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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7편 1절-2절.
57편.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1절-2절: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1절: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거다. 우리는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이 내용을 구별해야 한다. 육신, 육체, 육의 생각으로 불쌍히 여기는 면이 있고, 영의 생각을 가지고 불쌍히 여기는 면이 있다.
지하철 역 계단에 보면 어린아이가 구걸을 하기도 하고, 전철 안에서 소경이 구걸하는 일도 있는데, 물질적으로 어렵게 사는 이런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은 육의 눈을 가지고 불쌍히 여기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이 이런 생각으로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이 이와 같은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육적인 면을 불쌍히 여기는 거다.
믿는 사람이 영 주격, 영의 생각을 가지고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가 있고, 육의 생각을 가지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기도가 있다. 그러면 육의 생각을 가지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다면 어떤 내용의 기도가 될까? 육신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하게 된다. 그러면 영 주격으로 기도하는 기도는 어떤 면으로 기도를 할까? 영적 신앙생명을 연장해 달라는 기도를 하게 된다. 여기에는 이룰구원이 들어있다.
우리 기독자들이 이룰구원 면에서 신앙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기도를 할 때는 육신적인 면은 굳이 해석할 필요가 없다. 성도의 육신 면은 누가 잡고 있느냐? 주님 당신이 알아서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생명을 연장해 달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러니까 믿는 우리가 어떤 생명보다 어떤 생명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하느냐? 또 우리 주님은 우리의 어떤 생명보다 어떤 생명을 더 귀히 여기시느냐? 영의 생명을 더 귀히 보신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의사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기도를 한다면 뭐라고 기도를 할까? 육신생명을 살려달라는 기도를 할 거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몸이 아플 수 있는데, 병원에 가니 ‘당신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라고 사형선고를 한다면 뭘 위해 기도를 해야 하느냐? 죽기 전까지 실컷 먹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할까? 어떤 기도가 제일 고상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기도겠느냐?
믿는 사람이 의사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잘 됐다. 빨리 데려가 주십시오’ 라고 하고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듣고 빨리 데려가실까, 아니면 ‘이놈이 죽을병이 들었어도 회개를 안 하는구나’ 하며 죽을 때까지 고통 속에 넣을까?
신앙생명의 연장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육신생명이 죽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놓고 그건 염려하지 않고 자기가 죽기 전까지 성경도 보고 기도도 하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동안 걸어온 것에 대해 구석구석마다 구비구비마다 잘못된 것에 대해 회개를 한다. 이게 신앙생명을 연장하는 기도다. 이렇게 살다보면 육신생명도 연장이 될 수도 있는 거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런 것은 없이 ‘내가 죽으면 이 자식들이 어찌 살꼬? 장가도 못 보내고 시집도 못 보내고 죽는구나’ 이런 생각만 한다. 아무리 죽을병이 들었어도 강한 신앙정신이 들어가면 그 가운데서도 남은 생을 믿음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
진리성도 다윗이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은 어느 면이 다치지 않도록 긍휼히 여겨달라고 하는 것일까? 다윗이 육신생명이 안 죽으려고 도망을 다니는 거냐? 믿음 없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면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도망을 다니게 한 것은 그 안에 다윗에게 허락된 이룰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것 때문에 도망을 다니는 거다. 이게 아닌 육신생명 대 육신생명으로 생각할 것 같으면 다윗은 사울 왕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거다. 환난과 시험과 박해가 왔을 때 신앙이 있는 사람은 육 위주의 기도보다 영 위주의 기도를 올린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어디로 피한다는 거냐? ‘이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구원 속에 피하리이다’ 이 말이다. ‘하나님의 품 안에 피하리이다’ 이 말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다윗이 어디에 피해 있는 것으로 보이느냐? 굴속으로 피했다. 물론 다윗이 굴속에 숨은 건데, 그러나 다윗의 신앙 주격적 정신 사상은 어디에 피해 있느냐? 하나님의 품속이다.
이런 다윗의 입장에서 말하는 재앙은 어떤 재앙일까? 육 위주로 생각하는 재앙이냐, 영 위주로 생각하는 재앙이냐? 영 위주다. 다윗이 도망을 다니느라고 육신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육 쪽의 재앙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을 하게 되면 다윗의 신앙은 없어져 버린다. 다윗의 신앙은 못 보는 거다.
예수님이 장로들과 서기관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과 로마군인들에게 붙잡혔을 때 그들이 수건으로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누가 때렸는지 알아 맞혀봐라’ 하며 놀릴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이 되었을까? 안 믿는 사람이 이런 일을 당하면 그 마음이 어떻게 작용을 하느냐? ‘내가 이놈들을 죽여 버려야지’ 그럴 거다. 예수님도 안 믿는 사람들처럼 그런 마음이 들어있었을까, 아니면 ‘참아야지’ 이게 들어있었을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 삶의 정신적 집중성이 어디로 들어가 있느냐? 당신의 택자들의 구원에 들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무리들이 아무리 당신을 비방하고 모욕을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마음으로 그걸 다 이겨낸다.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겨내는 게 아니라 당신의 백성을,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겨낸다. 이게 이해가 되느냐?
