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땅이름과 우리말 / 강화도 마리산(마니산)
마리와 마루(宗)
으뜸의 뜻 ‘마로’는 고대부터 써 온 말
우리나라에서 제주도에 이어 두번째로 큰 섬인 강화도에는 고려산(高麗山.436m), 혈구산(穴口山.460m), 진강산(鎭江山.443m), 마리산(摩尼山.마니산.469m) 등 400m 이상의 산이 4개이고, 그 중에서도 마리산이 제일 높다.
인천시 강화군 화도읍에 위치한 이 마리산은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태고의 신비를 가득 간직했고, 특히 단군 시조의 전설을 간직해 민족의 성지로 자리굳힘해 왔다.
단군 때부터 제를 드리던 나라의 으뜸산
한국의 다른 명산과 비교해서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절경을 안고 있는 이 마리산은 백두산과 한라산의 사이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며, 춘하추동으로 변화무쌍하여 선경(仙境)으로 일컬어지고 있기도 하다.
마리산이 있는 강화도의 화도읍은 원래 본도와는 떨어져 있던 섬이었던 것을 조선 숙종 때 강화 유수 민진원(閔鎭遠)이 간척 사업으로 강화 본도에 접속시켰다. 원래 강화도의 남쪽에 위치한다 하여 '하도면(下道面)'이라 하던 것을 일제 때인 1937년 음이 가까운 '화(華)'자를 써서 '화도읍(華道面)'이라 하게 되었다.
마리산의 산마루에 오르면 서해가 훤히 발 아래 펼쳐지고, 낙타등처럼 이어져 뻗은 남동쪽 암릉 위로 전망이 확 틔어 있다. 정상의 북동쪽 약 5㎞지점의 정족산에는 단군의 세 아들 부소, 부우, 부여가 쌓았다는 설화가 담긴 삼랑성(三郞城)이 있고, 그 안에는 우리나라 대표적 사찰의 하나로, 31본산이며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전등사(傳燈寺)가 있다.
산 중턱에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년) 회정선사(懷正禪師)가 창건했다는 정수사(淨水寺)가 있는데, 이 절에는 보물 제161호로 지정된 유명한 법당이 있다.
465m 길이의 돌담 안에 있는 참성단(塹城壇)은 확실한 축조 연대 기록은 없지만, 약 4천 년 전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적 제136호로 지정돼 있는 이 단은 고려 원종 11년(1270), 조선 인조 17년(1639), 숙종 26년(1700) 등에 보수 또는 수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돌로 단단하게 만들어져 있어 그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단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외곽 부분은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쌓았고, 단은 땅을 상징하여 네모로 쌓았다.
단군 51년(기원 전 2282년)에 만들었다고 하는 이 제단에선 단군 이래로 계속 제사를 지내 왔다.
그 기록이 문헌에 여러 차례 나온다.
민족의 성지로 여겨져 왔던 이 산에선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가 각기 자기들의 영역이었을 때 국가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실상 나라의 으뜸산으로 여겨 온 것이다.
그 뒤 고려 조선시대를 계속 거치면서도 끊이지 않고 민족의 제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또 광복 후부터도 해마다 개천절이 되면 제를 지냈고, 1953년 이후부터는 전국 체육대회 때마다 성화를 점화하는 장소로 이용돼 왔다. 성화의 점화는 강화군에서 엄선하여 뽑은 칠선녀에 의하여 태양열을 화졍으로 인화하거나 구름이 낀 흐린 날에는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던 부싯돌로 불을 붙여 이루어지고 있다.
참성단 근처에는 함허대사가 수도했던 함허동천이 있고, 참성단 중수비가 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한자로)
“우리나라 수천리 땅에 강화는 나라의 방패, 그런 강화 중에서도 마리산은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드리던 명산(名山), 서쪽 제일 높은 곳에 돌을 쌓아 단을 만들었으니 이름하여 참성단이다"
참성단 북서쪽 바다 건너로는 보문사로 유명한 석모도(席毛島)가 있는데, 토박이 땅이름으로는 돌모루섬이다.
'마니산'이냐 '마리산'이냐
강화도 사람들은 참성단이 있는 화도읍의 산을 '마리산'이라 부르고 있다. 그래서, 딴 지역 사람들이 와서 '마니산'을 물을 때는 그런 산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물론, 그러한 상황은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마니산'이란 이름을 귀에 선 이름으로 알고 있는 토박이 어른들이 아직도 강화도에 많다.
