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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檀古記 -9 (1,000년 세월이 낳은『환단고기』)
『桓檀古記』는 신라 고승 安含老에서 조선의 李陌(이맥)에까지 1,000년 세월에 걸쳐 5人(삼성기 상-안함로,
삼성기 하-원동중, 단군세기-행촌 이암, 북부여기-복애 범장, 태백일사, 일십당 이맥))이 저술한 사서를 하나의
책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1. 한국사의 國統 脈을 세우는 근간『三聖記』
삼성기(上, 下)는 인류의 창세 역사와 잃어버린 한민족사의 국통 맥을 바로 세우는 근간.『三聖記』上은 신라를
부흥시킨 진흥왕 손자인 26세 진평왕(재위579-632)시대에 쓴 책.
불과 4쪽…그러나 이 기록은 인류의 시원국가인 환국에서 배달→고조선→북부여를 거쳐 고구려, 신라에 이르는
한민족사의 맥을 압축하여 전달하고 있다.
『三聖記』下는 환국(7대 桓因 3,301년. 9환족 12분국)과 倍達(18대 桓雄 1,565년)에 대해『三聖記』上보다
좀 더 세밀하게 기술. 桓國의 12나라 이름과 배달의 18세(대) 환웅의 이름, 재위 연도까지 상세 기록.
그러나 桓國을 계승하여 세운 나라가 神市에 도읍한 배달임을 밝힌『三聖記』上과 달리, 『三聖記』下는 환웅
천황이 무리 3,000명을 이끌고 도착한 곳이 神市라는 사실만 기록.
그런데『三聖記』下는 桓國시대가 시작되기 이전의 인류역사, 즉 現인류의 시조인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桓國의 실존에 대해서는『三聖記』上이 ‘吾桓建國이 最高’(우리 桓族이 세운 나라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선언한
것을『三聖記』下는 ‘昔有桓國’(옛적에 환국이 있었다.)이란 말로 다시 확인.
昔有桓國은 『三國遺事』「고조선조」에서도 선언되는 名句이다.
또『三聖記』上에서 “치우(蚩尤)천황이 계시어 靑邱를 널리 개척하셨다.”고 약술한 것을『三聖記』下는 天子의
자리를 노리고 군사를 일으킨 서방족 헌원(軒轅)을 배달의 치우천황이 탁록(涿鹿)벌판의 大戰爭에서 무릎을 꿇려
신하로 삼았음을 기록, 倍達겨레가 靑邱를 개척한 과정을 상세히 밝혔다.
『三聖記』上, 下는 음양의 짝을 이루어 인류와 한민족의 始原史를 드러내주는 소중한 史書다.
2. 고조선의 전모를 밝혀주는『檀君世紀』
『단군세기』는 초대 檀君인 檀君王儉에서부터 마지막 47세 高列加단군에 이르기까지 역대 단군의 이름, 在位
年數, 업적과 사건 등을 중심으로 연대기 형식으로 기술. 2,096년 동안의 고조선 역사를 기록.
『단군세기』가 전하는 고조선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三韓管境制.(辰韓,番韓,馬韓).
三韓管境制의 관점에서 고조선사를 살린다면 고조선 국내 정치는 물론, 中國과 日本 등과의 관계까지 파악이
가능하다. 『단군세기』는 상고시대 내내 한민족과 인류의 정신적 지주였던 神敎의 다양한 풍속을 전하여 現人
類文化의 뿌리를 깨우쳐 준다. 神敎의 풍속 中에서 天祭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이다.
天祭는 桓國과 배달 이래 各시대와 나라마다 다양한 이름으로 행해진 동북아 최대의 祭典이었다.
『단군세기』는 고조선시대 역대 단군이 매년 하늘에 계신 三神上帝님께 天祭를 올려 上祭님의 덕을 찬양하고
天祭를 거행한 후에는 온 백성과 더불어 음주가무를 즐기며 큰 잔치를 벌였음을 밝히고 있다.
『단군세기』는 (중국의 周나라 때 처음 실시된 것으로 알고 있는 토지제도인) 丁田制를 본래 2세 夫婁(부루)단군
때 고조선에서 먼저 실시→중국으로 갔다고 기록.
또 BC2,100년경에 벌써 貝錢(패전)이라는 화폐를 사용했으며 세금제도도 시행했음을 밝히고 있다.
『단군세기』서문엔 “나라는 形體와 같고 역사는 魂과 같으니, 형체가 그 혼을 잃고서 보존될 수 있겠느냐면서
나라와 역사의 관계를 강조.
당시 고려는 元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 국호를 버리고 元과 합치자는 간신배들이 들끓던 때였다.
그래서 나라를 구하는 길은 바로 역사를 배우는데 있다고 선언했던 것.
3. 잃어버린 고리, 부여사의 전모를 밝히는『北夫餘記』
『북부여기』는 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와 북부여에서 갈려 나간 동부여, 갈사(曷思)부여, 서부여 등 여러 夫餘史
를 총체적으로 기록하여 부여사의 전모를 밝혀 준다.
이 史書는 북부여의 건국 시조인 解募漱(해모수)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혔다.
또 高句麗 시조로 알려진 高朱蒙(고주몽)이 원래는 북부여 6세 高無胥(고무서)단군의 사위로서 북부여 7세의 단군
이었다는 사실도 밝혔다.
그래서 북부여의 대통(代統)이 고구려로 이어졌음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북부여기』는 또 만주와 대륙에서 여러 부여사가 진행되는 동안 한반도 땅에서 펼쳐진 또 다른 한민족사를 전
한다.
燕人 衛滿의 배은망덕이 발단이 되어 대동강 유역에 崔崇의 樂浪國이 건설되고 한강 이남에 새로운 삼한(南三韓)
이 성립된 사실을 기록했다.
고조선이 亡하고 고구려가 세워지기 전까지 대륙과 한반도에서 전개된 한민족의 격동적 역사를 기록한 사서가
『북부여기』이다.
이 책이 없었으면 고조선 마지막 임금인 高列加단군이 퇴위한 BC238-고주몽이 고구려를 연 BC58 사이의 한민
족사는 미궁에 빠졌을 것이다.
이 책 덕분에 고조선과 고구려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인 부여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9,000년 한국사에서 가장 파악이 어려운 부분이 부여사인데,『환단고기』는 부여사 전모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三國史記와 三國遺事는 夫餘史를 誤記했다. 삼국사기의 경우, 고주몽을 해모수의 子로 기록했고, 삼국유사 경우
고주몽을 북부여의 5세 高斗莫(고두막)단군과 혼동, 同一人物로 기록했다.
4. 신교 원형 文化의 기틀을 밝히고 한민족사를 집대성한『太白逸史』
『태백일사』는 총 8권으로 桓國에서 고려까지 근세 조선을 제외한 한민족사의 국통 맥 전체를 기록하였다.
제1권『三神五帝本記』는 天上에 만물의 존재 근거인 三神이 계시고, 그 三神이 五方位의 주재자인 五帝임을
밝힌다. (五行思想의 출처가 곧 三神사상이다.)
三神五帝本記는 三聖祖(환국, 배달, 조선) 시대의 정치, 종교, 건축, 의식주 생활文化를 구성하는 中心사상인
三神철학을 담고 있다. 때문에 『태백일사』의 序頭를 「삼신오제본기」로 시작하였다.
동양의 易學은 곧 象數學이라 할 수 있는데 象이란 보이는 현실 세계 이면에 있는 어떤 기운 같은 것이다.
形象이란 말이 있다.
形은 곧 보이는 세계고 象은 그 본질로 존재하는 내면의 변화이다.
예를 들어 사람의 얼굴 표정을 보고 그 속마음을 읽어내는 것과 같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걸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도 일종의 象을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똑같이 변화무쌍한 자연 속에 살고 있지만, 그 변화의 질서를 깨치는 사람은 드물다.
동양의 聖哲들은 陰陽과 五行이라는 象을 발견했다.
주역을 보면 하늘은 상을 만들고 땅은 형을 만든다고 했다. (在天成象在地成形).
이러한 상은 닦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이다.
상에다가 수를 붙인 것은 왜인가? 영적이고 직관적인 세계라 할 수 있는 상이 수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목은 3과 8, 화는 2와 7 같은 것이다.
象을 卦라는 상징부호로 나타낸 것이 8괘, 64괘와 같은 卦象이고, 河圖, 洛書와 같이 數로 나타낸 것을 數象이라
부를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象數學의 가장 기본이 된다.
六爻(육효)는 64괘가 모두 각기 여섯 개의 끊어지거나 이어진 막대로 되어있는데, 그 막대를 효라고 한다.
여섯 개니까 육효다. 이어진 것을 陽爻, 끊어진 것을 陰爻라 한다.
