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치대며 / 서태수
빨래를 치댄다. 어깨 출렁 엉덩이 들썩, 온몸으로 치댄다. 목줄띠에서 옮은 완고한 땟국도, 뱃가죽에서 눌어붙은 게으른 땟자국도, 발가락에서 배인 고리타분한 땟국물도 함께 치댄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꼬장꼬장한 생각도 치대고, 소파에 뒹굴던 꼬질꼬질한 몸뚱이도 치댄다.
인생살이와 빨랫감이 뭐가 다르더냐. 무릇 빨래란 비누 쓱쓱 문대어 이리 치대고 저리 비비고, 배배틀어 물기 짜고, 탈탈 털어 까실까실 말려야 하는 법. 영웅英雄도 여세추이與世推移니 자립갱생自立更生이 필연이라. 긴긴 인생살이에 낡은 땟자국을 죄다 훑어내어야 이 늦은 나이에 재활용再活用이라도 되지 않겠느냐.
인생과 빨래의 함수관계! 이 위대한 순리順理를 이순耳順의 중턱에 걸친 오늘에야 드디어 실천한다. 결혼 후 36년 만에 처음 해보는 빨래. 해방이든 방임放任이든, 아니면 구속이든 새로운 공간에는 으레 혼란과 불안 후에 화려한 변신變身이 따르지 않더냐.
남편이란 참으로 묘한 동물이다. 집 안에서도 벽에 박힌 못의 개수는 낱낱 꿰고 있지만 아내의 살림 공간은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집 밖이야 너른 공간의 춘하추동 작업 스케줄에 그 복잡한 공구창고, 쓰다 남은 철사 하나까지 명경지수明鏡止水로 환하지만, 아내의 좁은 공간은 첩첩산중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아내가 없는 오늘, 눈을 부릅뜨고 더듬어 보지만 냉장고도 씽크대도 옷장도 캄캄하다. 첫술에 배부르랴. 급한 불부터 꺼 나가자.
나의 빨랫감. 런닝, 팬티, 겨울내복, 양말 세 켤레, 타월 두 장이로구나. 허리가 고장 난 세월이라 쪼그려앉기는 금물. 욕실 타일 바닥에 앉은뱅이의자를 엉덩이에 붙인다. 빨랫감이 담긴 세숫대야를 당긴다. 이미 엊저녁에 빨래비누 칠을 해서 물에 퉁퉁 불려놓은 것들이다. 묵직하다. 자취생활 15년에 이력이 났던 솜씨. 팔다리를 걷어부치고 두 팔을 벌려 장수풍뎅이 같은 전사戰士의 자세를 취한다. 자못 엄숙해지려 한다. 학창시절과 총각시절, 먼 세월 저편의 아련한 향수에도 살풋 젖어본다. 겉옷은 숯을 담아 입으로 물을 뿜어가면서 다림질하던 시절이었다. 다리미 똥구멍으로 숯이 튀어나와 옷에 불구멍도 내었다. 하늘하늘 헤져서 앞트임 구멍이 절로 생겼던 검정색 광목 팬티도 뒤집어 널었다. 그땐 아랫도리 힘도 좋았지.
사흘 전, 보름 동안 - 어쩌면 스무날이 넘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 출산을 앞둔 며느리가 힘들어 해서 손주 돌보미로 아내가 상경했다. 전례 없는 긴 이산가족. 머뭇거리는 아내를 다독여 쿨cool하게 가라 했다. 아내는 냉동밥에 냉동 곰국, 냉동 갈비찜에 김치, 김, 멸치 등등을 한 끼씩 분량으로 준비해 두었다. 모임으로 외식이 잦으니 이만하면 충분하리. 속옷가지와 양말 등도 차곡차곡 챙겨 놓고 신신당부를 하고 갔다. 그러면서도 근심은 안방에, 걱정은 거실에 구석구석 깔아놓고, 대문간에는 애잔한 눈빛까지 걸쳐 놓고 올라갔다.
방임인지 해방인지 모를 묘한 사나흘이 지나 옷을 갈아입고 나니 생생한 삶의 현장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널브러진 풍광 묘사는 생략하자. 먹는 것은 착착 줄어들어도 자동차로 뽀르르 달려나가면 해결된다. 게으른 싱글single들을 위한 먹이상품도 지천이다. 문제는 옷. 개어 놓은 속옷이 네 벌, 내의 바지 하나, 양말 다섯 켤레다. 차례로 입어가면 남이 못 보는 은밀한 구석이라 큰 문제는 없다. 모임에서도 향수는 그들이 뿌리고 올 테니 굳이 내가 신경 쓸 필요 없을 터.
그러나 꾀죄죄하게 살아도 열흘이 한계. 더구나 봄철, 너른 마당에 땀 흘릴 일도 많다. 그럼 땀 흘릴 작업 때는 입은 속옷을 또 입고 외출은 새 옷으로? 아님 속옷도 착착 사서 입어? 그러다 보름 동안의 속옷 빨래를 몽땅 모아두면? 염치도 유분수지. 이건 소가 웃고 개가 재치기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한 번은 빨래를 해야 한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이야 기계치機械痴 아내에 비해 달인의 경지지만 세탁기 버턴은 ‘눈멀 맹盲’이니 언감생심 불가능! 열흘쯤 미루어 산더미만한 빨랫감을 욕조에 처넣고는 가루비누 철철철 뿌려 발로 자근자근 밟는 간단명료한 방법도 있긴 하다. 티끌로 빠느냐 태산으로 빠느냐 그것이 문제. 곰곰 생각하니 남는 게 시간. 빈둥빈둥 뒹구는 것보다야 운동 삼아 티끌로 빨아서 입는 것이 나을 것 같다. 36년만의 작심作心이다.
