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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142. [역경의 열매] 김창준 (1-18) 미국까지 건너온 세월호 悲報… 애통 넘어 분노가
세월호 침몰 사고 충격이 너무나 크다. 시간이 지날수록 들려오는 얘기들은 창피하고 분통이 터진다. 세계 경제대국이라고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자연재해도 아닌 인재로 발생한 이런 엄청난 비극을 믿을 수가 없다. 구조 과정에서 드러난 한국사회의 갖가지 적폐들을 보노라면 분노가 가시지 않는다.
이 사고의 원인을 깊이 캐고 들어가면 결국엔 탐욕에 그 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크고 작은 탐욕이 쌓이고 몇몇 사람들의 탐욕이 엄청난 비극으로 나타나는 이 현실에 가슴이 너무나 아프다. 매일 매일 세월호 참사의 속보를 전해 들으면서 나는 기도하고 다짐한다. '나의 여생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업을 제대로 감당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탐욕이 없게 하소서….'
반세기 넘는 미국 생활에서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하지만 나 역시 일이 잘 풀리고 기쁠 때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깜빡 잊고 살 때가 많았다. 잘나갈 때는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님을 찾는 시간도 뜸해졌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더라도 '하나님은 항상 내 곁에 계시니까'라면서 나 자신을 합리화할 때도 많았다. 그러다가 어려운 일이 닥치면 부랴부랴 하나님을 찾을 때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교만해지려 할 때마다 찬송가 150장(갈보리산 위에)의 후렴을 소리내어 부르고 또 부르곤 한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역경은 누구에게나 온다. 아무리 좋은 일만 하면서 살려고 해도 역경은 온다. 나도 역경의 터널을 건넜다. 그런 가운데 나름대로 역경을 극복하는 비법을 터득했다. 키워드는 '내일'과 '희망'이다. '내일에 희망을 걸고 살자'는 신념이다.
하나님께서는 남녀노소 구별 없이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을 선물로 주셨다. 내일은 오늘의 연장이 아니다.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일 나에게 어떤 기적을 베풀어주실지 모르는데 섣불리 낙심하거나 좌절해서야 되겠는가. 예기치 못한 역경이 닥쳐도 굳은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매달리면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분명하게 약속하셨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세월호 참사로 희생자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심정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헤아리기 힘들 것이다. 고난 중에 있는 이들을 함께 보듬고 아파해주는 일이 너무나도 필요한 때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에게 반드시 용기와 새 힘을 불어넣어 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내일'과 '희망'을 선물해주자.
나 역시 삶의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역경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다. 미국 유학을 와서 고학 끝에 미 주류사회에서 기업을 이끌고, 시의원과 시장을 거쳐 연방하원의원을 지낸 한국인으로는 내가 유일하다. 지난 세월 축적된 경험을 살려 조국 대한민국에 도움이 되고 싶다. 아울러 '역경의 열매' 코너를 통해 내 삶 속에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국민일보 독자와 함께 나누기를 바란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창준 (1) 미국까지 건너온 세월호 悲報… 애통 넘어 분노가
* [역결의 열매] 김창준 (2) 청운초등 시절 광복… 기쁨도 잠시 한국전쟁 발발
* [역경의 열매] 김창준 (3) 대전고 1년때 교회 첫 출석… 주일 기다림에 설레
* [역경의 열매] 김창준 (4) 젊은 날의 방황 끝에 "청교도 나라 미국으로 가자!"
* [역경의 열매] 김창준 (5) "이승만 물러나라" 4·19 직후 드디어 미국으로
* [역경의 열매] 김창준 (6) 이역만리 미국 땅의 교훈 "돈과 '백' 벗어던져라"
* [역경의 열매] 김창준 (7) 유학생 동아리 회장 선거 출마해 당당히 당선
* [역경의 열매] 김창준 (8) 황금알을 낳는 '하수처리장 건설 업체' 창업
* [역경의 열매] 김창준 (9) 나만의 경영전략 "한국적 사고방식을 버려라"
* [역경의 열매] 김창준 (10) 최초의 한국인 시의원 당선 2년 만에 시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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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김창준 (12) '도덕성 회복·긴축재정' 들고 연방하원의원 출마
* [역경의 열매] 김창준 (13) 200달러 들고 유학 온 지 32년 만에 美의회 입성
* [역경의 열매] 김창준 (14) 老母의 충고 "사람은 잘 나갈수록 몸을 낮춰야 해"
* [역경의 열매] 김창준 (15) "놀고먹는 국회의원 없는 미국 의회를 배워라"
* [역경의 열매] 김창준 (16) "이건 LA타임스가 의원님을 총으로 쏜 겁니다"
* [역경의 열매] 김창준 (17) 무릎꿇고 오만함 회개하니 '꿈의 3선 의원' 허락
* [역경의 열매] 김창준 (18) 정치도 하나님 사업…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를
◇김창준 전 의원 약력=1939년 서울 출생. 미 남가주대 토목공학 학사, 환경공학 석사, 한양대 정치학 명예박사, 미 캘리포니아주 다이아몬드바 시장, 캘리포니아주 제41지구 제103·104·105대 연방하원의원(3선), ㈔김창준정경아카데미 이사장, ㈔김창준미래한미재단 이사장, 워싱턴 한미포럼 이사장,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미 와싱톤한인교회 원로장로
***[역결의 열매] 김창준 (2) 청운초등 시절 광복… 기쁨도 잠시 한국전쟁 발발
1998년. 네 번째 하원의원 선거에서 실패한 뒤 나는 완전히 절망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무런 희망이 없다'라고 생각했다. '아, 이렇게 무너지고 마는구나.' 너무 허무했다. 그토록 애태우며 가꿔온 것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는 것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다. 억울했다. 정치판이 이기적이라고 하지만 모든 것을 계산적으로 이용당한 것 같았다. 백인 정당인 공화당에서 유일한 동양인 의원이었던 나는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민주당의 타깃이었다. 나는 당한 것이다.
빈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참을 수 없이 분하고 억울했다. 내가 거뒀던 열매는 결코 거저 얻은 게 아니었다. 모두가 안 된다고 하던 일들을, 나 자신조차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목숨 걸고 달려들어 쟁취하지 않았던가. 단돈 20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남들 자는 시간에 일하고 밤낮없이 영어를 배워서 이뤄낸 꿈이었다. 미국 역사 교과서에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으로 실렸던 성공적인 삶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게 무언가. 한순간에 모두 무너져버렸다. 나는 소리 내어 울었다.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다이아몬드바 시의 시장이 되던 날의 기쁨과 미 연방하원의원이 되던 날의 환호와 박수갈채,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나를 향해 몰려들던 수많은 기자들,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리고 만세를 외치던 나의 가족과 지지자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실 때 제자들은 모두 숨어버렸다. 요한은 골고다까지 따라 나섰지만 그 이후로는 숨어버렸다.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들키지 않고 갈릴리로 돌아가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숨어 지내는 것뿐이었다.
그때 내 심정이 꼭 그랬다. 문득 내 조국 한국에 가고 싶었다. 어린시절 거닐던 골목길이 떠올랐다. 다시 한번 그 길을 천천히 걷고 싶었다. 제2의 인생을 설계하리라 다짐했다. 마음속으로 주님을 불렀다. '주님 아직도 제 곁에 계십니까?'
나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한창일 때 태어났다. 4대 독자인 내게 쏟아진 부모님의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사업 덕분에 기와집에서 편안하게 살았다. 나는 그다지 특별한 아이가 아니었다. 1등을 밥 먹듯이 하는 수재도 아니었고, 머리를 싸매고 노력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보통 아이였다. 종로구 통인동 청운초등학교에 다녔다. 매일 아침이면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했다. 처음 배운 일본말이 서툴러 한국말이 튀어나오면 즉시 일본인 선생한테 불려가 따귀를 맞았다.
