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의 초대
미카 예언자는,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나오리라고 한다(제1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러 오셨다고 한다(제2독서). 엘리사벳은 자신을 찾아온 마리아를 보고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하고 외친다(복음).
제1독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5,1-4ㄱ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2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리라.
그 뒤에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리라.
3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제2독서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5-10
형제 여러분, 5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6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복음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삶에 지치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자신을 찾아온 성모 마리아께 이렇게 외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끊임없이 도전하다 그 실패에 좌절하고 맙니다. 자아는 도전하게 만듭니다. 도전하게 하려고 항상 지금 불만족스럽게 만듭니다. 만족하는 사람은 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다 지칩니다.
“열심히 살다 보니 삶이 피폐해지는 느낌이다.”, “더 잘하고 싶은데 진도가 안 나간다. 모든 일이 힘들기만 하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항상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등의 생각이 든다면 삶이 지쳤다는 증거입니다. 왜 지칠까요? 나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믿는 마음이 나를 지치게 만듭니다. 쉬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은 이성의 동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적당히 일하고 쉬며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올리버 색스의 『화성의 인류학자』란 책에 이런 사례가 나온다고 합니다. 순행성 기억 상실증 환자인 그레그에게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슬퍼할 사이도 없이 그는 이 사실을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레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리며 몇 년 동안 집에 틀어박혀 나오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만 갔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내가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해도 나를 조정하는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감정’입니다. 감정은 축적되어 나를 지배합니다. 나를 지배하는 것은 기억도, 지성도 아닙니다. 나의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 나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내가 실패했다는 기억도, 연인과 헤어졌다는 기억도 아니란 것입니다. 나의 감정입니다. 자아는 불만족의 감정을 주고 믿음은 감사와 기쁨의 기분을 줍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2001)에서 상우는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는 사운드 엔지니어로, 강릉 방송국의 PD이자 DJ로 일하는 은수를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집니다. 둘은 항상 라면을 먹는데 이는 둘의 사랑이 라면처럼 금방 끓고 라면처럼 금방 불어버리는 사랑임을 암시합니다. 은수는 이미 결혼 경력이 있는 여자이고 상우는 진지한 사랑이었습니다.
둘의 사랑이 식는 것을 느끼자 은수는 차갑게 돌아섭니다. 하지만 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며 상우는 분노합니다. 홧김에 은수가 산 새 차를 긁어버리는 유치한 행동도 합니다. 그런 그의 유일한 위로는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상우를 아껴주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십니다. 상우는 할머니의 죽음을 보며 자신의 감정에 그리 매몰될 것이 없음을 깨닫고 현실로 돌아옵니다.
이때 은수는 다시 상우가 생각이 납니다. 상우와 화해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드리라며 화분을 들고 상우를 만납니다.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하지만 상우는 할머니의 죽음도 모르는 은수와 다시 사귈 생각이 없습니다. 화분을 다시 돌려주고 헤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의 소리를 모읍니다. 그 소리 하나에도 행복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영화는 끝납니다.
영화에서 영원히 외로울 사람은 은수입니다. 감정에 치우치는 삶을 사는 여인이고, 상우는 이제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지금 있는 자연의 소리로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감사할 수 있다는 말은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바람 소리, 새소리, 맑은 공기에 감사합니다. 가진 것에 감사한다는 말은 그것을 나에게 주신 분에 게 감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감사는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창조자에 대한 믿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게 합니다. 성모님께서 “믿으신 분”이 되신 이유는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면 믿게 되고 하느님을 믿게 되면 어린아이처럼 지치는 일이 없습니다.
돈이 행복지수에 관여하지 않으면 부탄이란 작은 나라는 매우 높은 수준의 행복지수를 나타냅니다. 부탄의 4대 국왕인 지미 싱게 왕축은 “국민총행복지수가 국내총생산보다 중요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1729년에 만들어진 부탄 왕국의 법전에는 “백성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정부는 존재 이유가 없다”라고 쓰여있습니다. 부탄은 국민총행복지수(GNH)라는 부서를 따로 만들어 부탄에서 행하는 모든 정책에 실제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부탄이 말하는 GNH 행복지수는 심리적 웰빙, 건강, 시간 사용, 교육, 문화적 다양성, 굿 거버넌스, 공동체 활력도, 생태학적 다양성 및 회복력, 생활 수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 부탄은 400년 전인 150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동차와 도로는 전혀 없었고 대부분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이었습니다. 국가에 의사가 단 2명밖에 없었으며 평균수명은 38세, 개인당 국민소득은 51달러로 최빈국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탄은 국민행복지수를 국가 기본 정책으로 정한 이후 전혀 다른 나라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1인당 국민소득은 3천 달러가 못 되는 최빈국 수준이지만 국민의 삶의 질은 몰라볼 정도로 향상되었습니다. 국가에서는 실력에 따라 고등교육을 제공하며 현재 국민 기대수명은 69세입니다.
