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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의 지난이야기
작성자:정원
작성시간:2020.10.19 조회수: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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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의 지난 이야기>
이민, 고국의 사랑하는 가족과 익숙한 모든 것을 뒤로하고 남의 나라에 와서 발 붙인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다.
나름대로 아팠던 옛 일을 끄집어 내어 이 글을 쓰는 것은 친구들에게 묻혀 있는 지난 얘기 다 open 하여 털어놓아 더 깊은 우정으로 발전 하고싶은 바람에 더해서, 우리의 삶에 끊임없이 개입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 이야기를 하고싶어서이다.
1985년 6월 시댁쪽으로 시어머니와 형제들이 이미 Maryland에 와 있었고 우리가 마지막 이었다.
당시 큰 아들 안또니오는 휘문고를 나와 사제의 길인 서울 혜화동 대신학교에서 1년 4개월째 수학중 이었고, 둘째 스테파노는 영동고 2학년 이었다. 아이들이 이만큼 커서 어느정도 한국인으로 정서가 정립된 뒤에 고국을 떠나게 된 것 그 후 두고 두고 감사한 일 이었다.
안또니오는 가족의 이민으로하여 고민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지도신부님께 말씀 드렸더니 가족이 이민가는 것과 너와 무슨 상관 있느냐.. 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을 두고 떠나 올 수는 없었다.
가족이 이민 비행기를 타는 그날 아침까지 학교 기숙사에 있다가 수십명의 친구들과 함께 직접 공항으로 나와서 공항 Lobby 에서 청년 신학생들이 원으로 둘러서서 작별 Ceremony 를 벌렸었다.
그날 떠나는 나를 위해 공항에 나와준 친구들, 곽정숙 이민희 홍순진 박순림 최문경, 대학동창 조진희 김현자, 나의 동료후배 박찬옥 선생, 지금도 자주 나는 그 색바랜 사진을 들여다 보며 혼자 만감에 잠긴다.
Maryland 에 와서 보름도 안되었을 때 우리 가족이 아무 곳에도 메인데 없이 신기하고 낯선 거리를 구경하며 걷는 중에, 안또니오가 일깨우던 말, 신학대학에 적을 옮기는 것을 서둘러야 되겠다고 한다.
선배중에 이민와서 어영부영 하다가 성소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음을 들어서 자기 혼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것 같다.
워싱톤 교구 성소 담당 신부님을 만나고, 순조롭게
한국 학점을 모두 인정받아 9월부터 시작되는 새 학기에 2학년에 등록하고 그 준비로 8월 중순에 차에 짐을 잔뜩 싣고 Pensylvania Scranton 까지 5시간 drive로 처음으로 장거리 여행을 했다.
St. Pius X Seminary, 안또니가 적을 둔 신학교였다. 당시 19세 이던 아들은 그전해 서울 혜화동 대신학교에서 시작된 집 떠나 기숙사 생활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사람을 사목하겠다며 교포들이 많은 LA 교구로 적을 옮겨 St John’s Seminary에서 4년을 더하고 31세에 LA교구 소속 사제로 서품 받을때까지 객지에서 또 객지생활의 계속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안또니오의 성소(부르심)에 대해서, 여기서 더 옛날 얘기를 쓰게된다.
대학 졸업 후, 창덕여고에 재직하고 있던 1963년 여름 방학 중이었다. 우연히 혼자 길을 걷다가 명동성당 마당 게시판에서 ‘지성인 교리반’ 9월 8일부터 시작된다는 공시를 보고 기다려서 등록하고,
주 1회 2시간씩, 200명이 넘었던 주로 대학생이 많아 보이는 청강생들의 회를 거듭 할수록 열기가 더해갔다.
주변 가족 친척 아무도 천주교 신자라고는 없었던 완전 문외한 이었던 나는 꼭 색물감 스며드는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그당시 유명하셨던 조요한 회장님의 강의가 너무 좋아서 ‘이 강의를 같이 듣는 사람과 결혼했으면..’ 하는 바람을 마음속으로만 혼자 몇번 품었을 뿐인데 말로 입에 옮기기도 전에 하느님은 우리의 원을다 들어 주고 계신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4개월후 내 삶을 송두리채 바꾼 영세식으로 하느님 앞에 새로 태어나다. 동기생들이 신앙 모임을 만들기로 한다. 몇월 며칠 몇시에 그 발기인 모임을 갖겠으니 꼭 참석해 달라는 엽서가 교무실로 날아오고있었다. 나는 그런 모임에 관심도 없어서 답도 안하고 있다가 학교로 처들어간다는 마지막 엽서를 받고 참석한 날,
옛날 명동성당 임시 식당의 긴 table을 가운데하고 바로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초면의 사람이
“본명이 무엇입니까?” 하고 말을 걸던 사람, “글라라 입니다.” “성녀 글라라와 성 프란치스코가 어떤 사이 였었는지 아십니까?”라고 다시묻던 사람.. 이렇게 이루어진 만남에서 내가 먼저 완전 빠져 버렸던 것 고백한다.
