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신년이 시작되었다.
내가 나온 '중학교 동문회'에도 새로운 집행부가 구성되었다.
2월 하순에 신임 집행부의 워크샵이 있었다.
1박 2일간 여주에서 알찬 행사를 마치고 상경했다.
그런데 바로 집으로 가지 않았다.
모두 다 '한남동'으로 갔다.
그곳에는 '불루 스퀘어 삼성전자홀'이 있었다.
그곳에서 뮤지컬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단체로 이동했다.
전 세계의 모든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해 주었던 불후의 명작이 있었다.
바로 '레 미제라블'이었다.
도착해 보니 입추의 여지없이 많은 관객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성황이었다.
2015년 11월 28일 초연(初演) 이후로 매회차 매진사례가 이어지고 있었다.
엄청난 열기였다.
그만큼 이 작품은 재론할 여지가 없었다.
불세출의 작품이자 가슴 뭉클한 대작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3월 6일이 '고별무대'였다.
각자의 바쁜 일정 때문에 좌고우면 했다간 '고별무대'까지 놓칠 게 뻔했다.
'고별무대'까지 놓치면 배 떠난 항구에서 안타까움만 곱씹어야 할 판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긴급도'가 아니라 '중요도'에 따라 시간의 가중치를 부여한 뒤에 우선순위를 매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동문회 집행부의 1박2일 워크샵이 끝난 뒤에 단체로 관람했던 거였다.
시작하기도 전에 가슴이 떨렸다.
게다가 서울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굵은 눈발이 소복소복 쌓이면서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기 시작했다.
풍경도, 세상도, 작품도 탁월했다.
더욱이 수많은 관객들의 심장도 시작시간이 다가올수록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심쿵이었다.
특히 이번 공연은 국내와 해외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한 작품에서 각자의 예술혼을 마음껏 불태웠던 황홀한 무대였다.
그야말로 초호화 캐스팅이었다.
또한 프랑스가 낳은 최고의 작가이자 정치인이며 시인이었던 '빅토르 위고(1802-1885)'의 숨결과 서정이 무대 위에서 가감 없이 녹아 흘렀다.
소설, 영화, 연극, 오페라, 뮤지컬 등으로 이미 세계인의 영혼을 수도 없이 흔들었던 대작이었다.
2012년에 한국에서, 한국어로 첫 공연을 한 이후로 금세 40만 명 이상이 줄을 지어 관람했을 만큼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킨 뮤지컬이었다.
그 명성과 평판에 대해 두 말하면 무엇하겠는가.
나는 이번에 특히 한 배우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의 연기와 노래를 좀 더 깊게 느끼고 싶었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혁명의 리더로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던 '앙졸라'역을 맡았다.
그의 이름은 바로 '민우혁'이었다.
'민우혁'이는 젊고 훤칠했다.
멋진 외모, 깔끔한 매너, 선이 굵은 연기, 시원한 성악까지 그는 뮤지컬 배우로서 탁월한 재능을 두루두루 겸비하고 있었다.
과연 '앙졸라'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민우혁'은 출중했고 돋보였으며 아름다웠다.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라 시놉시스를 거론하는 자체가 사족일 테지만 그래도 짧게라도 스토리를 따라가 보자.
빵을 훔친 죄로 19년을 감옥에서 보낸 '장발장'.
그는 가석방되었지만 전과자에 대한 세상의 멸시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우연한 기회에 '딘뉴주교'의 고귀한 사랑을 경험한 뒤로 '장발장'은 거듭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삶을 성실하게 엮어갔다.
급기야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장'이 되었고 종국엔 그 도시의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끝판왕이었다.
승승장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약자들 편에서 온정을 베풀었다.
그랬던 까닭에 시민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장발장'이 사업체를 운영할 때 직원으로 근무했던 여인 '판틴'.
어느 날, 딸의 양육비를 벌기 위해 길거리에서 몸을 파는 그녀를 보게 된 '장발장'은 '판틴'을 향한 연민의 끈을 놓지 못했다.
끝내 엄마의 쓸쓸한 죽음으로 세상에 홀로 남겨진 '판틴'의 딸 '코제트'를 구해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나 무능한 '수구세력'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했다.
이 부패와 무능한 세력의 타도를 위해 반기를 들고 봉기한 건 언제나 젊은 학생들이었다.
특히 프랑스의 '앙샹레짐'에 항거하며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전면에 섰던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청년 혁명가 '앙졸라'였다.
'앙졸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망했다.
그리고 그는 혁명세력의 대오를 맨 앞에서 이끌었다.
그런 혼돈의 상황 속에서 어느덧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한 '코제트'는 학생 혁명가 중 한 사람인 '마리우스'를 알게 되고 그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혁명에 참가한 '마리우스'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장발장'이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한평생 '장발장'과 대척점에 서 있었던 '자베르 경감'은 훗날 자신의 존재론적 비루함과 역할론적 허무함 그리고 삶에 대한 덧없음을 가슴 절절하게 깨달았다.
