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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에 밀려가는 배
행 27:9-20
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 설 교 >
그 어떤 경우에도
행 27장 13~26절 / 손상률목사
바울의 일행을 태운 호화 여객선 알렉산드리아 배는 순풍에 돛을 달고 에게해의 아름다운 경관을 만끽하면서 낭만의 항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배에는 로마의 정예군인 아구사도 부대의 백부장 율리오가 지휘하는 군인들을 포함하여 276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습니다. 시기적으로 금식하는 절기(9월20일경)가 지나고 나면 지중해의 날씨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급변할는지 예측할 수 없는 계절입니다. 그 곳 사정에 밝은 바울은 율리오에게 무리한 행선을 강행하지 말고 미항에서 겨울을 지나고 출발하도록 요청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신뢰하고 출항을 명령하였습니다. 잠깐 동안 순한 남풍이 불어 바다가 고요할 때, 그들이 득의한 줄 알았으나 잠시 후 그레데 해역을 통과할 무렵 「유라굴로」라는 악명 높은 태풍에 휘말리면서 배는 파선 직전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권세 당당하던 백부장과 군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큰소리치던 선장과 선주도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습니다. 사공들이 나서서 배의 침몰을 막아보려고 배 안에 있는 화물을 물 속에 던지기도 하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허사였습니다. 하늘이 캄캄하고 폭풍이 몰아치기를 열 나흘이나 계속되는 동안 승객들은 식음을 전폐한 채 죽음의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때 사도 바울은 희망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들을 향해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 내 곁에 서서 말하되…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 하는 자를 다 내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였습니다(23-25절).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지구호(地球 )는 2003년이라는 바다 위로 출항하였습니다. 이달리야로 가는 알렉산드리아호가 그레데 해역을 통과하면서 순풍과 광풍을 만나는 것처럼 금년 한해 우리 앞에 펼쳐지는 항로가 어떤 모습으로 급변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지어 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엄청난 파고가 예상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항해가 순탄하든지 높은 파도에 위험을 만나든지 그 어떤 경우에도 헤쳐나가는 비결을 가져야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의 비결이 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어야됩니다.
Ⅰ. 주님의 보호를 확신합니다.
본문 말씀 20절에 보면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살아날 희망이 없어지자 낙담하고 주저앉아 있는데, 유독히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용기를 불러일으키게 하였습니다. 25절에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였습니다.
(1) 약속의 싸인을 받았습니다.
망망대해에서 유라굴로라는 태풍을 만나 살아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바울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23-24절에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 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불신자들과 똑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언제든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특수한 신분의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낌을 받는 자들이요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미 여러 차례 하나님께서 저와 같이 하시고 저를 지키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8:9-10에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성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시간이나 환경이 달라져도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2) 적절한 시간에 개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지키실 때 자녀를 아끼는 부모처럼(말3:17), 평소에는 먼발치에서 보고만 있는 것 같다가도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거나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면 모든 일을 전폐하고 거기에 매달리곤 합니다. 질병이나 사고로 생명이 위경에 달했을 경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살려내려고 애를 씁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산 위에서 혼자 기도하고 계시던 에수님께서 밤 사경에 바다 위로 걸어 오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마14:29). 여기 바울의 경우도 유라굴로 풍랑을 만나 도저히 살아날 여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그 시간 주님의 사자를 그의 곁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전쟁에서 특수 임무를 띠고 투입되는 특공대처럼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시간 필요한 장소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개입하시고 그의 전능하신 위력을 발휘하시는 것입니다.
(3) 신비로운 체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요동되지 않는 확신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불변의 언약 곧 계시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며, 또 한 가지는 그동안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의 체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후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율법을 선포하시면서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은혜의 체험이 있는 사람은 그 사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어떤 상황에든지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동안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 때마다 자기 곁에 서서 돕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였습니다(14:19-20, 16:25-31). 훗날 로마 옥중에서 회고하기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가졌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빌4:11-13).
Ⅱ. 사명의 열정을 가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주권과 자기의 사명을 확실히 아는 자입니다. 로마서 11:36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4:7-8에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고 하였습니다.
(1) 사명의 확신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그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로 붙잡힌 다음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사명에 대하여 확실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하여 그를 택정하셨다고 하였습니다(롬1:1). 갈라디아서 1:15에는 하나님을 가리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 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의 원리를 믿는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 때문에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를 선택하셨고(엡1:4), 때가 되어 부르셨는데 그 과정은 매우 극적이고 초자연적인 방법이었습니다(행9:3-9).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두고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행9:15). 그는 훗날 밀레도에 모인 에베소 장로들과 송별 설교를 하면서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행20:23-24).
(2) 사명을 향한 집념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명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 자기의 생명을 거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고 그것으로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는 이 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입니다. 바울의 경우 그가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9:19-23에 보면 그가 유대인을 만났을 때는 유대인처럼 하고 헬라인을 대할 때는 헬라인처럼 행동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9:19).
그는 디모데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였습니다(딤후4:3). 바울은 복음 전도의 사명에 대한 집념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접근할 때 시간도, 장소도, 상대도 구별이 없었습니다. 밤이나 (행16:25) 낮이나, 저자 거리에서나(행16:18), 회당에서나(행15:1), 아레오바고 언덕 같은 야외에서나(행17:22), 자기를 심문하는 임금과 총독 잎에서나(행26:28), 그를 감시하는 근위병들에게나(행28:16), 감옥에서나(몬1:10), 심지어 풍랑 치는 바다 위에서 죽음 직전에 있는 승객들에게까지 무작위로 감행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있었습니다.
위대한 전도자 바울은 어느 때 어떤 장소에서 누구에게든지 전도를 하였고, 놀라운 변화를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일들이 주권자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되어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전도할 문을 열어주신다고 하였습니다(골4:3). 고린도전서 16:9에 보면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소아시아를 떠나 마게도냐로 갈 때도 하나님께서 계시의 환상을 보여주셨고(행16:9),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을 부를 때도 지진이 나며 옥터가 움직이게 되는 등(행16:26),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이 뒷받침되었습니다.
본문 사건을 보더라도 엄청난 풍랑으로 모두가 다 죽음의 위기로 몰렸을 때 거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구원과 승리의 확신을 갖게 하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종 된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계시와 능력이 뒷받침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십니다.
Ⅲ. 하나님의 목적은 성취됩니다.
바울이 여객선을 타고 로마로 가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그가 총독 베스도 앞에서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였기 때문입니다(행25:10). 사도행전 26:32에 보면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 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었을 뿐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게 된 배경도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로마에 보내고자 계획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3:11에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볼 때 바울의 일행이 그레데 해역에서 풍랑을 만난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게 하는 한 과정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권세를 확인하였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임을 부정합니다. 곧 사람이 제 마음대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사도행전 27:9-11에 보면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이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는 자이며 그 사실을 백성에게 나타내는 자입니다. 한편 백부장은 권력을 가진 자요, 선장은 기술이 있는 자이며, 선주는 재물을 가진 자입니다. 결국 그 배에서는 세상 권력과 지식과 물질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있는 것 같았으나 결국 그것은 얼마 못 가서 유라굴로 풍랑 앞에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자연과 바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을 다스리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권세임이 확인 된 사건입니다.
(2) 영혼 구원의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본문 말씀 24절에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 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겉으로 보면 배 안에 있는 사람의 생명이 군대장관 율리오의 손에 있거나 배의 안위를 책임진 선장이 좌우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라굴로 태풍 앞에서 백부장의 힘은 무력하였고, 선장과 선원은 저희들만 살기 위해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행27:30). 다만 주권자 하나님의 싸인을 받은 바울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승객과 선원들에게 음식을 권하며 생명의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였습니다. 35-37절에 보면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인이러라"고 하였습니다.
(3) 개선 장군이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배는 곧 이어 두 물이 합치는 곳에서 깨어져 침몰하였습니다. 배에 있던 사람들은 널판과 같은 부유물을 타고 헤엄쳐 나와 모두 구조되었습니다.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을 가장 존귀한 인물로 생각하고 그를 호위하여 주었습니다(행27:42). 그들이 상륙한 곳은 멜리데라는 토인들의 섬이었습니다. 마침 그 섬의 추장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을 앓고 있었는데 바울의 기도로 병에서 낫게 되자 바울과 그 일행이 후한 예로 대접을 받았습니다(행28:7-10). 석 달 후에 거기서 다른 배를 타고 로마에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환영해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28:15에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신이 되어 비록 쇠사슬로 얽매인 죄수의 신분이었으나(엡6:20),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 그 어떤 경우에도 담대히 이기는 개선 장군이 되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로서 소임을 다 하였고, 그 결과 놀라운 생명적 축복을 행사하게 된 것입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어 평온한 항해를 하게되든지 유라굴로 풍랑으로 고난을 당하게 되든지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승리자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
박인걸목사(수주중앙교회) / 행 27:14-26
미래를 알아맞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 신통력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쟁이나 영매쟁이를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둘째, 과학적 통계에 의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입니다. IMF 때에 우리나라 국민 누구도 그런 일이 올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해외 석학들과 금융연구소에서는 한국에 외환위기가 온다는 예측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할 줄 아무도 몰랐지만 전쟁을 예측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다른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합니다.
인류 역사는 미래를 예측하는 눈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사람은 미래를 읽는 눈이 있었고, 모세는 장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을 향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는 적어도 1.500년 후를 내다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나 엘리사도 미래를 예측하는 힘이었습니다. 토인비나 엘빈 토플러는 미래에 대한 탁월한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삼성 스마트폰과 애플의 스마트폰을 만든 자사의 회장들은 앞으로 손안에 세상이 온다는 것을 예측하고 거액을 투자하여 스마트폰을 개발하였고, 그들의 예측은 적중하여 전 세계인들이 손 안에 세상을 들고 다니고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무나 풀잎이 싹이 틀 때부터 크게 될지 오래 못가서 말라 죽을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이나 어떤 일에 대하여 초기부터 장래를 짐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경험과 상황에 비추어 내일을 예측하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알렉산드리아 호를 타고 갑니다. 그는 죄수 아닌 죄수가 되어 로마로 재판을 받기 위하여 가는데 그의 호송은 로마에 복음을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그의 기도 응답이며, 동시에 서유럽에 복음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탄 배는 여객선이며 그 배에는 276명이 타고 있었고, 통솔자는 백부장입니다. 첫 출항은 순탄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풍랑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미항에서 과동을 한 후 봄이 오면 가자고 했습니다. 그는 예측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항해하면 반드시 풍랑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배에 탄 사람들이 바울의 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백부장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못하고 유라굴로하는 큰 태풍을 만났고, 14일간 그들은 바다 한 가운데서 죽게 될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앞뒤가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은 극한의 고통과 두려움에 처해 있었는데 열흘이 넘은 어느 날 바울이 그들 앞에서“여러분 이번 여행에 화물은 잃겠지만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지난밤에 말씀하였습니다.”라고 안심시킨 후 파선된 배의 널빤지와 화물조각을 이용하여 멀리 보이는 해안으로 헤엄을 치게 하였고, 그의 말대로 모두 살아났습니다. 그들이 살아난 섬은 멜리데라는 곳이고 그곳에서 겨울을 난 후 로마로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예측능력을 통하여“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듣겠습니다. 바울을 비롯하여 276명의 승객들이 모두 수장 될 수 있는 절대 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미래를 예측하는 바울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예측능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미래를 보는 통찰력입니다.(행27:10절)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라고 했습니다. 가이샤라를 출발한 「아드라뭇데노」라는 배는 북쪽으로 110Km 항해하여 시돈에 이르렀고, 백부장의 특별한 배려로 바울은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났습니다. 시돈을 출발한 배는 구부로를 지나 길리아기아, 밤빌리아를 지나 루기아의 무라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서 로마로 가는 「알렉산드리아」호로 바꿔탑니다. 이때부터 바람이 많이 일어나 간신히 니도를 지나 살모네와 그레데 해안을 지나 미항이란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바울은 금식기간이 지난 후“이번 여행에 큰 어려움이 예측된다면서 생명과 화물에 타격이 있을터이니 미항에서 과동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갔던 항로가 9월-11월은 위험한 시기로 분류되고, 11월 중순에서 다음 해 2월까지는 항해가 금지되었습니다. 아마 바울이 탄 배는 11월 중순의 곡물운행 화물선으로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는 그 해 마지막 배였던 것 같습니다.