학교에 들어간 이듬해인가, 갑자기 '쐐액'하고 날아가는 비행기 소리가 자주 들리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다 말고 책상 밑으로 숨을 때가 많았다. "깨졌다 싱가포르, 물러섰다 영∼국." 학교에서 돌아오면 '천황 폐하의 선물'이라며 나눠준 고무공을 튕기면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어느 날 내 뺨을 때리던 일본인 선생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으스대던 일본인 아이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해방을 맞은 것이다. 학교에는 한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일본말을 쓰지 않는다. 너희는 한국 사람이다."
그제야 학교 가는 일이 즐거워졌다. 공부를 곧잘 하던 나는 아버지 권유로 보성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1년이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며칠도 안 돼 한강 다리가 끊어져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안심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정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탓이었다. 서둘렀다면 우리도 건널 수 있었건만….
***[역경의 열매] 김창준 (3) 대전고 1년때 교회 첫 출석… 주일 기다림에 설레
6·25 당시 나는 을지로에 살고 있었다. 인민군들이 요란한 굉음을 내는 탱크를 타고 서울 거리로 밀려들어오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인민군들이 우리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다짜고짜 우익정치단체에 이름이 올라 있던 아버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아버지는 이미 몸을 피하신 뒤였다. 화가 난 인민군들은 우리 집에 빨간 딱지를 붙이고 다른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어머니와 나는 집안의 물건들을 남몰래 내다 팔아 간신이 끼니를 이어갔다. 인민군은 밤마다 어머니와 나를 불러냈다. 나는 완장을 차고 한강변으로 나가 내 키의 두 배나 되는 삽으로 매일같이 땅을 팠다. 한강을 거슬러 올라올지도 모를 국군에 대항해 싸울 수 있도록 토치카(참호)를 파는 일이었다.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던 국군이 석 달 만에 서울을 되찾았다. 하지만 우리 집은 폭격을 맞아 기둥이 무너지고 기와지붕도 내려앉았다. 겨울이 되자 중공군이 넘어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사람들은 피란을 떠났다. 우리도 봇짐을 꾸려 리어카에 싣고 피란길에 올랐다. 3대 독자인 아버지에게는 변변한 친척이 없었지만 아주 먼 친척이 살고 있다는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고등학교를 다니게 된 나는 연극반에 들어갔다. 수줍음이 많고 소극적인 내 성격으로 어떻게 연극반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나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대전에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권투 선수였던 집주인 아들에게서 권투도 배웠다. 그러면서 나는 조금씩 변해갔다. 나를 옭아매었던 4대 독자, 부잣집 도련님의 굴레를 조금씩 벗어버리기 시작하자 자신감이 생겼다.
당시 연극반에는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배우 이순재씨가 있었다. 지금도 종종 안부를 묻고 지내는 사이다. 교회에 처음 나가게 된 것도 대전고 1학년 때였다. 밴드부 활동을 하면서 두 명의 친구와 가깝게 지냈는데 모두 착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의 권유로 함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성가대 활동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 가는 일에 재미를 느꼈다. 성가대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여학생과 눈맞춤을 하려니 일요일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그 친구들과 더 가까워지면서 성경공부도 시작했다. 한 친구는 당시 우리 교회 목사님 딸과 결혼했고 또 한 친구는 일본 여성과 결혼해 미국유학을 마치고 변호사가 됐다.
활발했던 나의 대전 생활과 달리 현지에서 마땅한 사업을 찾지 못하셨던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가기를 원하셨다. 대전고 2학년 때 다시 상경했다. 대전과 달리 서울은 활기찼다. 당시 연극무대에서 박수를 받으며 생긴 우쭐함을 어쩌지 못하던 나는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마침 허파에 바람이 가득 든 친구들 몇몇이 흔들리고 있던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패거리에 끼워줬다. 우리는 교복바지 주름을 칼날같이 세워 입고 명동이며 종로 거리를 활보했다. 고등학교 3학년을 그렇게 보냈다.
대학 입학시험을 치를 때가 됐다. 당시 나의 학교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기에 선생님은 나를 비롯해서 7명에게 서울대 법대 원서를 써 주셨다. 합격을 장담했던 7명 중에 나만 떨어졌다.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버지 강권에 못 이겨 후기대학에 시험을 치고 붙었지만 다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는 어머니한테 용돈을 얻어 양복 한 벌을 맞춰 입고 머릿기름을 발랐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명동의 댄스클럽을 찾아갔다. 클럽을 가득 메운 남녀가 손을 맞잡고 음악에 맞춰 추는 춤이 신기했다. '슬로우 슬로우 퀵퀵∼'
"저게 무슨 춤이야?" "지루박이란 거야. 요즘 최고 인기라던데."
다음 날 나는 대학 입학금을 들고서 댄스 클럽을 다시 찾아갔다.
***[역경의 열매] 김창준 (4) 젊은 날의 방황 끝에 "청교도 나라 미국으로 가자!"
어차피 공부할 마음도 없는 학교에 비싼 학비 낼 필요 없다고 생각하니 아까울 것도 없었다. 연극에 몰입했던 것처럼 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내 손짓에 따라 여자의 몸이 몇 번 뱅그르르 돌아가면 하루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창준이 이놈, 너 도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 재수를 하든지 편입을 하든지 할 일이지 허구한 날 모양만 내고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바지 주름을 잡으며 대문을 나서는 나를 향해 아버지의 호통이 터져 나왔지만 못들은 척하고 집을 나가버렸다. 클럽에서 나는 손꼽히는 춤꾼이 됐다. 그런데 리듬이 몸에 익어 어떤 음악이 나와도 내 맘대로 춤을 출 수 있게 되자 이전만큼 신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겉으로는 명동의 최고 멋쟁이가 되어 돌아다녔지만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대전에서 함께 교회에 다니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교회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광화문에 있는 종교교회를 선택했다. 당시 '나 하나의 사랑'이라는 노래를 히트시킨 가수 송민도의 남동생 송민영이 성가대를 지휘하고 있을 때였다. 교회를 나가면서 나만의 기도시간을 가졌다. '주님은 항상 내 곁에 계신다'는 믿음에 고독감이 사라지고 밤잠도 잘 오기 시작했다. 이제 나를 다시 찾은 듯했다. 하지만 방황하는 아들을 보다 못한 아버지는 뒷돈을 써서 다른 학교에 넣어주셨다. 이른바 '보결'이라고 하는 거였다. 그마저도 다니고 싶지 않았다. "정 그러면 절에 들어가서 고시 공부라도 하면 어떻겠느냐"는 어머니 요청에 절에 들어갔다가 기겁을 하고 하루 만에 돌아왔다.
어머니 등쌀에 못 이겨 집을 나선 나는 동대문을 향해 걸었다. 등짐을 가득 진 지게꾼들 틈으로 투전판을 벌이는 야바위꾼들,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놓고 미군부대에서 빼낸 레이션 박스의 먹다 버린 햄을 넣어 끓이는 부대찌개 냄새에 비위가 거슬렸다. 이게 뭔가. 모두가 배고픈 시대에 홀로 배부른 나는 희망이 있는가. "아 싫다. 떠나야지. 지긋지긋한 가난과 부패의 땅을 떠나버릴 것이다." 나는 혼자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갈 곳은 미국뿐이었다. 방법은 유학. 법 공부보다는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기로 하고 공대 쪽으로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후원자를 찾기 위해 미국의 로터리 클럽에 편지를 보냈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그레이버씨에게서 답장이 오고, 그가 사는 동네의 채피 대학에서 입학허가서가 왔다. 변두리에 있는 대학이었다.