부모가 가난한 세월을 보내며 연속적으로 육체의 고난을 겪을 때 누구를 사랑함으로 그걸 이겨내느냐? 집에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고 아이들을 사랑함으로 그걸 이겨낸다. 고난을 당할 때 사랑이 아니면 그 고난을 못 이긴다. 육신의 고난만 아니라 마음의 고난도 사랑이라야 이겨내는 거다. 신앙 면으로도 고난 가운데서도 신앙 믿음을 굽히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이겨내는 거다.
우리가 다윗이 재앙을 이기는 것을 볼 때 주님의 심정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의 심정을 느끼듯이 다윗도 자기 속에서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아는 거다. 그래서 우리도 다윗의 신앙과 같은 감동 감화성으로 들어가 있다면 주님의 성격 성질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거다.
진리의 성도들에게 시련과 연단이 많은데, 이것을 이길 적마다 인간 자기는 실력자가 되고 능력자가 된다. 그래서 자기에게 고난이 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한 고비 한 고비를 넘을 적마다 깨달음이 있으니 감사한 거다. 그래서 또 다른 고비가 오면 ‘아, 나를 또 깨닫게 해 주고 올려주시려고 하는구나’ 하며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서 이기고, 이러면 또 영적 실력이 올라가니 또 감사하고, 이렇게 해서 감사의 연속이 되는 거다. 그래서 이 면을 염두에 두고 항상 감사하라고 하신 것이고,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 거다.
우리가 고난과 재앙의 시험을 당하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처럼 온전자로 만들어 주기 위해 깨닫게 해 주시려는 게 있고, 두 번째는 사람을 통한 사단 마귀의 시험이 있고, 세 번째는 몰라서 스스로 당하는 시험이 있고, 네 번째는 성도가 신앙을 바로 지키려다 보니 당하는 것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것을 알고 시험을 당하게 되면 그 시험을 이길 수 있지만 모른 채 당하면 원망소리가 나오게 되고, 신앙이 아닌 방법을 쓰게 된다. 이런 사람은 타락적 주관성이 강해서 좀처럼 신앙이 들어가지 않는 교만한 자가 돼버린다.
우리는 자기가 잘 해서 건 잘못해서 건 자기에게 고난이나 재앙이나 시험이 왔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잡고 신앙생명 신앙정조를 빼앗기지 않도록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구조요청을 하고,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요동치 말아야지 세상 쪽으로 기울어지면 안 된다.
성도에게 오는 모든 재앙은 주님을 잘 믿는 사람으로, 영적인 면이 잘 되라고 주시는 좋은 약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오는 모든 시련과 고통과 재앙은 깨닫고 보면 다 감사할 일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다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못 깨달으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는 것을 자기가 재앙으로 바꿔놓고 만다.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자기에게 어떤 상황이 닥쳐도 진리를 붙잡고 진리로 자기 자체화 시키면서 좁은 길 생명 길로 가는 것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한 거다. 이런 사람이 재앙을 피할 수 있다. 토굴 속에 들어가서 금식기도를 하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고행을 하는 것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는 게 아니다.
자기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이것을 피하게 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많이 했을 거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하나님께 피하는 거냐? 사건이 자기를 피해가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거고, 자기에게 사건이 왔을 때 이 사건을 역이용해서 사건을 이기고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가는 게 주님께 피하는 거다. 이게 영능의 실력이요 진리로 얻어지는 지혜로써, 이렇게 될 때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건 환경을 여하히 처리하고 넘어가게 된다.
‘내일 준다. 모레 준다’ 하며 워낙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은 빚을 받을 사람이 자기 집으로 직접 찾아올 것 같은 낌새가 느껴지면 미리 다른 곳으로 피해버린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이라면 피할 생각을 하느냐? 그 사람이 오면 ‘내 사정이 이렇다’ 라고 하면서 맞대서 잘 얘기를 하면 빚 갚는 날짜를 미뤄주기도 한다. 이것을 자기에게 신앙 면으로 끌고 와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처신을 생각해 봐라. 하나님 앞에 어느 것이 비굴하고, 어느 것이 옳은 거겠느냐?
2절: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왜 부르짖느냐? 뭘 이루니까? 모든 것을 이루시니까.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는 거다.
그렇다면 다윗 자기의 모든 것이 뭘까? 다윗은 그만두고 오늘날 자기의 모든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든 것을 이루시느냐, 한두 가지만 이뤄놓고 다른 건 모르겠다고 하시느냐? 다윗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나의 모든 것’이라고 하는 거냐? 첫째는 육적인 세상살이의 모든 조건을 말한다? 두 번째는 영적인 면에서의 모든 조건이다? 세 번째는 육적인 면과 영적인 면 둘 다다? 두 번째가 정답이다.