바울의 이런 통찰력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 배를 통솔하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바울의 말을 무시하였습니다. 바울에 대하여 그는 별 볼일 없는 죄수로 생각했습니다. 우습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점차 그 배안에서 바울은 지도자로 부상합니다. 통찰력이란?“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이런 통찰력은 자신의 항해 경험에 따른 예측입니다. 그는 바다에서 세 번 풍랑을 만나 죽을 뻔 했습니다.(고후11:25), 그래서 자신을 호송하는 백부장에게 미항에서 겨울을 난 후 가자고 한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급변하는 특징을 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미래를 보고 준비합니다. 미래에 유망한 직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① 고령화 증가로 인한 노인전문 사회복지사, 간호사, 간병인, 실버시터, 장례지도사 등입니다. ② 건강 전문 웰빙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상담전문가, 의료코디네이터, 첨단의료기기 개발자, 영양사, 식품 공학자 등입니다. ③ 사회 안전구조의 변화에 따라 힐링강사, 다문화 강사, 결혼이민 지원전문가 등입니다. ④ 환경문제관심 증대에 따라, 그린에너지 연구가, 기후변화 전문가, 친 환경 자동차 개발자 등입니다. ⑤ 첨단기술 융합 발전에 따른, 유비쿼터스 개발자, 방송통신 기술자, 응용소프트웨어 개발자, IT 컨설턴트 등이 뜨는 직업입니다. ⑥ 전문직 서비스산업의 발달에 따른, 경영컨설턴트, 보험전문가, 변리사, 호텔리어, 커리어 코치, 마케팅전문가 등입니다. 가장 전망이 밝은 직업은 교육 업에 종사하는 직업입니다. 왜냐하면 최첨단 과학 사회로 나갈수록 인간의 지식은 고도화되기 때문에 그들을 가르치는 직업은 인기가 줄어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미래를 보는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 외에도 사람을 보는 통찰력, 사건을 보는 통찰력, 국가의 장래를 보는 통찰력, 국제관계를 내다보는 통찰력, 역사를 읽는 통찰력, 등등 있으며 이런 통찰력은 우리의 삶에 필수불가결의 요소입니다. 바른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위험을 피할 수 있으며, 미래를 예측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통찰력을 지혜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스위스는 세계적인 시계 메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자시계 시대가 도래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세계 시장 점유율 65%에서 10%로 곤두박질 쳤습니다. 일본의 코닥도 통찰력이 부족하여 그룹이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시대를 읽는 통찰력이 부족하면 국가도, 기업도, 가정도, 교회도 문을 닫을 수 있고, 가정도 개인도 망할 수 있습니다. 시대와 미래를 읽는 눈은 하나님이 자연인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개성공단을 시작할 때 저는 개인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곳에 입주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날이 올 것을 저는 읽었습니다. 북한은 미혹의 영이 역사하는 영적 집단입니다. 거짓말 하는 영이 국가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북한을 국가로 보면 계속 속을 것입니다.
통찰력을 키우려면 책을 많이 읽고, 전문적인 식견을 쌓고, 사물과 사건을 관찰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혜는 경험과 기도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미래와 가정의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목회자는 교회와 지역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통찰력을 잃으면 함께 하는 가족이나 공동체를 파멸로 이끌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런 통찰력을 키워가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예측능력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또 무엇이 있었습니까?
(2)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행27:23-24)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로마로 가는 배 안에서 풍랑을 만나 위기를 당하고 있는 바울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급파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반드시 가이사 앞에서야 할 것이며, 바울과 함께 항해하는 모든 자들을 지켜주겠다.”고 하신 말씀을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 계시 된 말씀입니다. 신앙은 말씀에 근거하며, 말씀은 신앙의 근거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삶에 역사하며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예측해 줍니다. 말씀을 따르며 지키는 개인은 구원을 받고, 복을 받으며, 말씀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말씀을 따라 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며, 생의 아름다운 족적을 남깁니다. 말씀을 따라 살지 않은 사람은 그의 삶의 궤적이 부끄럽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시119:105),“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5),“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5:39),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소유한 성경에는 하나님, 인간, 타락, 구원, 영생, 축복, 저주, 승리, 성공, 실패, 행복, 자유, 기쁨, 만족, 바른 삶, 인간 존재의 의미, 삶의 방법 등등, 인간에게 중요한 주제들이 다 들어 있으며, 우리가 믿고 따라가야 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좇아 살면 미래가 아주 밝습니다. 환합니다. 잘 됩니다. 잘못 된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1편, 저자는 이렇게 썼습니다.“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들지 않음같이 그 하는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1-3)라고 했습니다.
링컨은 시골에서 출생했습니다. 부모가 가난하여 학교를 갈 수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가게를 열었다 실패하여 빚 갚는데 15년이 걸렸답니다. 농부, 뱃사공, 장사꾼, 군인, 우체부, 등 열 네 가지 직업을 가졌습니다. 첫 번째 약혼자는 죽었고, 후에 결혼하여 낳은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섹스피어에 대해서는 문학박사 수준이었고, 성경지식은 신학자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였고, 16대 미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날 첫 문장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글귀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결코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없었으며, 미국이 직면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는 성경을 근거로 흑노 해방을 위한 전쟁을 하였고, 미국의 통합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성경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그런 성경을 읽게 한 분은 그의 어머니입니다.
말씀에 의존하여 사는 사람은 반드시 미래를 예측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요소는 무엇일까요?
(3)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적인 사람입니다.(행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 바울은 그 풍랑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고, 말씀한 대로 이뤄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가이사 앞에 서서 재판을 받게 되고 더 나가 로마에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바울의 꿈은 로마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37절과 19장 21절에서 두 차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 꿈을 가지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기도가 이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로마에 복음이 전해 져야 유럽이 복음화 되고, 유럽이 복음화 될 때 전 세계에 복음이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예측은 적중했습니다. 로마가 주후 313년에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고, 소위 서양사가 형성되었으며, 그 서양사는 기독교 역사여, 인류 역사를 주도하게 됩니다. 그 원동력은 바울이 전한 복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그 앞길을 인도하여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떠났습니다.(창12:4) 하나님은 그의 앞길을 인도하였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부모와 형을 떠나 망명의 길을 떠나는 고통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그의 앞길이 활짝 열렸고, 결국 큰 거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요셉도 형들에게 팔리는 아픔을 겪지만 그 역시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애급의 총리가 됩니다. 이스라엘에 애급에 200만이 나올 때 모세와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광야길이 힘들고 어렵다고 불평한 자들을 모두 광야에서 죽었지만 하나님만 믿고 의지한 자들은 모두 가나안 땅을 밟았습니다. 믿는 자의 미래는 예측이 가능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의 미래는 예측아 불가능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포브스’지가 정한 세계 100대 인물 가운데 11위에 올랐고, ‘아시아의 철의 여인’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가족사의 불행을 딛고 일어서는 그의 의지를 보고 한국 국민들이 그를 믿어 주었고,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대통령이 된 것에 대하여 이 신문은 높이 치하한 것 같습니다.‘머니볼 이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영화 ‘머니볼’에서 시작된 말인데 “경기 자료를 철저히 분석해 선수를 적지적소에 배치해서 승률을 높인다는 게임이론”입니다. 이 영화에서 단장은 고정관념을 버렸습니다. 스펙이 화려하고 우수한 선수보다 잠재력이 있는 참신한 선수들을 선발해 그들을 끝까지 믿어주는 데서 선수들은 메이저 역사상 기적을 이끌어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믿어줄 때 사람은 그를 위해 생명도 거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자식을 믿어주는 부모가 돼야 그 자식이 실망을 시키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기적을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강도의 소굴로 변한 성전을 정화하신 후 지나가는 길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선생님, 선생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다고 보고했다. 그때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믿고 마음에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막11:23), 어떤 환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고 믿는 사람은 반드시 일어섭니다. 죽음에서 살아납니다. 절망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바울은 그 무서운 유라굴로가 불어 닥쳐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이것이 영적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굳게 믿는 자들의 미래는 밝습니다. 환합니다. 길이 열리고, 돕는 사람이 나타나고, 일이 풀리고, 문제가 해결되고, 꿈을 성취하고, 목적하는 바를 이루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대로 되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입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은 통찰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믿음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이런 능력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광풍이 불어올 때
배 혁목사(안토니오교회) / 행 27:14-25
오늘 말씀은, 사도바울이 죄인의 신분으로,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호송되던 도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의 세계의 중심이라고 일컬어지는 로마로 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세계의 중심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에 세계의 곳곳으로 퍼질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소망대로 로마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런데 그가 로마로 가는 신분은 죄수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바울을 죄인이라면서 잡아다가 로마인들에게 넘겼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이니, 로마에 있는 가이사의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겠다고 했고, 사도바울은 재판을 받기 위해서 로마로 호송되어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도바울이 타고 가는 그 배를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일으키셔서 바울이 타고 가는 배를 파선시키시고, 죽음의 고비를 겪게 하십니다.
오늘,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파선을 당하는 사도바울의 모습들은,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광풍과 같은 일들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유라굴로를 대면케 하심으로, 또한 하나님을 대면케 하심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에 불어 닥치는 유라굴로와 같은 광풍이 어떠한 의미가 있을지 함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광풍을 통해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 개입하시고자 하심을 봅니다.
사도 바울이 탄 배는 무역선입니다. 죄수를 후송하는 별도의 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역선으로 운행하던 배를 타고,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배에는 죄인들과 그들을 후송하는 로마군사들, 그리고 일반 상인들과 선원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로마를 향해 출발한 사도바울이 탄 배가 미항이라는 항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탄 배가 미항에 이르렀을 때에 사도바울이, 죄인들을 후송하는 책임을 맡은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권면하기를, 지금 정박하고 있는 미항에서 겨울을 지내고 가는 것이 낫겠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짐들과 배도 손해를 볼 것이고, 사람의 생명까지 위험할 수 있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바울의 말은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선장과 선주의 조언에 따라서 배를 뵈닉스 항구로 항해해서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 배를 책임진 백부장은 전문가의 말을 따라 미항을 떠나, 뵈닉스 항구로 떠나게 됩니다.
사람들의 삶의 대부분은 전문가의 말에 관심하고 그 판단을 신뢰하며 따릅니다. 배의 선주와 선장은 배와 바다에 대해서 전문가입니다.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의 말에 의존하고 판단하다가 보니까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하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은 비록 항해에는 비전문가였지만, 사도바울의 말은 바울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말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모든 것의 전문가인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그것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판단의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의 판단의 근거가 편한 것일 때가 있습니다. 백부장이 미항을 떠나고자 했던 이유는, 미항은 과동하기에 불편하니, 좀 더 편한 뵈닉스 항구로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지만 그것 때문에 더 불편하고 죽을 뻔했습니다.
또한 전문가와 다수의 의견입니다. 전문가도 떠나자고 했고, 그곳에 있던 바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미항을 떠나자는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의견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판단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에 전문가와 편함과 다수결에 근거를 삼다가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울이지도, 고려하지도 않고 살아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덧, 이 세상에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편안한 것들이 많아지고, 커다란 세력들을 형성할 수 있는 여론들이 조성 되면서,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바다와 배의 전문가인 선장과 선주의 말을 믿고, 배가 출항을 합니다. 처음에는 바람이 참 순하게 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득의한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곧 바라던 일이 잘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전문가의 말을 듣는 것을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오래갑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14절에,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서 유라굴로 라는 광풍이 불어왔다고 했습니다. 유라굴로라는 말은, 동풍을 뜻하는 ‘유로스’와 북풍을 말하는 ‘아낄로’를 합성한 말입니다. 동북풍입니다. 강한 동북풍이 섬으로부터 불어옵니다.
이 유라굴로 광풍으로 인해서 가고자 했던 목적지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냥 바람에 몰려가는 것입니다.
2. 이 유라굴라를 누가 보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참 무심하십니다. 사도바울을 로마로 보내시는데, 좋은 배도 아니고 무역선에다가, 죄수들과 가는데, 그 불편함을 피해 뵈닉스 항구로 가는데 그냥 편하게 보내주시면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꼭 광풍을 부셔서 그렇게 고생을 하게 하시니 참 너무 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유라굴로 광풍을 통한 교훈과 깨달음이 있습니다. 편안히 로마로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 광풍을 만남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십니다.
1) 먼저, 유라굴로는 사람의 어떠한 노력도 허사이고,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광풍입니다.
유라굴로 광풍을 만날 때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보통 때는 계획한대로 뭐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옵니다. 광풍을 만나니까 뭐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습니다.
노를 저어도 안되고, 돛을 올리거나 내려도 안됩니다. 키를 잡고 있어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수고하면 할 수록,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것만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바람이 불어 오는 데로, 아니 하나님께서 모시는 대로 몰려갈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십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15절에,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라고 했습니다.
이 때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문가가 할 수 없고, 다수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 광풍을 주시는 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전능자를 깨닫는 것입니다.
2) 또한 유라굴로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게끔 만들기도 합니다.