그런데 군복무를 마치지 않으면 비자받기가 힘들었다. "아버지, 하루 빨리 군대에 가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는 나의 간곡한 요청에 못 이기신 듯 여기저기 다니시며 육군 입대 영장을 받아오셨다. 당초 입대 예정일보다 6개월 먼저 입대하게 됐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카투사를 훈련시키는 제2훈련소로 보내졌다. 어이없게도 군대에서도 춤바람이 한창이었다. 장교들은 쉬는 날이면 지르박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훈련소에 들어간 다음날부터 장교들에게 춤을 가르쳤다. 훈련은 거의 받지 않았다. 그리고 두 달 만에 의무대로 발령이 났다.
어느 날 고참이 나를 찾았다. 링거 2병을 주며 대전시내의 어떤 약국에 갖다 주라고 했다. 약사는 링거 병을 받자마자 봉투를 내밀었다. 빳빳한 현금이 들어 있었다. 병사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수많은 약과 주사가 그렇게 빼돌려지고 있었다. 사회나 군대나 곳곳에 부정이 만연했다. 환멸을 느꼈다. 떠나자. 저 큰 나라인 미국으로 가자. 미국은 기독교인들이 세운 나라가 아닌가. 아무래도 이처럼 썩어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미국 유학 준비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김창준 (5) "이승만 물러나라" 4·19 직후 드디어 미국으로
'빨리 떠나야 한다.' 군대에 대한 실망이 커질수록 미국으로 떠날 생각밖에 없었다. 나는 또 아버지의 힘을 빌렸다. 당시 군대 의무복무기간은 36개월. 나는 속성제대를 하기 위해 대전에 있는 63육군병원에 입원을 했다. 병명은 악성치질.
병원에서는 내가 '나이롱 환자'라는 걸 알고 주말마다 외출증을 끊어주며 집에 가라고 했다. 주말에 배급되는 내 양식을 빼돌리기 위해 나를 내쫓는 거였다. 나는 적당히 기회를 봐서 의무 제대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미군 고문관들의 병원 감사 때문에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만한 증거를 만들어야 했다. 급한 대로 치질 수술을 했다. 멀쩡한 생살을 찢고 꿰맨 것이다. 그런데 수술 후 처리를 잘못했는지 수술 부위가 감염돼 생각지도 못한 고생을 했다. 36개월을 복무해야 하는 군대에서 10개월 만에 의가사제대를 했다. 하지만 치질 수술한 부위가 계속 말썽을 일으켜 잘 걷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수술 부위는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도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제대를 하자마자 미국 유학 시험 준비를 서둘렀다. 서울대 문리대 안에 있던 한국외국어학원(FLI)을 찾아가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FLI는 한국 정부에서 유학 준비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정식 영어교육기관이었다. 그날도 FLI에 가려고 집을 나설 때였다. 서울 효자동 전차 종점 부근에서 경찰이 길을 막았다. 경찰 어깨 너머로 사람들의 머리가 새카맣게 밀려들었다.
"이기붕을 죽이고 이승만은 물러가라."
다다다다….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경찰이 학생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았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흩어졌고, 나도 겁에 질려 몸을 웅크리고 뛰었다.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는 선거에까지 번졌다. 정권연장에 눈 먼 이승만 정권은 부정선거를 저질러 학생들의 분노를 산 것이다. 그날 내가 맞닥뜨린 것이 4·19의거였다.
유학 시험은 국사 과목에서 한차례 낙방한 뒤 석 달 만에 다시 치러 합격했다. 부정선거 책임을 지고 이승만 정부가 물러난 뒤 허정 임시정부가 들어섰지만 사회는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호적초본을 떼는 데도 양담배 한통을 건네줘야 했다. 국방부에 출국증을 받으러 가니 담당직원은 양복 한 벌을 당당히 요구했다.
모든 수속을 끝냈다. 미국에 가져갈 수 있는 한도액 200달러를 손에 쥐고 1961년 1월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하얗게 얼어붙은 김포벌판을 날아오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배웅 나오셨던 어머니 모습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채피 대학이 있는 로스앤젤레스 근처 업랜드 시에 방을 얻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그림 같은 도시였다. 막상 미국에 도착하니 영어를 한마디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1961년 당시만 해도 인종차별이 굉장히 심할 때였다. 세계 최빈국에서 온 불쌍한 유학생에게 미국사회는 혹독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파던(뭐라고요)?"이라고 반복하자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서머타임을 못 알아듣고 남들보다 한 시간이나 먼저 강의실에 들어가 기다린 적도 있었다. 친척도, 친구도, 돈도 없었다. 아파도 혼자 나아야 했다. 미국 교회를 가려해도 여의치 않았다. 잘 알아듣지도 못할 뿐더러 일요일에도 일을 해야만 겨우 입에 풀칠을 할 때였다.
도대체 왜 여길 왔나. 미국에 온 지 2주도 안돼 가난과 부패에 찌든 한국이 너무도 그리웠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순 없지 않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도뿐이었다.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렸다.
"주님, 제 옆에 바짝 붙어 지켜 주세요. 저 혼자서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역경의 열매] 김창준 (6) 이역만리 미국 땅의 교훈 "돈과 '백' 벗어던져라"
캘리포니아주는 자동차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곳이다. 자동차를 살 돈이 없었던 나는 귀한 달러를 털어 중고 오토바이를 한 대 샀다. 그걸 타고 동네 고급 레스토랑에서 일을 해 생활비를 벌었다.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오토바이 운전 실력도 늘어갔다.
어느 날, 철길 근처에서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순간 오토바이가 '부웅'하고 높이 떠올랐다. '아, 기분 좋다'하고 생각한 순간 내 몸은 포물선을 그리며 튕겨나갔다. '쿵'하고 오토바이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사고가 난 지 이틀이 지났다고 했다. 정신을 잃었을 뿐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입원실을 나가려 하자 병원 관계자들이 들이닥쳤다. 병원비를 정산하라고 했다. 200달러를 들고 와 방을 얻고 오토바이를 샀으니 무슨 돈이 남아 있겠는가. 들어놓은 보험도 하나 없었다.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병원 관계자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이란 점을 감안해 병원비의 4분의 1만 받고 나머지는 학교에서 받아갔다.
명동 암달러상한테 바꿔온 돈 200달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일푼이 된 나는 방값이며 밥값을 버는 게 급선무였다. 하루도 쉬지 않고 2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잠을 자도 피곤이 풀리지 않았지만 새벽이면 알람이 울리기 무섭게 일어났다.
병원 청소도 했다. 샌안토니오 병원의 더러운 마룻바닥을 윤이 나도록 닦고 피고름 묻은 거즈가 가득한 쓰레기통을 치웠다. 서울이었다면 코를 틀어막고 도망갈 일이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생각이 바뀌니 못할 일이 없었다.
태평양을 건너 이역만리에서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것 같았다. 조국에 두고 온 내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가난한 나라에서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새삼 느끼곤 했다.
훗날 나는 연방의원이 돼 샌안토니오 병원을 다시 찾았다. 그 병원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을 초청했던 것이다. 병원의 육중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정중하게 인사하며 나를 맞아주었다.
