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바로 이것이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시인하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는 내 안에 있
어, 나의 말이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
될 때, 비로소 내가 예수를 시인하는 것이란 말이다. 이 상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이며, 그와 내가 하나됨이다. 나는 죽고 오직 그리스도가 사심이다.
예수를 부인한다는 것은 내가 예수를 미워하고 예수에 대하여 적대적인 언사를 늘어놓음
이 아니다. 예수와 내가 서로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여전히 객관적인 존재, 제 3자로
있으면서, 떠벌리는 모든 말이 예수를 부인함이다. 예수에 대한 찬양의 말을 하건 아니면
그 반대의 말을 하건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예수의 십자가를 찬양하고
감사해도 그 찬양과 그 감사가 예수를 부인함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제 논점을 좀 바꾸어서, 예수를 시인하는 사람들과 부인하는 사람들의 차이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요한은 이어지는 요한일서 4장 4절 이하에서,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고 말씀한다.
미혹의 영이 내뱉는 말의 핵심은 세상에 속한 말이다. 세상이 듣는 말이고, 세상이 좋아
하는 말이다. 이 말이 무엇인가? 다른 예수가 전하는 메시지들이다. 세상에서 잘 먹고, 세
상에서 복 받고,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자자손손 이름을 날리고,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하겠다는 말씀을 세상적으로 적용하는 모든 시도들이다. 그래서 세상을
좋아하고, 세상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예수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예
수가 십자가에 죽으리라는 말을 하시면 베드로처럼 「그리 마옵소서」 한다. 왜냐?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남을 섬기는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다른 복음이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은혜로 의롭다 하심에
이르지만, 그래도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삶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얘기, 복음의 변질이 왜
일어나는가? 그 율법이 바로 세상의 질서며, 세상의 윤리며, 도덕이며, 인간 보편의 양심이
기 때문이다. 인간 보편의 양심. 이것이 바로 세상의 질서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아무리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소리 높여 외치더라도, 그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육신에 속한 인간들은 이 세상을 초월하는 질서, 하나님 세계의 생명 원리에 대
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그래도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세상의 질서를 버릴 수는 없지
않느냐고 강변한다.
나는 지금 세상의 질서를 무시하라는 얘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예수 그리
스도를 시인하는 사람 입에서 나올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유치원의 도덕 선생 입
에서 나올 얘기며, 또 돈 벌어 잘 먹고 잘 살자는 얘기, 세상적인 복 받음의 얘기는 대기업
회장님 입에서나 나올 말이라는 얘기다.
다른 영, 미혹의 영이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오심을 부인하는 영이고,
그리하여 나는 죽고 오직 그리스도만 살아 역사하심을 부인하는 영이고, 따라서 세상에 속
하여 세상적인 복과 세상적인 질서 유지를 위하여 은혜의 복음을 행위의 율법으로 되돌리는
시도를 하고 있는 존재. 그가 누구인가?
우리는 이런 존재들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이겨야 한다.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그들에게 맞아 죽음으로서이다. 이것이 이김이다. 죽음을 생명으로, 지는 것
을 이기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눈.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