며칠 동안 광풍에 몰려다니던 배위의 사람들이 살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짐을 바다에 풀어 버려서 배를 가볍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야 배가 가벼워져서 배의 파선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짐을 버리는 것도 부족해서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버린 짐들속에는 대부분 귀한 물건들이었을 것입니다. 무역하려고 그렇게 수고해서 사 놓은 값비싼 물건들을 버려야 했습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서 늘 지니고 다녔던 물건들을 버려야 했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소중하게 장만한 선물들도 버려야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배를 운행하던 기구들도 버려야 했습니다. 자신들의 손으로 그것들을 가지기 위해서 그들은 피나는 노력을 했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풍랑을 맞게 되니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죽게 되니까 자기 손으로 버려야 할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의 실상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버려야 할 것들이 아닙니까?
지난 화요일 밤에, 샌안토니오 지역에 아주 이래적인 기상현상이 있었습니다. 샌안토니오의 넓은 지역에 우박이 떨어진 것입니다. 콩알만한 우박이 떨어진 곳도 있었지만, 골프공만하거나 야구공만한 우박이 떨어진 곳도 있었습니다. 그토록 아끼는 집의 지붕과 벽이 깨지는 피해도 있었습니다. 애지중지 기르던 정원의 꽃들과 채소들이 망가졌습니다. 무엇보다 밖에다가 세워 둔 차들의 유리가 깨지고, 차체가 찌그러지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고 예쁘게 가꾸던 것들이 한꺼번에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 순간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깨지고,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을 눈 앞에서 보면서도, 그냥 손을 놓고 보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유라굴로를 저와 여러분에게 보내십니다. 그래서 그 동안 하나님 이외에 집착했던 세상의 것들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어떨 때는 내가 스스로 그것들을 바다에 던지게 하십니다. 그것들이 나를 살려 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그것들 때문에 내가 죽을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살기 위해서 포기해야 할 그 무엇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18절에서는 사람들이 바다로 버린 것들을 짐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왜 짐입니까? 그전에는 그것은 보석이고, 보물 제1호였고, 나를 먹여 살리는 생계였습니다. 배를 항해하는 귀한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유라굴로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은 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 손으로 버릴 때에 이것이 짐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소유한 것이 행복이 아니라 짐인 것입니다. 다 버렸습니다. 배에 있는 모든 연장, 기구를 다 버렸습니다. 배 항해를 하는데 필요한 기구를 다 버렸으니 마지막 보루를 버린 것입니다.
3) 때로 하나님은 유라굴로를 통해 깊은 절망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바다에 던져버렸는데도 그들에게 소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20절에 보면,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밤에 해가 안보이고, 밤에 별이 안보였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바다에서 떠 다니면서 다닙니다.
이럴 때에 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풍랑은 계속 치는 것입니다. 구원의 여망, 끝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망입니다. 먹지도 못해서 힘도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이제 제로에 가까워 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절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우리가 절망했을 때에 하나님은 시작을 합니다. 인간이 절망했을 때에 가난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가난해지고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4) 이제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소망을 발견케 하십니다. 관심을 하나님께로 이끄십니다.
그 동안 사람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사람 바울도 아니었고, 하나님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편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짐을 잘 옮길까? 바울의 말은 그것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서 바울에게 관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시면서 하나님께로 그들을 돌이키십니다. 이것이 유라굴로가 주는 유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절망 가운데서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21절,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뻔하였느니라”그러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소망을 줍니다.
22절에,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니라. 왜냐하면 어제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사도바울은 로마에 가서 가이사 앞에 설 것이고, 바울과 함께 한 자를 다 바울에게 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할 때에 배에 탄 사람들의 관심이 바뀝니다. 배와 바다의 전문가인 선장과 선주의 말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도바울의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수고가 다한 후에 이제, 하나님께서 바울을 세우시고, 그로 하나님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라굴로가 주는 유익입니다.
3.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순풍, 광풍 모두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처음 미항을 떠날 때에 그 사람들은 순한 남풍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뵈닉스로 분명히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순풍을 통해서는 자신들의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원하는 목적지로, 자신들이 항해하는 배를 잘 몰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그렇다고 그것이 사람이 하는 일입니까? 내가 목적지에 갈 수 있고, 모든 것이 득의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하는 것입니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순풍을 주실 때에는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상황을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미풍도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반면에 광풍은 강하게 하나님의 주장하심을 경험케 하십니다.
광풍이 없었으면, 물건이 파괴되고 목숨이 위태한 지경까지 가지 않았으면, 그 배에 타고 있었던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께 관심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광풍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배가 미항을 떠나 무사히 뵈닉스에 가는 것에 관심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로 이끄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워 놓은 목적지에 가고 싶어하지만, 하나님은 순풍이나 광풍을 통하여, 하나님이 목적지이고, 도착지임을 알리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순풍에 있으십니까? 광풍 속에 있으십니까? 내가 원하는 도착지에서 멀어졌습니까? 가까워 졌습니까?
그것보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이라는 항구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풍을 통해, 그리고 때로는 광풍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항상 주장하십니다.
그렇게 하셔서, 사람의 계획과 능력을 꺾으시고, 하나님의 계획과 전능하심이 있음을 드러내시고, 사람으로 그것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깨닫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25절에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믿음이 없으면 순풍이든 광풍이든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냥 바람입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 섭리주 하나님을 믿게 되면, 이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풍에 처하든, 광풍을 처하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시면서,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대면하고, 그분 앞에 자신의 삶을 더욱 맡겨드리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살아갈 희망이 다 사라지고 말았을 때
송기성목사 / 행 27:18-26
“아 하나님의 은혜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것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You can do it, because you should do it.) 무슨 일을 행함에 있어서 당위성이 크면 클수록 실현 가능성도 커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위성이 크다고 해서 반드시 모든 일을 가능케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라며 하나님의 능력을 전제로 하였던 것입니다.
세상을 사노라면 살아갈 희망이 다 사라지고 말았을 때를 당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시련을 당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호를 타고 로마로 가는 항해 중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죽을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동행하던 누가는 당시의 상황을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행27:20)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는 말은 살아날 희망, 살아갈 희망이 마침내 다 사라지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살아갈 희망이 다 사라지고 말았을 때 그 무서운 광풍 속에서 남달리 평온과 용기와 확신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살아갈 희망이 다 사라지고 말았을 때 그가 취한 태도와 행동에서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교훈과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살아갈 희망이 다 사라지고 말았을 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호에 바울과 다른 죄수들을 태웠습니다. 배가 미항에 겨우 정박했을 때 바울은 항해를 계속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그가 보기에는 이 항해가 불안하며, 짐과 배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경고를 무시하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출항을 명했습니다. 때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어 그들은 안심하고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 배가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큰 풍랑으로 초죽음이 된 사공들은 배의 짐과 기구를 바다에 내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실 선장도 아니었고 선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도 여행 중 세 번씩이나 파선을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영감과 지혜가 있었습니다. 백부장과 선장과 선주는 사도 바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래 먹지 못하여 기진맥진에 빠졌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의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않아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한 책망이기도 하지만 자기의 판단과 말이 옳았음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지금부터라도 자기가 하나님을 힘입어 판단하고 지시하는 말에 사람들이 믿고 따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라며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며 희망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살아갈 희망이 다 사라지고 말았을 때 사도 바울은 결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살아갈 희망이 다 사라져버린 광풍의 큰 풍랑 속에서 희망을 건져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살아갈 희망이 다 사라지고 말았을 때에도 희망과 용기와 평온을 잃지 않고 구원의 여망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하며 소망의 빛을 비추어 주는 줄 믿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함으로써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애국애족 정신과 민주주의 이념을 심어 주는 오산학교로 진학하면서 그의 이름을 기복에서 기철로 바꾸었습니다. ‘기독교를 철저히 지킨다’는 신념을 이름에 담은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성조차 주(朱)씨였기 때문에 붉은 피로써 기독교 신앙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뜻이 됩니다. 1939년 이른 봄 7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세 번째 옥살이에서 나온 날 그는 마침 주일을 맞아 산정현교회에서 <5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둘째, 긴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셋째, 교우들과 가족을 지켜 주옵소서.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옵소서.
다섯째,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주님께) 부탁하나이다.
<5종목의 나의 기도>, 그것은 주기철 목사님의 유언 설교가 되었습니다. 1940년 9월 마흔네 살 때 주기철 목사님은 마지막 네 번째 투옥을 당하셨습니다. 투옥되시기 전날 밤 그는 죽음을 예견하신 듯 담담하게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를 읽고 다시 읽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주기철 목사님은 평소의 기도를 드린 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1944년 4월 21일 순교하셨습니다.
시편 50:15에 하나님께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환난(troubles)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환난이 극심해지면 살아갈 희망도 다 사라질 수 있습니다.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끝까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살아갈 희망이 다 사라지고 말았을 때, 성도 여러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살아갈 희망이 다 사라지고 말았을 때
두려워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인생은 항해와 같습니다. 순풍에 돛을 달고 의기양양하게 순항할 때가 있는가 하면 광풍에 돛을 내리고 의기소침하여 표류할 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탄 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백부장과 선장과 선주 등 배에 탄 사람들은 유라굴로 광풍으로 말미암아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살아갈 희망이 다 사라져버린 큰 풍랑 속에서 용기를 낸다는 것은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백부장의 권력이나 선장의 능력이나 선주의 재력 등으로는 결코 구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실 죄수 아닌 죄수의 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의지하거나 자랑하는 권력이나 능력이나 재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배에 탄 모든 사람이 유라굴로 광풍이 몰아치는 큰 풍랑의 바다에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평온과 용기를 잃지 않고 담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며 희망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그가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가 속한 바 그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자기 곁에 서서 하신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사실 살아갈 희망이 다 사라져버린 큰 풍랑의 바다에서 바울인들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에게는 유라굴로 광풍도 그를 꺾을 수 없는 사명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가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 서서 복음을 전하기까지 그는 결코 죽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사명과 확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살아갈 희망이 다 사라지고 말았을 때에도 희망과 용기와 평온을 잃지 않고 구원의 여망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증거하며 소망의 빛을 비추어 주는 줄 믿습니다.
북부 보스톤교회의 홍석환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큰아들 현택이가 갑자기 악성 뼈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8개월 동안 투병하다가2004년 2월 열일곱 살 때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주 의연하게 암 투병과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걱정하는 아빠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힘든 일을 주시는 데에는 특별한 뜻이 있을 거예요. 제가 아프기 때문에 지금부터 인생을 아주 의미 있게 살 것 같아요. 내 뜻대로 세상에 오지 않았듯이, 내가 세상을 떠나는 것도 내 뜻대로가 아니잖아요. 아빠, 나는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현택이는 여동생에게 MP3를 선물하고, 몇 곡을 다운로드해 주었습니다. 그 속에 “나는 오직 희망 중에 기다릴 뿐”이라는 곡이 들어 있습니다. 그 곡에서 한 줄의 가사가 여동생을 더욱 감동시켰습니다. 그것은 ‘주님 앞에 섰을 때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영원히 당신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입니다.
홍현택, 그는 살아갈 희망이 다 사라지고 말았을 때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리라는 희망 중에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홍석환 목사님은 아들의 삶과 죽음과 투병 과정을 통해 고통을 이해하는 차원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즉, 무력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세상에는 이길 수 없어 그저 직면해야 하는 일들도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상대적으로 보던 세상을 절대적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사야 12:2에 선지자 이사야는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이 극심해지면 살아갈 희망도 다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사람에게 힘과 노래와 구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살아갈 희망이 다 사라지고 말았을 때, 성도 여러분,두려워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선교사 리빙스턴은 “사람은 자기 사명을 다하기 전까지는 죽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따라 헌신하는 사람과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28:20). 사도 바울의 생애가 바로 그 산 증거입니다.
유라굴로 광풍과 큰 풍랑으로 표류하던 배가 마침내 열나흘 만에 멜리데 섬에 닿았습니다. 미항에서 멜리데까지의 거리는 800km즉 2천리나 되었습니다. 그 먼 거리를 큰 풍랑 속에 표류했지만 배에 탄 사람 276명이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행27:34).그것은 전적으로 사명을 다하기 전까지는 죽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항상 함께 하셨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살아갈 희망이 다 사라지고 말았다고 생각될 때에 결코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해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인생의 풍랑에도 생명을 지켜주는 이유는?