"저는 이 병원을 잘 압니다. 매일 밤마다 제가 청소하던 곳이니까요." 사람들은 무슨 농담인가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농담이 아닙니다. 30년 전 저는 이 병원의 청소부였습니다. 마룻바닥 닦는 일을 제일 많이 했지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날 나는 병원 청소를 하는 사람들한테 유난히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들에게 나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미국생활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학교 수업도 따라가기 힘든데 아르바이트까지 하려니 몸이 열개라도 모자랐다. 그런데 이상했다. 영어도 못하고 주머니에 돈도 없었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편안했다.
왜일까. 서울에서라면 돈과 '백'에 의지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 오자 모든 게 달라졌다. 햄버거 하나를 먹어도 내가 땀 흘려 일한 대가로만 먹을 수 있었다. '1+1=2'라는 삶의 기본을 깨달아가는 날들이었다. 그동안 나는 조국에서 벌어지는 부정과 부패를 지독하게 혐오하면서도 정작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아버지의 힘을 빌려 손쉽게 모든 일을 해결했다.
부정을 혐오하면서 동시에 부정을 이용하는 아이러니. 내 마음의 밑바닥에서는 그러한 나를 힐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돈과 '백'을 벗어던지자 오히려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했다.
***[역경의 열매] 김창준 (7) 유학생 동아리 회장 선거 출마해 당당히 당선
유학 온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여러 나라 유학생들이 모이는 동아리에 가입했다. 국제관계를 연구하는 모임이었는데, 영어를 잘 못하는 나로서는 토론내용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고 토론을 벌이며 무언가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식당에서 서빙을 하다가 손님한테 음식을 엎질러 쫓겨나던 날에도 모임에는 빠지지 않을 만큼 열심이었다.
그 모임에서는 각 나라 외교정책을 두고 토론을 벌였다. 주로 2차 세계대전 후의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 때때로 코리아가 등장했다. 나는 토론을 들으며 생전 처음으로 세계 속의 코리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나 식민지 교육을 받았고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우리나라의 비극적인 역사와 나의 존재를 함께 놓고 고민해본 적이 없다. 부정선거에 항거해 목숨을 내걸고 구름 떼처럼 경무대로 치닫던 학생들의 무리를 보고서도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나는 먼 미국 땅에서 깨달았다. 아, 얼마나 부끄러운 청춘이었던가. 그러던 어느 날 동아리 회장을 새로 뽑는다고 했다. '내가 나가봐야지.' 새로 들어온 신입회원의 선언에 다들 생뚱맞은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데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정견발표를 준비해야 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라며 친절하게 대해주던 한 미국인 여학생을 찾아갔다. 다짜고짜 그녀에게 정견발표를 대신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흔쾌히 승낙했다. 며칠 뒤 학교 신문에는 나와 그녀 사진이 크게 실렸다. 교내에 화제를 불러 모으며 나는 동아리 회장으로 당당히 당선됐다. 그런데 막상 각종 동아리 행사 때마다 회장과 함께 대변인처럼 늘 따라나서야 하는 일이 그 여학생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의 이상한 파트너십은 2년 임기 가운데 3분의 1도 채우지 못하고 7개월 만에 깨져버렸다. 이를 계기로 영어를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늦은 밤 집에 돌아오면 혼자서 영어를 중얼거렸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V와 F, TH, Z 발음은 어려웠다.
여러 방법으로 애를 쓰다가 화장실에 앉아 신문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좁은 화장실 벽에 내 목소리가 부딪혀 내 귀로 다시 들어와 어설픈 내 발음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신문에 실린 주요 기사를 몇 번씩이나 소리 내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기사 전체가 통째로 외워졌다. 그렇게 영어공부에 매달리자 유학생활 1년 만에 영어실력이 부쩍 늘었다. 하루가 다르게 귀가 열리고 말문이 터졌다. 그래도 특유의 악센트는 여전히 남아 있고 아직도 서툰 부분이 있다.
그 무렵 지역 신문사 보급소에 새 일자리를 얻었다. 새벽시간을 이용해서 일하니 낮 시간에 공부하기가 한결 쉬운 데다 수입도 좋은 편이었다. 신문 배달을 하는 동안 단 하루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그걸 좋게 본 때문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구역 책임자가 됐다.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수입이 늘어 더 이상 병원 청소는 하지 않아도 됐다.
신문 보급소 일을 하면서 내가 꿈꾸던 남가주대학 토목공학과 2학년에 편입했다. 꿈이 실현되고 있는 것 같았다. 남들은 어려서부터 원대한 꿈을 가져야 한다고들 충고한다. 하지만 그때 내 삶은 원대한 꿈을 갖고 살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저 코앞에 닥친 현실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러나 어렵다고 주저앉아 본 적은 없었다. 작은 목표가 완성됐을 때 조금 더 큰 목표를 세워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역경의 열매] 김창준 (8) 황금알을 낳는 '하수처리장 건설 업체' 창업
학부 공부를 하면서 진정으로 미국과 미국 사회를 이해하고 미국 사람을 사귈 수 있었다. 학부 과정은 이방인인 내가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그들을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공부하기는 몹시 힘들었지만 내 삶의 자양분이 된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토목공학은 적성에 맞았다. 이 분야를 공부하기 전까지는 내 성격이 엔지니어에 적합하다는 걸 잘 몰랐다. 공학은 기준을 세우고 표준을 만드는 일이다. 모든 작업은 기준에 맞아야 했다. 나는 그런 일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좋은 성적으로 남가주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같은 대학 대학원에 진학했다.
전공은 환경공학으로 상하수도의 물을 정화하는 것이었다. 주경야독으로 조교까지 하면서 1969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으로 떠난 지 8년 만이었다. 학교에서는 내게 박사과정을 권했지만 연구직은 내게 맞지 않았다. 미국 주류사회에 나가 당당한 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마침 대학원을 마칠 무렵은 미국 전역에서 하수처리장 설치로 바쁜 때였다. 내 전공 분야인지라 좋은 직장에 금방 취직이 됐다. 온갖 종류의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던 빡빡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손꼽히는 하수처리 컨설팅 업체인 '제임스 몽고메리'에서 경험을 쌓은 후 직접 회사를 차렸다.
하수처리장을 짓는 일은 주정부에서 발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으면서 업무상 정부 관계자들을 자주 만났다. 하수처리장 수주를 잘 따기 위해 신문·잡지를 꼼꼼히 읽으며 정부에 관한 지식을 키워나갔다.
미국 전체에서 동시다발로 폐수처리 사업이 이어지다 보니 일거리는 쏟아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비행기를 타고 서부 지역을 날아다녔다.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으면 그만큼 수입도 많아졌다. 미국으로 건너가 처음으로 사람답게 산다는 느낌,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고 미국 주류사회의 일원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엔지니어로 왕성하게 일하면서 일본계 미국인들이 만든 아시아기업가협회(AAA)에 나가 활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인들을 제치고 AAA 회장이 됐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이 어떻게 미국의 주류사회와 소통하는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한인들과의 교분도 이어갔다. 한국계 교민이 늘면서 한인들을 위한 이익단체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무역업을 하던 배기성씨와 함께 1972년 한미정치협회(KAPA·카파)를 조직했다. 나는 2대 회장이 됐다. 우리는 카파의 첫 번째 사업으로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출마한 제리 브라운의 정치모금 파티를 열어 후원금을 걷어 줬다. 브라운은 8년 동안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했다. 당시 가장 어린 주지사였던 그는 2011년 40년 만에 또 다시 당선되면서 지금은 가장 나이 많은 주지사로 일하고 있다.
나를 비롯해 카파 회원들은 정치인을 후원하는 일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깨달아갔다. 앞으로 미국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2세들을 위해서라도 한인들이 더 이상 먹고사는 일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미국은 거대한 나라지만 그 거대한 나라를 움직이는 것은 지역구민들이 스스로 뽑는 주의원, 시의원이라는 걸 실감했다. 정치 모금을 통해 한인사회의 의견을 주지사에게 전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걸 그때야 알았다.
