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의 Shutter's Mill과 금의 첫 발견자 James W. Marshall
"금이다! 금이야!"
"어, 진짜 금이네!"
California의 American river 강가 한 작은 마을 Coloma의 Sutter's Mill에서는
두 사나이가 이 뜻 아닌 금의 발견으로 흥분에 들떠 있다. 주인 John Shutter와
그의 목수 James W. Marshall이 그들이다.
그들은 여기저기 주변을 뒤져 금 한 움큼씩을 더 찾아낸다.
Shutter는 금덩이를 쥐고 벌벌 떨고 있는 Marshall을 데리고 제재소 안으로 황급히
들어가 조용히 할 것을 당부한다.
"이거 소문 나면 큰일 나니까, 우리 입 다물고 침착해야 되네."
"알았어요. 우리 두 사람뿐이니까요."
때는 1848년 1월 24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금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금의 소문이 샌 것이 삽시간에 미대륙 전역에
퍼져나간다. 그 조용하던 강가 마을은 하루아침에 인산인해로 뒤덮힌다. 소문이란 참
무서운 것이어서 매스컴도 별로 없던 그 시절에 어떻게들 알았는지 California의 강과
산에는 온통 금을 찾는 사람들로 들끓는 것이었다. 특히 뉴욕 등 저 동부지역 사람들은
수만리 대륙을 넘고 넘어 죽기로 금을 찾아 장정에 오른다. 일반 노가다는 말할 것도 없
고 공무원, 교사, 신문기자, 군인, 의사, 판사, 목사, 선원, 깡패, 사기꾼..........황금에 눈
이 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서부로 서부로 그냥 몰려가는 것이었으니......
그 뿐인가 소문이란 참 대단한 것이 어두운 밤 하늘에 등불 빛에 모여드는 벌레와도 같이
외국에서까지 수많은 사람이 California를 찾아 온다. 유럽, 남미, 호주........ 그리고 여기
중국인들이 결코 빠질 수 없었고. 어림짐작으로 1848년에서부터 제일 많이 몰려든1849년
(Forty niner)을 포함해 7년간 모여든 수는 30만명으로 10만 정도는 외국인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그 때 벌어들인 수입 총액은 당시 돈으로 5억 5천만 달러 정도라고 하는데 현재 가
치로는 수백억 달러가 나가는 돈(Gold worth tens of billions of today's dollars)이라 한다.
그러면 그들 대부분은 한 밑천 잡았어야 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같다. 대개 아무 준
비 없이 온 사람들이라 숙식 문제가 우선 어려웠다. 개별 채취자도 있었고 광산 노동자로
일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하루 종일 거친 노동에 시달리면서 계속된 빈약한 식사로 영양실
조에 허덕였고 밤에 자러 들어가면 방엔 독사가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기 일쑤였
으며 천정엔 비가 새고 있는 형편이었으니. 그 뿐인가, 원주민들(인디안)의 위협이 간헐적
으로 반복되어 그들 심신은 편할 날이 없다. 또 그들이 캐는 금은 중개업자들에 의해 금값이
아닌 똥값으로 거래되곤 했으니 무슨 한밑천을 잡는다는 말인가.
그 때 이들 사이에서 불려지기 시작한 노래가 바로 이 'Clementine'이라니 동병상련의 그들
애처로운 심사가 노래 속에 실려 널리 불려진 모양이다.
Sanfrancisco에서 동북방향으로 Sacramento강을 따라 100km 정도 올라가면
Sanfrancisco 주도인 Sacramento시가 나오는데 여기서 Sacramento강은 두 줄기로 갈라진다.
본류는 Oregon 쪽을 향해 북으로 벋어 있고 한 줄기는 동으로 나 있는데 이게 American River
로 저 Sierra Nevada 산맥에서 발원한 물줄기인 것이다.