동양학에는 우주를 표현하는 도구가 3가지 있다.
甲子, 卦爻, 象數이다. 象數는 말 그대로 象과 數를 하나로 본 것이다.
동양학은 모든 것이 位 상수로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된다. 3극, 4상, 5행, 6기, 7정, 8괘, 9궁... 이런 식이다.
실제로 神農本草經(한의학), 鬼谷子撰(李虛中 命書/命理學) 등은 분명 위 상수로 표현되어 있다.
李虛中 命書는 현존하는 최고의 고법사주 이론서.
李虛中(762-813)은 唐나라 때 사람으로 西紀 794년에 科擧에 及第하여 進士가 되었고 헌종(憲宗)때 전중시어사
(殿中侍御史) 벼슬을 지내고 813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귀곡자(鬼谷子)가 저술한 것으로 전해지는 귀곡
자유문(鬼谷子遺文)을 주석(註釋)했다. 李虛中命書를 편찬한 인물이다. 이허중의 字는 常容.
서양은 수리학과 기하학을 별개로 구분한다.
그러나 동양학은 位수리학과 기하학을 하나로 표현하고 있다.
1水, 2火, 3木, 4金, 5土 이런 식이다. 位 사고는 서양적 사고보다는 분명 한 단계 높다.
상수학은 원래 춘추전국시대 이전에 활성화 되어 있었다. 동양학의 시작은 상수로 시작했다.
그런데 漢나라를 거치면서 차츰 쇠퇴하였다가 조선말에 이르러 다시 극점을 찍어 부활했다.
그리고 지금은 촉망받는 분야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연구하는 주체가 아직 분명하지 않다. 또한 대중화 역시 아직은 묘연하다.
桓檀古記 -10
당대 최고 지성들의 역작
1.『三聖記』上을 지은 安含老(579-640, 61세. 경주 불국사 ‘신라를 빛낸 인물관’에 10성 중 한 분으로 모셔져
있다.)
- 신라 진평왕 때 人.
- 신라의 대표적 人物인 十聖 중 하나.
- 고려 때 覺訓(승려)이 정리한 삼국시대 이래 고승들 얘기인『海東高僧傳』에 …23세 때(진평왕 23년) 칙명
받아 隨나라서 온 사신 따라 隨나라에 가서 文帝(재위 581-604) 직접 만남
- 4년 만에 (605년) 공부 마치고 서역 승려들과 함께 귀국, 경주 황룡사 머물며 정진.
- 皇龍寺 9층탑 지어 女王의 권위 세우고 외침 없도록 했다.『삼국유사』에는 황룡사 9층탑 건립자를 643년
(선덕여왕2년)에 唐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승려 慈藏이라고 했다.
안함로가 입적한지 3년이 지난 때였다.(안함로 입적 후 탑 세워진 것).
- 안함로는 뛰어난 학식을 갖춘 지성. 불교를 초월, 儒佛仙과 上古시대 神敎文化를 허용한 당대 최고 道僧.
2.『三聖記』下 지은 元董仲(?-?)
- 발해 또는 고려시대 人物로 추정. 또는 이조시대?
※『三聖記』上, 下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썼다.
上을 읽은 원동중이 부족한 내용을 보충시키기 위해 下권을 쓴 것처럼 上下는 상호보완 관계에 있다.
(만약 동시대를 살았다면 師弟之間?)
3. 檀君世紀 쓴 李嵒(1297-1364, 67세)
- 元나라 간섭 받기 시작한 고려 25대 忠烈왕 때(1297) 경남 고성에서 출생(固城 李씨).
元에 충성을 바친다고 해서 임금 시호에 忠 자를 쓴 고려왕들…忠善(26대), 忠肅(27), 忠惠(28), 忠穆(29), 忠正(30)
- 이암의 호 杏村은 자신이 유배되었던 강화도 마을 이름.
- 고려 공민왕 때 門下侍中
- 조부, 父 모두 학식 많아
- 17세 때(1313, 고려 26대 충선왕 5년) 文科 급제.
- 충숙왕10년(1323)에 유청신과 오잠 등이 국호 고려를 폐지, 원나라의 일개 성이 되고자 하는 請을 원 조정에
제출, 元의 한 성으로 한다는 칙령 받자, 이암은 “우리나라는 환단시대 이래 모두 天上 上帝님의 아들(천제자)라
칭했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니 애당초 분봉을 받은 제후와는 근본이 같을 수 없습니다.”(『太白逸史』「高麗國本紀」)는 통분의 상소문
올림.
- 10세 때 공부했던 강화도에 36세 때 유배됨.(이곳서 친척 백이정이 충선왕 따라 元에 들어가 10년 머물고 귀국
때 가져온 儒家經典을 비롯, 수많은 圖書를 읽었다. 經學, 曆學, 天文, 風水, 地理 등)
- 3년 후 유배에서 방면(1335). 천보산 태소암에 1년간 머물렀다. 이때 李茗과 范障을 만나 한민족사 회복을 위
한 史書 집필 결의. 이들은 素佺거사라는 人物로부터 석굴에 감춰져 있던 古書를 받음.
(인류文明의 황금시절이었던 桓國-배달-고조선시대를 기록한 책들).
- 이암은 素佺거사로부터 들은 이야기 + 전수된 冊을 바탕으로 → 『太白眞訓』,『檀君世紀』를, 伏崖거사 范障
은 『北夫餘紀』를, 淸平거사 李茗은 『震域留言』을 썼다.
- 이암은 충직하고 大義에 투철, 忠肅왕과 忠惠(복위)왕 때 입궐, 유배를 계속하다가 公愍왕 때 門下侍中(국무총리).
- 홍건족이 압록강 넘어 의주, 철주(평북)까지 침략하자 이암이 최고사령관으로 출정, 40,000명의 적을 물리쳤다.
- 1361년 홍건적이 10만 大軍으로 再侵, 황해도 지역까지 침입하자 公愍왕은 南으로 피난, 福州(현 경북 안동)에
이르렀다.(이때 이암은 공민왕 곁 지킴)
수도 開京이 함락된 지 54일 만에 탈환되고(1362), 공민왕이 興王寺(경기도 개풍군의 절)에서 총신 金鏞이 왕
시해를 획책, 암살될 번한 위기를 넘긴 후 관직서 물러남(67세. 17세에 급제, 50년 동안 6임금(26세 忠善왕부터
31세 公愍왕까지)관직→야인으로.
- 나이 67세에 강화도로 들어가 紅杏村에 海雲堂이라는 집을 짓고 스스로 紅杏村叟(수)라 불렀다.
- 망해가는 국운에 비분강개하여 동북아의 맹주였던 옛 조선의 영화로운 역사를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서술한
역작이『단군세기』. (68세 5월에 별세…『단군세기』서문을 끝으로 별세)
- 이암의 글씨는 麗末鮮初의 圖書體가 될 정도로 최고의 명필이었다.
그는 송설체(松雪體. 元나라 초기 趙孟頫(부)의 서체.)를 그대로 구사하지 않고, 송설체의 유려함과 고려 坦然體
(大鑑國師 坦然)의 근력을 겸한 서체를 구사.
- 이암은『단군세기』서문에서 국통을 바로 세우는 것이 곧 구국의 길임을 적었다. 나아가서 인간은 어떻게, 왜,
무엇을 위해 태어났으며,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할 참된 삶은 무엇인가에 관한 인간론의 명제를 명쾌한 필치로
풀어냈다.
첫 行부터 마지막 行까지 논리 정연한 구조로 정리된『단군세기』서문은 대학자의 지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명문
이다. 행촌 이암은 원형文化와 신교역사관의 정립자이다.
※新敎의 핵심사상을 전하면서, 안으로는 역적이 들끓고 밖으로는 mongol과 홍건적의 외침으로 조정과 백성이
유린된 고려의 현실을 매섭게 질타한『단군세기』서문. …후속 연구가 아쉽다.
趙孟頫(1254-1322, 68세) (元 왕조에 봉사. 중국 문화 이어감)
元 황제의 조맹부 평
①제왕의 핏줄
②풍모 뛰어나
③박학다식
④언행 바르다
⑤글 솜씨가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⑥서예, 그림 실력 절륜
⑦불교, 도교 심오한 이치를 깨닫고 있다.
그러나 보통 선비 장점을 말할 때 유교 경전에 정통해 있다거나, 바른 것 그른 것 가리는데 추호도 거리낌 없다는
말은 없다. 그 이유는 조맹부가 唐나라도 宋나라도 조선도 아닌 元나라 선비였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4.『북부여기』를 쓴 范樟(?-?)
-麗末 錦城(현 羅州) 生. 호=伏崖. 복애居士로 불림.