가난한 집 6남매의 맏이 이고, 대학도 안했고, 결혼으로 생각을 바꾸는데 10년은 걸릴 것이다. 나를 밀어내기 위해 그가 한 말들이 다 사실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두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나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을만큼 그당시 나는 용감했었다. 10년? 괜찮아요. 기다릴게요.
내가 본 것은 그를 둘러싼 스팩이 아니고, 인간 그 자체, 그의 성실성과 진실함이 다 였다. 하느님이 중매하셨다고 믿으며 살아온 56년, 이 사람 이라면 나의 모든 것을 주고도 후회 않을 것이라..전적으로 나 자신의 판단에 의한 결정이 세월과 함께 “얼마나 옳았던가..!” 를 수없이 되뇌이며 80이 넘도록 함께를 허락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 감사 기도드린다.
그 당시 그는 결혼이라는 것 생각에도 없었던 사람이고 나는 집에서 몇년 전 홀로되신 어머니의 과년한 딸, 시집 못 보낼까봐 줄기찬 걱정과 재촉을 받고있던 노처녀, 나의 적극적이고 집요한 공세로 드디어 ‘Yes’ 라는 답을 받아내다.
“그러면.. “ 하고 바로 이어지던 그의 말,
“우리의 첫 아들은 사제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너무나 엄청난 말에 놀라서 “자라서 본인이 싫다고 하면 어떻하냐?”라고 물었고, “부모가 온갖 정성 다 하면 99% 하느님이 도와주신다.” 가 그 대답이었다. 그 순간 이후 평범하던 내 가슴은 떨리기 시작했고, 하느님께로부터 크나큰 숙제를 받은 마음으로 하느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사제가 될 아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가 시작 되었다.
그도 역시 집안에 첫 신자 였고 자기가 먼저 영세받은 후에 어머니와 동생들을 영세시킨 사람이지만 고교 때부터 가톨릭 서적을 읽고 영세 받기전 8년동안이나 혼자 새벽미사를 다니며 나중에는 모두가 신자로 알고 있는판이라 더 못하고 있다가 더 미룰 수가 없게 되어서 우연히 나와 같은 기에 세례를 받게된 동기였지만 신앙면에서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 8년씩이나 영세를 못 받고 기다렸던 것에 대해서, 혼자서 믿었을 뿐, 아무도 끌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 사람은 하느님께서 정해놓으신 미지의 여인을 만나게 하시기위한 하느님의 안배였노라고 그는 해석한다.
우리 어머니를 만나고, “그럼 결혼은 언제 하겠는가?” 에 10년 후 라고는 말 못하더라.
‘3년쯤 후에’라고 옹색한 대답을 했지만 우리는 그해를 못 넘기고 64년 12월 26일 명동성당에서 크리스마스 후 허락되는 첫 혼배미사를 곽정숙을 증인으로 봉헌 했다. 그는 28세, 나는 27세, 생일로 따지면 3개월 차이로 동갑내기나 같다.
6개월 후 6월, 성심성월에 임신하고 안또니오 이름지어 놓고 기도로 기다린 아홉달, 다음해 66년2월에 태어난 아기가 지금의 안또니오 신부다. 병원에서 간호원이 안겨주는 아기를 받아 안은 아버지의 첫 인사가 “안또니오 신부님, 안녕하셔요?” 였다는 것, 그 당시 모두 비신자들 이었던 집안에 화제꺼리 였었다.
이쯤 되었으면 좀 다른 엄마가 되어 있을 법도 한데,
이민와서 얼마도 되지않아 아들을 신학대학에 데려다놓고 그날 학교에서 미사중에 터진 울음보를 아무리 참으려 해도 통제가 안되었다. 보다못한 프란치스코가 신부 엄마가 되려면 마음이 강해져야한다고 일침 하던 말 잊을 수 없어. 그 때는 아들이 여럿이라도 아까워서 그 중 하나도 절대로 신학대학에 보낼 수 없다던 어떤 어머니와 다를 바가 없었음을 반성한다. 집에 돌아 오면서 내내 울었다.
