글 | 김창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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