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남기신 가르침 중에 ‘자귀의 법귀의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생인 저는 외부의 자극에 쉽게 영향을 받고, 제 뜻을 세웠다가도 잊어버리고 무너지는 것이 반복되다 보니 저 자신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장애 (ADHD)가 경계성으로 살짝 있다고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선천적인 부분인 것 같은데, 흔들리는 제 자신을 등불 삼아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이렇게 선천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도 부처님 법을 따르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회의가 듭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남에게 의지합니다. 어릴 때는 부모에서 의지하고, 크면 남편이나 아내에게 의지하고, 어른이 되면 자식에게 의지하고,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나 친구에게 의지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괴로움은 의지했던 부모, 남편이나 아내, 자식, 친구, 선배, 이런 사람들이 떠나거나, 또는 이 사람들이 내 뜻대로 안 됐을 때 생깁니다. 그래서 남에게 의지하는 것은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과 같은 인생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낙엽이 공중에 뜬 것은 바람의 힘에 의해서 뜬 것이지 자기 힘으로 뜬 게 아니죠. 낙엽은 자기가 막 공중을 날아가는 것 같지만 바람이 멈추면 어느 산기슭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것처럼, 우리는 늘 남에게 의지하고 있어서 삶이 불안한 거예요.
그래서 의지처를 다 불태워 버리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주로 집에 의지하니까 집을 불태워버리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출가입니다. 고향에 의지하니까 고향을 불태워라, 어떤 가치관에 의지하니까 가치관을 불태워라, 가족에 의지하니까 가족을 떠나라,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롯이 스스로 서라. 자기 마음을 알아차려라.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에 너무 의지하지 말고, 남과 비교하지도 말고, 오롯이 자기 스스로 일어서라.’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고, ‘자기를 주인으로 삼아라’,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지 세상의 종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자기’라는 말은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상대적인 용어로 쓴 것이지 ‘자기’라는 것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에요. ‘뭐가 자기냐?’ 이렇게 물으면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지나치게 바깥 경계에 의지하지 마라’ 하는 가르침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런 의미를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기에게 의지하라’ 하고 표현한 겁니다.
경전에는 ‘남을 섬으로 삼지 말고, 자기를 섬으로 삼아라’ 이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우리가 강을 건널 때 강의 가운데에 섬이 하나 있다면 그 섬을 의지해서 배를 타고 건너잖아요. 강폭이 너무 넓다면 중간 디딤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번역하면 ‘남을 섬으로 삼지 말고 자기를 섬으로 삼아라’ 이런 얘기인데, 그것을 해석하면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 하는 의미가 되는 거예요.
여기서 핵심은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홀로 서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홀로 못 서잖아요. 어릴 때는 부모에게 의지되어 있고, 나중에 커서는 주위 사람에게 의지되어 있죠. 그래서 가까운 사람이 죽거나 헤어지게 되면 방황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돈에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 코인을 샀다가 코인 값이 떨어지면 정신을 못 차리죠. 아파트나 주식도 그렇고요. 애인한테 의지했다가 헤어지면 그때도 정신을 못 차리죠.
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에 의지했기 때문에 졸업하면 무엇을 해야 될지 깜깜합니다. 회사에 다닐 때는 회사에 의지했기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면 무엇을 해야 될지 정신이 없죠. 대학 다닐 때 배운 전공에 의지했는데 전공을 사용할 데가 없어지면 무용지물이 되니까 의지할 데가 없어지죠. 20년 동안 공부해서 전문가가 됐는데 인공지능이 나와서 그 일을 대체해 버리면 황당해질 때도 있잖아요. 이런 것들이 다 무언가 남에게 의지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괴로움입니다.
그러니 바깥 경계에 의지하지 말고 항상 너 스스로가 오롯이 서라, 남과 비교하거나 재물이나 인기에 너무 연연하지 마라, 내 삶은 항상 내가 주인이 되어서 세상을 살아가라, 이런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법에 의지하지 법 아닌 것에 의지하지 마라’ 이런 뜻입니다. 특히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라는 겁니다. 법륜스님이 여러분께 이렇게 좋은 얘기를 하잖아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법륜스님에게 의지할 것이 아니라, 법륜 스님이 하는 말을 듣고 이치를 깨우쳐서 자기화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법륜 스님이 죽든지 살든지 여러분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법륜 스님이 내일 결혼을 하더라도 여러분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법에 의지해야지 사람에 의지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이 좋은 얘기를 하면 그 법에 의지하지 않고, 그 사람에 의지하기 때문에 실망을 많이 합니다. 사회적으로 봐도 신흥종교나 신흥사상 등 사람에 의지했다가 실망하는 경우가 허다하죠. 새로운 정부에 진보적이거나 사회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들어가게 되면 많은 기대를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도 다 기득권을 갖고 해 먹더라’ 이렇게 생각하고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도 사람에게 의지해서 그렇습니다.