조영식목사 / 행 27장 18-26절 /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302장)
들어가는 글
오늘은 2월 첫째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흐름은 사도 바울이 1차, 2차,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유대인들의 고발로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며 로마로 가서 황제의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겨울에 항해하는 것이 위태하다고 말렸지만, 백부장은 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항해를 시작했습니다(11절). 처음에는 남풍이 순하게 불어서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았지만,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라 광풍을 만났습니다(13,14절). 바울이 전한 주님의 말씀보다 선장의 경험을 더 믿었기 때문에 풍랑을 만나 생명의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바울을 태우고 로마로 항해하는 배가 풍랑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깨닫고, 우리도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적용하여 잘 극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우리가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가 가진 것을 가볍게 비워야 합니다. 누가는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렸다”고 합니다(18절). 사공들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최선의 방법은 짐을 바다에 버려서 배를 가볍게 비우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공들이 배의 기구들까지 내버리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최대한 가볍게 비우고 있습니다(19절). 우리의 인생도 코로나의 풍랑을 겪으면서 무슨 짐을 버려야 하는지 깨달을 때 우울함에 빠지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한국교회도 코로나의 풍랑을 겪으면서 무슨 짐을 버려야 하는지를 깨닫고 실천할 때 건강한 교회로 다시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코로나의 풍랑을 만나기 이전을 아무리 그리워할지라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도 인생의 풍랑의 만났을 때 무엇을 버려야 할지를 깨닫고 실천하여 침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방법으로 풍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수용해야 합니다. 누가는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한다”고 합니다(20절). 당시에는 배가 항해하는 길을 찾으려면 해와 별을 통하여 방향을 잡아야만 가능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날 동안 해와 별도 보이지 않으면 아무리 경험 많은 사공일지라도 항해하는 길을 찾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고 합니다(20절). 우리의 경험과 능력으로 길을 찾을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을 통하여 길을 찾아야 합니다(23절). 인생의 풍랑은 구원의 여망을 없게 만들지만,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구원의 여망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사람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구원의 여망을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사도 바울이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전하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첫째로 인생의 풍랑을 만난 원인을 파악해야 합니다. 바울은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합니다(21절). 그가 진단한 원인은 주님의 말씀보다 선장의 말을 더 믿었기 때문이다고 합니다(11절). 우리가 풍랑을 만난 원인을 정확히 진단했을 때 올바른 처방도 내릴 수 있습니다. 바울의 처방은 지금부터라도 사람의 말이 아니라 주님이 전하는 말씀대로 따를 때 풍랑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인생의 풍랑 만나서 넘어지며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처방을 내려서 풍랑 속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인생의 풍랑 만났을 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고 합니다(22절). 선주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배 안에 많은 짐을 싣고 가서 이윤을 크게 남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배 안에 있는 생명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합니다(마6:24). 성도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면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 때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알고,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함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라고 합니다(23절). 성도들이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더 혼란스러움만 가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인생의 풍랑 속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풍랑 속에서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서서 함께하심을 믿어야 합니다(23절).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는다면 내 곁에 서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생의 풍랑을 만날지라도 주님의 음성을 들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버려두지 아니하고 내 곁에 서서 함께 계시는 증거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하나님이 풍랑 속에서도 바울의 생명을 지켜주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는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합니다(25절).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믿는 바울의 생명을 지켜주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래야만 풍랑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를 믿으면 주님이 생명을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가 아니라 내 생각대로 한다면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서 모순 중의 하나가 자신의 생각대로 시작은 해놓고 문제가 생기면 주님께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를 믿음으로 주님이 생명을 책임져 주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사명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합니다(24절). 하나님이 바울의 생명을 지켜주는 이유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선교의 사명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명을 붙잡고 있으면 그 사명을 다 이룰 때까지 생명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명을 가진 자와 함께 할 때도 주님이 생명을 지켜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김포한신교회를 지켜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조건으로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굳이 찾자면 우리 교회의 모든 목장이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기간에도 주님이 우리 교회를 지켜주신 이유는 흔들림 없이 선교의 사명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와서 자신들의 만족을 채우려는 성도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며 함께하려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사람들의 만족을 채워주는 넓은 길보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좁은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말씀 다지기 (함께 되새김질 하는 시간입니다.)
1. 우리가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해야 하는 두 가지는 무엇인가요?(19,20절)
2. 바울이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전하는 교훈은 세 가지는 무엇인가요?(21,22,23절)
3.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믿는 바울의 생명을 지켜주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25절)
4. 하나님이 풍랑 속에서도 바울의 생명을 지켜주는 이유는 무엇인가요?(24절)
□ 말씀 적용하기 (서로 삶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1. 우리가 코로나의 풍랑을 겪으면서 무엇을 버려서 비워야 하는 것을 깨달았나요?
2. 우리가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주님의 말씀으로 길을 찾았던 경험은 무엇이 있나요?
3. 우리가 지금까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말씀은 무엇이 있나요?
4. 우리가 붙잡고 있는 사명은 무엇이며, 또한 어떤 사명을 붙잡은 사람과 함께 하고 있나요?
유라굴로의 풍랑을 맞은 세계 경제
조용기목사 / 행 27:18~25
<서론>
오늘 저는 “유라굴로의 풍랑을 맞은 세계 경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 선생이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많이 얻어맞고 로마의 주둔군에게 끌려가서 거기에서 심문을 당하고 고생을 하다가 로마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서 율리오라는 로마의 백부장이 이끄는 죄수들과 함께 수갑에 채여서 배를 타고 가게된 것입니다. 그들의 배가 그레데 섬의 미항에 도착했을 때 바울이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그 마음 속에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이번에 출항하면은 화물도 다 잃어버리고 배도 파선할 것이고 같이 가는 사람들의 인명에도 큰 타격과 손상이 있을 것이라는 지시를 받고 그가 선주와 선장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내가 보니 이번 미항에서 출발하면 큰 손해가 날 것이다. 화물도 다 잃어버리고 배도 파선되고 생명에도 큰 지장이 있을 것이니 겨울을 미항에서 머물고 봄이 오면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선주와 선장이 “뭘 바울이 바다를 안다고 큰 소리냐? 우리는 뱃사람으로써 잔뼈가 다 굵었으니 바다는 우리가 알지 어떻게 네가 아느냐?” 그 백부장 율리오가 가만히 들어보니까 바울은 종교인이고 신앙인이지 뱃길은 모르는 사람인데 바울의 말을 들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출발합시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호는 276명의 손님을 싣고 로마를 향해서 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를 무사히 가니까 좋다고 다들 기뻐했는데, 그런데 그만 육지에서 유라굴로라는 대풍랑이 불어와서 바다를 치매 파도가 태산처럼 몰려오고 배는 도저히 방향을 잡지 못해서 그냥 파도에 밀려 나갔던 것입니다. 이틀 째 되던 날 도저히 배가 가라 앉을것 같으니까 선장과 화주들이 짐을 전부 다 바다에 풀어 버렸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은 얼마나 절망했는지 배에 기구를 다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배를 가볍게 해야 배가 침몰하지 않을 것이니까. 그런데 나흘째, 닷새, 엿새, 이레, 여드레, 아흐레, 열흘.. 계속해서 바람이 불고 폭풍우가 대작하는데 하늘에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천지가 캄캄합니다. 사람들은 다 절망했습니다. 살 희망이 다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울이 일어나서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안 떠났으면 이런 고통 안 당했을 것 아닌가. 그러나 이제는 안심하라. 왜냐하면 어제 저녁에 내가 속한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와서 말하기를 ‘바울아 네가 반드시 로마의 황제 앞에 서서 심판을 받아야 되겠고 이 배에 탄 276명의 모든 사람들은 네게 주었으니 이 배는 침몰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므로 여러분 머리털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니까 염려하지 마라.”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배가 점점 육지에 가까이 다가오는 기미가 보이니까 뱃사공들이 배를 버리고 달아나려고 닻을 내리는 척 하고서 구명보트를 내려놓고 타고 달아나려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깨닫고 율리오 백부장이 말하기를 “저 사람들이 이 배를 떠나면 여러분들이 구원을 못 받는다.” 그러니까 군인들이 그 구명보트의 줄을 끊어서 떠내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바울이 서서 여러분 14일 동안 먹지 못하고 토하고 뒹굴고 고통을 당했으니 이제는 안심하고 먹어도 좋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다 구원할 것이니까.. 그리고서 떡을 떼서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그 사람들 앞에서 먹으니까 사람들이 다 따라서 먹기 시작한 것입니다. 환난과 풍파를 당하니까 배를 지휘하는 것은 선장과 선주가 아니고 죄수인 바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말에 따라서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 먹고 난 다음에 배가 점점점.. 육지에 가까워지는 것이 물의 깊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아침이 되어 보니까 섬이 보입니다. 그 섬에 그들이 무사히 도착해서 생명을 구원했다는 기록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오늘 제가 알아보고 싶은 것은 이 세상에 경제적인 유라굴로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 치고 경제적인 위기에 처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기업의 토대가 흔들리고 경제가 곤두박질을 치고 가계가 엉망인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되었느냐.
<본론>
1. 탐욕과 욕심을 버리고 삶을 가볍게
오늘날 다가온 경제적인 유라굴로는 미국에서부터 불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국에서 왜 유라굴로의 풍랑이 불기 시작한 것입니까? 미국이 국채를 국민들과 여러 나라에 많이 팔았습니다. 국채를 팔고 나니까 그 국채를 산 개인이나 나라에 이자를 매달마다 지불해야 되는데 이자가 너무 많이 나가니까 미 재무성에서 이자를 적게 물려고 미국에 대출이자를 1%로 낮췄습니다. 여러분 이자돈 1%밖에 안 되면 공짜인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미국 정부는 그 기회에 서민들이 모두 다 내 집 갖도록 하는 정책을 세워서 담보 없이 값싼 이자로 집을 사는데 90%에서 95%까지 돈을 융자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집 없는 사람들이 담보도 없이 정부시책에 따라서 은행에서 90%에서 95%의 돈을 빌려 주니 얼씨구나 좋다고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은행의 돈을 빌려서 집을 사니 굉장히 부동산 붐이 일어나고 건축 붐이 일어나고 돈이 흥청망청 씌여지고 경기가 좋은 것 같다가 그만 경기가 시들어지기 시작하고 그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니까 집값이 떨어지는데 폭락을 해서 반값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니 은행에 1% 이자를 주고 90%에서 95%의 빚을 내어서 집을 산 사람이 은행에서 빌린 돈보다 집값이 더 떨어지거든 그러니까 집을 포기해 버립니다. 우리 집 은행에서 도로 가져가라! 그 말입니다. 은행에서 도로 받으니까 살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은행은 돈 다 빌려줬는데 돈은 안 갚지요. 집값이 폭락하자 월부금, 할부금, 이자도 안내니까 은행이 들것이 났습니다. 우리 한국 동포 한 사람의 예를 들어보면 은행의 돈을 빌려가지고서 13억짜리 집을 샀어요. 좋다고 그래서 할부금도 내고 이자도 냈는데 13억 짜리가 10억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은행에서 빌린 돈이 13억인데 집값은 10억 이하로 떨어졌으니까 도저히 이제는 할부금을 내고 이자를 낼 이유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포도 그 집을 은행에 돌려주었습니다. 가져가라! 나는 이제 못 갚겠다. 은행이 그 집을 도로 맡았으나 살 사람이 없어요. 집값이 폭락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 교포는 그 집에서 그냥 눌러 사는 것입니다. 할부금도 안내고 이자도 안내고 나 죽여라. 나 빼째라. 그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 형편이에요. 미국이.. 그러니까 은행은 돈을 빌려 주고 돈을 못 찾으니까 은행이 텅텅 비게 된 것입니다. 은행과 보험사가 부실하게 되므로 은행이나 보험사에서 만든 금융상품이 휴지가 되었어요. 은행에서 발행한 금융상품을 산 사람들이 그것도 휴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돈을 안 쓰고 소비가 위축되니까 공장이 파산하고 공장이 파산하니까 실업자가 대거로 몰려와서 정부에 보조를 받아야 먹고 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증권시장이 폭락하니까 증권을 가진 사람, 펀드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다 거지가 된 것입니다. 이런 폭풍이 미국에 불어오니까 그 여파가 중국에 일본에 한국에까지 미친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국이나 일본이나 한국이나 세계 경제국들이 모두 다 미국에 수출해서 먹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은 한국 GNP의 60%를 수출로써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이 경제가 들것이 났으니까 수입을 하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가 못 팔아먹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자동차도 못 팔아먹고 컴퓨터도 못 팔고 핸드폰도 못 팔고 거의 공장들이 가동을 하지 못하게 되고 그리고 가격이 떨어지고 직장을 잃게 되고 경제적인 한파가 우리에게도 다가온 것입니다. 엄청난 한파가 미국을 통해서 유라굴로가 불어와서 이 풍랑이 온 세계를 뒤엎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의 IMF는 뺨칠만한 것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IMF때는 공장이 망하니까 융자를 해주고 은행이 무너지니까 은행에 융자를 해주어서 버텼는데 지금은 개미떼같이 많은 사람들이 집을 포기해 버리니까 정부가 그 한사람 한 사람의 빚을 다 걸머지고 해결해야 되니까 기가 막힌 일이지요. 그래서 하루 이틀에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뭐 공장 수백 개, 은행 수십 개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수백만의 사람들의 집이 다 무너졌으니까 그 사람들 다 데리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시간이 안 걸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금년도에 유라굴로의 풍랑이 일어났으니 명년에는 해도 안보이고 달도 안보이고 별도 안보이고 캄캄한 풍랑 가운데 엄청난 고통이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온 세계에 다가오고 우리 한국도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2. 경제 폭풍을 잠재우려면
경제적인 폭풍의 유라굴로를 잠재워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경제적인 유라굴로를 잠재우고 안 빠져 죽고 살수가 있겠습니까?