강화도에 가면 지금도 마리산초교(폐교), 마리산기도원, 마리산휴게소 등의 간판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외지 사람들은 이 산을 보통 '마니산'이라 부르고 있다.
일부 사람들이 마리산을 마니산이라고 부르게 된 데는 예부터 그렇게 불러 와서가 아니라 이 산의 한자 표기 때문이다. 즉 한자로 마니산(摩尼山)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다.
여기서의 한자 '니(尼)'는 '니'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리'로도 읽힐 수도 있다.
강화도의 마리산은 옛 문헌에 한자로 '마리(머리)'의 뜻이 들어간 '두산(頭山)', '종산(宗山)'으로 표기돼 왔으며, 예부터 '마리산'이라 불러 왔고, 지금도 주민들은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이 점을 생각하면 여기서의 한자 '마니(摩尼)'는 '마니'가 아닌 '마리'의 소리빌기(음차.音借)임을 알 수 있다.
'니(尼)'를 '리'로도 읽을 수 있음은 근처 김포 땅의 '오리산(吾尼山)'을 예로 들 수도 있다. 경기도 김포군 대곶면의 오리산은 60m 높이의 낮은 산으로, 일명 깜짝산이라고도 했다. 외따로 있는 산이라 해서 '오리미'라고 주로 불러 왔던 산이다. 이 산 밑의 마을도 역시 같은 이름이다. 이것이 바탕이 된 오리산리(吾尼山里)가 이명(里名)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한자의 ‘니(尼)’기 ‘리’로도 읽힐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충북 영동군 양산면, 심천면과 옥천군 이원면 경계에도 높이 640m의 마리산(摩尼山)이 있는데, 이곳 사람들도 이 산을 그대로 '마리산'으로 부르고 있고, 더러는 '마리봉성' 또는 '마리성'으로도 부른다. 돌로 쌓은 성이 있는데, 둘레 4,631자, 높이 5자이다, 고려 공민왕의 왕비 노국대장 공주가 피란하였던 곳이라고 전한다. 경남 거창에는 마리면(摩利面)이 있는데, 옛 안의군의 지역이었던 이곳 서쪽의 신라 때 이름인 마리현(摩利縣)을 딴 것이다. 함북 부령군 부령면에도 마리동(摩里洞)이란 행정지명이 있다.
마리산이 원래 이름임을 입증할 수 있는 많은 문헌이 있는데, <고려사> 권56 지리지 강화현조에도 '마리산'이라는 글자가 분명히 들어가 있다.
"유마리산(有摩利山) 재남부(在府南) 산정유참성단(山頂有塹星壇), 야전(也傳) 단군제천단(檀君祭天壇)"
(남쪽에 마리산이 있고, 산꼭대기에 참성단이 있는데, 단군이 하늘에 제를 드리던 곳이라 전해 온다) <고려사>
그 밖의 <세종실록>, <규원사화> 등에도 마리산(摩利山)으로 들어가 있고, 머리산, 마루산이란 이름을 한자로 옮긴 두산(頭山), 두악(頭嶽), 종산(宗山)이란 이름이 들어간 문헌도 있다.
<인조실록>
1628년 (인조 6) 강화(江華)의 마리산(摩利山)에 새로 사고를 설치하여 묘향산 사고의 전주본을 옮겼다가, 1660년(현종 1) 강화 남쪽의 정족산(鼎足山)에 사고를 마련하여 마리산 사고의 전주본을 비장하였다.
노산 이은상도 마니산이 아니라고 강조
마리산 제천단(祭天壇)에
돌 한 덩이 올리고서
꿇어 엎드려 절하며
비온 말씀
내 백성 잘 살게 하옵소서
이 소원을 들으소서
(노산 이은상)
<마리산 고천(告天)>(이은상)
"지금 한자로 쓰는 이 '마니산(麻尼山)'이라는 것이 조금도 틀림없이 한국말의 '마리산'을 음역(音譯)한 것이라 함은 학자들의 정론이매, 내가 여기서 새삼스러이 말할 것은 없거니와, '마리'는 즉 '머리'이니 고서(古書)에 '머리'를 '마리'로 적은 것은 너무도 그 예가 허다한 바, 이 '마리산'이란 말은 필경 가장 높은 산, 거룩한 산, 즉 '신산(神山)', '성악(聖嶽)'이란 의미입니다."