-여말 충신 鄭夢周(1337-1392)의 제자
-범장의 증조부 范承祖는 南宋때 禮部侍郞을 지냈는데 元나라에 의해 남송이 멸망하자(1279) 고려에 망명했다.
조부 范有睢(수)가 여진족 정벌에 공이 있어 錦城君에 책봉된 것을 계기로 금성 范씨가 됨.
-범장은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문과에 급제, 諫議大夫까지 지냈다.
-1335년 천보산에서 李嵒(암), 李茗과 함께 素佺거사로부터 秘書를 전수받았다.
-고려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뜻을 공유한 70여명과 함께 萬壽山 杜門洞에 은거.
-조선 태조, 태종이 여러 차례 출사 권고했으나 불응, 고향(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복만마을)에 은거.
고향에 온 범장은 자신이 즐겨 노닐던 곳인 伏岩을 따서 호를 伏崖라 했다.
-범장은 이암, 이명과 함께 국호만 살아 있을 뿐 주권을 상실한 고려의 현실을 통탄하며 반드시 한민족사를 되찾
을 것을 굳게 결의했다. 이들 3인의 결의 덕분에 한국사 회복의 서광이 비치게 된 것.
-그는(복애 범장) 元나라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가 다시 일어나 한민족의 옛 영광을 회복하여 고조선→북부여
(列國時代)→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四國時代)→大震. 신라(南北國시대)→고려로 이어지는 국통의 맥을 후대
에 전하고자 夫餘史를 저술한 것이 分明.
5.『태백일사』지은 李陌(두렁맥.1455-1528)
-조선 초기 文臣
-杏村 李嵒의 玄孫
-張淑容(張綠水)이 연산君 총애 믿고 분에 넘치게 재물 탐하고 사치 일삼자 수차 탄핵상소.
50세(1504)에 槐山에 유배됨.
-1506년 중종 반정 후 복직. 66세 때(1520년) 실록 기록하는 撰修官.
(이때 세조, 예종, 성종 때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수거하여 궁궐 깊이 감추어 두었던 上古 역사서를 마음껏 접할 수
있었다.)
이맥은 그 금서들을 통해서 알게 된 史實과 예전 귀양살이 시절에 정리해 둔 글을 합쳐 1권의 책으로 묶고 正史
에서 빠진 太白(큰 밝음의 뜻으로, 태백의 역사란 동방 한민족의 大光明의 역사를 말함)의 역사라는 뜻으로
『太白逸史』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中國을 事大하는 조선의 악습과 성리학에 위배되는 학설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세태 때문에 이 책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안에 비장했다.
이맥은 9,000년 한민족의 왜곡 날조된 국통 맥을 확고하게 바로세운 불멸의 공덕을 쌓았다.
그는 神敎文化의 원전인『天符經』과『三一神誥』에 정통한 역사학자였다.
그의 호 일십당(一十堂)은 천부경의 一積十鉅(하나가 생장운동을 하여 열까지 열린다)에서 따 온 것으로 그가
우주의 본체인 一(태극)과 十(十無極)의 정신에 관통했음을 나타낸다.
『太白逸史』를 지은 李陌은 한민족의 三神文化의 원형 역사관의 化身이다.
桓檀古記 -11
『桓檀古記』의 편찬과 대중화
1.『환단고기』를 편찬한 桂延壽(1864-1920, 56세)와 스승 李沂(이기, 1848-1909, 61세)
-1000년에 걸쳐 쓰여 진 5권의 史書를 1권의 책(『환단고기』)으로 묶은 사람은 雲樵 桂延壽
-李沂(1909년경에『湖南學報』도 발행. 국세 기울자 1909.7.13 서울여관방서 자결. 62세)는 1909년에 檀학회
조직, 神市開天 주장).
羅寅永(羅喆,1863-1916)은 檀君開天 주장 - 檀君敎(후에 大倧敎로 개칭)창설 - 종교단체조직(1909)
-계연수, 1911년(48세 때)에 『환단고기』에 범례 지어 붙인 뒤 독립운동가 홍범도(1868-1943), 오동진(1989-
1944)의 도움으로(자금지원) 만주 寬甸縣(관전현)에서 30부를 간행.
(초간본은 剞劂. 인쇄하려고 새김칼과 새김 끌로 나무판에 글자를 또박또박 새기는 것)
-범례에서 계연수는 “桓檀 이후로 전수되어 온 三一心法(太古시대 동방의 우주사상의 핵심)이 진실로 이 책 속
에 들어있으니, 東方 大光明의 참진리가 중흥하는 기틀이 아니고 무엇이랴.
손발이 절로 춤추며 흥겨워 외치고 싶고 기뻐서 미칠 듯 하도다.”고 했다.
-發刊 意義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의 주체성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크게 축하할 만한 일이요, 또한 민족文化의
이념을 표출하게 되었으니 크게 경축할 만한 일이며, 또 한편으로 세계 인류가 대립을 떠나 共存할 수 있는 기틀
을 마련하게 되었으니 더욱 경축할 만한 일이다.”고 했다.
-계연수는 조선이 일제의 야욕 때문에 나라를 빼앗기고 절망에 처해 있을 때 인류의 창세사와 한민족의 9,000년
국통 맥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국사학의 아버지였다.
2.『환단고기』를 대중화 시킨 李裕苙(이유립.1907-1986)
-이유립은 이암, 이맥의 후손(평안도 삭주産. 독립운동가 李觀楫이관즙의 四男). 이유립의 父와 계연수는 친했다.
-13세 때(1919) 배달의숙(계연수가 만듦)에 들어가 계연수, 최시흥, 오동진 등 독립운동가들의 강의를 듣고
『환단고기』공부. 독립군 사이의 통신연락(소년통신원)
-해방 후 1948.5 월남하려다 안내인 배신으로 체포되어 해주 내무서에 수감. 4개월여에 걸친 수감기간 중 고문
등으로 죽음 일보직전. 내무서 인근에 벼려졌으니 극적으로 소생, 추석 다음 날 어렵게 3.8선을 넘었다.
그 후 두어 차례 북한 다녀 옴. 이때 환단고기를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1963년(57세)에 대전은행동에 정착. 1963.11 檀學會를 桓檀學會로 개칭하고 후학을 기르며 역사연구, 강연에
전념
-『환단고기』를 처음으로 발간하고 일제의 역사 도륙의 칼날에 무참히 죽어간 운초 계연수, 추위, 굶주림 속에
서도 역사 연구에 헌신하며『환단고기』를 세상에 널리 알린 寒闇當한암당 李裕苙.
-이유립은 1986년(86세) 타계. 현재까지 알려진『환단고기』 판본은 1911년 계연수가 간행한 초간본
(이유립 보존), 1949년 오형기(吳炯起)의 필사본, 이 필사본을 영인한 趙炳允(이유립의 젊은 문하생)이 1979년에
발간한 光吾理解社(서울)본 100부 출판)
-1976년에 이유립 소장 초간본 분실 ①성남 집 홍수 때 ② 집주인이 밀린 세 안낸다고 책 팔았다는 등 설 많음
-지금 나와 있는『환단고기』는 광오이해사 본과 배달의숙 본(光吾理解社 本에 있는 오형기의 跋文을 삭제하고
誤字를 바로 잡은 것은 1979년. 출판비가 없어 미루다가 1983년에야 배달의숙을 발행인으로 100부 발행)
-배달의숙 본은 迦葉原夫餘紀가 표기되어 있어서 光吾理解社 본과 쉽게 구별된다. 오형기가 목차를 필사할 때
‘가섭원부여기’를 누락시켰으나, 이유립이 초간본을 보았던 기억을 되살린 것으로 파악된다.
왜『환단고기』를 읽어야 하는가 : 환단고기의 특징과 가치
1. 인류의 창세文明과 한민족의 뿌리 역사의 진실을 밝혀주는 유일한 史書이다.
『三聖紀』는 ‘吾桓建國 最古’라는 문장으로 시작. (동서양 4대 문명권의 발원처라는 말.
인류문명은 환족에서부터 시작). 오환은 우리(吾) 모두는 桓(밝을환. 光明자체)이라는 것.
삼성조 시대는 桓國(BC7197-BC3897, 3,300년간 7대 桓因)
倍達國(BC3897-BC2333, 1564년간 18대 桓雄)
古朝鮮(BC2333-BC238, 2095년간 47대 檀君)으로 전개됨.
※환인, 환웅, 단군은 보통명사(최고 통치자를 일컫는 말. 오늘의 대통령을 지칭)
2. 단절된 한민족사의 國統 맥을 가장 명확하고 바르게 잡아준다.