강을 따라 동으로 30km 정도 좀 넘게 올라가면 Folsom Lake가 나오고 여기서 American river는
North Fork와 South Fork로 갈라진다. South Fork 줄기를 따라 동으로 30km 정도 못되게 계속
올라가면 Gold Rush의 진원지인 Coloma 마을이 나오는 것인데 거기엔 저 사진과 같은 Shutter's
Mill의 초라한 제재소 건물이 세워져 있다 한다.
Clementine ㅡ Mitch Miller Chorus
In a cavern, in a canyon 어느 산골짜기 동굴 속에는
Excavating for a mine 사금을 캐면서
Dwelt a miner forty-niner 한 포티나이너 광부가
And his daughter Clementine 그의 딸 클레멘타인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네.
(refrain)
Oh, my darling, oh, my darling -오 내 사랑, 오 내 사랑
Oh, my darling Clementine 오 내 사랑 클레멘타인아
Thou are lost and gone forever 넌 영영 가버리고 말았으니
Dreadful sorry,Clementine- 가슴 메어지게도 서운하구나, 클레멘타인아!-
Light she was and like a fairy 그 애는 가쁜하고도 요정 같았다네.
And her shoes were number nine 그리고 그 애 신발은 9문짜리였는데
Herring boxes without topses 청어 상자로 만든 덮게 없는 샌들이
Sandals were for Clementine 클레멘타인의 것이라네.
(refrain)
Drove her ducklings to the water 그 애는 매일 아침 9시만 되면
Every morning just at nine 새끼 오리들을 몰고 물가로 가는데.
Hit her foot against a splinter 나무 끌텅에 발이 걸려
Fell into the foaming brine 거품 이는 깊은 물 속에 떨어졌다네.
(refrain)
Ruby lips above the water 루비빛 그애 입술은 물 위에 떠 있고
Blowing bubbles soft and fine 부드럽고 고운 물거품이 일렁이고 있었는데
But alas, I was no swimmer 그러나 이를 어쩌랴, 난 수영을 할 줄 몰랐으니!
So I lost my Clementine 그렇게 난 내 딸 클레멘타인을 잃어 버렸다오.
(refrain)
Then the miner, forty-niner 그 때 저 포티나이너 광부는
Soon began to peak and pine 금새 바싹 여위어져 갔는데
Thought he oughta join his daughter 그는 딸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어라.
Now he's with his Clementine 지금 그는 그의 딸 클레멘타인과 같이 있다오.
(refrain)
In my dreams she still doth haunt me 꿈 속에서 그 애는 아직도 나타나는데
Robed in garlands soaked in brine 바닷물에 젖은 화환을 쓰고 있는 것이어라
Though in life I used to hug her 살아서는 그 애를 늘 안아 주곤 했지만
Now she's dead, I draw the line 지금 죽었으니 그 애 모습이나 그려 보는 것이라오.
(refrain)
우리나라에선 1920년대 소설가인 박태원(아래 추기내용 참조 바람)에 의한 다음과 같은 번안 가사로 이 노래가 불려진다.
이 또한 훌륭한 내용이다. 우리 민족의 정서로는 이쪽이 더 좋아 보인다.
클레멘타인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 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딜 갔느냐
.......................................................
(나중에 다시 확인한 내용을 추기한다.)
클레멘타인의 가사를 번안한 분은, 소설가 구보 朴泰遠(박태원)(1909-1986)이 아니라, 음악가 朴泰元(박
태원)(1897-1921))이다.
朴泰元은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수학도중, 폐결핵에 걸려 귀국하였으며, 고향인 대구 자택에
서 24세의 나이로 1921. 8. 5. 요절하였다. 그의 동생이 유명한 음악가인, 연세대 음악대학장을 지낸 朴
泰俊(박태준)(1900-1986)이다.
출처; cafe daum art hill 박다니엘(소설가 박태원의 자제)의 글에서.
그러니까 이런 내용은 소설가 박태원의 자제에 의해서 밝혀졌다는 것인데 고마운 일이다.
(2013.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