스테파노 학교문제로 Maryland Education Board 에 갔다. 말하는 중에 학생 자모로 온 한국 아줌마의 말에 영어선생 티가 났는지..미국 온지 열흘도 안 되었다는 말에 놀라는 걸 보고 고국에서 25년간 영어를 가르치다 왔노라고 털어놓았다.
아주 반기며 자기들과 같이 일 하자고 한다. 구체적인 거쳐야 할 방법까지 친절히 일러주던 ESOL 선생님들. 한국 대학에서 없었던 Special Education의 학점 이수가 필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남편이 우선 시누이 가게에서 일을 시작하는 동안
나는 한국에서 못했고 여기선 필수인 운전을 배우며, 가까운 Haward University에서 특수교육 학점을 땄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아마도 그대로만 밀고 갔더라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실수같은 것은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2년 뒤, 남편이 가게를 사서 시작하게 된다.
그때는 우리 두 사람 다 남의 나라에 왔으니 ‘돈’ 울 벌어야 된다 가 우리를 지배한 생각이었고 누구나 장사만 하면 돈을 벌게 될 것같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주 7일 일하는 악조건도 마다않은 착각 실수를 저질렀던 것. 그가 혼자는 못하고 나의 도움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자리잡을 때까지 2, 3년 도와주고 나오리라 했던 것이
그 후 13년간 Cashier로 붙박이 가구처럼 꼼짝 못하는 자신을 한심해 하면서 보낸 세월...
우리는 정말 열심히 일 했다. 별불편없이 통하는 언어 덕에 고객들로부터 My Favorite Store라는 사랑도 많이 받았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친절한 프란치스코를 특별히 좋아하는 고객들도 많았다. 세월이 갈수록 익숙해 져서 고용인 없이 둘이만 일해도 주 7일 일하는 것 외에는 별 불편없던 어느날,
가게를 닫을 준비하던 저녁 8시경,
복면 쓴 흑인 세명이 강도로 들어와서 프란치스코가 앞에서 턱을 통해 한번, 피를 쏟으며 꾸부리고 있는 이 사람에게 뒷 목으로 확인 사살까지
두방의 총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다.
나는 작은 일에도 어찌할 바를 몰라 덤벙대는사람인데 이 사람은 냉철한 사람이다.
이런 일을 대비해서 미리 준비 해 두었던 돈봉투도 있었는데 단지 돈이 목적인 이 아이들에게 집어 주기만 했어도 아무일 없었을 것이다.
완전 panic에 빠져버린 나는 돈 집어 줄 생각은 않고 옆에 와서 총으로 나를 위협하고 있는 산같은 검은 물체를 울면서 밀어 낼려고만 사투를 벌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남편이 “돈줘!” 소리를 질렀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어
돈을 집어준 순간 1초도 지체없이 모두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사람의 입에서 폭포수처럼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것도 바닥을 더럽힐까봐
빈 박스를 집어들고 피를 쏟고 있었다.
나는 밖으로 뛰어 나가며 Help! 를 외쳤지만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고를 알리는 알람을 눌러놨기때문에 경찰과
Paramidics들이 일시에 들이 닥쳐서 그때까지
몸도 움직이고 정신도 말짱한 그를 꼼짝 못하게 눕혀놓고 전신을 천으로 감아서 앰뷸런스로 싣고 간다. 당연히 같이 따라 갈려고 나서는 나를 경찰이 붙잡는다.
1998년 4월 6일, 부활주일을 앞둔 예수님 고난주일의 월요일 이었다.
안또니오는 서품 1년도 안된 햇병아리 보좌신부였고 스테파노는 이미 그때 Seattle 에서 독립하고있었다.
그 와중에도 실려가기전 그가 나에게 당부한 세가지가 있었으니
첫째, 아이들에게 연락 하지마라.
둘째, 내가 이렇게 피를 쏟고 있으니 남의피가 필요 할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피는 받고싶지 않으니
당신 피를 주도록 해라. 우리 둘다 O형 이라.
셋째, 세 강도중 한사람이 옆 건물 흑인교회의 목사 부부가 길르고있는 foster boy 누구다. 경찰에게 말해라. 셋 다 복면을 하고 있었어도 이 사람은 그 중 한 아이를 알아 보아서 그후 범인들을 채포하는데 단서가 되었다.