현재의 강단사학 國統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7,000년 상고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환단고기』에
들어있는 5대 사서 중 『삼성기』上,下 그리고 『북부여기』는 三聖祖에서 고려, 조선에 이르는 국통 맥을 바로
세우는 근간이 된다.
그 중『북부여기』는 한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리인 夫餘史(북부여, 동부여를 비롯한 여러 부여의 역사) 전모를
기록, 기존 어느 사서에서도 밝히지 못한 고조선과 고구려간의 국통 맥을 이어 준다.
한국史의 국통 맥은 환국-배달-고조선-북부여(列國時代)-고구려·백제·신라·가야 四國時代-대진(발해)·신라
(남북국시대)-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져왔다.
『환단고기』덕분에 잃어버린 9,000년 한국사의 총체적인 맥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3.『환단고기』는 桓, 檀, 韓의 원뜻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환, 단, 한의 光明사상이 실현된 上古시대 인류와
동북아 역사의 전체 과정을 기록하였다.
桓(天光明) + 檀(地光明) = 天地光明 … 따라서『桓檀古記』는 천지광명을 체험하며 살았던 태고적 인류의 삶을
기록한 옛 역사이야기라는 뜻이다.
韓 = 人光明(인간은 天地가 낳은 자식으로 인간에겐 天地父母의 光明이 그대로 다 들어있다.
한의 뜻은 수십 가지이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天地光明의 主人으로서의 인간을 의미한다.)
※환은 곧 한이라 하여 이 책 제호를 『한단고기』라 함은 용인할 수 없는 잘못.
檀은 박달나무 단 字인데, 박달은 '밝은 땅' 이라는 뜻이다. 즉 檀은 땅의 光明, 地光明을 뜻한다. 그러면 天地人의
光明은 어디서 왔을까?
『太白逸史』『三神五帝本紀』에 이르기를, “大始에 上下와 東西南北 사방에는 일찍이 암흑이 보이지 않고 언제
나 오직 한 光明이 있었다.”고 했다.
천지가 열리기 전에 오직 광명만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 우주는 원래부터 광명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환단고기』는 ‘어둠에서 광명이 열렸다’고 한『구약전서』의 창세 이야기와 전혀 다르게 말한다.
같은 동양인데도 구약(이스라엘)과 환단고기(환국)에는 차이가 있다.
우주는 영원토록 오직 한 光明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우주에서 나온 하늘(환), 땅(단), 인간(인)은 서로 구분이
되기 때문에 하늘의 光明은 桓,땅의 光明은 檀,인간의 光明은 韓으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환국에서 대한민국까지 나라 이름들이 모두 光明 사상을 담고 있다.
桓國은 桓 그 자체이고, 倍達은 밝다를 뜻하는 배(倍)와 땅을 뜻하는 달(達)이 모여 동방의 밝은 땅을 의미한다.
배달을 달리 ‘檀國’ 이라 부르는 것도 桓檀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다.
후대의 漢陽조선과 區分하기 위해 옛 ‘古’ 자를 덧붙인 古朝鮮도 光明사상을 담고 있다.
朝鮮은 ‘아침 햇살을 먼저 받는 곳(朝光先受地)을 뜻한다.
이 말은 고조선 6세 달문(達文) 단군 때 神誌發理가 지은 『神誌秘詞』에 나온다.
『新增東國與地勝覽』에서는 “동쪽의 끝 아침 해가 떠오르는 땅에 위치하였으므로 조선이라 불렀다고 썼다.
(東表日出之址,故曰朝鮮)
고조선의 국통을 이은 북부여의 夫餘도 ‘불’ 이라는 말로 光明을 나타낸다.
夫餘 중에서도 구국 영웅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세운 東明夫餘는 동녘(東)과 밝을 명(明) 자에 광명사상이 들어
있다. 또 고구려 유민이 세운 大震國이 震 字는 고조선 辰韓의 辰(아침 진, 새벽진) 자와 의미가 동일하다.
대진이 일어난 만주 지역이 고조선 三韓의 중심 국가였던 辰韓(眞朝鮮에 속한 땅이었기에 큰 진한, 큰 진 조선
이라는 의미에서 大震이라고 했다는 견해도 있다.)도 동방에 있는 광명의 큰 나라라는 뜻이다.
‘大震’이란 말보다 더 잘 알려진 발해(渤海)도 밝은 바다라는 말로 역시 광명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고종황제가 선포한 대한민국의 大韓이란 말에도 역시 韓의 光明精神이 내포되어 있다.
桓, 檀, 韓의 光明精神은 國號뿐 아니라, 각 시대 창업자의 호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桓仁,桓雄,檀君,이 세 호칭은 모두 ‘光明의 지도자’를 뜻한다. 桓仁은 天光明의 ‘桓’과 책임지는 사람을 뜻하는
‘仁’자로 이루어져 ‘광명의 아버지’를 뜻한다. 환웅과 단군 역시 그 호칭에 桓과 檀의 光明사상을 담고 있다.
북부여를 세운 解慕漱(해모수)의 성씨인 ‘解’ 자 역시 우리말에서 ‘태양’을 뜻하므로, 光明精神이 담겨 있다.
신라의 朴赫居世도 ‘밝다’는 뜻의 朴 자로 성을 삼았고, 이름에 ‘빛날 혁麻’ 자를 써서 광명사상을 표출하였다.
한양조선의 이성계(李成桂)가 즉위 후 이름을 ‘새벽 단旦’ 자로 바꾸었는데 이 또한 光明을 뜻한다.
이성계는 고조선의 영토와 文化를 회복하여 과거 한민족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웅지에서 국호를 조선으로 定하고
자신의 이름을 ‘새벽 단’ 자로 바꾼 것이다.
한마디로 桓國 이래 동북아 한민족의 모든 역사과정은 환단(天地光明)의 역사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기록한 『환단고기』는 天地光明의 역사서이다
4.『환단고기』는 한민족의 고유 신앙이자 인류의 始原宗敎이며 原型文化인 神敎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기록
되어 있다.
神敎의 문자적인 뜻은 ‘神으로써 가르친다’는 것, 다시 말해 神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단군세기』의 ‘以神施敎’,『규원사화』의 ‘以神設敎’,『주역』의 以神道設敎 등의 줄임말이 곧 神敎이다.
신교에서 말하는 神은 인간과 天地萬物을 모두 다스리는 통치자 하나님인 三神上帝님이다. 그러므로 神敎는 三神
上帝님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다. 즉, 神敎는 삼신상제님을 모시는 인류의 원형신앙이다.
한민족은 天祭를 올려 상제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했다.
그 文化(天帝文化)가 桓國을 연 桓仁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桓國은 인류 祭天文化의 종주이자 고향이다.
이것을 태백일사「환국본기」에서 ‘환인께서 天神(삼신상제님)에게 지내는 제사를 주관하였다.(主祭天神)고
기록하였다. 祭天文化로 나타난 한민족의 上帝信仰은『환단고기』全篇에 기록되어 있다.
『구약전서』가 유대민족의 종교 경전이자 역사서인 것처럼,『환단고기』는 동방 한민족의 상고 역사서이자
소중한 종교 경전이다.
5.『환단고기』는 天地人을 三神의 현현(顯現)으로 인식한 한민족의 우주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전한다.
우주 萬有의 생성 근원을『환단고기』에서는 一神이라 정의한다. 一神은 곧 종교에서 말하는 조물주, 道, 하나님
이다. 그런데 一神이 실제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작용을 할 때는 三神으로 나타난다.
한 손가락이 세 마디로 되어 있듯이, 하나 속에 셋의 구조인 三數原理가 들어있다.
그래서 한민족은 예로부터 우주의 조물주 하나님을 三神이라 불렀다. 이것이 한민족이 창시한 우주사상의 출발점
이다.
三神이 현실계에 자신을 드러낸 것이 바로 天地人이다. 각각에 내재된 三神의 生命(命)과 神性(性)은 서로 同一
하다. 이 같은 天地人을『환단고기』는 天一, 地一, 太一 이라 정의한다. 인간을 太一이라 부르는 것, 이것이
한민족의 우주사상의 핵심이다.
인간을 人一이라 하지 않고 太一이라 한 것은, 人間이 天地의 손발이 되어 天地의 뜻과 소망을 이루는, 하늘이나
땅보다 더 큰 존재이기 때문이다.
『환단고기』에서는 우주사상의 근간인 一神과 一氣, 一神과 三神, 三神과 天地人, 天地와 人間 등의 관계를 조명
하면서 종합적으로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환단고기』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歷史哲學의 經典이요 文化經典인 것이다.
6.『환단고기는 동방 한민족사의 첫 출발인 배달시대이래 전승된, 한민족의 역사 개척정신인 郎家사상의 원형
과 계승 맥을 전하고 있다.