물론 현재는 TV와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못사는 나라인지 알게 되어 젊은이들은 도시로 몰리고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여 청년 실업률이 증가했으며 외국으로 젊은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가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었던 세계의 유일한 부탄도 이제 돈이 행복이라는 세상 물결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부탄처럼 행복을 위한 정책을 지금 바로 우리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나부터라도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지금 처지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정책을 펴면 됩니다. 내가 나를 믿고 도전하다 보면 실패를 거치며 나에 대한 믿음이 줄어들지만, 주님을 믿고 그 뜻을 따르다 보면 실패해도 지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나를 조종합니다. 지금 감사하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은 나를 믿는 시간이고 분명히 지쳐 쓰러질 것입니다. 우리가 지칠 수 없는 이유는 우리를 지치게 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감사로 중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삶에서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자아의 종살이를 하기 때문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세상은 공평한가요? 아니면 불공평한가요? 당연히 불공평합니다. 저의 자발적 선택 없이 삶의 시작부터 많은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국적, 성별, 부모 형제, 가정환경, 외모, 건강, 재능 등등…. 저의 선택 없이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시작부터 불공평한 삶임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과 살아가야 하는 삶의 기본 조건이라는 것만 모두 공평할 뿐입니다.
여기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것입니다. ‘내 삶에 주어진 것들을 거부하고 불평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며 나만의 삶을 만들며 살 것인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신의 삶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생의 변화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저 역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불평불만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가서 제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고, 이로써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과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불평만 하기에는 자기 삶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성모님께 주어진 일 역시 성모님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무조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불공평의 상황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모습은 우리와 너무 다릅니다. 불공평의 상황을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일이기에 기쁘게 받아들이십니다. 그 기쁨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모님은 사촌인 엘리사벳을 찾아 기쁨을 함께 나누기로 결심하고 발걸음도 바삐 유다의 땅을 향합니다. 서둘러 가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기쁨이 넘쳐서 발걸음이 가벼웠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잉태해서 무거운 몸이었기에 다리도 아프고 무척 고생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마음은 기쁘기만 합니다. 기쁨의 성령이 인도하는 발걸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엘리사벳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머니라 불릴 나이였던 엘리사벳이 앳된 동생 마리아의 방문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이 모든 기쁨이 바로 성모님의 노래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기쁨은 어디에서 시작한 것일까요? 불공평해 보이는 하느님의 일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곳에서 시작했습니다. 불평하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서 긍정적으로 바라봤기에 참 기쁨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안의 불공평을 지금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우리가 세운 목적이 그른 것이라면 언제든지 실패할 것이요, 우리가 세운 목적이 옳은 것이면 언제든지 성공할 것이다(안창호).
로히르 반 데르 베이덴,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공평의 이름으로 펼쳐지는 불공평.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역사상 가장 끔찍한 테러 공격이 일어났습니다. 이 공격으로 자그마치 3,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집단 혼란에 빠졌고, 정부는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중 하나가 희생자 가족에게 주어지는 보상금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똑같이 보상금이 주어졌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예상과 달리 보상금은 25만 불부터 최대 700만 불까지 액수가 제각각이었습니다. 죽음의 가격이 다르게 책정된다는 것이 너무 이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나이, 경력, 교육 수준, 직군, 인종 등으로 그 차이가 생겼습니다.
최고의 지위에 있는 CEO의 죽음과 아무도 알지 못하는 행려자의 죽음을 하느님께서 다르게 보실 리가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공평이라는 이름으로 불공평을 만드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세상에 만연된 불공평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0‘엘리사벳을 방문한 성모 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