마리산은 백두산이나 한라산 등에 비하면 훠씬 낮다. 그런데도 이 산이 '높음'의 뜻인 '마리'란 이름을 달게 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우선 이 산은 주위의 너른 평지 위에 오똑 솟아 있어 주민들에게는 그 어느 산보다도 높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머리'와 같다는 뜻의 '마리'가 들어갔을 수도 있다. '마리'는 '머리'의 옛말로, 지금도 짐승의 머릿수를 셀 때 '한 마리, 두 마리, ……' 같은 단위말로 남아 있다.
또, 이 산은 단군 이래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산이어서 '으뜸'의 뜻인 '마루'가 들어갔을 것이다. '마루'는 원래 '맏'에서 나온 말로, '높음', '신성함', '위'의 뜻을 지닌다.
이 '마리산'이 '마니산'으로 된 데는 일제의 계략도 한 몫을 했다.
일제는 이 산이 '으뜸산'의 뜻인 '마리산'이 마땅치 않았던지 두산(頭山), 종산(宗山), 마리산(摩利山), 마리산(摩尼山) 등으로 표기된 여러 이름 중 '마니산(摩尼山)을 택해 자기들의 글인 가다카나로 '마니상'으로 적고 그렇게 정착시켜 나갔다. 일제 강점기에 나온 지도에 카타카나로 ‘마리상’으로 적어 놓은 것을 보면 읽기는 ‘마니’가 아닌 ‘마리’로 해야 함을 명확히 했다.
우리는 광복 후로 그 '마니'란 이름을 지우고 '마리'로 해야 했으나, 이를 잘 알지 못하는 교육자들에 의해서 계속 그렇게 끌려 왔다.
신라의 왕호에 나오는 ‘마로’는 으뜸의 뜻
신라의 왕호(왕을 일컫는 말)는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왕의 순서로 변천해 왔다.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은 고대 신라 사회에 있어서 군장을 일컫는 순수한 우리말을 뒷날 한자로 옮긴 것이다.
거서간은 신령한 대인이라는 뜻이나, 태양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차차웅은 무당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이사금은 연장자, 선거 등에 의해 군장의 자리를 이은 대왕의 칭호라고 한다. 여기에 반해 마립간은 대수장(大首長)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지니는 호칭으로 왕권의 성장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고 왕(王)은 군장의 중국식 칭호로서 지증왕, 법흥왕을 전후하여 율령 제도의 정비 등에 따라 나타나는 왕권의 강화를 반영하고 있다.
결국, 신라에 있어서 왕호의 변천은 선거제적 군장의 추대가 세습적 군장제로 바뀌고, 다시 왕제(王制)로 전제화되어 가는 정치적 발전 과정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신라 왕호의 마립간은 으뜸의 뜻을 담는다.
마리(마루)+간 >마리간 >마릿간 >마립간
우리가 일상에서 툇마루, 안방마루 할 때의 그 ‘마루’도 신라 때에 높은 곳에서 나라를 다스렸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또 지방 사투리의 ‘마룻소(아주 큰 소)’의 ‘마루’도 ‘’에 뿌리를 둔다. 자기 부인을 일컬을 때 쓰는 ‘마누라’는 원래 오랜 옛날에 노비가 상전을 부를 때 쓰던 말인 ‘하’의 변한 말로, 궁중에서 ‘상감 마노라’. ‘곤전 마노라’ 식으로 임금이나 왕비를 아주 높여 부르던 말이었다. ‘하’의 ‘하’는 ‘선혈하’(선열이시여) 식의 높임 부름토(존칭 호격조사이다.
‘마’나 ‘말(마로)’의 뿌리말은 ‘맏’이다. 이 ‘맏’은 ‘말’로 되고 그 뒤에 따라오는 모음절과 연음되면서 많은 친척말을 이루게 하였다. 즉 마리와 마루의 뿌리말은 ‘맏’이며 이 말은 으뜸, 위, 첫번째, 앞 등의 뜻을 지닌다.
우리 머리에도 위라는 뜻으로 붙여진 부위가 있다. 이마나 가리마처럼 ‘마’가 들어간 것이 그것이다.
즉, 이마의 ’이‘는 ’앞‘, ’마’는 ’머리‘를 가리키는데 머리의 앞이라는 뜻이다.
가리마는 머리(머리털)를 양쪽으로 가른다는 뜻이다.
이(앞)+마(머리)=이마
가리(가림)+마(머리)
으뜸의 뜻이어서 신라 때 관명으로 많이 씌어
‘꼭대기’, ‘으뜸’의 뜻을 가진 ‘마로’는 삼국시대에 인명과 관명으로 많이 씌었다.