나는 초조해서 미칠지경인데 경찰은 나를 데리고 본서에 가서도 서두를 일이 없다는 듯이 커피를 마시고 동료들과 잡담하며... 너의 남편은 지금 good care 를 받고 있다. 너는 조서를 작성해서 그를 해친 강도를 잡아야 한다.
My husband is dying. He needs my blood.” 라며 울면서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 없었다.
그 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도 살리신 하느님, 지금 그의 상태가 어떻든 당신께서 ‘원상복귀’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짧은 기도를 바치고 나니 그 믿음으로 내 마음이 안정 되어서, 재촉하지 않고 차분하게 경찰의 조서에 대답 할 수가 있었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그가 있는 병원에 나를 데려다 주었다. 그 때까지 그의 상태를 진찰하고 살피고 있던 아주 아주 친절한 백인 의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첫 마디가 “It’s miracle.” 이었다. 그러면서 아마도 신앙인 인 것같다는 말까지...
아닌게 아니라 프란치스코씨 그모양으로 앰불런스에 실려 가면서도 기분이 그렇게 좋더라며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저를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시켜 주시는 군요” 라고 기도를 바쳤다고.. 뒤에 들은 이야기.
그 때까지 진찰한 사고의 결과를 자세히 설명해 주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 그 의사의 연민이 넘치던 태도를 나는 잊을 수 없다.
턱을 뚫고 들어간 총알은 아랫 잇몸을 통해서 혀를 밑에서 위로 뚫고 목젖을 망가트리고 척추 목뼈 바로앞에서 멈추고 삼키기 직전에 간신히 꺼냈노라고..뒷 목으로 들어간 다른 하나는 머리 뒷부분에 안전하게 박혀 있다고..
입안 상처는 다 치료 가능한 것이고, 뒤의 bullet은 나중에 척출수술 하면되고, 망가진 teeth 두개만 implant 하면되고.. 아무리 보아도
Permanent Damage로 남을 상처가 없다는
것. 그순간부터 살아난 나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언제나처럼 제 기도를 다 들어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를 입속으로 외면서 다녔다.
그날 자정부터 다른병원에서 전문의를 불러와 입안 수술, 혀의 상처를 꼬매고 목젖을 붙이고... 놀랍게도 총알이 뚫고간 턱의 상처는 tire에 박힌 못자국처럼 저절로 아문다는 것. 이 사람은 참기어려운 Pain을 호소 하는데도 나는 완전 살아서 웃고 다닐 수 있었다. 다음 날 연락을 받으신 워싱톤 성당의 본당신부님으로 와계신 서울교구의 임승철 신부님도 이런 일 당해서 웃고 돌아가기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셨을만큼 내가 살아 있었다.
지금도 생생하고 세세한 순간의 일까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기억들, 옆에 건장하게 살아서 세상 온갖 일에 호기심을 놓지않는 이 사람을 볼 때마다 마음속에서 외치는 소리, “그를 살리고 저를 살리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로하여 그가 어떻게든 잘 못 되었더라면 내가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 Maryland에 유학, 박사학위중이던 안또니오의 선배가 ‘생명이 위험한’ 상태 라고 난 한국일보의 이 사건 기사를 보고 병원으로 달려와서, 아무레도 안또니한데 알리는게 좋겠다고, 이렇게 신문에도 대서특필 된 마당에 모르고 있다가 혹씨 다른경로로 듣게되면 얼마나 놀라겠느냐고, 하기사 죽었다는 소문까지 돌았으니, 자기의 폰으로 준비해서 내미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두 아들에게 알렸다.
괜찮다는 엄마의 말 못믿겠다며 아버지 바꾸라고..
발음도 분명치않은 아버지 목소리를 듣고서야 다음주 부활주일 미사를 끝내고 밤비행기로 집에와서 이틀 확인하고 돌아갔다. 사고당한 아버지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St. Thomas 사도에 대한 강론을 하면서 내가 직접 보기 전에는 못 믿겠다고 한 것은 ‘의심’ 이 아니라 직접 보고싶은 ‘사랑’이었다고. 내마음이 지금 그렇다고...했다고 한다. 그 때 안또니가 보좌신부로 있던 LA교구의 Claremont 성당 신자들은 프란치스코의 무사를 비는 기도부대 였었다.