육적인 면에 관한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주권적으로 하시는 건데, 육신의 생활이나 사는 것으로 해석을 붙이게 되면 틀려진다. 왜냐? 그건 따라오는 거니까. 따라오는 것을 주격적으로 해석을 하면 틀려진다. 따라오는 것을 자꾸 주격적으로 말을 하게 되면 슬며시 무게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주님께서 ‘너희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라’고 했다. 주님께서 이 말을 하신 이유가 뭐냐? ‘너희들은 육신의 밥을 안 먹고 사는 자들이다’ 이 말이냐? ‘육신의 밥에 관한 말이냐, 아니냐?’ 하고 말을 하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가 알아서 하시는 것을 인간들이 자꾸 말을 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더 이상해진다.
물질세상은 인류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만들어 놨다. 왜 사람부터 먼저 만들어 놓지 않고 먹을 것부터 먼저 만들어 놓은 거냐? 먹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이고, 인간은 두 번째로 중요하기 때문에 세상을 만든 후에 인간을 만든 거냐? 먹을 것부터 만들어 놔야 인간을 만든 직후에 인간이 이것을 먹고 살 수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우리 인간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세상을 가꾸고 이용하고 활용하고 사용하면 되는 거다. 이방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미 있는 세상 것을 잘 이용 응용 활용하면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구할 것이 무엇이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다. 즉 먼저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하나님의 도덕성을, 하나님의 능력성을 내가 가지는 거다. 하나님의 속성을 입으면 이 하나님의 속성에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것이 나오게 된다. 이러면 세상 것을 다 이용 활용성이 나오게 되는 것이니 뭐가 부족하겠느냐?
믿는 우리가 생계의 방편으로 공부하고, 일을 하고, 장사도 하고, 취직하는 것은 이런 것들로 통해서 사람들과 사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일을 통해서 사람을 진리로 정복을 하라는 거다. 이 속에는 자기의 귀한 것이 다 들어있다. 예를 들면 자기가 직장에서 정직하게 열심히 일을 해서 사장의 마음에 쏙 들게 되면, 즉 사장을 정복한다면 다른 직원들보다 더 대우를 받게 된다. 일을 매개물로 사람을 사귀게 되면 세상살이가 참 부드러워진다. 이건 없이 늘 ‘돈 돈’ 하게 되면 이 사람은 굉장히 무디고 빡빡해진다.
부모의 말을 안 듣는 자식이 부모에게 뭘 달라고 자꾸 떼를 쓰고 있으면 부모로서 때려주고 싶을까, 칭찬을 해 주고 싶을까? 신앙의 이치도 똑같다. 이 세상은 우리의 이룰구원에 이용하고 활용하는 재료감이다. 그런데 속화된 기독자들 중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망각하고 세상 것에 목적을 두고 그것을 이뤄달라고 떼를 쓰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어떻게 하시겠느냐?
다윗은 신앙심이 참 깊다. 계:에 다윗을 비유로 주님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열쇠는 누가 가지느냐? 자기 집에 온 손님이 가지고 있느냐, 주인이 가지고 있느냐? 주인이다. 주님께서 다윗의 열쇠를 가졌다는 것은 주권, 능력을 말한다. 즉 모든 것을 다 맡고 있다는 거다. 이 분이 우리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먹고 마시는 것은 당신이 다 책임을 진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생각을 해 봐라. 첫째, 이것저것을 해도 다 안 돼서 목사님을 찾아가서 ‘왜 이렇게 안 되지요?’ 하고 물으니까 ‘말씀대로만 해 봐라. 그러면 왜 안 되겠느냐?’ 라고 말했다면 묻는 교인이나 대답을 해 주는 목사가 둘 다 육의 생각이냐, 아니면 한 쪽은 영의 생각이냐? 둘 다 육의 생각이다.
두 번째는 위의 예와 반대로 자기가 무엇을 해도 다 잘 될 때 다 잘 되는 이유가 자기가 말씀대로 하니 다 잘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이게 영의 생각일까, 육의 생각일까? 육의 생각이다.
세 번째는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 뭐든지 잘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기 때문이고, 뭐든지 잘 안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안 해서 그런 거냐? 요즘 중국이 빠르게 발전을 한다는데 이것은 중국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서 그런 거냐?
성도다윗은 어느 면이 잘 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자기의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신다고 말하는 것일까? 자기의 육적인 면을 염두에 두고 말을 하는 것이겠느냐, 영적인 면을 염두에 두고 말을 하는 것이겠느냐? 영적인 면이다.
영적인 면을 염두에 둔다고 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어떻게 육적인 면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영적으로만 사느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래도 먹을 것도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영적인 것만 생각을 하느냐?’ 라고 하는 이 ‘그래도 병’은 요즘 교인들의 신종 병이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그래도’를 붙이지 않아도 ‘그래도’를 붙이는 사람처럼 하루 세 끼를 잘 먹고 산다. 그러니까 ‘그래도’를 붙이지 않아도 되는 거다.
오늘날 우리 기독자들이 본문의 성경구절을 보면서 어느 면을 염두에 두고 ‘나의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을 하느냐? 다윗의 입장과 내 입장이 같다면 참 좋은 거다. 영적인 성도다. 다르다면 육적인 성도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은 설령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임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시간 따라 변해진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나의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건 다윗과 같은 마음이 아니다. 다윗은 세상 것을 통해서 다각적으로 구원을 이뤄가는 신앙실력을 염두에 두고 ‘나의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