郎家는 곧 郎徒인데, 우리에게 익숙한 신라의 화랑도 또한 郎家이다. 낭가의 원형은 배달시대의 관직이었던 三郞
이다. 三神의 道法을 수호하는 직책이기에 三자를 붙여 三郞이라 했다.
三郞은 三神上帝의 道로써 백성을 교화하고 형벌과 복을 주는 일을 맡았다.
桓雄이 桓因天帝의 命을 받고 동방개척을 위해 白頭山으로 이주할 때 동행했던 무리 3,000명의 정체도 바로 이
郎家이다.
문명개척의 주인공으로서 倍達을 세운 그들은 濟世核郞이었다.
세상을 구한다는 의미에서 濟世란 말을 붙여 배달의 문명개척단을 濟世核郞이라고 부른 사람은 한국 국사학의
아버지 寒闇堂 李有苙이다.
환국 말기에 태동한 濟世核郞과 배달시대의 三郞은 그 후 古朝鮮의 國子郞 → 북부여의 天王郞 → 고구려의 皂衣
仙人(조의선인)→ 백제의 武節 → 신라 花郞 → 고려의 在家和尙(仙郞 또는 國仙) 등으로 계승되었다.
(청소년 무사단)
배달의 삼랑(三郞)→ 고조선의 국자랑(國子郞)→ 북부여의 천왕랑(天王郞)→ 고구려의 조의선인(皂依仙人. 조의
선인. 皂는 하인 조, 검은 빛 조 ) → 백제의 武節→‧ 신라의 花郞→ 고려의 在家和尙(仙郞, 國仙. 宋나라 휘종의
사절단 徐兢이 1123년 고려에서 見聞한 것을 그림, 글로 표현한『고려도경』에서 고려의 낭도를 재가화상이라
했다.) 등으로 계승 되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三神 上帝님의 진리를 공부하며 심신수양, 학문과 무예를 연마하여 유사시엔 구국의 선봉에
서서 목숨을 바쳤다. 郎家는 神道의 구도자이며 역사개혁의 선봉장으로서 한 시대의 구국청년단이었다.
7.『환단고기』는 (동방의) 한민족이 天子文化(山東省 泰山 첫 門樓엔 紫氣東來란 글씨 넉자가 있다.
동방 天子文化의 출원을 말해주고 있다. 紫는 天子의 별인 紫微垣의 紫자로 천자를 상징한다.
따라서 紫氣東來는 천자문화의 기운이 동방에서 왔다는 의미이다.
(중국의 천자문화의 출원이 동방의 한민족임을 밝힌 것이다.)의 主人公이요 冊曆문화의 시조로서 數를 최초로
발명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天子는 天帝之子 준말이고, 天子는 上帝의 다른 말이므로 天子는 곧 상제님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天子는 상제님을 대신, 땅 위의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자요, 하늘에 계신 상제님께 天祭를 올리는 제사장이다.
한마디로 天子는 上帝님과 人間을 연결하는 다리 같은 존재다.
天子의 가장 근본적인 召命은 자연의 법칙을 드러내어 백성들이 春夏秋冬 때에 맞춰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책력
을 만드는 것이었다.
배달시대에 지은 한민족 최초의 책력(冊曆)인 七回祭神曆(『태백일사』「신시본기」) 또는 七政運天圖(『태백
일사』「소도경전본훈」)는 인류 최고의 달력이다.
이를 계승 발전시켜 唐堯(당요)와 虞舜(우순)이 366일과 356와 4분의 1의 1년 曆數를 정립시켰다.
역법에는 숫자가 사용된다. 그래서 책력의 시조라는 것은 곧 숫자文化의 시조라는 말이다.
수의 기본인 1에서 10까지의 숫자는 9,000년 전, 환국시절의 우주론 경전인『天符經』에 처음 보인다.
천부경은 3분의 1이 숫자로 되어 있다.
문자발명 이후에는 반드시 숫자가 나온다. 한민족은 세계 최초로 숫자를 만든 민족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이 바로 배달시대의 算木(숫자를 셈할 때 쓴 막대기)이다.
배달국 후기 치우천황 때에는 산목의 변형태인 鬪佃目을 사용했고, 부여시대에는 書算을 사용했다.
(『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
배달시대의 성인 제왕인 太皥伏羲(태호복희) 씨가 1에서 10까지 수의 생성과 변화원리를 찾아내 河圖를 그렸고
또한 八卦를 그었다. 하도는 4,200년 전 禹임금이 창안한 洛書와 함께 동양수학의 기반이며 象圖(象數)學
(numberology)의 토대이다. 伏羲 八卦는 나중에 문왕 八卦로 발전,『周易』의 기초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고대 한민족이 수를 발명하고 하도와 팔괘를 창조하였으므로 동방 한민족이 철학과 과학文明의
원뿌리가 되는 것이다.
※後漢 때 채옹(蔡邕)의『獨斷』에는 “天子는 동이족이 사용하던 호칭이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는 까닭에 天子라 부른다.”고 했다.
Hard 수학 : 전통적인 수학 (이에 대응하여 하나의 수식을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하는 수학을 Soft
수학이라 한다.) ※물리학(양자역학)에서는 현상을 해석의 여지로 본다.
Soft 수학 : 대자연의 오묘한 창조와 변화의 법칙을 수의 상호관계로써 밝힌 河圖와 洛書야말로 진정한 Soft
수학이다. 상생의 이치를 나타내는 河圖는 1에서 10까지 수로써 천지의 모든 변화와 과정을 표현하고, 상극의
이치를 나타내는 洛書는 1에서 9까지 수로써 모든 변화를 표현한다.
하도와 낙서에서 圖書館이라 할 때의 圖書란 말이 나왔다.
※세종대왕 때 七政算이 편찬되었다. 칠정산은 우리 자체의 冊曆이다.
8 .『환단고기』는 한민족이 天文學의 宗主임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의 天文기록은 인류역사 최초의 天文기록이다. 천문대를 운영하며 남긴 기록은 당시 전 세계 어느 역사에도
없었던 것. 고조선이 인류 천문학의 종주국임을 보여주는 實例이다.
『삼국지』「위서동이전」에도 “濊(예)나라 사람들은 별자리를 관측, 그 해의 풍흉을 점쳤다”고 하여 고조선에서
천문관측이 행해졌음을 밝히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한반도의 고인돌에는 돌 뚜껑 겉면에 80개의 구멍을 내어 북두칠성의 국자 형상
을 만들어 놓았다는 접이다. 평안도 증산군 용덕리에서 발견된 10호 고인돌이 그러하다. 상원군 번동 2호 고인돌
뚜껑돌에도 역시 80개의 구멍을 내어 북두칠성의 국자형상을 만들어 놓았다.
세계 천문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Mesopotamia의 Babylonia에서 발견된 토지경계비에 새겨진 별자리를 천문학
의 원형으로 본다. 이 별자리의 그림은 BC1,2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인돌의 별자리는 이보다도 1,800년 이상 앞서는 것으로 밝혀졌다.
9.『환단고기』는 三聖祖(환인, 환웅, 단군)시대의 국가 경영제도를 전하는 史書로서 만고불변의
‘나라 다스림의 지침’을 담고 있다.
그 으뜸 원리는 三神五帝 사상이다.
造化, 敎化, 治化 삼신이 현실에서 작용할 때 다섯 방위(方位)로 펼쳐진다. 東(靑), 西(白), 南(赤), 北(黑), 中央(黃)
오방에서 각기 만물의 생성작용을 주장하는 神은 五帝(靑帝 ‧ 白帝 ‧ 皇帝 ‧赤帝 ‧ 黑帝)이다.
오방위의 주재자가 水火木金土(五行)의 천지 기운을 주재한다.
이 같은 三神五帝 文化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 고구려 무덤 벽화 속 四神圖이다. 四神圖는 東西南北 4方과 春夏
秋冬 4계절의 천지오행 기운을 주재하는 자연신인 靑龍(동방), 白虎(서방), 朱雀(남방), 玄武(북방)을 표현한 것
이다. 중앙(黃龍)은 무덤 벽화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청용은 文과 法을 다스리고, 백호는 刑과 名을 다스리고, 주작은 樂과 禮, 현무는 農工, 황용은 중국엔 없고 고구려
만의 특색.
이러한 삼신오제 사상은 동북아 한민족사의 창제시절부터 통치원리로 理化되었다. 배달의 桓雄天皇이 三神五帝
사상에 따라 三伯(風伯, 雨師, 雲師)제도와 五事(主穀, 主命, 主刑, 主病, 主善惡)제도를 시행했다.