스테파노는 사고 3일 수요일에 와서 토요일에 아버지를 퇴원시켜드리고 돌아갔다. 아버지를 집에 모셔놓고 스테파노와 부활미사를 참례하면서 하느님께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사를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 때 내 수중에 있던 현금 500불, 더 있었으면 몽땅 해도 부족했을 것이다. 봉투에 넣어 헌금함에 넣으면서 가슴이 뛰던 일.
그때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Seattle에서 독립하고 있던 스테파노는 전에 워싱톤 성당에서 처럼, 씨아틀 한인 성당에서도 청년성가대를 만들어 지휘자로 발표회 준비를 하고 있을때, 카타리나는 외대 전산과를 졸업하고 서울 Microsoft 한국지사에 근무하던 중에 씨아틀 본사에 4개월 연수차 와 있는동안 교회 성가대에서 만난사이, 스테파노는 제일 어린 나이에 왔으면서도 왠지 우리 식구중 제일 식성조차도 한국음식만 좋아하는 아이였다. 성당에서 오빠 오빠 하며 따라 다니는 아가씨들 많아도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이민연륜이 깊은 아가씨는 자기짝이 아니라고 하더니 결국 서울에서 결혼식을 하게되는 것 우연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사건을 당한 때가 서울에서 하기로 날 잡아놓은 스테파노의 결혼식 날을 꼭 한달 17일을 앞두고 우리 두 사람 비행기표까지 전부 준비되어 기다라던 중이었다. 그래도 한달 여 남아 있으니 스테파노에게도 좋은 일도 아닌 일, 아직 신부 카타리나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 하고있었다.
그러던중 본격적인 상처 치료가 시작되어서 치과부터 born grip(잇몸 뼈 이식)으로 망가진 잇몸치료 후 implant 두개 해 넣을 준비로 임시치아로 있을 때, 머리 뒤에 박힌 bullet 척출 수술로 이어져, 본인에게는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힘드는 일이 계속되었다. bullet 척출 수술을 맡었던 의사가 하던 말, 1mm만 더 들어 갔어도 위험했을 것이라고.. 세월이 한참 지난 요즘도 어떤 날은 그부위가 아프다고 한다. 다 나았다고 해도 후유증을 남겨 그 일을 우리가 기억하도록 상기시키시는 것 같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본인의 심리상태라고 밖에 해석이 안되는 일로 옆에서 내가 마음고생을 겪었다.
혼주인 아버지가 결혼식에 못 가겠노라고 한다.
갖은 설득과 노력이 안통한다. 결국 포기하고 비행기표를 반환 하기로 하면서 이렇게 된이상 서울에 안 알릴 수가 없었다.
먼저 그때까지 전혀 소식 모르고 있던 혜자에게 강도당한 사실을 알렸다. 너무나 놀라면서 묻던 말,
형부 말 할 수 있어? 걸을 수 있어? 운전해? 말도하고 하고 걷기도 하고 운전도 해. 그러나 서울에는 못간다. 신부인 카타리나도 모르고 있다. 이런 일 전화로 말하기 보다 시이모 될 사람인 네가 카타리나를 만나서 얘기해주면 좋겠다. 라고 부탁했다. 결혼식이 보름쯤 남았을때 일이었다. 멀리 있는 신랑을 대신해서 온갖 것 정성을 다해 결혼식을 혼자 준비하고 있던 신부와 신부 부모님들이 받았을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짐작하고 남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스테파노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안 계신 결혼식은 할수 없으니 결혼식을 연기하겠노라는 전화였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가 그렇게 하도록 둘 수는 없었는지 마음을 바꾼다. 결혼식에 가겠단다. 당연한 일이 왜 그렇게 고맙던지.. 어깨를 짓 누르고 있던 천근의 돌 덩어리가 순간에 사라진 느낌이었다. .
동생을 위해 무엇이든 준비되어 있는 형 안또니오 신부님은 혼배미사를 집전하기위해 스테파노보다 먼저 서울에 가서 하나뿐인 귀한 가족이 될 카타리나를 미리 만나 같이 식사도 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못 가신다고 할 때 제일 많이 기도하고 꼭 참석하셔야 한다고 설득한 사람, 처음부터 모든 가족의 길흉사는 신부인 자기책임 이라고 작정한 사람같다. 5년후 메릴랜드에 가서 사촌 여동생의 혼배 집전을 시작으로 친할머니 외할머니 작년에 돌아가신 고모 까지, 성당 행사에 맞 물려서 하루도 지체 못하고 6시간 비행의 밤 비행기로 가서 장례미사로 모셔 드리고 당일 밤비행기로 돌아오는 무리도 주저하지 않는다.
