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모어에게 보내는 편지 외 1편
이윤훈
친애하는 토마스 모어
당신이 꿈꾸던 유토피아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역설의
그 매혹적인 섬
매연을 뿜는 딱정벌레가 번식하고
마천루 선인장이 자라는 도시 사막
신기루처럼 나타나는 열섬들
이제 우리는 이곳을 스마트 시티로 꾸미고 유토피아라 부릅니다
도시 유목민의 환상적인 거주지
물신의 선물입니다
판도라 상자일까요?
그 안에 아직 희망이 남아 있으니 다행일까요?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가 도시 사막을 순환하는
무한소비 사회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도 당신은 이에 거슬러
고고한 신념의 단두대에 목을 내놓겠습니까?
내 수염은 죄가 없으니 다치지 않게 하게나
이렇게 사형집행인에게 농담도 던지며
존경하는 토마스 모어
우리가 찾은 유토피아가 환상일까요?
환상이어야 유토피아가 아닐까요?
오늘도 코인을 채굴하러 지하로 내려가는 영혼들
그 눈망울이 과열된 백열등 같습니다
목이 마릅니다
열섬에서
도시 유목민
세헤라자데의 혀를 가진 하마
내가 아끼는 컵은 하마를 닮았어요
입이 곧 몸이랍니다
말만 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아요
팔다리, 눈코귀를 감추고 입만 벌린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나와요
그러다 살짝 안쓰러워요
아무래도 외로운 모양이에요
연둣빛 혀를 키워
모스크의 아라베스크 무늬처럼 온몸을 덩굴로 덮었으니 말이에요
천 일 동안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요
밖을 향해 자꾸 소리를 벋으려 해요
누군가에게 닿고 싶은 거겠지요
저 자신을 휘감을 뿐이지만요
뭉크보다 더 크게 입을 벌리고,고 말을 하지만,만
그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아요
프리마 돈나가 아리아를 부르다 입을 벌린 채 멈춘 텔레비전 화면처럼요
물을 마시고 나면 말을 향한 더 심한 갈증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려 탁자에서 쿵쿵 뛰려 하고
고양이가 말랑말랑 걷는 소리
오후 세 시의 접시들이 동글동글 하품하는 소리
누군가 삼킨 흐느낌마저 흉내를 내려 해요
하마를 물끄러미 보다가
우리의 귀는 진실만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새삼 알았어요
수려하게 말솜씨를 부릴 수 있는 것은 치명적인 행운이에요
우리의 귀는 귀꿈치를 들고 덧없는 구애라도 듣고 싶어 하거든요
각설탕 이를 가진 거짓말이라도
발설은 아름다운 병이에요
내 하마도 사랑의 이야기를 밤새워 이어가고 싶어 해요
천 일, 또 천 일
오늘부터 하마의 천일야화를 들어줘야겠어요
그 불치의 병을 사랑하고
자주 목을 축여줘야겠어요
요즘 종종 거울 앞에서 입을 벌리다 깜짝 놀라요
내 하마를 닮아가는 나를 보고요
그것이 원래 나라는 걸 알고 오늘 더 놀랐어요
행복하게도 속수무책이에요
내일 다시 이야기를 덩굴덩굴 늘어놓을게요
들리지 않아도 귀를 열어 두세요
이윤훈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나를 사랑한다, 하지 마라, 생의 볼륨을 높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