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남정사( 禱南精舍)
도남정사 강동면 단구리 352-1(앞실길 17)(모안정, 여재문)
도남정사(禱南精舍)는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단구리에 있는 정사의 편액이다. ‘도남’은 포항시 흥해읍 학천리와 신광면 냉수리 및 경주시 강동면 단구리 일대에 걸쳐 솟아 있는 ‘도음산의 남쪽’이라는 의미이다. 정사는 지방의 소규모 교육기관인 서당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도남정사는 현재 안락당(安樂堂) 손영(孫暎, 1507~1569)을 향사하는 경주손씨(慶州孫氏) 문중의 재실로 사용되고 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행서체이다. 윤택한 점이 넉넉한 품으로 자리한 후 속도를 더한 붓이 빠르게 달려 신성한 제사상인 ‘시(示)’를 이루었다. 이후 풍성한 제물을 정성스레 올리듯 느긋하고 조심스러운 필획이 차분하게 움직여 ‘수(壽)’를 더하여 이룬 ‘도(禱)’ 자가 치밀한 구성으로 앞장선다. ‘남(南)’ 자의 당당하고 우뚝한 모습은 도음산의 우뚝함과 그 아래 땅의 넉넉함을 보는 듯하다. 붓의 완급으로 이루어낸 굵고 가는 획이 어우러진 ‘정(精)’ 자에서는 후학을 양성함에 있어서의 치밀한 태도가 엿보인다. 넉넉한 여유로 시작하여 소박함을 견지하고 간결하게 마무리한 ‘사(舍)’ 자와 더불어 편액에 엄숙한 분위기가 감돈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경주손씨 안락당파慶州孫氏 安樂堂派 소개
경주손씨(慶州孫氏) 안락당파는 고려 말에 판밀직사사를 지낸 손경원(孫敬源)의 후손이다. 경주손씨는 고려시대까지 손순(遜順)의 유허지인
경주 서북 지역과 경주 읍내를 중심으로 거주하였고, 그 반대편인 안강 쪽으로는 진출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손경원의 손자인 손등(孫登)이 영해박씨(寧海朴氏) 호장 박시우(朴時遇)의 딸에게 장가들어 처가인 상주 중동면으로 옮겨 살았다.
손등의 장남 손사성(孫士晟)은 안동권씨(安東權氏) 직장 권명리(權明理)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버지처럼 처가인 청송군 안덕면으로 옮겨 살았다.
손사성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손욱(孫旭)은 딸만 셋을 두었다. 그래서 둘째 손소(孫昭, 1433~1484)가 적통을 계승했는데, 그가 풍덕류씨(豐德柳氏) 만호 류복하(柳復河)의 딸에게 장가들어 처가인 경주 양동마을로 들어왔으니, 그가 바로 경주손씨 양동마을 입향조이다.
손소는 양동에 입향한 이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경주손씨의 굳건한 기반을 다졌다. 이후 손수의 자손들은 양동마을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손소의 둘째 아들로 적통을 계승한 손중돈(孫仲暾)은 안강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분통골 언덕에 관가정(觀稼亭)을 지어 마을 안에 터전을 마련하였다. 이처럼 경주손씨 안락당파는 손현검의 장남 손등이 상주 중동으로, 손등의 장남 손사성이 청송 안덕으로, 손사성의 적통을 계승한 손소가 다시 경주 양동으로 옮겨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손소의 자는 일장(日章), 호는 송재(松齋),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아버지는 손사성, 어머니는 안동권씨이다.
손소는 1433년(세종 15) 청송부 안덕현에서 4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1453년(단종 1) 21세 때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 함께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457년(세조 3) 25세 때 경주 양동에 살고 있던 풍덕류씨 만호 류복하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이 해에 바로 양동 처가로 옮겼는데,
이후 자손들이 양동에 자리를 잡아 세거함으로써 마침내 경주손씨 양동마을 입향조가 되었다.
1459년(세조 5) 27세 때 문과에 급제한 뒤에 사헌부감찰, 성주목사, 공조참의, 이조참판, 안동부사, 진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관직에 있을 때 문학과 경학 방면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고, 또 지방관으로서도 대단히 성공한 인물이다.
특히 1467년(세조 13) 함경도 토호 출신 이시애(李施愛)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평로장군 박중선(朴仲善)의 종사관으로 참여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같은 해 9월에 난이 완전히 평정된 뒤 정충출기적개공신2등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485년(성종 15) 3월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손소는 중앙과 지방의 각종 요직을 두루 역임하여 양동마을에 전례가 없는 대표적인 고위 관료가 되었으며, 적개공신2등에 책봉되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계천군이란 봉호를 받았고, 죽어서는 양민(襄敏)이란 시호를 받았다.
손중돈의 자는 태발(泰發), 호는 우재(愚齋), 본관은 경주이며, 아버지는 손소, 어머니는 풍덕류씨이다.
1463년(세조 9) 8월에 양동마을 서백당(書百堂)에서 5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의 30년지기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서 학문의 큰 방향을 들었다. 1483년(성종 14)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89년(성종 20) 2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양산군수, 사헌부대사헌, 충청도관찰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손중돈은 갑자사화 때 언관으로 거슬리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곤장 100대를 맞고 파직되었다. 중종이 즉위한 뒤로는 곧바로 등용되어 아버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화려한 관직으로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다가 1529년(중종 24) 4월 9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7세이다. 손중돈은 성종조 이래 한층 심화되기 시작한 신유학의 학문적 지식과 논리에 근거하여 관직에 진출하고 활동했으며, 특히 외직으로 나갔을 때 청렴결백하여 청백리로 유명하였다.
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같은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여 영남 지역에 성리학의 새로운 문호를 열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결과 월성군이라는 봉호를 받았고, 죽어서는 경절(景節)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속수서원과 동강서원에 배향되었다.
손중돈은 경(曔)·영(暎)·창(昶)이라는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 영이 바로 안락당(安樂堂) 손영(孫暎, 1507~1569)이다.
한편 도남정사(禱南精舍)는 안락당 손영을 향사하는 경주손씨 문중의 재실이다. 1541년(중종 36) 경주 안계리에 안락당이라는 강학 공간을 마련하였고, 1722년(경종 2) 후손들이 안락당을 단구리로 이건했으며, 1963년 보수하여 지금의 도남정사라 고쳐 불렀고, 1995년 3월 손영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도남정사는 사당인 영모사(永慕祠)를 비롯해서 안락당, 모안재(慕安齋), 율기재(律己齋)와 삼문인 여재문(如在門) 등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황위주, 『처마 끝 소나무에 갈무리한 세월, 경주 송재 손소 종가』, 경북대학
[출처] 경주손씨 - 손영의 도남정사(禱南精舍)1541년
[출처] 도남정사(禱南精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