1998년 5월 23일, 아버지의 당당한 참석으로 함께하여 주심으로하여 스테파노가 늘 바라던 대로 서품 1년된 형 신부님 주례로, 당시 90세 이시던 외할머니를 모시고 온갖 준비 한가지도 부족함 없이 도와주신 외가댁 온 식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성악을 전공한 tennor인 외 사촌형의 축가에, 너무나 화려하고 감사에 넘치는 아름다운 혼배미사를 아무 부족함 없이 올릴 수 있었던 것, 모든 것 가장 좋은 것으로만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께 아무리 감사를 드려도 부족할 뿐이었다.
모두들 강도 소식듣고 놀라고 걱정했던 것에 비해 겉으로 멀쩡한 이 사람을 보고 오히려 놀랄 정도로 경사로움에 감사를 더해 주었다. 그날 결혼식장에까지 와서 축하해 주었던 친구들에게 이 기회에 못다한 감사를 전하고싶다.
금년에 결혼 22주년을 보낸 하나뿐인 예쁘고 슬기로운 며느리 카타리나를 볼때 마다 그 때 생각을 한다. 시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며느리, 카타리나를 아주 마음에 들어하는 시아버지가 때때로 ‘복많은 여자’, “며느리까지 잘 볼게뭐야..” 라고 말 할때는 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허락하시는 하느님께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사진 설명
그 때의 사진들 몇장 옮겨 본다. 입안에 아직 아물지 않은 born grip 과 임시 치아를 고정시킨 철사가 얼기설기 엃혔어도 겉으로 멀쩡한
사진들..
주례하신 형 신부님과 함께
신랑 신부 부모님들과
페백 장면
90세이신 어머니를 모시고 스테파노 결혼을 축하하기위해 우리 엄마의 육남매 쌍들이 모두 모였다.
결혼식을 잘 치르고 돌아 와서, 사건의 뒷처리가 계속 된다. 범인들의 채포가 이어지고, 재판이 열리고,
그는 victim으로 나는 witness로 우리 둘다 재판정에서 증언했고, 범인들 중 총을 쏜 장본인이 범행 사실을 부인했기때문에 처음 얼마동안은 더 긴장하기도 했다. 그때 우리 사건을 맡았던 여 검사 Ms. Apolido의 정당하던 사건 마무리에 그래도 정의가 살아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다.
두 얼굴을 가진 광야, 전에 들은 송봉모 신부님의 강론 말씀을 기억하며 의식이 깨어 있고자 발버둥 쳤던 그 때의 자신의 모습이 떠 오른다. 나의 광야는 황량함, 외로움 뿐인 광야로 끝날 수는 없다.
도전과 성취의 기회로 삼자. 우리를 힘겹게 만드는 삶일지라도 전환의 기회로 변용시킬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법정에서 증언한 이야기는 그 때 기록해 둔게 있어서 그대로 옮겨 적는다.
기회는 분명한 기회였다. 내 영어에 귀 기울여 줄 청중을 어디에서 또 만나겠는가.
과거의 내 모든 것 접어두고 Grocery Cashier로 13년, 금전 같은 것으로는 환산이 불가능한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큰 축복에 늘 감사하며 이 삶이 바로 내가 원하던 행복인양 지나다가도 때때로 잘 못 잡은 방향에 대해서 쓰라린 회한의 쓴 맛을 혼자 삼킨적이 몇번이며, 이 나이를 먹고도 언젠가 이 자리만 벗어나면 무엇인가 나의 일을 할 수 있으리라 별른 것이 한두번인가.
옛날 서울에 있을 때 어느 중학교의 영어웅변 대회에서 출연자 10여명 중에 내가 원고를 쓰고 지도했던 세명이 1,2,3등의 자리를 차지하던 경험을 떠 올린다. 이번엔 내가 무대에 설 차례다.
우리가 증언할 10월 6일을 이틀 남겨놓고 어떤 말로 표현해야 가장 효과적인 전달이 될까 차근차근 순서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 몸으로 내가 겪은 일을 얘기하는 것이니까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6일이 20일로 보름씩이나 연기 되었다는 통지를 받았다.