제일 먼저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이런 어려움을 당할 때 왜 어려움이 당한지를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어려움을 당한 것입니까? 탐욕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기 분수대로 사람이면 사람으로 살지 마귀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이 된다고 그러니까 왜 사람이 사람으로 살지 하나님 되려고 탐욕을 가지고 하나님 뜻을 거역해서 선악과를 따먹고 반역해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쫓겨났던 것입니다. 탐욕이 원죄인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에 일어난 그 유라굴로의 경제적인 폭풍도 미국 정부와 국민들의 탐욕인 것입니다. 돈 빌려 가고 난 다음에 이자 적게 내려고 이자율을 낮춘 것 하고 사람들 담보도 없이 은행이자를 90~95%로 빌려줘서 집사게 하는 것은 탐욕 아닌 것입니까? 내가 능력이 없는데 얼씨구나 좋다고 욕심으로 다 사들이고 결국 무너진 것입니다. 분수에 뛰어넘는 욕심은 반드시 결과에 파멸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들은 원래부터 타락한 그 마음이 탐욕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 아니라 나도 탐욕에 잡힐 때가 많습니다. 구두 한 켤레 신으면 아직 안 떨어지고 좋은데 다른 사람이 멋진 구두를 신으면 “나도 저것 한번 사 신어야 되겠다.” 그래서 아직 말짱한 구두 두고서 그 구두 사 신어요. 구두 신고 얼마 안 있으니까 유행이 달라져 다른 구두가 나오면 “나 또 그 구두도 사야 되겠다.” 그러다가 나중에 구두장에 구두가 가득한 것입니다. 안 신는 구두가... 내 신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직 아깝고... 구두가 쌓이는 것이에요. 우리 여성도들 보면 옷 자기가 입던 옷 그대로 아직도 몇 년은 더 입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행에 떨어지니까 새로운 유행의 옷을 사 입습니다. 그 다음 친구들 보니까 그보다 더 나은 옷을 사 입으니까 또 그것 두고서 또 그 옷을 삽니다. 옷장을 열어보면 옷이 가득해요. “왜 이렇게 옷을 많이 옷장에 넣어? 이것 나누어주지?” “나누어 주기는 아직 너무 아깝고 내 입기는 이미 철이 늦었고...” 그렇게 옷이 쌓여가는 것입니다. 가방도 그래요. 가방도 우리 구역장들이 가지고 있던 가방 들고 다니는 사람 요사이 별로 없어요. 집도 그렇습니다. 30평짜리 집을 사가지고서 좋아서 제일 처음 박수를 치고 있다가 가만히 보니까 이웃 친구들은 40평 짜리가 있거든. “아이구 우리도 40평 사야지.” 그래서 허리를 졸라매고 애를 써서 40평을 사서 좋다고 했다가 그 다음 다른 친구 보니까 50평짜리 살고 있거든. 그래서 40평이 마음에 안 맞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50평 사려고 죽을 애를 써가지고 50평 사놓으면 그 다음에는 친구들 보니까 독립 집에서 산다 말이에요. 우리도 독립 집에서 살아.. 여보, 우리 친구는 자기 독채로 사는데 이 아파트에서 이게 무슨 생활이야? 여보 돈 좀 더 벌어. 더 벌어. 밤잠을 못자고 남편이 애를 써서 독립 집을 사 놓으면 그 다음에는 친구들이 콘도미니엄을 가지고 있다 말입니다. 우리도 콘도미니움, 우리도 콘도미니움. 욕심은 한번 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 욕심을 채우려고 하니까 스트레스에 걸리고 마음이 불만스럽고 불행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옛날 이야기에 보면 세 강도가 우리 강도질 하지 말고 새사람이 되어 살자. 약속을 하고 우리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수련하는 곳으로 가자고 새사람이 손을 잡고 가다가 길거리에 보따리가 하나 있는데 들춰 보니까 금덩어리가 들어 있거든. 좋다고 세 사람이 금덩어리를 안고서 우리 이것 나누어 가지자고. 그리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데 그만 한사람을 확 밀어 가지고서 물에 빠뜨려 버렸거든. 그 두 사람이 허허허 웃으면서 우리 둘이 나누면 이젠 우리가 더 부자가 되겠다. 저 놈은 빠져 죽었으니 되었다고 그래서 두 사람이 배에서 내려서 들을 가다가 배가 고픈데 한 집에 오두막집에 불빛이 있으니까 한 친구가 하는 말이 “내가 가서 음식을 좀 구해 올테니까 네가 여기에 기다려라!” 음식 구하러 간 동안에 물병에다가 기다리는 놈이 독을 넣었다 말입니다. 독을 넣어서 물병을 딱 세워 놓고 음식 먹을 때 그 놈 보고 마시게 하려고.. 그런데 음식을 구하러 간 그놈이 음식을 구하지 않고 부엌에 들어가서 칼을 숨겨 와서 콱 찔러 죽여 버렸습니다. 친구를... 그리고 “야 이놈아! 너는 죽을 팔자다. 금덩어리 나 혼자 찾았으니 좋다.”고 허허 웃으면서 목이 마르니까 병을 끌러가지고서 물을 마셨다 말이에요. “켁” 하고 죽어 버렸어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욕심 때문에 세 사람 다 죽고 금덩어리는 그대로 들에 버리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 결국에는 끝없는 욕심으로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고 불만족한 가운데 불행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비교가난으로 불행한 것입니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불행을 느끼지 않습니다. 가만히 제가 세계를 다녀 보니까 부자 나라에 갈수록 사람들이 웃지를 않아요. 구라파나 미국의 부자나라에 갈수록 얼굴이 대리석 같고 웃지 않아요. 그런데 인도나 방글라데시나 저 가난한 아프리카에 가면 사람들이 잘 웃어요. 너털웃음을 웃어요. 왜냐하면 부자나라에는 탐욕 때문에 긴장을 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더 돈을 벌어야지. 더 돈을 벌어야지. 더 잘살아야지 하고 애를 쓰는데 아주 없는 사람은 다 포기하고 난 다음 베짱 좋게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기대가 크면 클수록 실망이 크고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다 버리는 것이 좋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에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고 했는데 있는 바를 족한 줄 알면 행복해지는데 있는 바를 족한 줄 아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오늘날 ‘성공학’의 대가인 데일 카네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과로가 원인이 되어 죽지는 않는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다름 아닌 낭비와 번민 때문에 죽는다.” 일을 많이 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먹고 마시고 그리고 과로를 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죽는다.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합니다. 그런데 1974년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의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은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이 가장 기본적인 생활에서 벗어나면 행복지수가 쑥 올라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 소득이 많아져도 그 만큼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스털린 패러독스’라고 불리는 이 보고서 내용은 이후 사람들의 마음속에 “돈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이 많을수록 행복할 것 같은데 돈이 많을수록 더 불행해지고 더 스트레스를 받고 더 마음에 고통이 많다는 것입니다.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만 해결되고 그 다음에 더 애쓰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행복을 가지고 살더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20평 대 아파트를 사면 그 다음엔 30평 대, 40평 대를 갖고 싶은 욕심 때문에 사람들은 현재를 오히려 더 불만족스럽게 여기며 산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현재 상태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내면 낼수록 마음은 불만족해지고 불행해지고 스트레스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경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모두 다 욕심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파탄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를 휩쓰는 경제적인 유라굴로는 바로 욕심이 가져온 태풍인 것입니다. 자기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다가 경제적으로 곤두박질을 치고 망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유라굴로의 풍랑에서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까? 바울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서 14일 동안 해와 달과 별이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풍랑에 뒹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났었습니까? 14일 동안 사도바울 선생과 그 제자들과 그 배에 있는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이 가만히 있을 분입니까? 그 사람들을 전도해서 모두 다 결사적으로 기도한 것은 성경에 그 276명을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었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 배에 타고 14일 동안의 고통 가운데 이는 또한 그 사람들을 다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게 하고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하나님 살려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회개를 하게 된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면 회개하게 돼요. 평안할 때는 회개 안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회개가 돼요. 편안하면 누워서 기도하다가 좀 답답하면 앉아서 기도하고 더 답답하면 꿇어 앉아 기도하고 더 답답하면 새벽기도 나오고 더 괴로우면 기도원에 금식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통에 정비례해서 하나님께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글을 읽어 보았었습니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이 살아 계실 때 비서실장을 한 장로님인데 그가 비서실장에 되기 전에 그때 우리 한국사회가 6.25 이후로 굉장히 가난했지 않습니까? 돈을 벌겠다고 결심하고 생선 장사를 했습니다. 원산지에 가서 생선을 사서 배에 싣고 와서 서울에 와서 노점상이나 개인상점에게 나눠주는 그러한 장사를 해서 돈을 꽤 벌었어요. 톡톡히 재미가 있었습니다. 점점 돈을 버니까 주일날 교회 가서 예배 보는 것이 아깝거든 그래서 주일날 교회 가지 않고 집에서 간단히 성경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 미안합니다. 오늘 장사를 합니다.” 하고 나갔습니다. 돈이 더 벌리니까 십일조가 자꾸 많아지니까 “아이구 이것이면 생선 몇 상자를 더 사겠는데?”하고서 그래서 십일조도 안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일날도 안 나가게 되고 십일조도 안내게 되고 예수 믿는 것은 악세사리가 되고 주인은 바로 돈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생선을 싣고 배를 타고 오다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었습니다. 고통과 괴로움이 휩쓸어 왔습니다. 그는 배 밑바닥이 출렁 거리는데 뒹굴면서 엎드려서 “하나님, 생선도 내놓습니다. 돈도 내놓습니다. 다 내 놓을테니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한번만 살려주면 내가 올바르게 살겠습니다.”하고 통곡을 하고 기도를 했더니 몇 시간 기도하고 난 다음에 풍랑이 잠잠해져서 살아나고 난 다음에 다 털어 버리고 교회 주일날 열심히 나오고 십일조 바치고 장로가 되고 나중에는 한경직 목사님 비서실장까지 되었다는 기록을 읽어 본 것입니다. 풍랑 안 만났으면 지금까지도 생선장사 할련지 모릅니다. 풍랑을 만났기 때문에 변화가 된 것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유라굴로의 풍랑을 만난 이 시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이 일어나서 뭐라고 했습니까?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행 27:21)
하나님의 말씀을 일찌감치 들었으면 이러한 풍랑을 안 만날 것인데 사람의 욕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아서 풍랑을 만났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를 회개해야 돼요. 내가 소식을 들으니까 요사이 미국의 교회가 꽉꽉 들어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동안에 하도 호황 때 교회가 텅텅 비었어요. 주일날 텅텅 비고 수요일날 저녁예배는 문을 닫는 교회가 많았는데 요사이는 수요일날도 꽉 차고 주일날도 줄을 서서 교회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곽선희 목사님을 만났는데 곽선희 목사님도 “수요일날은 우리 한국에도 교회 교인들이 많이 안 왔는데 요사이는 꽉 들어찬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실직자가 많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을 찾는 수가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를 봐서는 고난당하는 것 좋지 않지 않아요. 고난당해야 교회를 찾아오지 좋으면 놀러가고 교회를 안찾아 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할 때 우리가 고난을 이길수 있는 것은 결사적으로 회개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자기 정체성을 다시 확립해야 되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과 방향이 잘못되었으면 바로 잡아야 돼요. 삶의 목적이 출세에 있고 혹은 돈에 있고 명예에 있고 지위에 있었으면 고난당하면 돈도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다 날라 가게 되었으니 그것에서 중심을 옮겨서 하나님 중심으로 들어와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소속했느냐. 돈에 소속했느냐.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세상 쾌락에 속했느냐. 하나님께 속했느냐. 다시 한번 고난당하면 그것을 생각해 볼 때가 온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마귀에 속하든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께 속하든지 둘 중에 하나밖에 없는 것을 중간상태는 없습니다. 고난당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므로 우리의 정체성이 확립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 23절에 바울은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였느니라”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어디에 속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어요. 