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도 시인의 시집 『나는 그를 지우지 못한다』(푸른사상 시선 192).
노동에 관한 사유를 근간으로 생명의 소중함을 존재론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시편들은 깊은 감동을 준다. 시인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시들은 우리 시대의 노동 현실을 구체적이면서도 진정한 시인 정신으로 반영한 것이기에 사회학적 상상력을 획득한다.
2024년 7월 15일 간행.
■ 시인 소개
1959년 사과 산지인 대구 반야월에서 출생하여 아버지가 마차를 끄는 모습을 보며 성장했다. 1978년부터 포항공단 철강회사의 기계사업부에서 근무하던 중 ‘민중시 낭송회’ 사건으로 1989년 서울로 좌천되어 기계 애프터 서비스(A/S) 업무에 종사하다가 회사의 합병으로 퇴직했다. 그 뒤 기계 수리 관련 자영업을 운영했다. 1985년 『시인』에 「삽질을 하며」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그리운 흙』 『귀뚜라미 생포 작전』 『마부』 『말들도 할 말이 많았다』 등이 있다. 한국작가회의 감사 및 연대활동위원장을 역임했고, 분단시대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 시인의 말 중에서
그런 다급한 우려로 긴 세월 가슴에 묻어둔 채 ‘언젠가는 써야지’ 하며 미뤄두었던 자전적 이야기 시 『마부』를 쓰게 되었고, 주변의 독려로 그 후속편인 『말들도 할 말이 많았다』를 내었다. 그 바람에 10여 년이 지나서 두 시집 이전의 시들을 이렇게 정리하게 된 것이다.
내가 시인을 꿈꾸면서 품었던 나와의 약속인 ‘자전적 이야기 시’를 두 권으로 정리해낸 것을 큰 다행으로 여긴다. 다시금 내가 걸어가야 할 세계와 존재에 대한 물음에 묵묵히 성찰할 일과, 조발성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인 아내의 치유를 위해 헌신하는 일만 남았다.
■ 작품 세계
그의 ‘말 연작’ 시집들은 자전적 경험에 그 밑바탕을 두고 있는데, 그 경험은 대부분 노동에 관한 것들이다. 이번 시집과 『귀뚜라미 생포 작전』은 노동에 그 중심을 두고 있는데, 시집에서 다루는 노동은 대부분 시인의 자전적 경험에 의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디에 조금 더 방점이 찍혀 있느냐의 차이일 뿐 정원도의 시는 기본적으로 노동에 관한 사유를 근간 삼는 시들이라 할 수 있다. (중략)
정원도의 노동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정원도 시를 관통하는 또 다른 테마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다. 정원도는 꾸준히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말해왔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생명을 말하는 방식에서 이전 시집들과의 차이가 감지된다. 이전 시집들에서 생명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다소 당위적인 존재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존재론적 물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아마 낙상 사고로 인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시인의 경험이 시에 녹아든 것이리라. 위에서 나는 이번 시집에서 다뤄지는 노동들 또한 시인의 자전적 경험에 의한 것이라 했는데, 그것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 진기환 시집 해설, 「노동하는 생명, 생명의 노동」 중에서
■ 추천의 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듯이, 한 시대가 가기도 전에 시가 먼저 낡아가는 것을 읽은 시인이라면, 자신의 시대를 깊고 넓게 살아내어 자기 몫을 찾아 노래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원도 시인은 농경시대 끄트머리에 대구의 변두리에서 마부(馬夫)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산업시대에 들어 공업고등학교와 현장에서 배워 익힌 “기계와의 동거 30여 년” 동안, “숨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아픈지 아는”(「증발」) 기계 노동의 땀으로 건실하고 견결하게 삶을 일구어온 중견 시인이다. 1980년대 중반, ‘포항우리문화연구회’ 활동으로 하루아침에 서울로 쫓겨 올라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곁눈질하지 않고 시대정신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묵묵히 삶을 일구어온 시인은, 그의 뛰어난 시집 『마부』와 『말들도 할 말이 많았다』에서 생생하고 역동적인 언어로 자기 몸에 체화(體化)된 시대의 얼굴, 곧 자기 삶의 역사성을 찾아내어 아름답게 노래했다. 시대가 허여한 그의 몫이었다.
이번 시집에는 그가 ‘밥’을 위해 “고장 난 기계 위를 맴돌다 추락”(「낙상 4」)하여 의식을 잃고 생사의 갈림길을 오간 재해(災害)와, 온갖 신고(辛苦)를 겪어온 일상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들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하루하루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계하”고, “쓰디쓴 노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의 노동을 “젖은 눈의 거룩한 노동”(「거룩한 노동」)으로 읽어내는 데서, 나는 시인으로서 뭇 생명에 대한 애틋한 연민을 품은 그의 깊은 눈과 넉넉한 가슴을 읽고 있다. 따뜻한 시인의 시가 이러하다.
― 배창환(시인)
■ 시집 속으로
나는 그를 지우지 못한다
정원도
딱 1년만 일 더 하고 접는다더니
갑작스레 연락 불통
쉬쉬하던 사이에 증발해버린 당신
아직도 연락처를 뒤적이다 보면
스쳐 지나는 옛 웃음은 그대로인데
나는 그를 지우지 못한다
우리가 곤죽이 되어 건너다보던
해거름 노을 건너 사라진 지도 오래
명절 직전 고향 갈 채비로 들떠 있던 날
포클레인 바가지에 올라타고 컨베이어를 용접하다가
바가지가 흔들 하는 바람에
일 년 전 내가 낙상당한 바로 옆자리
내 드러누운 정신이 혼미할 때
구급차를 부르고 실어주었다는 그가
다시 실려 가서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자리
예순이 훌쩍 넘어 힘들어도
늘 웃는 얼굴로 조금만 더 하고 가야지 하더니
다시는 쓸모없어진 그의 연락처를
나는 끝끝내 지우지 못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