아, 하느님께서는 철저히 준비하여 완벽하게 하라고 시간을 주시는구나. 그날부터 매일 가게에서 혼자 있을때 법정 증인대에 서 있듯이 소리내어 연기까지 연습했고 다시 22일로 연기되어 실지로 증언 했던 그 날은새벽에 일어나 침대머리에서 소리를 죽여가며 마지막으로 Rehearsal 까지 하고 나왔을 정도 였다.
우리 두사람이 제일 좋은 옷으로 쪽 빼입고 신사 숙녀가 되어 9시까지 Upper Marlboro 법원에 다다르다. 검사를 만나서 나는 통역사가 필요 없고
나의 영어로 하겠노라고 처음으로 알리다.
혼자 준비하고 있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프란치스코씨, 다소 걱정되는 표정으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하지 말아라.”고 일러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몰래 연습하며 옆사람을 놀라게 해 주고싶었던 치끼어린 바람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같은 증인끼리는 자기가 증언 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증언을 들을 수 없는 제도 때문이었다.
법정 밖 대기실에 증인들이 앉아 있다. 수사관과 경찰들도 포함하여 우리 두 사람도 지시에 따라 의자에 앉아 있다가, 나만 먼저 Clara Lee 이름이 불리어 법정 안으로 들어선다.
방안에 사람들이 즐비하게 앉아 있는데 모두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는듯 쥐죽은 듯 조용하다.
몸집이 크고 60세도 넘어 보이는 남자 판사가 검은 법복을 입고 판사석에 앉아 있고 그 옆에 12명의 배심원들이 엄숙하게 진을 치고 있다.
영화에서나 보던 법정 풍경이다.
우리를 옹호하는 Ms. Dorry Apolido 여 검사가
전에 보던 때와는 달리 정장을 하고 가운데 서 있고 우리 가게를 방문 한적 있는 변호사들의 모습도 보인다. 범인들의 가족인듯한 사람들이 방청석을 메우고 있다.
지시에 따라 바른 손을 들고 선서를 하고 인적사항을 확인한 다음, 그날 당일 (4월 6일)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말 하라고 한다.
때는 이때다. 자신감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철저한 준비가 나를 그렇게 만들어 준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나 더듬거릴 필요도 없이
우리 가게의 구조 설명에서부터 우리가 황망중에 겪은 그대로의 긴박한 상황을 자초지종, 때로는 빨리, 때로는 천천히, 또박또박 재연했고 그뿐 아니라 innocent citizen을 괴롭히는 crime에 대한 평소의 나의 소신까지 밝히며,
그때 겪은 참혹함이 다시 살아나서 때때로 목소리가 떨려 나온 적은 있어도 단어 하나 주저한 적 없는 나의 증언 20여분, 숙연한 분위기로 들어주던 그때의 청중들... 그 경험은 나쁘지 않은 추억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 노력한 만큼의 성취감도 있었다.
곧 이어 피해자 본인의 증언이 있었고, 한국여자 통역사의 통역을 들으며, 저 여자에게 나를 맡기지 않은 것은 참 잘 했다는 깨달음과 함께, <잘 되기를 바라거든 직접 하라.> 를 실천한 느낌이었다.
계속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우리는 두사람의 증언이 끝난 다음 바로 가게로 돌아 왔다.
둘이 홀가분한 걸음으로 차로 향하며,
오랫만에 느껴지던 해방감,
“이제 다 끝났다아~!”
청명한 가을하늘, 뜰의 나무에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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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2020.10.19메뉴
첫댓글인숙아,
널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고백부터 해야겠다.
너무 감동해서 눈물없인 읽을수가 없었어.
너의 글 솜씨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너의 일생 스토리를 요약해서 일목요연하게 쓸수 있는 건 너의 내면에서 우러 나오는 단면인것 같구나.
하나님은 너와 너의 가족 모두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비록 네가 가고저 했던 길에서 빗겨간 느낌이 아직도 네게 있는것 같지만 너의 삶은 정말 성공적이였고 감탄을 금할수 없는 계획된 코스였다고 보고 싶구나.
앞으로 너의 여생에 하나님의 지극하신 은총속에서 은혜로운 길만 있으리라 기원한다.
정원
22:50New메뉴
고국의 친구들에게 부끄러운 글
올렸다. 그래도 될까..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서 올렸네요.
중간에 사진들이 copy를 하니 따라 나오지를 안네요.
사진만 따로 보내겠으니 적당한 자리에 끼워 보시길...
