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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은석씨(23)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수원지검을 찾은 것은 6월 7일. 때마침 피의자 이씨가 담당 검사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수의를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른 그는 부모를 토막살해한 흉악범이란 선입견이 무색하리만큼 앳되고 착해 보였다. 짧게 시선이 마주쳤는데 선한 눈망울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엔 초조한 빛이 역력했다.
수사중에는 피의자가 외부인과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 때문에 그에게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검사실을 나와야 했다. 대신 검사실 관계자로부터 이씨가 처음에 이송되어 올 때만 해도 담담했는데 지금은 심리적으로 굉장히 위축되어 있는 상태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검찰에서도 무척 조심스럽게 조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을 심하게 떨고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어요. 공포를 느끼는 것 같아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자각하면서 심리적으로 불안해지고 있다는 이야기죠.”
며칠 뒤, 다시 그를 만나기 위해 면회를 신청했지만 그는 친형 이외엔 모든 면회를 거부했다. 하긴 만난다고 해도 그에게 무얼 묻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 잔인한 일이다.
이씨는 중산층 가정의 명문대학생이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보면 책임감이 강하고, 모범생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등학교 석차가 2백80명 중에서 7등을 했을 만큼 공부도 잘했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2년 동안 4.5만점에 평균학점이 3.05로 우수한 편이었다. 그래서 이씨를 기억하는 대학 동기, 선·후배, 고등학교 때 담임교사, 통신동호회 회원들은 한결같이 그가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이씨는 왜 부모를 토막 살해하는 참혹한 범죄를 저지른 것일까? 그는 분명 박한상 사건처럼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인 인면수심의 살인자는 아니었다. 사건기록과 그가 컴퓨터통신에 남긴 글을 종합해 보면 사실상 ‘해체된 가정’이 낳은 희생물이었다. 이씨는 구속 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진짜 내 부모님이 맞는지 회의를 할 정도”로 부모님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자랐다고 털어놓았다.
이씨의 아버지는 해군사관학교 출신의 장교였고, 어머니는 명문 여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온 전형적인 중산층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리 화목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성격차이로 인해 부모는 이씨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각방을 썼다고 한다.
이런 부모의 갈등은 자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부부싸움을 하면 두세 달은 서로 한 공간에 살면서도 말 한마디 안 하는 부모로 인해 집안은 숨이 막힐 것 같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이씨도 당연히 말이 없고 내성적이 되어갔다.
하지만 부모는 이씨의 고통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버지는 군인이라는 직업상 한달에 한번 집에 들어오면서 아들을 본체만체했다. 그런 아버지를 기피하면 “사내놈이 왜 그러냐” “굼벵이같은 자식”이라고 쏘아붙였다. 그리고 “네가 뭘 잘 하냐? 공부나 해라, 공부도 못하면 사회에서 낙오한다” “너 같은 놈은 사회생활 못한다”는 식의 상처주는 말을 주저없이 해댔다.
더구나 아버지는 결벽증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했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반드시 옷을 털고 들어와야 했고 실내에서는 슬리퍼를 신고 생활했다고 이씨의 형은 말한다. 또한 이씨가 고3 때는 두세 시간마다 한번씩 이씨의 방에 들어가 얼마나 공부했는지를 확인했다.
한때 이씨는 부모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놀지도 않고 1년 365일 공부만 했다. 하지만 그는 단 한번도 아버지에게서 따뜻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한다.
“넌 나가 죽는게 낫겠다”
어머니는 이씨에게 더 냉소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스트레스를 이씨에게 쏟아부었다. 심지어 밥을 먹을 때도 늦게 먹는다고 야단을 쳐 입안에 밥을 가득 집어넣고 화장실에 가서 토하기도 했다. “싹수가 노랗다”거나 “나가 죽는 게 낫겠다” “차라리 나가 버려라”는 말은 그래도 나았다. 툭하면 습관처럼 내뱉는 “내가 누구 때문에 이혼도 못하고 이렇게 사는지 아느냐. 다 너희 때문이다”는 말은 이씨 형제를 절망스럽게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이씨가 점점 자신감을 상실해가는 것은 당연했다.
