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기록 3조목 (북송 말기) : 염입본 서역도, 송태종 대상국사 친필 사액, 고려 사신 남창 글
2024년 3월 19일
남송 시기의 필기 오증(吳曾)의 『능개재 만록能改齋漫錄』(十八卷)을 읽다가 우연히 고려에 관한 기록 3조목이 있어서 간략하게 번역하였습니다. 고려사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송나라 시기에는 유서(類書)와 필기(筆記) 등 기록물이 아주 많습니다. 아마도 심심할 때 읽어보면 재미있고 몰랐던 이야기들이 많아 송나라 역사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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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 자료 3조목 (南宋、吳曾) 『能改齋漫錄』十八卷에서
宋、吳曾,『能改齋漫錄』,十八卷
2024년 3월 18일
1. 당나라 화가 염입본(閻立本, 601-673)의 서역도(西域圖) 모본을 고려에서 송나라에 보냈습니다.
고려에서 보관하였던 당나라 화가 염입본(閻立本, 601-673)의 서역도(西域圖) 모본이 송나라 말기에 되돌아왔다고 합니다. 비록 모본의 상태가 나빴으나 말이 젖을 먹이는 모습과 머리를 깎은 사람들의 모습이 모두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卷十二記事
○閻立本畫
「博陵閻公,總章右丞相,終於中書令。藝兼後素,時謂丹靑神化,此其跡也。唐人張彥遠,出鳴珂三相家。風流博雅,著書記歷代畫,第閻上品。而『西域圖』在所錄。又言:“王知慎亦拓之”,則傳世者非一本。此弊刺諸馬多闕,而剪髮二人全失之。比見摹本,自高麗來,採筆殊惡。而馬之瀝乳者,與人之剪髮者皆全。信外國自有唐時摹完本,今取其全者備見之。且以浚都世臣大家,秘藏圖史,以奇勝相高者極衆,至於閻跡乃少遇。其惟呂申公家有唐太宗『步輦圖』,引祿東贊對請公主事,皆傳寫一時容貌。贊皇李衛公小篆,其語採色神韻,與此同出一手。而張記亦曰:“時天下初定,外國入貢,詔立本寫外國圖。”而注指西域,則奉詔所爲者,即謂是耶?信眞跡果不足疑。舊傳其書狄梁公之跡,觀其端重和勁,稍不類褚、薛,亦或當然。竊嘗愛彥遠多識,著論得雅馴。引謝安言,韋誕書凌雲台,已釘榜,籃懸去地二十五丈。及下,鬚眉盡白,因戒子孫絕楷法。而王子敬正色詆之曰:“仲將魏大臣,豈有此?”信如所說,魏德之不興,乃以子敬爲知言。因論閻令既爲星郎,不當有臨池之辱。況太宗治近侍有拔紹之恩,接下臣無撞郎之急。豈得不通官籍,直呼畫師?以至丹靑之譽,非輔相之才。丹靑固不足以輔相,而所以爲輔相,乃不在丹靑。淺薄之俗,舉一廢百。而輕藝嫉能,一至於此,良可於邑。由是言之,窮神之藝,自不妨閻令之賢。斯人果賢,適增畫重。愚因取其說而並書之。“元塘年辛未九月,龍眠山人李公麟伯時題。”右伯時「跋閻立本西域圖」,廬陵王方贄侍郎家有之,其孫襄夔玉寶藏之。大觀間,開封尹宋喬年言之省中,詔取以上進。時廬陵令張達淳、郡法掾吳祖源被檄委焉。因竊摹之,於是始有摹本。有張天覺跋云:“崇寧甲申十二月甲寅,夔玉舟過善溪,盡得其家藏閻令、王維、王宰、韓干、邊鸞、周鴰閱之。佛書曰:‘心如工畫師。’畫之妙出於心,猶足以濡毫設色,造化物象。況心之妙,薰以正法,無間斷哉。”信安程俱致道有詩云:“大塊浮空轉兩輪,越南燕北共毫塵。齊州古莽應相笑,夢覺何人定識眞。”黃岡何頡之斯舉亦有詩:“窮荒未信子年欺,自笑山林老一枝。海上常思龜殼倦,天涯欲化鳥工窺。丹靑閻令如曾到,氣俗張騫舊獨知。公喜著書尤博雅,山經暇日補殘遺。”
참고 자료 :
宋、何頡之,「觀李伯時(李公麟)題閻立本『西域圖』」︰
窮荒未信子年欺,自笑山林老一枝。
海上嘗思龜殼卷,天涯欲化鳥工窺。
丹青閻令如曾到,風俗張騫舊獨知。
公喜著書尤博雅,山經暇日補殘遺。
2. 송나라 태종의 대상국사(大相國寺) 친필 사액을 고려에 갖고 왔습니다.