정원
22:53New메뉴
(김인숙 글라라)
고국의 친구들에게 부끄러운 글
올렸다. 그래도 될까..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서 올렸네요.
중간에 사진들이 copy를 하니 따라 나오지를 안네요.
사진만 따로 보내겠으니 적당한 자리에 끼워 보시길...
정원
22:54New메뉴
(김필수)
소설이 아닌 소설같은 이야기 읽으며 고였네.
너의 순수함 ,신앙심, 너의 낭군님에 대한 사랑 늘 존경해 왔지만 오늘 이글을 읽고 그토록 순수함속에 정의감 씩씩함까지 고루 갗춘 그대를 진정코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이제 남은 여생은 하느님의 은총속에 심신의 평온함이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정원
22:55New메뉴
(강옥정)
인숙아 너의 지난 이야기 읽으며
힘든 삶의 시간을 주님의 고통과 사랑으로 승화시킨
너의 믿음에 감탄한다
더욱 프란치스칸으로서 너의 삶이 복음화 되어
기쁘고 평화로운 여정 이기를 기도한다
정원
22:56New메뉴
(황광자)
인숙아,Clara Lee야
한편의 장대한 서사시를 읊는것같구나
내가 영화제작자라면
너의삶과 신앙생활을 한편의
영화로 만들고싶다
인숙아
너는 성공한 어느 소설가보다도 글을 잘쓰고 우리 맘을 설레이게,울먹이게 하는구나
어떤 고난과시련이 닥쳐도 하느님 감사합니다 기도드리는 너의 경건한 신앙생활에 경의를 표한다
인숙아
네 미국생활을 기탄없이 털어놔줘서 고맙다
잘 읽었어
우리 호주 딸에게도
보낼게
정원
22:57New메뉴
(염정자)
사진도 잘 보았어.
친구들의 옛날 모습이 새로워.
헌데 낮선 얼굴도 있네.
너희 가족 안또니오 신부님, 너의 끔찍한 사랑을 받으시는 프란시스코님, 스테파노 아드님과 며느님,
다들 훈남 미녀들의 용모 또한 감탄이다
내 겔러리에 옮겨 놓았다.😄💓
정원
23:03New메뉴
(김춘희)
인숙의 글은 우리 모두에게 많은 감동을 준다.
이민 1 새대에서만 겪는 새로운 인생을 경험하는 역경의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가 곧 신앙의 여정이라 읽는 이로하여금 깊은 감동을 주지.
인숙이가 우리들의 친구라서러기보다 이민 1 세대의 이야기이기도 해서 더욱 감명 깊어. 80 울 넘게 살아 온 우리들의 과거, 누구라도 털어 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거야. 그 생활이 국 내에서만 국 외 에서건 우리는 이야기를 엮으며 살아 왔지. 그러면서 옛 친구들에게 털어 놓고 싶은 저기만의 이야기 보따리가 있을거야. 혹은 아픈 이야기 일수도 있고 혹은 놀라운 이야기. 혹은 평범한 이야기 그 이야기 안에서 아무도 열어 보여 주지 않은 이야기들을 이제 우리는 다 털어 놓고 이야기 할 나이가 왔다고 생각 해. 반 새기 이상 못 만났던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울어주고 함께 웃어 줄 마음들이 다 준비 되 있는 우리다.
나는 이 방 친구들이 짧게라도 자기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 좋겠다 생각 해.
그래서 오늘 인숙이 글 읽으며 인숙이를 더 잘 알게 되고 친숙 해 지는 기회가 되어 너무 좋다. 아픔과 기쁨 모두 함께 공유해 줘서 너무 고마워. 이 자리가 있음에 하느님께 감사
정원
23:04New메뉴
(고화영)
인숙아 ! 정말 감격스럽구나 ! 가슴조이며 또 눈물을 글썽거리며 마치 소설을 읽으며 다음이야기가 어떻게 이끌어질찌
가슴 조이며 밤새워 읽든 기분으로 읽어내려 갔단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축복이다 이제는 택함밭은 하나님의 가정으로써. 자부심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소원한다 대견하다 ~~♡♡
정원
23:05New메뉴
(정기자)
인숙아 너의 이야기를 소설보다도 더 절절한 이야기를 잘 읽었다 정말 기적같은 이야기가 너의 결혼에서 시작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구나 모든 고난은 다 견뎌냈으니 앞으로는 행복한 길만이 있을거다 부디 건강하고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있어(뽀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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