<‘’의 연철 지명으로 보이는 곳>
제주도의 마라도馬羅島
전남 광양의 옛이름 마로현馬老縣’(마룻골)
충북 보은의 마로면馬老面
함남 문천의 마루치馬樓峙
여기서 신라 초기 죽지랑의 일화 하나를 소개해 보자.
신라 초, 술종(述宗)이라는 행정관이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가 되어서 임지로 가게 되었다. 때마침 삼한에 병란이 일어나 그는 기병 3천의 호송을 받으며 죽지령(竹旨嶺.지금의 죽령)을 넘게 되었다. 고개에 이르니 한 거사가 고갯길을 닦고 있어 이를 칭찬하니, 거사도 역시 술종의 혁혁함을 좋게 여겨 마음이 통하게 되고 친한 사이까지 되었다.
술종이 임지에 도착한 지 한 달쯤 되던 날 밤의 꿈에 죽지령에서 만났던 거사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의 아내도 역시 같은 꿈을 꾸었다. 술종은 거사의 신변에 어떤 일이 있음을 직감하고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니 거사가 죽은지 며칠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날수를 따져 보니 거사가 죽은 날이 바로 아내와 같은 꿈을 꾸던 날이었다.
술종은 군사들을 보내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거사를 장사지내고 돌미륵 하나를 세웠다.
술종의 아내는 그 날부터 태기가 있어 달이 찬 후에 아들을 낳았다. 술종은 이 아기가 틀림없이 거사가 다시 태어난 것이라 여기고 그를 만났던 ‘죽지령’의 지명을 따서 이름을 ‘죽지(竹旨)’라고 지었다.
죽지는 자라서 화랑이 되고 벼슬에 나아가 김유신 휘하의 부원수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뿐 아니라 진덕, 태종, 문무, 신문왕 등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이렇게 이름을 한자로 죽지라고 했지만, 이 이름도 사실은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었다. 우리말로 유추해 보면 ‘대마로’이다.
제32대 효소왕 때 죽만랑(竹曼郞)의 낭도로 있던 득오(得烏)는 그의 늙어감을 아쉬워하며 노래를 지으니, 이것이 ‘간 봄 그리매...’로 시작되는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이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의 ‘효소왕대’조에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술종, 죽지령, 죽지(랑), 죽만(랑) 등의 한자 종(宗), 지(旨) 등이 모두 ‘마로’를 의역해 적은 이름이다. 마로는 한자로 종(宗) 외에 지(旨)로도 취해졌다.
<마루’가 한자의 지(旨)로 취해진 경우>
긴마루. 장지長旨 경기 광주시
만마루. 만지晩旨 충남 천안시
즁마루. 중지中旨 경북 칠곡군 석적면
마룻골. 지로旨老 경북 울진군
숫마루. 화지禾旨 전남 순천시
산마루. 산지山旨 경남 창녕군 장마면, 강원도 이천군 용포면
외마루. 와지瓦旨 경북 포항시 기계면 고지리
한자의 기록을 유추해 우리말 알아내기
한자가 보편화하지 않은 삼국시대 초기에는 이처럼 사물의 이름이건 사람의 이름이건 당시의 우리말을 바탕으로 한 고유명사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을 제대로 옮겨 적을 우리글이 없어 후세에 한자로 옷이 입혀진 채 전해 내려왔다.
술종(述宗)은 ‘’(술마로=수리마로)의 한자 표기로 보이는데, 신라 초, 중기의 인물 중에는 이처럼 ‘’를 ‘종(宗)’으로 취한 것이 많다. 마로가 더러는 부(夫)로 표기되기도 했다.
<신라 때 마로가 부(夫)로 표기된 경우>
이종伊宗. 이사부異斯夫 ‘이은(계승한) 어른’의 뜻(’)
황종荒宗. 거칠부居柒夫 ‘거친(용감한) 어른’의 뜻
아음부阿音夫(조분왕 때),
양부良夫(미추왕 때),
비조부比助夫’(법흥왕 때),
노부奴夫’(진흥왕 때)
죽부竹夫, 심맥부心麥夫, 비지부比知夫 (진흥왕 순수비)
‘마로’라는 말은 우리나라에만 머무르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가 많은 친척말을 낳아 놓았다. 그러한 말로 ‘무로(ムロ)’가 있는데 이는 ‘높고 성스러움’을 뜻한다.
그래서 궁(宮)이나 신사(神社), 큰 방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고관 문인들의
이름(또는 아명)에도 아베노니카마로(阿位仲麻呂), 우시와카마루(牛若丸)와 같이 ‘마로(麻呂)’나 ‘마루(丸)’가 붙여졌다.