당시 한인 장로교 및 침례교는 현지 활동이 왕성했다. 하지만 감리교는 활동이 없던 터라 서울의 이화여대 교목을 모셔왔다. 우리 집에서 20여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린 뒤 미국 현지인 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김창준 (9) 나만의 경영전략 "한국적 사고방식을 버려라"
1977년 '제이킴 엔지니어스'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상·하수처리장 등 도시개발프로젝트를 설계하는 회사였다. 중소기업청에서 지원받은 10만 달러에 그동안 직장생활을 하며 번 돈을 합쳐 로스앤젤레스 근처 다이아몬드바 시에 사무실을 얻어 간판을 걸었다.
직원이라곤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비서 한 명뿐.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낮에는 사업계약을 따내느라 동분서주하고 밤이면 주문받은 설계를 하느라 도면과 싸웠다. 다행히 일거리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미국 서부 6개주에서 일할 수 있는 면허증을 얻은 뒤에는 도저히 혼자서 일감을 감당할 수 없었다. 설계 직원을 채용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무려 150명의 직원을 두게 됐다.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나만의 경영전략을 세웠다. 첫째, 미국에서 사업하는 동안 한국적 사고방식을 버린다. 둘째, 미국 사회의 관습과 불문율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어떤 경우라도 경영자와 사원의 한계를 지킨다. 넷째, 사원 모두가 내 회사라는 자긍심을 갖도록 애를 쓴다. 제이킴 엔지니어스는 설립 10년 만에 설계비로 연매출 1000만 달러를 올릴 정도로 놀랍게 성장했다. 캘리포니아의 500대 설계회사 중 하나가 됐다. 미국 서부지역에만 여덟 군데에 지사를 설립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나는 도시개발 분야의 전문가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미국 일간지 LA타임스에서는 성공한 사업가로 나를 소개했고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도 들어왔다.
다이아몬드바 시의 전망 좋은 언덕배기에 실내 수영장과 테니스코트가 있는 좋은 집도 직접 설계해서 지었다. 나도 모르게 우쭐해지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마음 한편에서는 또 다른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오래된 욕망과 맞닥뜨려야 했다.
'언젠가는 이 도시를 이끄는 시의원에 도전해 보리라.' 2년 동안 이웃 도시인 샌디마스시의 도시계획자문위원장으로 봉사하면서 그런 막연한 꿈을 꾸었다. 그런데 의외로 기회가 빨리 찾아왔다. 신흥 도시인 다이아몬드바 시의 두 번째 시의원 선거가 다가왔는데 초대 시의원 셋 중 한 사람이 주 상원의원에 출마하느라 사퇴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가슴이 벌렁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도전해 봐야지.'
하지만 시의원 출마가 무모한 도전이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안개처럼 피어오르며 나를 괴롭혔다. 설계책상 위에 A4용지를 펼쳐 놓고 펜을 들었다. 종이의 반을 접어 한쪽엔 '유리한 점'이라고 쓰고 다른 한쪽엔 '불리한 점'이라고 썼다. 그리고 내가 시의원에 출마했을 경우, 나의 장점과 단점을 각각 써내려갔다. 나를 객관화시켜 본 것이다. 그랬더니 불리한 점보다 유리한 점이 더 많았다.
'시의원에 출마하리라.' 막상 결심을 하고 나자 모든 게 단순해졌다. 다이아몬드바 시에 대해 공부했다. 지역도서관에 가서 시의 역사와 주민분포, 재정상태 등에 대한 자료를 모조리 찾아 읽었다. 인구 8만명 정도의 다이아몬드바 시는 독립한 지 1년밖에 안 되는 신생도시였다.
본래 도시가 새로 생기면 4년 안에 도시 전체의 마스터플랜을 세워야 하는데 내가 시의원이 되려고 하던 바로 그 시점이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릿속으로 다이아몬드바 시를 짓고 허물고를 반복했다.
출마를 선언하고 나서 발이 닳도록 나를 알리고 다녔다. '아, 주민의 85%가 백인인 이 도시에서 과연 그들이 나를 대표로 세울 것인가.' 착잡한 마음이 불쑥 찾아들 때마다 나는 애써 잊으려 했다. 사람들은 어차피 떨어질 후보로 단정해버린 듯 나한테 무관심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를 알리고 또 알렸다.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창준 (10) 최초의 한국인 시의원 당선 2년 만에 시장까지
선거 기간 중 8차례 토론이 있었다. 나는 최대한 쉬운 말로, 최대한 단순하게 내 생각을 말했다. "정부와 개인기업이 공조해서 작지만 효율 높은 정부를 만들겠습니다. 여러분의 세금 부담을 확실히 줄이겠습니다. 도시계획 전문가로 일해 온 저의 경험과 노하우로 가장 합리적이며 안전한 도시를 만들겠습니다."
이민자인 내가 변호사 출신이 낀 다른 후보들과 토론을 벌여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만의 방법은 오로지 하나였다. '단순하라.' 선거일까지도 나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역신문 기자들도 나를 제외한 후보들과만 인터뷰를 했다. 개표가 시작되자 내가 괜한 짓을 한 건 아닌지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개표 결과는 내 눈을 의심케 했다. 2위보다 무려 1000표나 많았다. 밤 11시쯤 승리가 확정되자 나는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당시 미국 전역에서 시의원에 출마했던 한인은 3명. 그중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나만 유일하게 당선됐다. 주미 한국 특파원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이튿날 한국 신문과 방송에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의원에 당선되다'라는 제목의 보도가 잇따랐다. 그날 이후로 내 이름 앞에는 '최초의' '유일한'이란 수식어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캘리포니아주의 시는 두 가지로 나뉜다. 로스앤젤레스나 샌프란시스코처럼 큰 도시는 풀타임으로 일하는 시장이 모든 행정을 책임진다. 하지만 대부분 작은 도시들의 시장과 시의원들은 자기 직장이 따로 있다. 그들은 시의회에서 결정권만 갖고 있으며 시 운영은 시티 매니저에게 맡긴다. 다이아몬드바시도 그랬다. 나는 제이킴 엔지니어링을 운영하는 한편 매주 화요일 시의회에 참석했다.
시의원의 임기는 4년이다. 그런데 시의원이 된 지 1년 반 만에 시장 자리가 공석이 됐다. 다이아몬드바 시장은 2년마다 5명의 시의원 중에서 뽑는다. 나는 출마를 결심했다. 이어 또 다른 시의원 3명은 물론 나와 경쟁하려던 시의원까지 설득해 만장일치로 시장에 당선됐다. 시의원에 당선된 지 2년이 지난 1992년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한국인 최초의 시장 당선이었다.
시장이 되고 나서 정말 바빴다. 아침 8시면 집무실로 향했다. 8시부터 9시까지 시장 업무를 본 후에 제이킴 엔지니어링으로 출근했다. 파트타임 시장으로 일하면서 받는 급료는 600달러에 미달했다. 말 그대로 봉사활동인 셈이었다.
공약대로 나는 작은 정부 만들기를 실행에 옮겼다. 시청사를 지으려던 계획을 없애고 빌딩에 세를 얻어 들어갔다. 시장실도 책상 하나 겨우 놓일 정도로 좁은 방을 빌려 썼다. 시의회도 별도 건물 없이 카운티의 환경부 회의실을 임대해 사용했다. 시 공무원 채용도 중단했다. 다이아몬드바시와 같은 규모의 시를 운영하려면 통상 150명 정도의 공무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파트타임 직원 2명을 포함, 모두 24명의 공무원만 운용했다. 이런 노력으로 연 1000만 달러의 예산을 줄일 수 있었다.
