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재 묘각으로 진입하는 저수지 제방 입구에는 2012년 연하마을 태생 안두식 등 주민들은 2012년 12월 망향비(望鄕碑)를 세웠다.
현재 없어진 묘각 하산재로 진입하는 교통편은 매우 좋아졌다. 2008년 녹색로(고속화도로)가 완공되었다. 연하동 저수지를 확대 축조하면서 제방도로가 확장되어 묘각에 진입하기 쉬워졌고, 거개마을과 연하마을로 진입하는 도로가 새롭게 생기고 확장되었다. 또한 묘각은 남향으로 저수지는 호수가 되고 전방에 제암산이 자리하고 있어 주변 경관은 뛰어나다. 다만, 2000년 하산도문계에서 철거를 결정할 당시 재원이 열악하여 재건을 생각할 여건이 되지 않아 부득이 2001년 철거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에서 한번 없어진 선대 유산을 재건하기는 더더욱 어려워 너무나 큰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는 항상 멀리 봐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이밖에 1910년 장흥군 경술지 용계방 내용에서는 운암재(雲巖齋)는 "在驛基護軍魏德寬墓閣後孫世彬世翰刱䢖"이라 확인된다. 이는 역기(부산면 호계리)에 위치한 위덕관(1547~1628)의 묘각 운암재는 후손 벽우당(辟憂堂) 세빈(1646~1726)과 육화당(六和堂) 세한(1657~1742)에 의해 부산면 호계리 묘소 아래 창건하였음을 기록하였다. 창건 시기는 1690년경으로 추정되며, 4칸으로 운암종중에서 관리해와 전해져 매년 음 10월 4일 가을 시제에서 사용해 오다가 건물이 낡아 1970년경 종중에서 철거하였다. 이런 근거로 따르면 천관산 장천재 다음으로 창건한 묘각으로 사료된다.
■ 하산재중건기(霞山齋重建記)
하산재는 우리 위씨의 중조 고려태보 충렬공 묘하의 재계하고 자는 장소인데, 근고에 또한 재의 동편에 설단하여 시조 회주군과 고려말 충신 지후공을 향사하였다. 세월이 오래되어 퇴패되었고 자손들이 번창하여 수용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지나간 건국 계사 1953년에 드디어 혁신하고 확대하였으니 대저 이 같은 큰일을 마침은 합력이 아니고는 불능한 것이요, 이 같은 합력은 원조를 추모함이 깊지 아니하면 불능한 것이니 이를 가히 쓰지 아니할 수 없다.
그윽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우리 충렬공은 4대 왕조를 차례로 섬기면서 ①계옥(啓沃)이 크고 많았으며 곧은 절의와 맑은 덕은 조정 백관들을 벌벌 떨게 하였으니 나라에 있어서는 실로 주석(柱石)이요, 겨레에 있어서는 이 산두(山斗, 태산과 북두)였다. 능히 휘업(徽業)을 열어 수10세를 빛나게 하였으니 조선께서 묵묵히 후덕을 내려 천여년 후예를 비호해 줌이 태산과 교악(喬岳) 같음이 있으니 비록 그 운동은 나타나지 않지만 공리(功利)가 물에 미친 자 넓고도 길다.
이에 고려조에는 명경(名卿)과 대료(大僚)가 대대로 선혁(嬋爀)하였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관작이나 문벌이 고려조보다는 못하나 충의와 문장 도학으로 당시의 중망(重望)을 한 몸에 차지한 자 세상에 드물게 태어났으며, 그 나머지 문무의 백관은 손으로 다 꼽을 수가 없으며, 지금에 이르러 비록 세상에 현요(顯耀)한 이는 없으나 장자는 오직 효우와 학문으로써 그 자제를 힘쓰게 하고 소자는 또한 떳떳함을 쫓아 순박함을 다스려 스승의 가르침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그 조상의 후손됨을 잃지 않으려고 기약하니, 이에 향린 여러 고가의 해범(楷範)도 일찍 우리 장흥위씨보다 먼저 하지 못하니 대저 누가 시켜서 그랬을까.
우리 조상께서 덕을 기르고 인을 쌓은 보답과 후손들이 근본을 두텁게 하고 사실에 힘쓰는 효과가 아니겠는가! 이는 실로 백배나 옛 보다 많으나 다만 이제 한갓 귀현(貴顯)함이 잠시 쉬고 있다. 다만 세변이 날로 심함이 하루 같은지라 무릇 우리 조상의 후손된 자 또한 마땅히 옛 보다 배나 추선하고 유후(裕後)한데 힘을 쏟는다면 하늘에 계신 영혼께서 항상 복을 내릴 것이요, 재를 같이한 겨레도 길이 그 아름다움을 간직할 것이며 재가 끊임없이 이어져 보존됨은 다음 일이다.
우리 춘곡(春谷) 진사부군께서 찬술한 공(公)의 갈명(碣銘)에 경사를 후손에게 내려주시고 멀고 깊을수록 커지며 산악(山岳)처럼 기울지 않기를 천억년(千億年)이라 하신 말씀 또한 헛되지 않을 것이다. 연하동(烟霞洞) 산악(山岳)의 장려(壯麗)한 영구(靈區)와 임천(林泉)의 청정(淸靜)함은 대인군자의 만년 유택(幽宅)임이 마땅하고 현조의 후손은 백세토록 재숙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제각이 이미 완성됨에 문중의 부형이 불초에게 명하기를 그 사실을 기술(記述)하여 지금과 후손들에게 보이라고 함으로 감히 글할 줄 모른다고 사양하지 못했으며 이 일에 후손인 하식(夏植)과 계훈(啓勛) 양씨께서 실로 노고가 많았으나 또한 제종이 위촉(委囑)함이다.
1971년(辛亥) 입추절 후손 대환(大煥) 삼가 기술(記述)하다.
※①계옥(啓沃)...내 마음을 열어 君王의 마음에 들어가게 함. 善道를 말하여 임금에게 告함. 지도유액(指導誘掖)함.
▲위대환(1907~1979) : 초휘는 황(煌), 자는 여방(汝方), 호는 백당(栢堂)이다. 부(父) 월암공 형량(馨良)과 모(母) 수원백씨 사이에서 3남 중, 장자로 장흥군 안양면 당암리 월암마을에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