<일본의 산이름 중>
헤기시노무레(辟支山)
고사노무레(古沙山)
누스리노무레(怒受利支山)
니사리노무레(任叙利山)
서울 황토마루의 마루도 마리와 친척말
말무덤, 말티고개(마치.馬峙), 말머리(馬頭). 마재(馬峴)처럼 말마(馬)지기 들어간 경우에도 꼭대기나 크다는 뜻의 ‘마루’를 바탕으로 한 것이 많다. ‘’은 ‘머리’, ‘마루’, ‘마리’, ‘뫼’ 등의 말을 낳았으나, 땅이름에서는 주로 ‘말’, ‘마루’가 쓰이었다.
‘마루’는 ‘도드라진 곳’, ‘불쑥 내민 곳’을 뜻하여 ‘용마루’, ‘지붕마루’, ‘콧마루’ 같은 식의 말도 자연스럽게 쓰였다. 또한 땅모양이 그러한 곳에도 이 말이 부담없이 붙어 영마루, 등마루 식의 땅이름이 생겨났다.
<마루가 들어간 땅이름들>
마루골 [말래골, 종곡] 【마을】 경기 가평군 외서면 고성리
마루들1 【마을】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종리
마루미 [종산] 【마을】 경기 시흥시 소래읍 방산리
마루태기 [노적산] 【산】 경기 강화군
마룰재 【고개】 전북 정읍시 산외면 종산리
마룻밭 【밭】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서울의 용산과 마포를 잇는 한 간선도로가 처음 개설되었을 때, 용산과 마포의 첫 글자를 따서 용마로(龍麻路)로 지었지만, 이 길 중에 생긴 큰 고개가 ‘용마루’로 불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거의 모두 그 이름으로 통하고 꼭대기란 뜻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서울 광화문 바로 앞에서 서울역 사거리(서울 중구)의 길이 세종대로이다. 전에는 광화문 바로 앞에서 세종로 네거리까지를 세종로라 했고, 그 남쪽부터 남대문까지는 태평로, 남대문에서 서울역까지는 남대문로였는데, 새주소를 매길 때 이 길을 모두 아울러 세종대로(길이 2.1km)라 하였다. 광화문과 세종로 네거리 사이의 넓은 길은 일제 때에 '광화문통(光化門通)'이라 했다.
광화문 네거리 바로 남쪽이면서 지금의 덕수궁 북쪽 언덕, 즉 조선일보사 사옥 뒤편으로는 누런 흙 빛깔의 등성이가 있었는데, 여기를 황토마루(황토현.黃土峴)'라 했다. 이곳의 서쪽 마을을 동령골(동령동.銅嶺洞)이라 하였는데, 이는 황토가 구리빛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자하문 터널 앞쪽에서 흘러오는 청계천도 이 황토마루 때문에 물줄기의 방향이 바뀌었다. 북악산과 청운동의 한 골짜기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청계천은 남쪽으로 계속 흘러내리다가 이 황토마루를 만나 동쪽으로 방향으로 돌려 동대문 남쪽으로 빠져 나간다. 다시 말해서, 황토마루 언덕은 청계천의 남행(南行)을 동행(東行)으로 바꾸어 놓았다.
황토마루 북쪽 지금의 세종로는 조선이 건국된 후 양쪽으로 들어선 큰 관청들로 인해 한성의 심장부가 되었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남쪽 양편으로 의정부, 육조, 중추원, 사헌부, 한성부 등의 관아 건물들이 있어 이를 육조거리라 했다.
황토마루의 ‘마루- 어떤 뜻일까? 분명히 ’마로‘의 친척말이겠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등성이의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마루턱이란 말도 있는데, 이는 등성이의 가장 위쪽을 가리킨다. ///
----------------------
* 친척말
-마루 맏이 맏아들 머리 이마 마파람(남풍)
* 친척 땅이름
-마루미(종산.宗山) 경기 시흥시 래읍 방산리
-큰뜸(종촌.宗村) 전북 익산시 당면 대선리
-밑마루(종촌.宗村) 전)충남 연기군 남면
-마루개 경남 사천시 서포면 다평리
-마루개(두현.頭峴) 전북 완주군 구이면 두현리
-마루골(말래골) 경기 가평군 외서면 고성리
-마루골(두곡.頭谷) 경기 파주시 교하면 와동리
-마루골(말골) 충남 부여군 양화면 수원리
-말미(두산.頭山) 충남 청양군 비봉면 양사리
2022년 8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