요즘 한국에 와보면 너무도 멋지게 지어진 구청이며 시청이 즐비하다. 몇 천억원을 들여 지은 호화청사라고 한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부채 액수가 엄청나다. 그 돈이 자기 것이라면 엄청난 부채를 떠안으면서 그렇게 지을 수 있을까. 지역주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구의회나 시의회에서 어떻게 그 문제를 그냥 넘어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다이아몬드바시는 효율적인 재정관리로 흑자를 냈고 은행에 상당한 액수를 저축할 수 있었다. 또 경찰서를 두지 않고 매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경찰과 계약을 맺고 외주를 줬는데 여기서도 상당한 경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창준 (11) 1992년 LA 흑인폭동 "최선 다해 시민을 지키자"
1991년 11월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LA 지역의 공화당원들이었다.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그들 중 한 명이 대뜸 물었다. "다음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할 생각이 없습니까?" 나는 이미 주 하원의원 출신의 척 베일러를 지지한다고 선언한 후였다.
"아, 아직 모르시는군요. 제이 킴의 다이아몬드바 시는 새로운 선거구가 됐습니다. 현직 의원이 없는 신생 선거구이니 한번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캘리포니아는 인구가 너무 많이 늘어 2개 선거구가 더 생기게 됐는데, 그중 한 지역구에 다이아몬드바 시가 포함됐다는 것이다.
"공화당 후보를 물색하다 보니 다들 변호사와 정치가뿐이더군요. 미국은 이민의 나라입니다. 당신은 맨주먹으로 미국에 와서 사업을 일구고 시장까지 되었습니다. 공화당이 찾고 있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 바로 당신입니다."
너무나 큰 제안이었다. 연방의원 선거는 시의원이나 시장 선거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주 의원도 거치지 않았는데 연방의원 선거에 출마하라니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인구 8만명인 작은 도시의 시장 선거와 65만명을 대표하는 연방의원 선거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새로 생겼다는 41선거구를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주민들의 소득 수준과 인구분포 등을 따져보니 공화당 후보가 된다 해도 확실히 당선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런 기회가 언제 또다시 오겠는가. 그날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서재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나는 이미 출마하기로 단단히 결심을 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의논하지 않고 혼자 결심했다. 의논해봤자 날더러 미쳤다고 반대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위기는 순식간에 닥친다.
1992년 4월 29일. 경찰서장으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골치 아픈 공청회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경찰서장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LA 다운타운에서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다이아몬드바 시도 어서 빨리 대책을 세우십시오." 우리 시는 LA에서 약 40㎞ 정도 떨어져 있었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연방의원 출마를 위해 한창 준비 중인데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러나 불평하고 있을 새가 없었다. 경찰차를 타고 급히 LA올림픽가의 한인 타운으로 향했다. 이미 난장판이 됐고 사방이 불바다였다. 마치 6·25전쟁 당시 시가전을 보는 것 같았다.
LA 흑인폭동사건의 출발은 로드니 킹이라는 흑인을 백인 경찰들이 마구 때린, 이른바 '로드니 킹 구타사건'으로 촉발됐다. 하지만 킹을 구타한 경찰관 3명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고, 폭동이 일어난 그날은 경찰관들이 무죄를 선고받은 날이었다.
4·29 흑인폭동은 사흘 뒤 6000명의 주 방위군이 투입되고 나서야 진압됐다. 사흘 동안 58명이 사망했고 2383명이 다쳤다. 1만2111명이 경찰에 구속됐고, 크고 작은 방화도 7000여건에 달했다.
나는 즉시 시의 경찰력을 대기시켰다. 그리고 LA 경찰력만으로 폭동 진압이 어려울 경우에 대비해 이웃 도시들에도 추가로 도움을 요청했다. 폭동이 진압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다이아몬드바 시의 안전을 지키고 LA를 지원했다. 덕분에 나는 지역 주민들에게 위기에 강한 리더십을 가진 후보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우리 구주 아니면 서지 못하네 나를 귀히 보시고 항상 붙드네 나를 붙드네 나를 붙드네 사랑하는 나의 주 나를 붙드네.' 감사한 마음에 찬송가(374장) 가사가 입에서 자꾸 맴돌았다.
***[역경의 열매] 김창준 (12) '도덕성 회복·긴축재정' 들고 연방하원의원 출마
제41선거구에서 공화당 후보는 나를 포함해 6명이었고, 민주당까지 합쳐 총 12명의 연방하원의원 후보가 나왔다. 시의원 선거 때처럼 나는 주목받지 못했다. "이번에는 이름을 알린다고 생각하라. 다음을 노려라"는 주변의 격려가 있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그런 마음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까지 나는 실패한 적이 없었다.
선거운동을 맡아줄 매니저부터 찾았다.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선거 전략가 밥 가우티를 어렵게 만났다. 그는 "41선거구는 척 베일러가 가장 유력하다.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의 완강한 태도에 나는 실망했지만 그를 다시 찾아갔다.
"나는 공화당에서 주목한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입니다. 제가 이민자라는 사실은 수많은 이민자들이 몰려오는 캘리포니아에서는 장점이 될 것입니다. 유권자들은 말만 번드르르한 변호사들이 가득한 정치판에 신물이 나 있습니다. 저는 말정치가 아니라 엔지니어답게 실제로 설계하고 시공하는 정치를 보여줄 겁니다. 게다가 저는 이미 충분한 재산을 갖고 있으니 선거비용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데도 저를 돕고 싶지 않으신가요?"
가우티의 눈빛이 빛났다. "선거엔 이슈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들고나오실 건가요?"
"간단합니다. 긴축재정과 도덕성 회복, 두 가지뿐입니다." 순간 가우티가 일어서서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당신이야말로 제가 찾던, 때 묻지 않은 후보입니다. 당장 일을 시작합시다." 가우티와 손잡았다는 소문에 나를 돕겠다는 사람이 많아졌다. 자원봉사자들이 몰렸고, 전국의 한인들로부터 성금이 밀려들었다. 교포들의 모금은 눈물나게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한 부담감으로 나를 압박했다.
후보가 되자마자 공화당에서 나온 여성 선거운동원들이 양복점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들은 내게 묻지도 않고 진한 감색 정장을 서너 벌 맞추고 미국 성조기를 상징하는 빨간색과 파란색 줄무늬가 들어간 넥타이를 여러 개 골랐다. 검정 양말에 검정 구두, 버튼다운 셔츠에 장식 없는 허리띠를 매니 누가 봐도 '나는 보수주의자요' 하는 모습이 됐다. 가우티는 내가 완벽한 공화당 후보가 되도록 일거수일투족을 점검했다. 흐트러진 복장, 부적절한 여자관계 등 상대방에게 꼬투리를 잡힐 만한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했다.
총 12명의 후보 가운데 나만 동양인이었다. TV 토론을 위해 남몰래 전문가를 고용해 주말마다 카메라 앞에서 토론하는 훈련을 했다. 하지만 미국 사회와 정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는 곤란할 때가 많았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게 나았다.
"저는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확신을 갖고 노력해 사업가가 됐습니다. 그래서 정치를 잘 모르고, 변호사처럼 말도 잘 못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도시계획을 잘합니다. 41선거구에는 재개발 사업을 할 곳이 많습니다. 통계를 보니 연방의원의 3분의 2가 변호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변호사를 보내시렵니까, 아니면 정치밖에 모르는 직업정치인을 보내시겠습니까. 긴축재정으로 세금을 한푼이라도 줄여줄 사업가를 보내주십시오."