마귀에 속하지 않았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하고 그는 돈을 섬기거나 세상을 섬기지 아니하고 내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속하고 내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돈도 벌고 하나님 섬기기 위해서 지위도 있고 명예도 있고 권세도 있어도 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목적이 되어야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이 내가 잘 먹고 잘 입고 잘살고 출세하는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가지고서 돈도 벌고 하나님을 이용해서 지위와 명예와 권세와 쾌락도 얻으려고 하면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풍랑을 만나면 삶의 목적과 방향을 올바르게 재정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의 말을 들은 그 모든 사람들은 바울선생의 말에 머리를 끄덕 거렸습니다. 배는 출렁거리고 바람은 부는데 바울이 “당신들 어디 속했소?” “나는 하나님께 속했소.”“당신들은 어디 속했소?”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그들은 불안과 공포와 좌절과 절망에 떨었습니다. 바울만 떨지 않았지 다 떨었어요. 왜냐하면 천지와 만물을 지은 하나님께 속한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면 살고 하나님의 뜻이면 죽어도 천당 가니까 두렵지 않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어지면 자기도 세상도 다 날아가 버리고 마는 것이니까 좌절과 절망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에 소속해 있는 것을 알아야 되고 누구를 섬기는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우리가 하나님의 중심에 서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지요. 하나님을 이용해서 나를 섬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가 우상이 되어서 기도도 자기 섬기기 위해서 하고 찬송도 자기 섬기기 위해서 하고 믿음도 자기 섬기기 위해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자기의 유익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 이용하려고.. 잘못된 것을 섬깁니다. 자기를 우상화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환난을 당하면 자기라는 것이 산산조각이 나잖아요. 잘못된 섬김을 돌이켜서 하나님을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하나님 섬기기 위해서, 좋은 집을 사는 것도 하나님 모시기 위해서 지위와 명예를 얻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하나님 중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야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풍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음을 긍정적으로 가지고 희망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풍랑이 다가온다고 우리는 다 죽었다. 우리는 다 망한다. 우리는 절단이다. 이제는 희망을 잃어 버렸다. 이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이 되면 안돼요. 두 사람의 죄수가 감방에 들어가 있는데 매일같이 창살을 통해서 밖을 내다보는데 한 사람은 하늘을 쳐다보고 “아~ 태양이 반짝인다. 밤에는 별들이 아름답구나. 바람이 부니 나무가 팔랑거리고 참 아름다운 세상이구나.” 언제나 기뻐하고 즐거워했는데 다른 사람은 창살을 통해서 땅을 내다보고 “아이구 먼지가 많이 나네. 사람들이 많이 걸어 다니니까 먼지가 많이 나! 비가 오면 진흙창 아이구 땅은 진흙창 밖에 없네. 인생은 먼지투성이고 진흙창 밖에 없네. 저 발이 더러운 것 봐라. 저 구두가 다 떨어진 것 봐라! 저 헐벗은 옷을 봐라!” 전부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감옥의 임기를 마치고 두 사람이 다 출소했는데 한사람은 기다리는 가족의 품에 들어가서 새로운 직장을 얻고 즐거운 새로운 인생을 출발했는데 땅만 바라보던 사람은 부정적이고 탄식하고 원망하다가 정신병에 걸려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습니다. 똑같은 사실을 볼 때도 부정적으로 보면 절망입니다. 지금 다가오는 유라굴로의 풍랑을 볼 때 여러분 부정적으로 보면 절대로 못살아 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희망을 가지고 회개하고 주님 중심으로 서고 하나님 섬기는 생활로 들어오면서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살 수 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냐 죽음이냐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크게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므로 넉넉히 이긴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언제나 긍정적이고 밝고 맑고 환한 믿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긍정적이 되고 부정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부정적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바울에게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바울은 희망을 사람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 22절에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7장 24절로 25절에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희망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희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님이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통해서 몸 찢고 피 흘려 우리 일생의 죄악을 다 청산하고 우리를 의롭다 일러 주시고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죄로써 절망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다. 어떻게 세속적이고 세상의 악한 습관에 묶이고 부패한 사람도 예수님의 보혈이 십자가에서 다 마음을 씻어 주시고 몸을 씻어 주시고 마음도 새롭게 하고 몸도 새롭게 하고 새로운 영인 성령을 주셔서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어떠한 술주정뱅이에도 희망이 있고 어떠한 아편중독자에게도 희망이 있고 어떠한 도둑놈이라도 희망이 있고 어떠한 방탕자라도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세속과 마귀를 멸하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병든 사람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절망적인 병이 들어도 희망이 있어요. 오늘 우리가 교회소식지에 나온 간증 봤지요? 78살 먹은 할머니가 대변을 보는데 자꾸 피가 나오고 피가 섞여 나오는데 자녀들이 걱정할까 싶어서 숨겨 놓았다가 나중에 피가 너무 나오니까 친정에 온 딸에게 들켰어요. 딸이 놀래가지고서 오빠들하고 어머니를 병원에 데리고 가서 조사를 하니까 항문이 암 3기가 되었어요. 그래서 의사가 가족들 보고서 “나이도 많으시고 수술해도 못살아난다. 그대로 두시면 한 3개월 조금 살다가 세상 뜨실 것이다.”고 그러더랍니다. 그런데 어머니에게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 딸들이 어머니를 데리고 우리 예배시간 이 4부 예배에 왔어요. 와서 어머니 설교나 듣고 위로 받으라고.. 그런데 제가 설교하고 병자위해 기도 다하고 그 다음에 앉아서 헌금을 거두고 난 다음에 축도하기 전에 나오더니 “오늘 여기에 항문에 종기가 난 사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말은 그 딸들이 그 어머니를 보고 암이라고 말하면 어머니가 낙심할까 싶어서 “어머니 항문에 혹이 났어요. 종기가 났어요. 그냥 있으면 났는다고 그럽디다.” 그렇게 거짓말을 했는데 “여기 항문에 혹이 난 사람 종기가 난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제가 하더랍니다 그날.. 그러니까 그 어머니가 “할렐루야~”하고 일어나가지고서 즐거워했는데 그 다음 병원에 데려가니까 “아 충분히 수술해서 고칠 수가 있게 쪼그라 들었다.” 그래서 수술하고 깨끗이 나아 버렸었어요. 어떠한 절망적인 병에 걸려도 희망이 있습니다. 좌절하고 절망해 버리면 죽지만 하나님은 할 수 없는 것이 없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일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희망이 있으니까 희망을 버리면 안됩니다. 희망을 향해서 나가면 하나님의 기적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빚쟁이에 쪼달리더라도 자살하면 안돼요. 요사이 탤런트들이 고통을 당하고 자살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알면 자살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께서 같이 하신 것입니다. 주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시련과 환난이 되어도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에 보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계신 이상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어 주시므로 절대로 환경을 보고 낙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죽을 때도 낙심할 필요가 없어요.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외쳤는데 주님이 죽었으나 사흘 만에 부활했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생을 얻은 사람들은 죽음조차도 낙심할 것 없는 것은 죽음의 터널을 통하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절대로 희망을 가져야지 이 어려운 때 희망을 포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평상심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야단법석을 하고 당황을 하고 탄식을 하고 좌절하고 절망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그 모든 사람이 열나흘 동안 굶었잖아요. 이제는 평상심으로 돌아가서 밥먹고 건강을 유지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 33절로 36절에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어야 돼요. 환난과 고난당한다고 안 먹으면 죽어요. 평상심대로 먹고 마시고 잠자고 그래야 환난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당한다고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고 잠도 안자고 날뛰면 환난이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태도가 그를 죽이고 마는 것입니다. 평상심이 있어야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그리고 난 다음에 환난을 이기기 위해서는 뭉쳐야 돼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이 어려울 때 뭉쳐야 돼요. 따로따로 놀면 죽어요. 어떤 아버지가 세상을 뜨기 전에 임종에 모인 아들 세 사람을 불러 놓고 난 다음 막대기 하나를 각자 주면서 한번 꺾어 보라고 했었습니다. 맏이가 철컥 꺾으니까 둘째도 철컥, 셋째도 철컥 꺾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버지가 막대기 세 개를 합쳐가지고서 맏이보고 꺾으라고 했습니다. 안 꺾이거든.. 둘째보고 꺾으라고 했는데 안 꺾이거든. 셋째도 못 꺾거든. 그러더니 아버지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너희 한 사람이 나가면 꺾인다. 세 사람이 뭉치면 세상에서 너희를 꺽을 자가 없다. 내가 죽으면서 너희에게 다른 것은 나누어 주지 못했지만 이 유언을 남길까 하니 꼭 형제간에 하나가 되어 살아라. 그러면 너희를 꺾을 자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전도서 4장 12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보십시오. 어려움을 당할 때 합쳐야 돼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3절로 14절에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화목하고 격려하고 붙들어 주어서 하나가 되어야지 흩어지면 죽는 것입니다. 회사가 살려면 사원이 일치단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회사가 부도직전인데 사주하고 노조들이 합쳐서 머리띠를 메고서 싸우면 망하지요. 미국의 GM(제너럴모터스)자동차 회사가 그렇습니다. 몇 만 명의 고용원들이 있는데 정부의 지금 구제 금융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부에서 국회에서 요구하는 것은 노조들 월급 깎아라 그러면 구제 금융을 주겠다. 노조가 우리는 임금 못 깎겠다. 옛날대로 받아야 되겠다. 그러니까 상원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그러면 너희들 고생해 봐야 된다고 구제금융 못준다 하고 탕하고 부결해 버렸습니다. GM은 얼마 있지 않아서 문 닫게 돼요. 문 닫으면 몇 만 명의 직원들이 다 직장을 잃고 길거리에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노사가 하나가 되고 일치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0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보십시오. 어려울 때는 말도 같은 말을 하고 마음도 같은 마음 가지고 뜻도 같이 하는 것이다. 합쳐야 되는 것입니다. 합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우리 아버님이 우리 어릴 때 늘 해주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가 졸탁동시(?啄同時)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한자어라 졸탁동시(?啄同時)가 뭐냐면 암탉이 병아리가 알을 품고 있다가 알을 품고 난 후 알이 나오게 되면 귀를 딱 기울이고 있으면 톡톡톡 하고 병아리가 알 안에서 찍습니다. 찍는 소리가 들리면 어미가 바깥에서 콱콱콱 찍어서 병아리가 깨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에서 톡톡톡 하면 밖에서 콱콱콱 찍어서 껍질을 벗겨 새끼가 태어난다. 졸탁동시라고 그렇게 아버님이 늘 말씀하시면서 서로 뜻이 맞아야 일이 되지 뜻이 안 맞으면 안 된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여러분 오늘날 이 어려운 시대에 살아나기 위해서는 대게 회사에 큰 회사나 적은 회사나 회사주나 노조원들이 마음이 합쳐야 돼요. 가정만 마음이 합치는 것이 아니라 회사에서도 마음을 합쳐서 단결하면 살아나갈 수 있어요. 허리띠를 묶고 새로 출발하는 기분으로 서면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론이 일치하고 정치가 안정돼야 돼요. 나라가 갈라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국민들이 하나가 되어야 돼요. 옛날에 IMF때 우리 국민 전체가 합쳐서 금과 은을 다 내놓지 않습니까? 농장에 있는 금과 은을 다 내놓고 합심해서 나라를 위해서 힘쓰니까 IMF를 거뜬히 이겨내지 않았습니까? 이 어려울 때 국론이 일치 되어야 돼요. 그러나 요사이 국회 보면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은 이렇게 죽을 고생을 하는데 나 몰라라 자기끼리 놉니다. 국회 정치하는 사람들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지 자기끼리 놀고 자기끼리 잔치하고 백성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국민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정쟁만 하는 이런 국회가 있으면 나라가 망하지요. 지금 여당과 야당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가 되어서 국민을 살려야죠.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더 어려운 고난을 국민들이 당해야 정신을 차리겠습니까? 국민들을 대변하는 그들이 있는 힘을 다해서 국론을 통일하고 나라를 살리고 국민들을 고통에서 건지려고 애를 써야지요. 우리 국민들이 질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정신차리도록..