물론 사람을 믿었다가 실망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의지하면 늘 사람한테 흔들리게 됩니다. 사람은 완전무결할 수가 없습니다. 법륜 스님이 중요한 게 아니라 법륜 스님이 말한 마음공부의 이치가 중요한 거예요. ‘내가 직접 경험해보니까 좋더라’ 이렇게 법에 의지해서 그 법을 자기화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괜찮지만 신격화하거나 우상화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부처님을 존경하고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과 부처님을 신격화하고 우상화하는 것은 다릅니다. 신격화를 하게 되면 많은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법이 아닌 것에 의지하지 마라’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것은 진리 또는 사실을 말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으로 말하면 연기법,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이런 것이 법입니다. 좋은 일을 하면 극락이나 천당에 간다는 것은 법이 아니고 하나의 믿음입니다. 법이란 것은 사실을 말합니다. 어떤 문제를 풀 때는 믿음이 아니라 실제 사실에 의지해야 합니다.
이런 뜻에서 법을 등불로 삼아라(법등명), 법에 의지하라(법귀의),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자등명),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자귀의),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법에 의지하라는 것은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진리에 의지해라’ 이런 뜻입니다.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해라’ 하는 표현에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자기 마음대로 해라’ 하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뜻이 전혀 아니에요. 여기에서 핵심은 ‘타인이나 외부에 의지하지 마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에 의지하지 진리 아닌 것에 의지하지 마라’ 하는 겁니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질문자는 경계성 ADHD를 갖고 있다고 했는데, 이런 정신적인 부족함이나 약점이 있다고 해도 괴로움 없이 살 수 있습니다. 팔이 하나 없으면 조금 불편할 뿐이지 그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눈이 안 보이면 불편할 뿐이지 그것이 행복하게 사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에 집착하면 괴로워집니다. 달을 따오고 싶다고 달을 따올 수 있겠어요? 그건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이 눈을 떠서 보겠다는 데에 집착하면,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평생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정신적으로 약간 우울증이 있다면, 우울증을 인정하고 약을 먹으면서 그 범위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아야지, 우울증이 완치되는 것을 추구한다면 병과 싸우다 일생을 다 보내게 됩니다.
그러니 장애가 있으면 장애가 있는 대로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개선할 수 있는 것은 개선하지만 어릴 때 형성된 것은 너무 바꾸려고 애쓰면 자신의 에너지를 불가능한 것에 투여하면서 좌절하게 됩니다.
사람이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뭐든지 다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항상 적응과 변화를 함께 도모해야 됩니다. 주어진 조건이 무더운 날씨라면, 한편으르는 거기에 적응하는 게 필요합니다. 옷을 가볍게 입는다든지, 찬 물로 목욕을 한다든지, 이렇게 적응하는 게 필요해요. 다른 하나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나무를 심어서 숲을 가꾼다든지, 물이 흐르게 한다든지, 에어컨을 개발한다든지, 여러 가지 노력을 해서 변화를 가져오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의 삶에는 적응과 변화, 두 가지 길을 늘 같이 가야 합니다. 무조건 다 변화를 시켜서 해결하려는 것이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환경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반면에 무조건 적응하라고 하면 현실을 개선할 수가 없습니다. 조선시대 계급사회에서 무조건 적응만 하면 계급 해방을 할 수 없고, 성차별에 무조건 적응만 해버리면 성해방을 할 수가 없잖아요. 그렇다고 해방이라고 해서 무조건 조급하게 해결만 하려고 들면 갈등이 생기고, 고통이 따릅니다. 그래서 적응과 변화, 두 가지를 적절하게 함께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꾸 복잡한 생각이 들었는데, 스님 말씀을 들으니 결국 법이나 진리는 간결하게 통한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명쾌하고 기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