선거운동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직접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공식 지지를 호소했다. 그 덕분인지 진보적인 LA타임스에서 나를 지지한다는 논설을 실었다. 지방신문들도 대부분 나를 지지했다.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동시에 쓰라림도 맛봐야 했다. 당시만 해도 동양인 이민자라며 악수도 안 받고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는 백인도 많았다. '20년 동안 겪어온 일인데, 이까짓 것으로 못 이기겠나.' 그때마다 눈을 감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역경의 열매] 김창준 (13) 200달러 들고 유학 온 지 32년 만에 美의회 입성
선거의 고비는 마지막 일주일이다. 끝까지 쥐고 있던 비장의 카드를 던지기 때문에 어떤 공격을 받을지 예상할 수 없다. 선거 참모들과 며칠 밤을 새워가며 작전을 짰지만 불안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그해는 연방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함께 있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빌 클린턴 아칸소 주지사의 인기가 치솟던 때였다. 그런데 선거 막바지에 클린턴 후보의 여자관계가 폭로됐다. 다른 후보들도 비슷한 스캔들이 터지면서 긴장 속에 일주일이 지나갔다.
투표일이었다. 선거 막바지에 '제이 킴이 유리하다'는 여론 조사 결과가 있었지만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법. 나는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개표를 지켜봤다. 초반부터 치열했다. 베일러 후보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애를 태웠다. 밤 11시가 넘어 부재자 투표함이 집계되면서 내가 가까스로 상대 후보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자 선거운동원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결국 베일러 후보를 10% 포인트 차이로 누르고 공화당 후보가 됐다.
하원의원 본선은 11월 첫째 화요일이었다. 41선거구는 공화당이 우세한 지역으로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거 막바지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클린턴의 인기가 날로 치솟으면서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49%의 득표율로 민주당 후보를 압도적 차이로 제치고 당선됐다.
드디어 미 연방하원의원이 된 것이다.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정말 기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두 팔을 높이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두 번째로 한국을 찾았다. 한국은 대통령 선거가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당시 민주자유당 후보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충북 옥천 유세장을 찾았다. 김 전 대통령이 '미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된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며 나를 소개하자 수많은 관중이 너도나도 악수를 청하려 달려들었다. 한국인 핏줄이라는 것만으로도 넘치는 환대를 받았다. 가슴이 뭉클했다.
1993년 1월4일. 위풍당당한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에 섰다. 겨울의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가슴속엔 뜨거운 열정이 펄펄 넘쳤다. 단돈 200달러를 들고 태평양을 건너온 지 32년, 식당에서 접시를 닦던 내가 연방하원의원이 되어 등원하는 첫날이었다. 내 가슴에는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와 숫자 '103'이 새겨진 의원 배지가 달려 있었다. 103차 의회라는 뜻이다.
나는 선서를 하기 위해 토머스 폴리 하원의장 앞에 섰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하원의장이 오른손을 들었다. 나도 심호흡을 하며 오른손을 들었다.
"당신은 미국헌법을 지지하고 국내외 모든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것이며…직무를 훌륭하고 충실하게 집행할 것을 엄숙하게 맹세합니까?"
"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나도 마음속으로 고백했다. "주님, 저와 함께 동행해주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등원 첫날 곧바로 103차 본회의가 속개됐다. 첫 안건은 5개 자치령과 워싱턴DC가 국회에 파견하는 대표들에게 하원의원과 동등한 투표권을 주자는 것이었다. 나는 발언권을 얻어 단상에 올랐다. 의원선서를 한 지 불과 40분 만이었다. 안건에 대한 반대 발언을 마치고 단상을 내려오는데, 공화당 의원들 모두가 일어나 내 이름을 연호했다. "제이 킴! 제이 킴! 제이 킴!"
이튿날 아침 미국의 유명한 신문마다 아시아인 초선 의원의 의사발언을 박스기사로 실었다. 덕분에 김창준이란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내가 등원 첫날부터 민주당의 표적이 된 줄은 미처 몰랐다.
***[역경의 열매] 김창준 (14) 老母의 충고 “사람은 잘 나갈수록 몸을 낮춰야 해”
미국 국회의원들은 손수 운전을 한다. 어떤 차를 타고 싶다고 신청하면 정부에서 자동차 구입비용을 대준다. 나는 의원들이 제일 많이 타는 검은색 포드 자동차를 신청했다. 의원들 중엔 트럭을 몰고 다니는 이도 있었다.
워싱턴DC에는 시민들이 이용하는 지하철 외에 국회의사당과 의원 건물을 잇는 경전철이 있다. 대개 국회의원들이나 보좌관, 행정부 공무원, 기자들이 이용한다. 경전철 옆에는 비상 대피로가 있어서 전쟁이나 테러 발생 시 재빨리 대피할 수 있다. 두꺼운 콘크리트 벽은 원자탄이 떨어져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안전하다.
하원의원에 당선되자마자 워싱턴 인근의 윌리엄스버그에서 공화당 워크숍을 가졌다. 윌리엄스버그는 건국 초기 모습을 재현한 민속촌이다. 집이나 상가, 레스토랑 등이 모두 18세기 모습 그대로다. 그곳에서 공화당 의원과 가족으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교육받았다.
특히 부인들은 값비싼 사치품을 갖지 말 것, 비싼 외제차를 타지 말 것, 고급 백화점에서 쇼핑하지 말 것 등 검소하게 생활하며 언행을 조심하라는 당부를 받았다. 나는 초선이었지만 최초의 아시아계 의원이어서 금방 유명해졌다. 우쭐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최초의 한국인, 최초의 아시아계 공화당 연방하원의원이란 수식어에 걸맞은 의원이 되겠노라 다짐했다.
공화당에는 지금도 ‘1분 연설’이란 게 있다. 여러 명의 의원들이 당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주제에 상관없이 국회 본회의가 끝난 다음 1분 동안 발언을 하는 것이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1분 연설을 자청했다. 사업을 하면서 이래저래 느꼈던 점들을 쏟아내고 나면 속이 다 후련했다. 그런 내 모습이 케이블 TV나 24시간 뉴스채널을 통해 전국에 방송되면서 초선의원답지 않게 유명세를 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민주당뿐만 아니라 백악관에서도 예의주시하는 인물이 되어 갔다.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높은 곳에 있을수록 떨어지기 쉽다.” LA에 사시는 어머니께서 전화로 몇 번이나 당부하셨다. “본래 꽃 피면 꽃샘바람 불고 열매 맺으면 첫서리 내리는 법이다. 사람은 잘 나갈수록 몸을 낮춰야 해.”
늙으신 어머니의 노파심이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 말씀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당선 직후 16명의 보좌관을 고용했다. 주어진 예산안에서는 22명까지 고용할 수 있었지만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숫자보다는 봉급을 많이 주고 실력 있는 보좌관을 원했다. 의회 활동과 지역구 관리를 위해 워싱턴 의회 사무실에 8명, LA에 7명과 오렌지카운티에 1명을 배치했다. 이 중 한국인 보좌관은 이민 2세 한 명이었다. 이 보좌관은 현재 변호사가 돼 연방정부 이민국의 요직에서 일하고 있다.
나는 한인사회를 비롯한 아시아계의 권익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은 진심이었고 그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전과 달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골프를 치고 비빔밥을 먹던 친구가 연방의원이 되더니 거만해졌다는 것이었다.
