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자주 카페에 글을 올리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회원 여러분에게 보일 만한 것이 없어 미루다가
이제야 한편을 올리게 되네요.
카페가 활성화되기를 바라며
혹 좋은 생각 있으면 댓글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
머리 형식을 통해 본 요서 지역 청동기 문화의 소속 문제-(1)
현재 남한 국사 교과서에는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대체로 대릉하 상류 유역까지 아우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어떤 특정 역사 문제에 대한 교과서의 서술이 확실한 역사적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과서의 서술이 단순히 교과서 집필자의 견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적어도 역사학계의 주된 연구 성과의 반영이라는 측면을 생각할 때 이것은 위와 같은 사실이 많은 남한 역사학자의 지지를 받는 견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있어 북한 역사학계 또한 고조선의 세력이 요서 지역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견해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요서 지역에 있어서 고조선의 세력이 미친 시기나 그 범위 등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많은 견해가 존재할 뿐 아니라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요하 유역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문헌 사료 및 고고학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측면에서의 접근 방법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요서(遼西) 지역 청동기 문화의 주인공이 속한 공동체의 문화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도 고조선의 세역 범위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접근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요서 지역 청동기 사람들이 곤발(髡髮)이라고 하는, 머리를 삭발하는 문화 전통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는 고조선이 아니라 동호(東胡)의 머리 형태와 동일하므로 요서 지역 청동기 문화는 동호의 유적이라는 주장이 있어1)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다음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머리카락은 사람의 체모 가운데에서도 끊임없이 자라는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 행동의 편의성 등을 위해 인류는 원시시대부터 머리를 정리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러한 까닭으로 인류는 긴 시간을 통하여 다양한 머리 형식을 창조하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머리 형식이 단순한 개인의 취향 문제로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으나 아직도 많은 지역에서 머리 형식은 개인의 성적 정체성이나 종교적 신념, 또는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거나 한 집단의 특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식으로서 여겨지고 있다.
전근대 사회에 있어서도 이러한 사실은 큰 차이가 없었다고 여겨지며 머리 형식을 집단의 중요한 전통으로 생각하고 타자와 구별하는 중요한 상징으로서 인정하는 경향은 후대보다 더욱 강하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다음과 같은 <<논어(論語)>>의 내용은 고대 중국인의 머리 형식에 대한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관중이 환공을 도와서 제후의 패자가 되어 한 번 천하를 바르게 하니, 백성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주는 것을 받으니,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머리를 헤치고 옷섶을 왼편으로 하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2)
공구(孔丘)는 자신들과 오랑캐를 나누는 중요한 문화적 기준으로서 옷차림과 함께 머리 형식을 들고 있다. 따라서 요서 청동기 문화인들의 머리 형식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의 소속 문제를 밝히려는 것은 어느 정도 타탕한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현전하는 고대 중국의 역사서에 따르면 동호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이래 고조선과 더불어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한 중요한 세력 가운데 하나이다. 동호는 전국시대에 연(燕)나라와 대립하다가 군사적으로 패배하여 일시 약화되기도 하였으나 곧 세력을 회복하여 흉노와 세력을 다투었으나 서기전 3세기 말에 흉노(匈奴)에게 멸망당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동호에 대한 약간의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지만 동호인들의 머리 형식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호의 후계세력이라고 알려져 있는 오환(烏丸)과 선비(鮮卑)에 대해서는 그 머리 형식을 추정할만한 비교적 충분한 사료 및 고고학적 자료가 알려져 있다. <<후한서(後漢書)>> <오환선비열전(烏丸鮮卑列傳)>에 따르면 오환 사람들은 모두 곤두를 하고 여성은 혼인할 때에 머리카락을 길러 나누어 상투를 만든다고 한다.
<오환선비열전>은 선비가 오환과 그 습속이 서로 같다고 설명하였지만 머리 형식은 조금 차이가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선비 사람들은 혼인 직전에 곤두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선비 사람들은 혼인을 하면 남녀 모두 곤두를 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동한(東漢) 시기의 유명한 정치가이며 학자이기도 했던 응소(應劭) 또한 <<풍속통(風俗通)>>에서 선비가 모두 곤두를 한다고 서술하였다.
