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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에는 저희 어머니께서 경기도 평택의 PMC박병원 5병동에 입원하셨다가 퇴원하셨습니다. 그 곳에서 저는 사랑을 보았습니다. 1일 3교대하는 간호사, 간호조무사, 간병인들의 극진한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두락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신평교회의 강원구장로님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각박하고 힘든 세상 속에서, 그 분들의 사랑으로 온 마음과 영혼이 흠뻑 적셔져서 어머님께서 퇴원하실 때는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성도된 우리가 실천하며, 또, 우리 교회가 실천하고 이루어야 할 사랑의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그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세기 신학자 “칼 바르트”는 자신이 겪은 2차 대전의 경험을 근거로 복음에 대해, “오스트리아의 한 청년이 독일 나치가 두려워서 산속 동굴로 피했습니다. 마을로 내려가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수용소로 끌려갈 수도 있기에, 두려워서 숨은 겁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히틀러가 자살을 하고, 나치 독일의 패전으로 종전이 선언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모든 마을에는 자유와 평화의 물결이 흘러넘쳤고, 모든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서 그 행복을 만끽하며,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과는 달리 아직도 두려움 속에서, 추위와 헐벗음과 굶주림을 겪는 가운데, 동굴에서 숨어 지내며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그 청년에게 빨리 가서, 자유와 기쁨의 소식을 전해야겠다며, 동굴로 찾아가서 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그 사실을 믿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이 나치와 협력해서 자신을 잡아가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청년에겐 아직도 히틀러는 살아있고, 나치는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기쁨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고, 죽음의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에 대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합니다. 요 3: 16을 보시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선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신의 생명을 주실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하나님의 성품과 그 진리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스러운 하늘의 기업에 소망을 두며, 천국의 영광을 삶의 소망으로 삼고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간직하여 견고한 소망으로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믿음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부활하심처럼, 우리도 영원한 천국을 상속 받게 될 것에 대한 소망을 줍니다. 그래서, 믿음은 그 소망, 즉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이 땅에서 즐거움을 누리게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우리의 경건이나 거룩한 삶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으신 큰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것은, 세상 어디에도, 그 누구도 그리고, 무엇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소망인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5 - 6절을 보시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합니다. 연약한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부어졌습니다.
본문 5절의 시작을 보시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이라고 합니다. 이를, 표준 새 번역으로 보시면,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부끄럽게”라는 말은 “수치를 당하다, 얼굴을 붉히게 하다, 당황하다, 명예를 잃다, 수치스럽다”의 의미입니다. 이는, 성도가 가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는 소망은, 절대로 공허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에 근거하여, 절대로 공허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을 이어서 보시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 죽으심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확증이 되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본능으로는 그 사랑을 전혀 느끼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부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특히, 본문에서, “부은 바 되었다”는 것은, 구약에서 유래한 것으로, “무한한 충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단회적으로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부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가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성령의 역사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베풀어 주신 그 사랑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사랑을 알고 믿고 감사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소망이 부끄럽게 되지 않는 분명한 증거라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삶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본문 6절에서 우리의 주의를 끌게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이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선을 행할 능력도 없었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을 막아낼 능력도 없던 연약했을 때를 말합니다. 바로 이 때,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순간순간 필요에 따라 조금씩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성도의 마음에 풍성하게 부어 주십니다. 마치, 마른 땅에 물을 부어서 새로운 생명력을 공급하듯,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의 심령에 풍성하고도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성도된 우리를 도우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 부끄럽게 하지 않는 겁니다. 본문에서 “부끄럽게 아니한다”는 것은,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연약하고 경건하지 않은 모든 자에게 구원을 얻을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부으신 하나님의 이 사랑 속에서, 죄 사함의 구원과 영생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7 - 8절을 보시면,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라고 합니다. 이는, 드물긴 하지만 의로운 자를 대신해 죽는 사람이 간혹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정의를 추구하고 앞장선 사람 또는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합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가리켜,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죄인이나 악한 사람을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 8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며, 예수님은, 죄인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며,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그리고, 이 증거가,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더 이상 막연한 단어가 아님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을 아주 구체적으로 명확하고 확연하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세상의 그 누구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본문에서는 “확증하셨다”라고 합니다. 이는, “행동으로 증명했다”는 의미로, 헬라어로는 “슈니스테신”이라 하며, 그 의미는, “나타내 보여주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은 바울이 로마서를 쓰는 당시뿐 아니라,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 그리고 여기에도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자리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입니까?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입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주적인 사랑이며 인류 최대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에게 베푸신 최고의 선물이며, 영원한 축복입니다. “찰스 스펄전”이 시골의 한 농가를 방문했을 때, 마당 한 쪽에 풍향계가 있었습니다. 스펄전은 풍향계의 화살촉 밑에 있는 글씨를 보고는, 가까이 갔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를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농부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바람 부는 대로 바뀐다는 말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웃으면서, “아닙니다. 바람이 어떤 방향으로 불든지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플랫폼으로 삼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0 - 11절을 보시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문 10절을 보시면,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더욱”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화목하게 된 구원을 말합니다. 이 구원에 대해, 앞의 9절에서는,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모든 구속행위의 동기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있음을 역설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환난 중에도 소망을 굳게 잡을 수 있습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즐겁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인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는,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기쁨은 대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삶이다”라고 했으며, 또, “진정으로 신뢰할 만한 기독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세상을 흔들어놓는 기독교는, 그 중심에 기쁨을 갖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시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었다”며, 선언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존재였고, 원수된 관계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제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9 - 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계된 “말미암아”를 무려 5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행하는 “선”이 아닙니다. 세상의 윤리나 도덕, 종교가 아닙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칭의와 화목과 구원과 천국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