三伯은 조선 시대의 三政丞(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근현대의 三權分立(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과 整合한다.
中國 역사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人物로 흔히 三皇五帝를 꼽는데, 이는 東方 한민족의 三神五帝 사상에서 연유한다.
三皇五帝 문화의 근원이 東方의 桓國과 倍達인 것이다. 삼황은 원래 天皇, 地皇, 人皇을 말한다.
中國史의 三神五帝는 문헌마다 차이가 나지만, 대체로 燧人氏(수인씨: 불, 음식, 조리법을 전했다고 함), 神農氏
(중국의 경제, 의약, 음악, 정서 등의 祖神), 伏羲氏(복희씨 또는 疱犧(포희), 太昊(皞). 복희는 제사에 쓰이는 짐승
을 길러 붙여진 이름) 등 三皇과 皇帝軒轅(헌원), 顓頊高揚(전욱고양), 帝嚳高辛(제곡고신)과 고조선 초대 단군
때의 인물인 堯, 舜을 五帝로 꼽는다.
神敎의 三神文化가 국가경영 원리로 정착된 가장 결정적인 제도는 바로 고조선의 三韓管境制이다.
大檀君이 중앙의 진한을 다스리면서, 두 명의 副檀君을 두어 번한과 마한을 다스리게 한 이 제도는 고조선 국정
운영의 근간이었다.
神敎의 三神五帝 사상은 한민족의 역사와 文化를 움직여 온 사상적 기반이었다. 그래서 신교가 밝히는 東方文化의
우주관의 핵심인 三神五帝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면 잃어버린 한민족의 국통 맥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10.『환단고기』는 배달과 고조선이 창제한 文字를 기록하여 고대 한국이 文字文明의 발원처임을
밝혀 준다.
한민족은 배달 때부터 이미 문자생활. 초대 桓雄天皇(BC3,897- BC3,804)이 神誌赫德(환웅의 신하)에게 命하여
鹿圖文을 창제. 이는 BC3,000년경의 쐐기문자(수메르)와 象形文字(이집트)보다 앞선 세계 최초의 文字이다.
고조선 3세 가륵(嘉勒)단군은 이 문자(녹도문)를 수정, 보완하여 加臨土(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다.
가림토의 모습은 조선 세종 때 만든 한글과 매우 흡사하다.
(※"이 달에 임금(세종)께서 諺文 28자를 지으시니 그 글자는 고전을 모방했다(其字倣古篆)는『세종실록』(세종
25년 12월초)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옛 글자(古篆)를 응용하여 만들어졌다.
이 옛 글자가 바로 훈민정음보다 10자가 더 많은 고조선의 가림토이다.)
가림토는 日本에 전해져 아히루(阿毘留) 문자를 낳았다. 아히루 文字는 일본 神寺의 고대 비석에서 자주 발견되는
神代 문자의 일종이다. 일본에는 신대 문자 존재설과 조작설이 병존한다.
11.『환단고기』에는 중국과 일본의 시원 역사와 역대 왕조 개척사 및 몽고, 흉노와 같은 북방민족의
개척사가 밝혀져 있다.
『단군세기』에는 고조선과 中國과의 관계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고조선은 무려 1,500년 동안(BC2,205夏나라 건국-BC770 周의 東遷) 중국의 고대 왕조인 夏, 商, 周의 出現과
성립에 깊이 관여하였다. 한 예로 중국 5천년 역사에서 국가를 존망의 위기에 빠뜨린 4,200여 년 전의 ‘9년
대홍수’를 들 수 있다.
그때 檀君王儉은 禹(임금)에게 治水法을 가르쳐 줌으로써 홍수를 무사히 해결하고 그 공덕으로 나중에 夏나라를
열 수 있게 했다.
또한 13세 屹達단군은 夏나라의 멸망과 殷나라의 개국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25세 率那단군 조에는 周나라
개국과 관련된 箕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단군세기』와『태백일사』에는 아직도 의문에 싸여있는 2,600년 전 일본의 개국과정을 밝힐 수 있는
단서들이 들어 있다.『환단고기』에는 또한 오늘의 서양문명과 中東 유대文明의 뿌리인 古代 수메르문명의
유래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도 들어 있다.
한마디로『환단고기』는 뿌리를 잃어 왜곡된 한, 중, 일의 시원 역사에서 북방민족의 역사, 서양문명의 근원인
수메르 역사까지 총체적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나침반이다.
『환단고기』는 한국인은 물론 70억 전 인류가 반드시 읽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인류 모체 문화의 역사 교과서
이다.
가장 오래된 나라가 桓國이고 그 환국에서 시작된 神敎文明과 우주사상, 理化세계와 弘益人間 사상이 지구촌
곳곳으로 갈려 나가 인류의 새로운 文明을 연 모든 민족과 국가의 정신적 모태가 되었다.
그 文明과 사상의 내용은 어느 한 민족에게만 타당한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文化의 사상임을 알 수 있다.
桓檀古記 -12
1. 위서론자들이 내세운 쟁점들.
① 사서 조작 문제
1911년 桂延壽가 편찬한『환단고기』는 원본이 없다는 것. 계연수라는 人物 존재여부(실존 人物이라는 근거를
대라. 족보 없다. 그러나 수안 桂씨 족보에 안 나온다고 不在인물? 북한 출신 중 족보누락자 많다.
이유립(李裕笠)이『자유』라는 잡지(1968.5 창간한 월간지)에 ‘桓檀古記’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적이 있다.
위서론자들은『자유』에 게재한 내용과『환단고기』내용이 대동소이하므로 이유립이『환단고기』를 1979-80
년에 썼거나 교정을 보면서 조작했다는 것.
그러나 이유립이 독자적으로 창작을 했다면 그 내용에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위서라는 것.
만약『환단고기』에 의심을 품는다면 桂延壽 편집본, 吳炯基 필사본, 오형기 필사본에 의한 영인본, 1976년
이유립의 원본 분실, 오형기 필사본의 오탈자를 바로잡은 배달의숙본 등의 과정을 모두 부정해야 한다.
이는 위서론을 주장하기 위해 인간(인격체)의 경험적 사실을 매도하는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위서라고 계속 주장하는 것은 민족사학 부정, 식민사학과 동북공정 옹호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② 地名, 人名 문제
『환단고기』에 있는 ‘영고탑’이 淸나라의(1644-1911)의 시조 전설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므로『환단고기』는
淸나라 이후에 꾸며진 위서라는 주장.
그러나 寧古塔은 원래 塔 이름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탑은 사라지고 地名으로 남았다고 보아야 한다.
마치 韓明澮의 亭子 ‘鴨鷗亭’이 정자는 사라지고 압구정이라는 地名으로 남았듯이......塔, 城이 있었던 곳 → 탑,
성 사라지고 地名만 남아. 즉, 영고탑은 영안(寧安, 역사적 古城)의 옛 탑이라는 뜻으로 단군조선시대 때부터
있었던 건물 모양의 탑. 영고탑 명칭은 明나라 萬曆 36년(1608년)에 처음 등장했다고『凊大事志』에 기록되어
있다.
주목할 것은 영고탑이라는 명칭이 배달과 고조선의 제천행사를 이어받은 夫餘의 영고와 有關하다는 것이다.
『단군세기』(이암)보면, 16세 단군 위나(尉那)가 “九桓族의 모든 왕을 寧古塔에 모이게 하여 삼신상제님께
제사를 지냈다”고 했고, 44세 단군 丘忽(구홀,구물)이 재위 2년(BC424) 3월 16일에 삼신영고제를 올렸다고
했다. 부여는 고조선을 이은 나라. 부여 영고는 곧 고조선의 제천행사였다.
영고탑은 바로 영고제를 지냈던 蘇塗祭天壇이 있었던 곳(영고제 지내던 터)이다.
후대 靑나라가 땅을 차지하면서 와전되고 왜곡된 것. 따라서 迎鼓의 원래 의미와 표기법이 잊혀 져서 寧古가
되었고 우리말의 터를 特(만주어), 台, 塔등으로 音寫하면서 寧古塔이 된 것이다.
③ 근대 술어 사용 문제
위서론자들은 국가, 文化, 평등, 자유, 헌법, 인류, 세계만방, 산업 같은 근대용어가 쓰였다는 이유로 『환단고기』
는 최근세에 쓰인 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文化, 人類는 최소한 1,600년 전부터 古典에서, 평등은 인도 승려 구마라집(鳩滅什)의『金剛經』에, 국가
는『周易』에, 헌법은 전국시대 史書인『국어』에서 이미 사용됨. 産業의 業은 본래 神敎의 宇宙論을 담고 있는
언어다.
카르마가 業으로 번역되어 쓰이기 이전부터 한민족은 우주의 業사상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한국 고유의 業은 天地의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이 지극히 신성한 功力을 들이는 것을 말한다.