실행 버턴 작동. 빨랫감을 엎어버리고 세숫대야에 런닝을 치댄다. 치댄다기보다는 두 손으로 비빈다. 아차, 손이 시리다. 방으로 달려가 목욕 버튼을 누르고 허리 운동을 하며 기다린다. 따뜻한 물에 젖은 섬유의 촉감이 보드랍다. 내 속옷을 빨 때 아내도 이런 정감을 느꼈을까. 내복을 집어 올린다. 입을 땐 몰랐는데 빨랫감이 되고나니 상당한 중량重量이다. 축 늘어진 내복바지를 들어 올려 보니 160센티의 내 키도 작은 키는 아닌 것 같은 착각이 잠시, 들다가도 이내 피식 웃는다. 세숫대야 안에서는 두 손으로 치대지지가 않는다. 손으로 비비자니 너무 길다.
대충 빨아놓고 입기를 포기할까. 이미 매화도 활짝 피었잖아. 갈수록 따듯해질 텐데. 아니지, 보리누름에 중늙은이 얼어 죽어. 아직도 춘삼월 아니냐. 빨래하기 싫어 얼어 죽었다면 저승에서 어머님을 어찌 대면하리.
빨래판! 그렇지, 이놈이 어디 있더라? 휘휘 둘러보아도 욕실에는 없다. 일어서니까 협착증의 허리가 뜨끔! 잠시 허리운동을 하고 다용도실로 간다. 세탁기 위에도 바닥에도 없다. 요즘 여자들은 빨래판을 안 쓰나. 대용품이라도 찾느라 뒤적거리니 구석진 선반에 네모난 녀석이 보인다. 노랗다. 꺼내보니 참으로 작은 플라스틱 빨래판이다. 덩치 큰 남자 발바닥만하다. 이 좁은 빨래판으로? 역시 아내는 나보다 기술이 월등한 모양이다. 빨래판을 세숫대야에 비스듬히 놓고 내복을 치댄다. 비누 쓱쓱 문지르고 두 손으로 척척 치댄다.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어깨가 출렁거린다. 덩달아 세숫대야도 덜컹덜컹 장단을 맞춘다. 유행가 ‘봄버들 나루터에 빨래하는 아가씨’는 아니라도 산자락 낡은 집의 컴컴한 욕실이다. 앞마당 늙은 내 매화나무에 봄볕이 다사롭겠다. 그렇지, 빨래는 이렇게 온몸으로 치대는 거야.
"자동세탁기가 빨래해 주는 동안 여자는 뭐 하는데?"
30년 전인가. 아내가 자동세탁기를 사자고 했을 때 내가 핀잔 섞어 던진 말이다. 아내는 이 말을 지금도 가끔 들먹인다. 내가 생각해도 무지와 편견의 고리타분한 땟국이 짜르르 배인 말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1m 앞에 있는 TV에 리모컨이 왜 필요한데?"
"전화기는 다이얼을 돌려야지. 버튼이 무슨."
실은 이보다 더한 말도 더러 했다. 나도 아내도 다 기억하고 있다. 가끔은 되씹으며 웃는다. 기가 막히는 말들이다. 꽝꽝 막혔던 세월 저편 생각의 편린片鱗들이다. 한 세대가 지나고 보니 모두 개 풀 뜯어먹는 소리요, 김밥 옆구리 터지는 말씀이다.
생각이 바뀌기는 참 힘들다. 어떤 자상한 과학자가 여자의 빨래 노고를 덜기 위해서 세탁기계를 만들기로 했단다. 세탁 문화의 역사를 연구하니 동서고금이 비슷한 빨래 방법이었다. 많은 실패와 연구 끝에 최첨단 기술의 세탁로봇을 발명했다. 주인이 빨랫감을 주면 바구니에 담아 냇가로 가서 무쇠팔로 탕탕 치대면서 빨았단다. 값비싼 상품이었지만 드디어 여성들의 가사노동 해방! 그런데 기술력도 볼품없는 어느 기술자가 싼값의 통돌이 세탁기를 개발했단다. 세탁 개념의 혁신!
오랜 땟국에 찌든 나는 아직도 아날로그analogue. 아무래도 통돌이 세탁기 같은 생각의 혁신은 자신 없다. 다만 세탁로봇 정도까지는 육체의 변신이 가능하겠다. 그래서 오늘 빨래를 치댄다. 치대면서 머릿속에 남아 있는 꼬장꼬장한 생각도 치대고, 소파에 뒹굴던 꼬질꼬질한 몸뚱이도 치댄다. 지난날의 묵은 땟자국을 쫙 훑어내어야 이 늦은 나이에 재활용再活用이라도 될 것 아니더냐.
세월은 짧고 인생은 긴 세상, 모레쯤엔 전기밥솥으로 화려한 변신變身을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