아모스 5장 24절에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우리 정치인들이 되어야 우리 국민들이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는 국민에게 분명한 희망과 꿈을 제시해야 국민이 안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국민에게 분명한 희망과 꿈을 줘야 돼요. 이 나라가 어디를 가는지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희망이 있는지 꿈이 있는지 알려줘야 되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앞에 서서 국민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어서 인도하는 것이지 지도자가 왔다 갔다 하고 마음이 분명하지 못하면 국민들이 누구를 쳐다보고 따라가는 것입니까? 목자가 지팡이를 들고 앞을 인도하면 양들이 다 목자를 보고 따라가는데 목자가 우왕좌왕 하면 양들이 흩어지고 이리가 와서 양을 물고 찢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분명한 희망과 꿈을 제시해야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욥기 11장 18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히 쉬리라”
희망이 있어야 안전하고 두루 살펴보아서 평안하게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폭풍우를 당하고 경제적인 고통에 빠졌을지라도 지도자가 우리에게 꿈을 심게 해주고 평안을 주면 우리는 능히 이겨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대통령이 확실한 꿈과 비젼을 국민에게 줄 수 있도록 여러분 매일 기도할 때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가 다 같이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유라굴로의 풍랑이 우리에게 큰 재앙으로 오는 것 같지만 우리가 잘만 대처하면 이것이 오히려 큰 축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쓸데없는 것을 다 배에서 던져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호화 사치하는 것 다 배에서 던져 버려야 돼요. 우리는 가장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헛된 욕심과 탐심을 가지고 잔뜩 모아놓은 필요 없는 것은 다 청산해 버리고 꼭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살 수 있는 그것만 챙겨 가지고서 어려움을 이겨야지 내가 가진 것 다 끌어안고 이 어려운 난국을 격파하려고 하면은 배가 뒤집어지고 가정이 뒤집어가지고 빼져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림을 줄여야 돼요. 내 생활을 줄여야 돼요. 내 형편을 줄여야 돼요. 필요 없는 것은 전부 다 청산해 버려야 돼요. 그리고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살아야 돼요. 그러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내 인생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올바르게 정해야 돼요.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돌아서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 주야로 기도하고 그 다음 마음을 긍정적으로 적극적인 희망을 가지고서 희망을 말하고 희망을 꿈꾸고 희망을 믿고 희망을 선포해야 돼요. 이때 절망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합쳐야 돼요. 가정이 합쳐야 되고 회사가 합쳐야 되고 국민이 단결해야 돼요. 그리고 국민을 이끄는 지도자가 분명한 꿈을 가지고 앞장서서 나가면 역경이 오히려 좋은 찬스가 되고 어려움이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유라굴로의 풍랑으로 다 침몰할 수도 있고 살아남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살아남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또다시 재출발해서 새로운 인생을 건설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바로 이런 것들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안 믿는 사람보다 앞장서서 우리 불요불급한 것은 다~ 짐을 풀어 버리십시다. 우리는 단순하게 사십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호화 사치를 다 중지하고 단촐하게 인생을 살면 가벼워져서 우리 배가 출렁거리지도 무너지지 않고 뒤엎어지지 않습니다. 더욱 옛날보다 더 기도 많이 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고 회개하고 우리 신앙을 똑바로 서면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를 돌보시는데 겁날 것 없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서고 하나님 섬기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어떠한 환난에도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을 단결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꿈과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꿈을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 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나아진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말할 필요 없이 단결해서 서로 ‘사랑과 행복’을 나누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구역이 단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구역원들을 서로 도와주면서 살아야 되고 교회가 단결해서 교회 어려운 사람들을 협조해 주고 도와주고 이웃을 이끌어주는 그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밝고 맑고 환한 날이 쉬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오늘 미증유의 고통을 우리가 당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유라굴로를 만나서 우리 개인가정이나 회사나 우리 사회가 뒤엎어질 위험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이 풍랑이 언제 끝날지 모르게 계속하는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안 보이는 풍랑입니다. 이 풍랑을 그치고 살아남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이 성경에 바울이 체험한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므로 우리도 그를 본 따서 우리 인생을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쓸데없는 잡동사니는 전부 배 밖으로 던져버리게 도와 주시옵시고 배를 가볍게 하여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인생의 배를 가볍게 해서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에게 성령으로 은혜를 주셔서 우리 잘못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중심에 서고 하나님 섬기는 삶으로 확실히 돌아오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부정적으로 파괴적인 말을 하고 생각한 것을 회개하고 언제나 희망적이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인생을 대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단결해서 하나가 되어 나가게 도와주시옵소서. 힘을 합쳐서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면 천을 뚫고 둘이면 만을 쫓는다고 했었습니다. 합쳐서 나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난국을 격파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죽음의 풍랑을 극복한 사람들
행 27장 18~25절 / 피종진목사
사도행전 27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배에는 네 종류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권력을 가진 백부장과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선주와 선장, 자유를 박탈당하고 손발이 묶인 채로 로마로 호송되어 가는 죄수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이 타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도 이와 같이 네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배가 풍랑을 만난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배는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되어 죽음의 직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배 안에 타고 있는 276명이 한 사람도 죽지 않고 그레데 섬의 미항이라는 곳에 정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들이 죽음의 풍랑을 헤치고 극복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기도하는 사람이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바울이 이 배에 타고 있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 배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은 여러분 곁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다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죽음의 풍랑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어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담대히 말하여 그들을 안심시켰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2~25)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모든 일을 기도로 계획했고, 기도로 진행했으며, 기도로 착수하여 결론을 맺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7:9에 보면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생활 속에서 애경사나 외식, 여가생활 보다 ‘기도하는 시간, 기도하는 모임, 기도하는 자리’에 최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존 낙스는 ‘내가 생명을 사랑하거든 기도하기를 즐거워하라’고 말했고, 로마의 시인 로마디우스는 ‘매일의 기도가 매일의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말했습니다. 항상 인생에는 두려움이 도전해옵니다. 그러나 매일의 기도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두려움을 내어 쫓아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로버트 홀리는 ‘기도는 최선의 치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치료의 방법 중에 최선의 방법은 기도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둘째, 필요 없는 모든 짐을 다 내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행 27:18,19) 풍랑으로 인해 죽게 되었는데 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필요 없는 모든 짐을 다 내어버렸던 것입니다. 생명보다 가치가 없는 필요 없는 것은 버릴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시편 55:22에 보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말씀했고, 마태복음 11:28에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짐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수고가 없는 인생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죄의 짐, 고통의 짐, 질병의 짐’을 지고 시달리는 피곤한 인생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 모든 짐을 맡길 때 죽음의 풍랑을 극복할 수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불타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4절에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에게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라고 말했다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을 풍랑 가운데서 구원하신 이유가 바로 사도 바울로 하여금 가이사, 곧 로마 황제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에게 아직 사명이 불타는 사명감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일행을 죽음의 풍랑 가운데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자가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하기까지 그들이 당하는 모든 위기와 환난 가운데서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해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고백하였던 사도 바울처럼 생명을 걸고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죽음의 풍랑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담대하고 당당하게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죽음의 풍랑을 극복한 사도 바울은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는 자가 되었습니다(행 28:31).
사랑하는 여러분! 항상 깨어 기도하며, 죄 짐을 다 내어버리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불타는 사명감을 가지고 충성하는 자가 되어 죽음의 풍랑이 엄습해온다 할지라도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희망의 노래를 부르노라
행 27장 18~26절 / 박근호목사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일까'를 가늠하는 것을 가리켜 '가치관'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가치관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 가치관에 있어서 피차에 동질적인 면도 느끼고 이질적인 면도 느끼며 살아갑니다. 인생의 여러 모임들은 대개가 이 가치관에 의해서 형성되어집니다. 즉 가치관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회를 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점에서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필요성, 하나님 나라의 소중함, 삶의 질의 고양 등등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모이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보물처럼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경입니다. 그래서 매년 12월 둘째주일인 오늘을 성서주일로 지키면서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하고 복된 은총의 선물인지를 다시 한번 상기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귀하고 중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경이 우리 인생들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으로 소개하는 것이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하는 인생의 필수품이라고 강조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리스도인에게는 무엇보다도 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세상에는 이 세 가지의 가짜가 제일 많다는 겁니다. 진짜 믿음, 진짜 소망, 진짜 사랑보다 가짜 믿음, 가짜 소망, 가짜 사랑이 더 많다는 겁니다. 유사품이 많다는 것은 그 오리지날이 좋다는 얘기입니다. 명품에 대한 이미테이션이 등장하는 것은 명품이 좋긴 좋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믿음, 소망, 사랑,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정말 좋은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위조품이 적지않습니다. 우리 시찰 안에 소망교회라는 교회가 10여년 전부터 진평동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근래 그쪽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우리 시찰 소속의 두 교회가 개척을 해서 새롭게 들어섰는데 하나는 새소망교회이고 또 하나는 참소망교회입니다. 그러니까 한 500미터 반경에 우리 시찰 소속의 세 교회, 소망교회, 새소망교회, 참소망교회가 있는 겁니다.
왜 자꾸 이렇게 덧말이 붙여지는 겁니까? 소망이면 되었지 새소망은 뭐고 또 참소망은 뭡니까? 성경은 산소망이라는 표현도 쓰고 있습니다. 그건 진정한 소망을 찾는다는 것이, 또 생기있는 소망을 갖는다는 것이 그리 쉽고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겠지요 그럼 진정한 소망, 살아있는 소망이 무엇일까요?...
요즈음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매스컴의 보도를 보면 자살에 대한 보도가 심심치않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황망한 일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태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점차 희망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군가가 희망을 '그리스도인의 깃발'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희망하는 사람이요 희망을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희망은 주어진 삶에 대한 애착에서 나오는 샘물같은 것이며 하나님 안에서만이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피어나는 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은 곧 믿음의 근거와 사랑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희망이란 어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냈을 때 생기는 희열이요 동시에 그런 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희망을 노래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이 고해와 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고해와 같은 세상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어떻게 희망의 노래를 불러야할지를 예시해줍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우리 인생에 항상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노래했던 바로 그 바울사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지금 로마로 끌려가는 포로의 신세가 되어 지중해 한 가운데를 항해하는 배 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바로 그 무시무시한 유라굴로 광풍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0절 말씀을 보면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고 했습니다. 지금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 가망이 없는 그런 절박한 지경에 처해 있는 겁니다. 한 마디로 절망의 상황입니다. '보이지 아니하고 다 없어졌다'고 하는 그 표현이 바로 저들의 현실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낮에 해가 보이지 않고 밤에 별이 보이지 않는 바다 한 복판의 여러날의 삶이 어떠했겠습니까? 게다가 풍랑은 잦아들 줄을 모르고 여전히 휘몰아쳐와 배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공동번역으로 옮기면 '살아 돌아갈 희망을 아주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저들이 이런 절망의 자리에 떨어진 과정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사실 처음부터 이 항해를 원칠 않았습니다. 무모한 항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절에 보면 항해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미항에서 겨울을 나고 석달 후에 출항할 것을 제안합니다. 지중해의 9월, 10월, 11월은 풍랑이 심해서 항해에 위험한 기간이었기에 이 3개월 동안은 바람으로 가는 범선의 지중해 항해가 중단됩니다. 이미 바울은 지중해 상에서 세 번이나 파선의 경험을 갖고 있었기에 항해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선장과 선주는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나자며 항해를 주장합니다.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의 하나로 서북풍을 막아 무척 온화하고 따스한 항구였습니다. 그곳에 비하면 미항은 겨울 지내기에 여러모로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겨울을 지내기에 편한 항구 뵈닉스로 가기를 강행했던 것입니다. 11절에서 보듯이 로마 백부장은 바울보다도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서는 그들의 말을 따라 항해를 계속합니다. 그가 볼 땐 바울보다는 뱃사람들이 전문가라고 본 것입니다. 게다가 남풍까지 순하게 불자 사람들은 이제 됐다 생각하고 닻을 올려 항해를 시작합니다. 사실 일기만 좋으면 하룻만에 뵈닉스 항구로 옮겨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되었습니까? 빈약한 촌락인 미항보다 번화하고 따스한 뵈닉스에서 겨울을 지내기를 원해서 미항을 떠났던 저들은 얼마 못가 풍랑을 만나 보름동안이나 광풍에 시달리며 거의 초죽음이 되는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일시적 고통을 피하려다가 돌이키기 어려운 큰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지중해 최대의 폭풍이 유라굴로, '동풍과 북풍이 만나 일으키는 미친 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인간적인 안위와 즐거움을 앞세우고 나아가는 인생길에 이런 유라굴로가 들이닥칩니다. 좀 더 편하고, 좀 더 안락하고, 좀 더 즐길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그 길목에 유라굴로가 기다리는 겁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니느웨로 가라는 사명을 저버리고 땅끝 다시스로 내빼는 요나에게도 광풍이 불지 않았습니까?