인류의 여러 경전은 오랜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加筆과 再編輯을 통한 補整작업 끝에 오늘날의 經典이 되었다.
『周易』은 太皞伏羲씨에서 孔子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完成 되었고,『도덕경』은 王弼이『德經』
과『道經』의 본래 순서를 뒤집어 재구성한 것이다.
동양의학의 성서인『皇帝內經』은 황제軒轅에게 假託하여 戰國시대를 거쳐 漢代에 성립되었고, 불교의『華嚴經』
도 분리되어 있던 경전들이 수차례의 결집을 거쳐 후대에 편집된 것이다.
한마디로『환단고기』는 太古적 韓文化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독보적 史書이다.
④ 다른 사서의 영향과 표절 의혹의 문제
예컨대『환단고기』에 나오는 三朝鮮이 申采浩『조선상고사』에 기록되어 있으니『환단고기』는『조선상고사』
를 베낀 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환단고기』에는『조선상고사』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三朝鮮의 배경이 되는 三神觀이 동방의
원형 文化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독창적인 우리 한민족의 역사관이 밝혀져 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먼저 존재했는지 自明하지 않은가?
또한 廣開土大王碑 비문에 나오는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相互 17세손’에 대한 해석만 보아도 『환단고기』
와『조선상고사』중 어느 것이 더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유교 事大主義 史觀으로 쓰인『三國史記』는 ‘고구려 역사를 700년으로, 광개토대왕은 추모왕(鄒牟王)의 13세손’
이라 하였다.『조선상고사』는『삼국사기』의 이런 부정확한 내용을 비판했다. 그리고『삼국사기』에서 부정한
『新唐書』의 기록, ‘賈言忠(당나라 때의 侍御史)의 고구려 900년 留國說’을 근거로 할 때『삼국사기』는 고구려
역사 200년을 삭감한 것이다.
『환단고기』의 기록을 보면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나오는 ‘상호 17세손’의 내력을 알 수 있다.
즉 『환단고기』의 三聖紀 上, 북부여기, 고구려국본기를 통해 고구려 제왕의 초기 혈통 계보가 天帝子인 제1세
해모수(북부여 肇國 BC194년에 단군조선을 계승) → 제2세 고리국의 제후 高辰(解慕漱의 둘째 아들) → 제3세
고진의 아들 → 제4세 沃沮侯弗離支(옥저후 불리지. 고진의 손자) → 제5세 高朱蒙(고진의 증손자) …
제17세 광개토태왕(주몽의 17세손)으로 … 고구려 900년 留國設이 입증된다.
고구려는 BC58년(단기2,276년) 봄 정월에 고추모(고주몽)가 역시 천제의 아들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회복하고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제사를 지내며 연호를 정하여 多勿(다물)이라 하니 이분이 곧
고구려 시조다. (『三聖紀』上)
國猶形 史猶魂(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
國家滅 史不可滅 蓋國形也 史神也(나라는 망할 수 있어도 역사는 망할 수 없다.
대개 나라는 형체(몸)요 역사는 정신이다.)
形而上者 謂之道
形而下者 謂之器
위 말은 박은식의『한국통사』서문에 있다.(인용?) 위 말은 실상 杏村 李嵒의『단군세기』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또『환단고기』범례에 郎家라는 말이 나온다.
위서론자들은 ‘丹齋 申采浩가 처음 사용한 郞家라는 말을『환단고기』서문을 쓴 계연수가 따온 것이기 때문에
『환단고기』는 그 후에 성립됐다’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사실『환단고기』는 낭가문화의 원형인 三郞과 郎家
맥을 최초로 전해주는 冊이다.
이순근(카톨릭大)은『단군세기』에 나오는 ‘三神一體’ 논리가 기독교의 三位一體 사상을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
한다. 박광용(카톨릭大)도 “교리체계에서도 桓因(하느님)의 조화, 桓雄(예수)의 교화, 檀君(성령)의 治化를 생각
나게 하는 三神一體論 부분은 … 기독교에 대한 단군신앙의 교리적 대응에서 나온 것이다.
또 靈魂, 覺魂, 生魂의 聖三品說이 보이는 부분도『天主實義』에서 Matteo Ricci가 이야기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환단고기』에서 제기되고 있는 東西 神觀의 中心 언어인 三神一體上帝란 무엇인가?
조물주로서 얼굴 없는 하나님인 三神과 한 몸이 되어 직접 우주 만유를 낳고 다스리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말한다.
비인격적인 三神만으로는 이 우주에 어떠한 창조와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주질서의 주권자이신 三神一體上帝의 造化 손길이 개입될 때 비로소 天地萬物이 창조되고 변화된다.
三神一體上帝 - 이 한마디에는 조물주가 어떤 원리로 우주를 다스리는지 그 해답이 담겨있다.
기독교의 三位一體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인데, 聖父, 聖子, 聖靈이라는 세 位格으로 계신다’는 뜻이다.
따라서『환단고기』가 말하는 동방의 ‘三神一體上帝’와 기독교의 ‘三位一體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三位一體上帝=人格的 하느님, 三位一體 하느님= 非人格的 하느님)
또한 마테오리치가 말한 ‘聖三品說’의 靈魂, 覺魂, 生魂은『太白逸史』「삼신오제본기」의 三魂說에서 말하는
靈, 覺, 生과 같은 용어는 같으나, 그 의미와 사상적 배경이 다르다.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三神說이나 三魂說은 고대 동북아 文化의 우주론, 삼신관을 바탕으로 한 ‘삼수원리’에
토대를 둔 것이고, 生活文化 속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개념이었다.
이것을 행촌 이암이『단군세기』를 저술하면서 수용한 것이다.
反面 마테오리치의 聖三品說은 아리스토텔레스의 三魂說에 토대를 둔 것이다.
마테오리치는『천주실의』에서 영혼의 불멸설을 주장하면서 三魂說을 말했다.
三魂說은 Aristoteles가 말한 영혼의 삼혼설을 말한다. 인간의 靈魂, 동물의 覺魂, 식물의 生魂에서 借用한 것이다.
마테오리치가 말한 三魂說을 조선에 소개하면서 정약용은 이를 聖三品說로 말했다.
그러나『태백일사』「삼신오제본기」에서 말한 靈, 覺, 生 三魂은 三魂七魄의 三魂을 말한다.
서양의 三婚說.....아리스토텔레스의 三魂說(영혼의 三分法. 인간= 영혼, 동물= 각혼, 식물= 생혼) → 마테오리치
聖三品說 → 정약용의 성삼품설
『태백일사』「삼신오제기」의 三魂......三魂七魄의 三魂을 지칭.
한마디로 위서론자들은 三神, 七星文化, 용봉文化, 天地光明의 환단문화에 대한 기초 개념조차 정립하지 못하고,
동북아시아의 전통문화의 삼신 우주관에 대해 치밀한 문헌고찰도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환단고기』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의식, 책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지성과 우주론이 결여된 자들이다.
⑤『환단고기』를 구성하는 各 역사서의 저자 문제
安含老와 元董仲의『삼성기』는『세조실록』에 등장한다. 그런데 위서론자들은 70년 후에 쓰인『新東國與地勝覽』
에 安含, 元老, 董仲 3인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 원동중
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
따라서 진서론에서 전거로 사용되는『조선왕조실록』의 ‘안함노 원동중 삼성기’라는 기록이 잘못되었으니 ‘안함·
원로·동중의 삼성기’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문영,『만들어진 한국사』,p44-46)
※세조실록에서는 몇 사람인지 혼동 여지 있을 때는 반드시 안함로 원동중 두 사람이라 (반드시) 적었다.
또 원동중의 삼성기가 실재했다는 또 다른 증거는 李陌(이맥)의『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에 元董仲三聖記注
라는 대목이다.
이는 이맥이 원동중의『삼성기』에 注가 달린 책을 보고『태백일사』를 저술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위서론자 이순근(카톨릭大)은 구한말에 나온 道器論이『단군세기』에 나오는 것에 의문을 제기.
그러나『周易』에는 이미 形而上者 謂之道 形而下者 謂之器라는 문구가 나온다.
道器論은 이에 근거해서 道와 器를 다룬 것. 이순근은『단군세기』를 고려 때 李嵒(이암)이 아니라 후대 다른
사람이 지은 사료적 가치가 없는 위서라 봄.
※ 고려가 세계의 3분의 1을 점령한 元 대제국 시대에 고려인 오감, 류청신은 고려 이름을 없애고 원(몽고)나라의
속국이 되기를 奏請했다.