선비 사람들이 혼인할 때에 곤두를 한다고 하면 혼인 이전, 곧 미혼 시기에는 곤두를 하지 않았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대체로 선비 사람들은 혼인 전에는 머리 형식이 비교적 자유로웠으나 혼인 후에는 남녀 모두 곤두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오환과 선비의 머리 형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남녀 모두 곤두를 하는 풍습이 있었으며 오환, 선비 모두 혼인한 성인 남성은 곤두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여성이 곤두를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여성에게도 곤두의 풍습이 있었다는 점이 특히 눈길을 끈다.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区) 화림격이(和林格尔) 신점자(新店子)에서 발견된 동한 시기의 벽화무덤은 오환, 선비의 머리 형식과 관련하여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무덤의 주인은 그 마지막 관직이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라고 하는데 이는 오환, 선비족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최고군정장관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통하여 벽화무덤에서 볼 수 있는 동한 사람들과 구별되는 머리 형식을 이들이 오환, 선비족임을 추정할 수 있다.3)
벽화에서는 오환, 선비로 추정되는 이들에게서 머리를 완전히 밀어서 머리카락이 전혀 없거나 머리의 주변은 모두 밀어버리되 머리 꼭대기 한 가운데의 남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세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선비의 곤발 형식에 대해서는 오환의 것과 함께 선비의 후계 세력이라고 전하는 거란의 머리 모양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거란은 여러 벽화 무덤을 남겼는데 이를 통해 거란 사람들의 머리 형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4) 이들 벽화를 모면 거란 사람들은 꼭대기의 머리를 밀고 주변머리를 길러 늘어뜨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점자 벽화에서 보이는 두 형식이 모두 곤발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모호하다. 거란의 머리 형식으로 미루어보면 가운데 머리카락 대부분을 삭발하는 것이 전형적인 곤발이 아닌가 생각된다.
거란 사람들도 주변머리는 남겨 늘어뜨리기도 하고 거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여진 사람들의 곤발에서 중앙 머리 대부분의 머리카락을 삭발하되 남은 주위 머리카락을 길러 귀 옆에서 둥글게 만든 모습을 볼 수도 있지만5) 거란의 머리 형식에서 머리 꼭대기의 머리카락을 기른 것은 보기 어렵다고 한다.
머리 꼭대기에서 세운 머리는 변발(땋은머리)로 보이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것이 변발과 관련이 있다면6) 흉노의 영향일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에 선비는 흉노의 영향 아래에 있다가 흉노가 남북으로 갈라지고 북흉노가 세력을 잃자 뷱흉노의 남은 땅과 무리를 차지하였고 2세기 중엽에는 선비족 단석괴가 부여에서 오손에 이르는 1만 수천리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이때 흉노의 남은 무리들이 선비를 자칭하였다고 하므로 실질적으로 선비와 흉노를 구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신점자 무덤 주인의 활동시기는 대체로 2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므로 선비의 세력 확장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흉노의 변발 풍습이 선비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여러 문헌사료를 볼 때 오환, 선비의 대체적인 형태는 머리 가운데를 삭발하는 곤발이었다고 생각된다.
1) 靳楓毅, 「论中国东北地区含曲刃青铜短剑的文化遗存(下)」, 『考古学报』, 1983-1; 靳楓毅, 「夏家店上层文化及其族属问题」, 『考古学报』, 1987-2.
2) 주희, 한상갑 역, 『논어/중용 사서집주Ⅰ』, 삼성출판사(서울), 1990, 317쪽. 밑줄은 글쓴이가 삽입하였음.(『論語』「憲問第十四」. “子曰 管仲相桓公 霸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 微管仲 吾其披髮左衽矣.”)
3) 李逸友, 「略论和林格尔东汉墓壁画中的乌丸和鲜卑」, 『考古与文物』1980-2.
4) 国家文物局 主編, 「河北宣化新发现 兩处辽金壁画墓」, 『1998 中国重要考古发现』, 文物出版社(北京), 2000; 国家文物局 主編, 「內蒙古扎魯特旗辽墓」, 『1999 中国重要考古发现』, 文物出版社(北京), 2001.
5) 金容文, 「中央아시아의 修髮樣式과 頭衣」, 『韓國服飾』 12, 1994, 75-77쪽.
6) 李逸友는 위 글에서 이를 변발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