대상국사는 당나라 예종(睿宗 李旦, 662-716)이 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잡은 뒤 710년에 즉위하였다는 곳이었습니다. 송나라 황실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여겼던 절이었고 송나라 태종(宋太宗 趙炅, 생졸 939-997, 재위 976-997)이 대상국사에 “대상국사는 뛰어난 열 곳 가운데 하나이다.(寺十絕之一)”고 쓴 사액(賜額)을 달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휘종(徽宗 赵佶) 정화(政和, 1111-1118) 연간에 대상국사를 궁궐로 개편하자 고려 사신이 송나라 태종의 글씨 사액을 달래서 갖고 갔다고 합니다. 나중에 궁궐을 다시 절로 복원하고 사액을 내렸다고 합니다.
卷十三記事
○大相國寺額
大相國寺舊榜,太宗御書“寺十絕之一”。政和中,改爲宮,御書賜額。舊榜遂爲高麗使乞歸。其後復改爲寺,御書仍賜今額。
3. 고려 사신이 배를 타고 우연히 양자강을 거슬러 현재 강서성 남창까지 갔을 때 양해해달라고 지어 올린 재미있는 글.
고려 사신이 북송 숭녕 연간(1102-1106)에 배를 타고 송나라에 들어갈 때 서해 바다를 건너 현재 중국 영파(寧波) 항구에 내려 개봉(開封)으로 갔다고 합니다. 때로는 영파에서 순풍을 만나면 양자강을 거슬러 현재 강서성 남창(南昌)까지도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창까지 올라가면 남창 지역 지방관에게 상황 보고서를 올리면서 양해해달라고 지은 짧고 재미있는 글이 남아있습니다.
고려 사신이 양자강을 거슬러 남창까지 갔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당시 송나라 내륙지방의 사정과 몽고 등에 관한 군사정보를 얻으려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숭녕 연간에 북송이 벌써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북송 말기 휘종 숭녕 연간(1102-1106)에 고려국 사신이 바닷길(海路)를 따라 명주(明州, 현재 寧波)에 들어와서 입공(入貢)하며, 우연히 순풍은 타면 양자강 뱃길을 따라 남창(현재 江西省 南昌)까지도 들어온다. 이럴 때는 고려 사신이 상황 보고서를 올려 말하길 “배를 몰아 양자강 물길을 따라 거슬러왔는데 먼 나라(고려)에서 송나라 황제 궁궐((天闕, 象魏))에 찾아오려고 하였습니다. 좋은 경치(桃源)를 바라보며 오다가 길을 잃어 신선 지역(仙鄉)에 잘못 들어왔습니다.” 고려 사신들이 배를 타고 남창까지 와서 많이 놀란 가운데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올렸다고 합니다.
卷十四記文、類對
○高麗至豫章先(先,申)狀
崇寧中,高麗自明州海道入貢,偶乘風,自江路至豫章。其先(先,申誤字)『狀』云:“泛槎馭以尋河,遠朝天闕。望桃源而迷路,誤入仙鄉。”自驚漂泊之餘,獲奉笑談之雅。
淸、潘永因,『宋稗類鈔』,卷二十一︰
崇寧中,高麗自明州海道入貢,偶乘風,自江路至豫章。其申狀云:“泛槎馭以尋河,遠朝天闕。望桃源而迷路,誤入仙鄉。”自驚漂泊之餘,𫉬(獲)奉笑談之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