※행촌 이암은 고려의 5백년 사직이 풍전등화 같이 되자 동북아 창세시대의 뿌리 종교이자 시원사상인 신교의
핵심 ‘三神우주 사상과 인간론’을 전하면서 위정자를 질타했다.
망해가는 허망한 조국을 바라보며 비분강개하면서 神敎文化, 始原歷史의 부활을 외치며 글(단군세기)을 쓴 것이다.
李嵒은 또 『단군세기』서문에서 마음의 근원과 神의 상호관계를 명쾌하게 정의했다.
性者神之根也(인간마음의 바탕 자리는 神이 존재하는 뿌리가 된다.) … 깨달음의 극치.
위 문장은 孔子의 中庸, 석가모니와 中論(中觀사상. 中觀論의 약칭)보다 훨씬 위대한 말씀.
환단의 天地光明 사상을 闊然貫通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간결한 문장.
위서론자들의 무지몽매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실례................潛淸輩(잠청배)라는 문구의 오역이 그것.
(잠청배는 이암이『단군세기』에서 처음 쓴 말). 고려의 역적이었던 오잠과 류청신의 이름을 빗대어 ‘吳潛과
柳淸臣 같은 간신배’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이것을 두고 위서론자들은 청일전쟁에서 승리, 조선 땅에서 청나라를
몰아낸 日本이 淸과 밀통한 무리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석했다.
이렇게 해석한 위서론자들은 ‘잠청배’가 조선 말기에 나온 말이므로『단군세기』서문은 이암이 아닌 구한말
이후 사람이 쓴 것이라고 억지 주장.
桓檀古記 -13
2)『환단고기』의 진정한 면모
『환단고기』가 주류 강단사학에서 위서로 몰리고 있던 1993년 서울대 天文學科 박창범 교수가 고조선 13세
屹達(흘달)단군 때 일어난 다섯 행성 결집현상(五星聚婁)을 컴퓨터로 재현, 실제 역사사건으로 증명했다.
박석재 박사(前 한국 天文연구원장)도 오성취루 현상이 사실이었고 고조선도 실재했다고 말했다.
“BC 1733년 5행성이 저녁 하늘에 나란히 관측됐다는 기록이『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서 발견됐다.
이 기록이 天文學的으로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매우 간단하기 때문에 나도 소프트웨어를 돌려봤다.
그 결과 단 1년의 오차도 없이 BC1733년 7월 저녁 서쪽 하늘에 左에서 右로 火, 水, 土, 木, 金 순으로 5행성이
늘어섰다.
여기에 달까지 끼어들어서 7월 11일- 13일 저녁에는 우주 쇼를 연출했다.
이런 天文현상을 임의로 맞춘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不可能하다.
따라서 BC1733년, 우리 조상들은 天文현상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조직과 文化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분명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박석재,『개천기』서문)
위서론자들은 人名, 地名, 연대, 사건조작, 용어 등에 대해 시비를 걸고 있으나, 그것들을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은
天才이거나 공상가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환단고기』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연대, 일부 내용이 변경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고『환단고기』의 전체 내용, 즉 天地光明의 歷史觀, 原形文化의 틀은 훼손된 것이 아니다.
僞書論 주장자들은 그들이 神敎文化의 신교세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환단고기』가 전하는 인류 시원역사가 워낙 기존 역사서와 달라서 의심을 하는 것이다.
『환단고기』의 위서, 진서를 떠나 “이 책이 한국의 사회 사상계 혹은 대중적인 역사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현상
은 부인할 수 없다. 나아가『환단고기』가 가져다주는 사회적 영향력, 역기능, 순기능을 점검하고 그것이 한국
현대사의 역사발전의 긍정적 도구로 사용될 수 있도록 진지한 모색을 해야 한다.”
(윤명철,「환단고기」의 사회文化 영향 검토,『환단고기』의 사료적 검토, P.7)
『환단고기』는 고대 한·중·일 三國의 관계, 북방 유목민족의 발흥 등을 다루는 정치경제사에서부터 언어, 文字,
음악, 의식주 등을 다루는 文化史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각종 주제를 다루고 있다.『
환단고기』에는 동북아 원형文化의 인간론, 신관, 자연관, 역사관을 전해주는 신령스런 이야기가 많다.
한마디로 정의하면,『환단고기』는 단순한 인간 중심의 역사서가 아니라 天地光明의 三神文化 역사서이다.
따라서 삐뚤어진 의식으로는 始原文化와 창세 역사가 밝히는 大道의 세계에 결코 접근 할 수 없다.
3)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워야
확장변천 paradigm(역사해석의 확대지향)
축소변천 paradigm(역사해석의 축소지향)
일제 식민지 시절, 한국의 실증주의 사학자들은 한민족의 역사(국호, 왕호, 호칭 등)을 축소지향적으로 파악,
고대 역사를 말살했다.
桓國, 倍達, 고조선의 역사 내용을 부정하고 신화로 일축. 고조선 이전 배달시대에도 많은 왕검이 있었지만,
한민족사에서 오직 한 왕검만이 존재, 그 왕검이 단군왕검이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거나, 실제로 130여 년 이상
연대 차이가 나는 해모수(解慕漱)와 주몽(朱蒙)을 父子之間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북부여의 실존 역사(181년간)
를 없애버렸다.
반면 申采浩는 한민족 역사 과정을 확대지향적으로 해석, 잃어버린 고대 역사를 복원코자 했다.(일제 식민사관 →
자주 독립사관). 신채호는『삼국유사』,『제왕운기』,『고려사열전』,『김위제전』『신지비사』등을 근거로 삼아
三韓 → 三朝鮮 → 北夫餘 → 삼국시대의 계보를 만들었다.
『환단고기』는 고대사를 확대지향해서 서술한 유일한 역사서이다. 중국에서는 100년 전부터 발굴한 紅山文化를
인류 고고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 선언하고, 이 홍산문화에 근거하여 ‘동북아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대한민국의 식민사학자들의 아류는 학계의 중심을 차지, 조상을 바보로 만들고 있으며 역사를 팔아먹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들어오면서 한민족 700만 명이 죽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강단사학자들은 그런 일본의 앞잡이
식민사학자가 되어 역사의 진실을 오도하고 있다.)
더욱이 원형文化를 담고 있는 유일한 정통 사서가 하나 남았는데 그것조차 송두리째 없애 버리려 한다.
그래서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걸고 본말을 전도시키고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를 편찬한 계연수는 독립운동 → 밀고 → 체포 → 고문 → 사지 잘려 → 압록강 수장. 계연수와 함께
檀학회 활동했던 이덕수도 그렇게 죽었다. 계연수의 스승 해학 李沂는 韓日 병탄되려하자 절망감에서 여관방서
자살했다.
결어
국내 사료에만 얽매이지 말고 중, 일, 동남아, 유럽의 사료까지 종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문헌과 고고학 자료에만 집착하지 말고 천문학과 유전학 등에서 밝히는 최신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래서 동북아 역사의 정의를 파괴하고 한민족의 역사 혼을 완전히 말살한 일본식민사학의 사슬을 끊고 대한민국
上古史와 인류역사의 틀을 바로 잡아야 한다.
三位一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인데,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으로 계신다는 뜻.
三神一體= 우주의 조물주는 본체에 있어서는 하나이지만, 작용으로 보면 삼신이며, 삼신의 본체와 한 몸이 되어
우주만유를 다스리시는 지존무상의 주재자 삼신상제님이 계신다는 뜻.
紅山文化 : 중국 만리장성 북동부에 존재했던 신석기시대 문화. 연대는 BC4,700- BC2,900년 경.
옌산산맥(燕山山脈)의 북쪽 랴오허(遼河)지류의 西랴오허 상류 부근에 널리 퍼져 있었다.
현재의 허베이성(河北省) 북부에서 내몽골 자치구 동남부, 랴오닝성 서부에 해당한다.
帝王韻紀 : 고려시대 학자 李承休가 충렬왕 13년(1287)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시로 쓴 역사책.(상,하 2권). 단군
부터 고려 충렬왕까지의 역사 기술. 공민왕 9년(1360)과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각각 다시 간행. 오늘날 유포
된 것은 이 3간본을 영인한 것.『제왕운기』上권은 중국 盤古로부터 금나라까지의 역대 사적을 264句 7言詩로
읊었고 下권은 한국의 歷史를 다시 1,2부로 나누어 시로 읊고 註記를 했다.
神誌秘詞 : 風水圖讖書. 현재 전하지 않음. 찬자, 찬술시기, 내용, 체제 알 수 없음. 고려 숙종 때 김위제(金謂磾)가
이 책을 인용, 남경 천도 주장.
海鶴 李沂(1848–1909) : 전북 김제 → 黃玹, 李定稷과 함께 호남 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