뼈에 사무치는 아픔이자 돌이킬 수 없는 후회였다.
기존 질서에 대한 유지, 정권을 향한 충견으로서의 역할, 굴절된 소신, 과도한 집착이 최고의 덕목이자 자신의 밥값이라고 생각했지만
'장발장'의 지속적인 '자비'와 '사랑' 앞에선 보잘것 없는 것이었음을 절감했다.
자신의 구린내 나는 뒷모습을 깨닫게 되자 그는 극심한 회의감에 휩싸였고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결국, 센강에 투신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랬다.
역시 세상을 바꾸는 건 '총과 칼'이 아니라 '사랑과 감동'이었다.
혁명을 꿈꾸었던 청년 '마리우스'와 딸처럼 애지중지 키웠던 '코제트'가 결혼하자 '장발장'은 일생의 소임을 내려놓은 채 그들 곁을 떠났다.
하지만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 바로 '장발장'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마리우스'는 아내 '코제트'를 데리고 '장발장'을 찾아갔다.
그는 거룩한 임종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던 숨겨진 스토리를 젊은 그들에게 술회하기 시작했다.
숱한 인생의 질곡, 멸시와 천대, 갖은 고초 속에서도 끝까지 유지하며 살았던 사랑과 헌신의 삶,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던 그의 휴매니즘이 그의 마지막 고백에서 애틋하게 흐르고 있었다.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 '레 미제라블'의 먹먹한 감동의 발원지도 바로 이 마지막 대목에 있었다.
사람들은 죽는 날까지 돈과 권력을 좇지만 인생의 정수는 순수한 헌신과 박애에 있음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 주었다.
막이 내리기 전에 절절한 노래가 흘렀다.
강력한 울림이었다.
먼저 떠난 '장발장', '자베르', '판틴', '에포닌', 혁명을 위해 목숨 바친 '앙졸라', 그리고 '수많은 학생들'을 위한 명복의 노래였다.
산 자들의 사랑과 새로운 세상을 향한 희망의 노래였다.
감사의 노래였고 생의 찬미였다.
그렇게 대단원의 막이 내려졌지만 관객들은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감동의 도가니였다.
진심 어린 박수도 한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위대한 작품을 멋진 감동으로 승화시켜 준 최고의 배우들에게 보내는 관객의 따뜻한 '오마주'였다.
'정애 누나'는 나의 2년 선배였다.
친밀한 선배였고 속이 깊은 선배였다.
뮤지컬이 끝나자 우리는 객석을 나와 배우 대기실 앞으로 갔다.
얼마 후에 키가 크고 잘생긴 '앙졸라'가 배우 대기실에서 나왔다.
'앙졸라' 역을 맡았던 '민우혁'은 '정애 누나'의 큰 아들이었다.
'우혁이'는 언제나 밝고 친절했다.
전도가 기대되는 다크호스였다.
금년 하반기엔 다른 작품의 주연으로서 그만의 예술혼을 뜨겁게 불태울 예정이라고 했다.
기대가 크다.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빅토르 위고'의 원작을 뮤지컬로 각색한 '알랭 부를리'가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세상에 궁핍과 배고픔으로 고통받는 누군가가 존재하는 한, 이 작품은 수많은 세월이 흐를지라도 그 고유한 가치를 잃지 않을 것이다."
벌써 132년 전인 1885년 봄에 세상을 떠난 '빅토르 위고'.
인생은 짧아도 예술은 길었다.
"사랑하는 우혁아. 정말 수고 많았다. 혼신의 열연을 펼쳐주어 깊이 감동했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해서 종은 더 아파야 하는 법이다. 이 점을 꼭 기억하면서 더 열정적으로, 더 겸손하게 정진해 주기 바란다. 너의 빛나는 영광을 위해 나도 늘 기도할게"
"그리고 정애 누나. 우혁이의 치열한 예술혼을 보면서 그 육신과 영혼에 녹아 흐르는 누나의 헌신과 사랑을 보았습니다. 강보에 싸인 작은 아기가 이렇게 훌륭한 뮤지컬 배우로 성장하기까지 지난 삼십여 년 간 누나가 흘렸을 땀과 기도가 내 눈에도 선하게 보였어요.
아들을 잘 키웠습니다. 이 지면을 빌려 누나에게도 감사와 축하의 박수를 보냅니다"
오늘 하루도 '장발장' 같은 생각과 행동으로 각자의 인생 스토리텔링을 진솔하게 엮어가는 복된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세상은 사랑이다.
또한 세상은 소통이자 공감이다.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2016년 3월 17일, 목요일 아침에.
동문회 워크샵을 마치고 단체로 관람했던 '레 미제라블' 공연.
그 역대급 뮤지컬 공연의 감동을 되새기며 큐티 마치고 몇 자 쓰다.
'민우혁'과 '정애 누나'에게 사랑과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