내 인생에 광풍이 불어올 때에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사명의 길을 저버리고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의 안위와 즐거움을 앞세우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나 보십시오. 그 광풍 앞에 저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저들이 광풍 속에서 대처한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일단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저들은 배가 가는대로 흘러갑니다. 왜냐하면 어설프게 대처했다가는 스르디스라는 모래 수렁에 말려들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광풍이 불어오면 섣불리 행동할 게 아니라 생각에 잠겨야 합니다. 전후좌우를 잘 살펴 사태의 추이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 다음 저들이 한 행동은 배에 있는 짐들을 바다에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금방 버린 게 아니었습니다. 18절에 보면 저들은 하루를 버티며 애를 씁니다. 그러다 이튿날 드디어 짐들을 바다에 풀어버립니다.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난 사흘째되는 날에는 배의 기구들까지도 저들 손으로 다 내어버립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이 배에 오른 276명, 저들은 나름대로 자기의 꿈을 가지고 이 배에 올랐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포로들도 많았지만 저들에게도 나름의 꿈과 희망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꿈이 여지없이 사라집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잠언기자는 '사람이 그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부자가 창고에 잔뜩 쌓아놓고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하지만 '그 날이 하루밖에 안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 장로 또한 먼곳에 가서 장사하여 이익을 남기겠다고 하는 자에게 '당신 생명이 아침 안개 같은 것임을 잊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저들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구원의 여망이 사라졌습니다. 얼마나 잘 살아보려고 몸부림쳤습니까? 얼마나 뵈닉스에서의 달콤한 꿈을 꾸었겠습니까? 그 배 안에 가득 실린 물건들이 의미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저들은 이 배에 저들의 희망을 싣고 항해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희망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희망은 한 순간에 다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참소망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 바울을 통해서 그 절망의 자리에 새로운 희망의 노래를 부르게 하십니다. 바울은 살아날 가망이 없어 절망한 이들에게 '이제는 안심하라'며 용기를 북돋웁니다. 입맛을 잃은 저들에게 먹고 힘을 낼 것을 종용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풍랑 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그 위기를 헤쳐가는 자가 누구였습니까? 바다를 집삼고 사는 선주와 선장과 사공들도 넋을 잃었고, 용맹을 자랑하는 로마 친위대도 맥을 못추는 광풍 속에서 오직 바울만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 풍랑 속에서도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했고 기도 중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그는 그 요란한 바람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바울아, 무서워하지 말라! 너는 반드시 살아서 가이사 앞에 설 것이다...' 바울은 바로 그 절망의 밤, 절망의 자리에서 희망의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의 행적이 기록된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은 밤에 주님을 만난 경험이 네 번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소아시아를 향한 전도의 문이 막혀 드로아 항구에 이르렀을 때 거기서 '이곳으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손짓하는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두 번째는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다 핍박을 받을 때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는 계시를 받습니다. 세 번째는 '환난과 결박이 나를 기다린다 하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며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 감옥에 갇혔을 때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할라"는 주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바로 이 지중해 풍랑 속에서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이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들을 다 네게 주셨다"는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절망 속에, 어둠 속에 처해 있다고 여겨질 때가 있습니까? 그런 처지에서 우리가 희망의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는 비결은 바로 기도에 있댜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나님과 연결된 줄을 붙들고 사는 자에게는 구원의 여망이 있습니다.
희망은 그 자신의 바람이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고자 하는 것들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희망이 무너져내리고 사라져버리는 그 자리에 진정한 희망이 들어섬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때 체험되는 새로운 감격을 사도 바울처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길에도 유라굴로와 같은 광풍이 휘몰아칠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 추스릴 수 없는, 어떻게 대처할 수도 없는 난감한 그런 현실의 한가운데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속수무책, 그냥 바람에 밀려갈 뿐입니다. 사공들처럼 끌어올리고 줄을 가지고 둘러 감고 애를 써도 어쩔 도리가 없는 그런 인생의 구비가 있습니다.
그럴 때 바울처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희망가를 부르게 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런 고난 속에서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신앙의 세계를 체험하게 하시고 당신을 알게 하시고 새로운 믿음의 시작을 잉태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올바른 가치관을 세워가십니다. 그래서 생명과 무관한 것들을 놓아버리게 하십니다. 무엇이 진정 소중한 것인지를 깨우쳐 주십니다. 사공들처럼 짐들을 바다에 풀어버리고 배의 기구들조차도 다 버립니다. 38절에서 보듯이 식량까지도 배불리 먹은 후에 다 바다에 내던집니다. 그리고 40절 이하에서 보듯이 닻을 끊어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저들은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들이 있고 또 인간의 목숨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러고 보니 바울은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다시금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은 바로 다시 불리워진 희망의 노래 아니었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형편, 어떤 처지에서도 절망하거나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대림절은 바로 그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 인생의 풍랑을 잔잔케하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희망하는 절기입니다.
먼저 인생이 파선하는 삶, 신앙이 파선하는 삶을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 번씩이나 파선의 경험이 있는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 1:19절에서 신앙의 파선 원인을 '선한 양심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욕심이 인생에 풍랑을 자초한다는 겁니다.
인생이 순항하기를 원하십니까? 무엇보다 욕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욕심 대신 선한 양심을 버리면 풍랑을 맞는 겁니다. 그리고 어떠한 이유에서건 인생의 태풍이 닥쳐온다할지라도 당황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문제를 풀어가십시다.
오늘 이 풍랑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44절 말씀에 보면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20절과 44절은 너무도 상반된 현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진 상태'에서 '모두가 구원을 얻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절망하며 삽니까? 왜 우리가 좌절하며 삽니까?... 희망의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오시는 주님은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광풍을 지나며 살아남은 사람들
행 27장 18~25절 / 김우생목사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온 사람들의 고백이나, 또는 일반적으로 남긴 문언을 통해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보게 되면 광풍을 만나지 아니한 인생은 거의 없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신문에 특별 기고를 하는 앤 랜더스라는 사람은 모든 인간에게 가장 적절한 한마디 충고를 하라는 부탁을 받는다면 다음과 같이 충고하겠다고 했습니다. 「환난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한 부분으로 환난을 기대하라! 환난이 올 때 머리를 똑바로 들고 환난을 바라보라. 그리고 말하라. 나는 너보다 크리라! 너는 나를 패배시킬 수 없다.」
사도 바울의 생애를 볼 때 그는 다메섹 도상의 사건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환난을 경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므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공모하여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그를 담아 성에서 달아내려 피신시킨 일도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번의 여행에 강, 강도, 동족, 이방인, 시내, 광야, 바다, 거짓형제중의 위험 등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온갖 위험이란 위험은 다 당한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수고하며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는 환난을 당하였습니다(고후 11: 23-27).
사도 바울은 3차 선교 여행이 끝날 무렵 예루살렘에서 붙들려서 이스라엘에 있는 로마의 수도 또는 요새인 가이사랴에서 2년간 투옥 되었습니다. 이 때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므로 그 앞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지중해를 지나 로마로 호송되는 중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은 가이사랴에서 이탈리아 로마에까지 이르는 뱃길, 즉 지중해를 지나야 하는 여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백부장에게 맡겨진 사슬에 매인 죄수였습니다. 로마행 배는 그레데 섬의 미항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미항이 겨울을 지나기에 불편하므로 보다 안전한 섬 뵈닉스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고 절박한 경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습니다. 그 배는 출항하였고, 출항한 배는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좌초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배에 타고 있던 276명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에 생명의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광풍을 만나게 된 연유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들의 삶 속에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Ⅰ. 광풍을 만나게 된 연유
인생의 여정에서 광풍을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상이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스스로 불러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는 다른 사람의 잘못 행한 것으로 인하여 광풍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는 ‘환경의 희생’일 수가 있습니다.
1) 그들은 그릇된 충고를 따랐다(11절).
인생의 가장 비극적인 실수중의 하나는 ‘잘못된 충고’, ‘그릇된 충고’를 따라가다 광풍을 만나게 되는 경우입니다. 사실상 우리들은 많은 친구들을 통하여 충고를 받습니다. 또한 인터넷을 통하여 엄청난 충고를 받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TV, 이웃, 친척, 잘못된 상담, 무당 등을 통하여서 잘못된 충고를 받거나 그릇된 충고의 폭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다른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얻는 충고도 성서적인 진리에 근거하고 있는가를 확실히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엄청난 광풍에 휘말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에서 한 때 유명한 부흥사로 위대하게 쓰임 받았던 빌리 선데이 목사님이 자주 말하였던 실화입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저지시의 사우스 사이드 역에 내리기를 원하는 한 여인이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난생 처음 기차를 탔습니다. 그녀는 어디에서 내려야 하는지 알지 못하여서 옆에 앉아있던 한 신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 있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졸다가 기차의 엔진을 식히고 물탱크에 물을 넣기 위해 잠시 멈춘 곳을 역이라고 생각하고 여인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한참을 지나다가 실제로 그 역에 도착하였습니다. 뒤 늦게 안 남자는 기관사에게 말하여 되돌아갔지만 여인은 아이를 품에 안고 동사하고 말았습니다. 잘못된 한 충고가 그 여인과 어린 아이를 죽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한 마디의 그릇된 충고가 인생을 파탄시킬 수 있습니다. 한마디의 잘못된 충고가 가정의 파탄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파탄 원인이 그릇된 충고에 있을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바탕을 둔 권면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광풍을 만난 것입니다.
2) 그들은 어리석은 다수를 따랐다(12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울의 계시를 무시하고, 다수는 그들의 여행이 안전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보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백부장은 빈약한 충고 뿐 아니라 그릇된 정보를 가진 다수의 말을 들었습니다. 다수는 반드시 그릇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결정을 하게 될 때 결정하는 기초는 영원불변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우리의 생의 여정에서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반드시 다수의 여론이 아닙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것에 의존하여야 합니다.
성경에서 모세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모세는 400년간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인도할 때 다수는 모세가 잘못하고 있다고 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열두 정탐꾼 중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고, 두 사람만 긍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수를 따랐던 그 결과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다수가 약속의 땅에 이르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항상 다수가 옳은 것은 아닙니다. 모세의 지도력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이와 같은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다수의 공식은 단 한명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것이 다수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다수라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것은 절대적인 소수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가 필요한 유일한 다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보다는 어리석고 그릇된 정보를 가진 다수를 따르기 때문에 광풍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3) 그들은 사람의 관점에 의존하였다(12-13절).
그들은 남풍이 순하게 불 때 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한 뵈닉스를 향하여 행선하였습니다. 인간의 견지에서 볼 때 푸른 하늘, 순풍, 고요한 바다는 배를 띠우고 항해하기에 적합한 날씨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때가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 것을 알고 저희를 권하였으나 그들은 듣지 아니하였습니다(9절).
사탄은 잠재하고 있는 멸망을 위장시킵니다. 보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눈멀게 합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인간의 관점을 왜곡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의 죄에 대한 경고, 죄의 결과를 위장시킵니다.
개구리탕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냄비에 찬물을 붓고 개구리 한 마리를 넣어 거의 변화를 인식할 수 없을 정도의 약한 불로 데우기 시작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데워지기 시작합니다. 개구리는 전혀 변화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물이 끓기 시작하고 마침내 개구리는 개구리 탕이 되고 맙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눈으로 보이는 것은 일시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사람의 관점에 의존한다면 광풍이 불어오게 됩니다.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Ⅱ. 광풍에서 나올 수 있는 길
물결이 일어나고 번개가 번쩍이며 천둥이 몰아치는 바다 얼마나 소름이 끼치고 얼마나 두려운 바다입니까? 거기에 276명을 태운 상선이며 죄수들은 나르는 작은 배는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노도하는 대해에서 낙엽과 같았습니다. 사공들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좌초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의 생명은 무사하였습니다. 구원의 여망이 없고 소망도 좌절되었던 좌초된 배에서 사도 바울은 본문 25절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광풍 중에 인내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이 광풍을 통과할 때 도움이 되는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깨달으라(23절).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광풍 속에서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 하신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광풍이 일어날 때 사람들, 동료, 친구들은 떠날 수 있지만, 하나님은 떠나지도 버리지도 아니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광풍이 일어날 때 제일 먼저 인지하여야 할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뚜렷한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뚜렷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예배는 하나님이 함께 계셔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는 진정한 예배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2) 광풍 중에도 “하나님의 목적”을 믿으라.
하나님은 바울에게 그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것을 확신시키셨습니다. 광풍 중에도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를 통하여 우리들 각자에게 두신 목적을 이루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목적을 붙들어야 합니다. 어둡고 소망 없이 보일 때도 하나님은 살아 역사하십니다. 어떤 환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그의 목적을 이루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존하라!(25절)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광풍 중에도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견딘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씀을 믿고 죄사함의 확신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지옥에서 구원하신다는 말씀을 믿고 그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는 말씀을 믿고 그 영생을 가진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공로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우리는 천국에 갈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광풍 중에도 그 하나님을 믿고 그를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과 276명이 광풍 속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깨닫고, 그의 생애에 두었던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존하였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