키도 작은데다(162cm) 자신감을 상실하고 내성적인 이씨가 학교에서라고 기를 펼 리가 없었다. 속칭 ‘왕따’의 대상이 되었다. 학창시절, 그는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도 없었고, 누구 하나 그에게 따뜻하게 다가서는 사람도 없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그가 만들어낸 도피처는 영화와 컴퓨터 통신. 한때 그는 컴퓨터통신의 영화동호회에서 운영진을 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얼굴을 맞대지 않으니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고, 또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 읽어준다는 것은 이씨에게 최고의 도피처였던 셈이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면서 그 순간을 즐긴다. 그때만큼은 나도 남들처럼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통신동호회 게시판에 적고 있다. 그는 영화 <킬러(원제 내추럴 본 킬러)>와 <택시 드라이버>(그의 통신아이디도 택시 드라이버다)를 가장 좋아했다. 이 영화는 정말 그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한 영화다. 서울대 신민섭 교수는 “‘피튀기는 영화’는 은석이에게 도피처였다. 영화를 보며 감정이입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이씨는 만성적인 우울증과 회피적인 성격장애에 시달렸던 것 같다. 통신에 올린 글을 보면 스스로를 ‘거리를 떠도는 악령’이라거나 ‘저는 원래 냉혈한’이라거나 ‘마음의 여유가 없는, 항상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대학에 들어가고, 컴퓨터 통신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그는 숨막힐 것 같은 가족의 공포로부터 조금은 해방되는 듯했다. 동호회 오프모임에도 나가고, 학과 행사에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통신에 올린 그의 글을 보면 ‘Are you talking to me?’라든지, ‘항상 혼자 가니까 재미없던데, 담엔 누구 같이 갈 사람 없나?’하는 식으로 사람을 그리워하는 구절도 눈에 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를 사귀지는 못했다.
그래서인지 이씨는 혼자 다니기를 좋아했다. 그가 통신에 올린 글을 보면 하루 생활이 잘 나타나 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대학로 동숭시네마텍 자료실에서 영화관련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다, 종로 레코드가게를 서성거린다. 그리고 교보문고에서 밤 9시까지 책을 뒤적인다. 교보문고가 문을 닫으면 다시 명동을 헤매다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그러고도 바로 집에 들어가지 않고 동네 공원을 어슬렁거리다 밤12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간다. 그에게 집은 그만큼 고통스런 공간이었다.
통신동호회 생활로 잠시 활기를 찾는 듯했던 이씨는 군입대를 하면서 다시 철저한 소외를 느껴야 했다. 3년간 단 한번도 면회를 오지 않는 부모, 그나마 의사소통을 해온 통신동호회와의 단절은 그를 다시 처음의 상태로 만들었다. 냉랭한 집안 분위기 역시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이씨는 제대 후 다니던 산업공학과에 복학하지 않고 영문과로 편입시험을 준비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가 편입시험을 준비하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의 형도 경찰서에서 그를 만나기 전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
학교에 복학하지 않는 이씨의 모습은 아버지에게 당연히 시빗거리였다. “너같은 놈은 사회에 적응할 수 없어.” 그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사무쳤다. 거기다 형마저 아버지와 크게 싸우고 집을 나가 독립을 선언했다. 5월 11일이었다.
형을 지독히도 편애했던 어머니는 형이 나간 것이 마치 이씨의 잘못인 것처럼 크게 화를 냈다. 그날 그는 ‘이젠 끝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사건이 나기 하루 전에도 아버지는 이씨에게 “너같은 놈이 무얼할 수 있겠냐”고 했다. 반항하며 부모 말을 듣지 않는 형에게 관대한 부모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한 번도 부모의 말을 거스른 적이 없는데 칭찬은커녕 제대로 된 관심마저 받을 수 없었던 반면 반항하는 형에게는 자상했고 사랑을 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5월 21일. 이씨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집에 있던 양주를 꺼내 마신 그는 새벽 5시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컴퓨터책상 밑에 있던 망치를 꺼내들고 어머니가 자는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4시간 후 다시 아버지가 자는 방으로 들어갔다.
“화장실에 갔는데 거울에 비친 피범벅이 된 제 모습을 보았어요. 그런데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요.” 이은석은 경찰조사에서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반항하며 학대사실을 따져 물었을 때 어머니가 만약 ‘미안하다’는 한마디만 했다면 그동안의 모든 일들을 잊었을 거라고 진술했다.
사건 발생 후 한동안 형을 만나기를 거부했던 이씨는 형을 본 후에야 비로소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후회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형도 “동생이 사형만 면한다면 평생 뒷바라지를 하겠다, 친구가 되겠다”고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 하지만 이씨가 즐겨보았던 영화들은 거기에서 상황이 끝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경기도 과천에서 일어난 부모 토막살인사건은 그 잔혹함으로 세상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사건 발생 후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은석의 형이 분노나 슬픔 등을 표출하지 않고 단지 “동생을 이해한다”고 대답해 사람들을 더욱 의아하게 했다. 이은석은 존속살해 및 사체유기 혐의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지난 7월21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수시로 상처주는 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