한인사회에서 나를 위해 성금을 보내고 마음을 모아준 것은 눈물나게 고마운 일이다. 그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치열한 선거운동을 끝까지 치러냈을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나는 미국 국회의원이지 한인회장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41선거구 지역구민들이 있었고, 나는 이들을 대표하는 하원의원이지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의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나는 ‘미국 국회에 간 최초의 한국인’이었고,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한인 사회, 나아가 아시아계 커뮤니티는 하원의원 김창준의 또 하나의 지역구인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창준 (15) “놀고먹는 국회의원 없는 미국 의회를 배워라”
“삐이 삐이, 15분 안에 ○○법안의 표결이 끝납니다.”
허리에 찬 삐삐가 울리면 부리나케 빌딩 지하로 내려가 경전철을 타고 의사당으로 달려간다. 의원회관과 의사당을 오가는 경전철 역에는 표결 15분 전에는 의원들이 먼저 승차하도록 양보해 달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왜 이렇게 할까. 표결은 반드시 의원 본인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원들은 삐삐와 함께 투표카드를 꼭 갖고 다닌다. 의회 상황은 TV 중계를 통해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표결은 현장의 전자투표기에 투표카드를 넣고 ‘예스(Yes)’나 ‘노(No)’ 또는 ‘기권’을 표시해야 한다.
몇 년 전 우리나라 국회에서 벌어진 대리투표 소동은 말 그대로 코미디 감이다. 슬쩍 눌렀느니, 안 눌렀느니 각 당의 의원들끼리 맞서서 싸우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의원들의 한 표는 국회에 그를 보낸 지역 주민 수십만명을 대표한다. 그러니 한 표가 아니라 수십만 표다. 한 표는 그렇게 엄중한 것이다.
‘놀고먹는 국회의원’이란 우스갯 소리가 미국에도 있지만 내가 경험한 미국 국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법안 외에도 무슨 일이 그리 많은지 하루도 쉴 수 없을 정도다. 일단 법안이 상정되면 민주당과 공화당에서 법안 토론을 벌인다. 어느 법안이든 정해진 시간을 넘길 수 없고 토론 시간에는 법안과 상관없는 발언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토론이 알차고 격렬하다. 각 당의 토론을 보고 의원의 생각이 바뀌면 바뀐 대로 투표하면 된다. 당에서 찬성한다고 해서 의원 모두가 찬성할 이유는 없다. 당론이라며 의원을 압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은 이념이 같아 모인 집단이지 권력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당에 공천권도 없다.
본회의는 끝나는 시간이 일정치 않다. 밤 10시까지도 끝나지 않아 의사당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기다려야 할 때도 부지기수다. 삐삐만 울리면 부리나케 달려가야 하니 도무지 개인생활을 할 수 없다. 한국에 와 보면 의원 보좌관들이 별별 수고를 다한다. 그러나 미국은 다르다. 그들도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니 일이 끝나면 칼같이 퇴근을 하고 비서실장만 남는다. 나는 본회의가 끝나길 기다리면서 밀린 서류를 읽거나 잡무를 처리하며 사무실을 지켜야 한다.
10시가 넘어 비서실장마저 돌아가 버린 의원회관은 썰렁하기 짝이 없다. 적막한 빌딩에 홀로 남아 밤늦게 일을 하려면 배가 너무 고팠다. 별 수 없이 빌딩 매점에서 컵라면을 사다 전자렌지에 끓여 먹기도 했다.
3선의 의원생활 동안 일주일을 워싱턴의 국회와 캘리포니아의 지역구로 나누어 살았다. 거리가 멀다 보니, 잠을 설치고 눈이 빨개진다고 해서 ‘레드아이(red eye)’라 부르는 밤 비행기를 애용할 수밖에 없었다. 매주 목요일 밤이면 비행기를 타고 캘리포니아의 지역구로 갔다가 월요일 밤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되돌아왔다.
미국 국회엔 의원들의 명패가 없다. 지정된 자리가 없으니 아무 자리나 앉으면 된다. 본회의장을 길게 가로지르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은 공화당, 왼쪽은 민주당의 자리다. 정당을 갈라놓는 통로는 마치 좌우를 가르는 강물 같다. 그 사이로 생각이나 이념이 판이하게 갈린다.
하지만 경제정책에 관한 한 사사건건 의견이 갈리는 보수와 진보도 하나로 뭉칠 때가 있다. 다름 아닌 국가안보와 관련된 경우다. 진보 세력은 평화는 ‘대화’를 통해서만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보수 세력은 평화는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니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진보든 보수든 세계 평화를 위해 미국이 앞장서 나가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미국의 안보와 관련된 문제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하나로 뭉친다.
***[역경의 열매] 김창준 (16) “이건 LA타임스가 의원님을 총으로 쏜 겁니다”
의원에 당선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워싱턴포스트’에 내 기사가 크게 실렸다.
진보 성향의 신문인 워싱턴포스트에서 공화당 초선의원 이야기를 크게 써줬으니 여기저기서 화제가 됐다. 재선을 준비해야 하는 입장에서 신문에 이름이 나는 게 싫진 않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토록 호의적이었던 신문들이 내 뒤통수를 노리고 있는 줄은 몰랐다.
7월 초순이었다. 아침부터 어느 젊은 여자가 사무실로 찾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LA타임스 기자라며 인터뷰를 요청했다. 반갑게 맞이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는 살기가 느껴졌다. 앉자마자 나를 인터뷰한다기보다는 심문을 하는 것처럼 내 모금 운동에 대해 따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아 그저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이튿날 아침, 여느 때처럼 이른 새벽에 일어나 출근하기 전 신문을 펴들었다. 평소 습관처럼 LA타임스 정치면부터 펼쳤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정치면 가득히 ‘김창준 의원이 기업 자금을 선거에 사용한 의혹이 있다’는 기사가 1면부터 3면까지 도배돼 있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쇠망치로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 멍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출근했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모두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기사입니다. 의원님이 언제 회사 자금을 쓰셨나요? 회사 건물에 빈 사무실이 있어서 선거 사무실로 썼을 뿐인데 도대체 무엇이 불법이라는 겁니까. 이건 명백한 모함입니다.” 신문 기사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애초부터 LA타임스가 의원님을 노리고 시작한 겁니다. 의원님이 등원 첫날부터 민주당을 공격하신 게 결정적이었어요. 이건 LA타임스가 의원님을 총으로 쏜 겁니다. 소리 나지 않는 총이라도 총은 총이지요.” 선거캠페인 매니저인 밥 가우티도 거들었다.
핵이 분열되면 중성자가 나온다. 그 중성자는 옆에 있던 다른 중성자와 부딪히면서 연쇄폭발을 일으킨다. 이것이 핵폭발의 원리다. LA타임스가 한 건 터뜨리면 그 기사를 지역신문에서 받아 키우고, 또 기사를 받아 교포신문에서 부풀리는 일이 연쇄 반응으로 일어났다.
의혹이 불거지자 미 연방수사국(FBI)에서 수사를 시작했다. 수사관들이 제이 킴 엔지니어스의 모든 회계장부와 컴퓨터를 샅샅이 뒤졌다. 회사는 쑥대밭이 됐다. 나는 신문보도가 나간 지 한 달쯤 지나 반박 자료를 내놨고, 언론과 인터뷰를 가졌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특히 임대료 문제가 계속 발목을 잡았다. 비록 내 건물에 사무실을 얻었더라도 단돈 1달러라도 임대료가 오고간 거래내역이 없으면 미국 선거법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미 연방선거법이 그만큼 까다롭다는 걸 나는 미처 몰랐다. 선거운동에만 몰두했지 선거법에는 별 신경을 안 썼는데, 다른 의원들은 다 아는 미국 선거법을 나 혼자만 몰랐다는 사실이 나를 깊은 절망감 속으로 빠트렸다. 내가 내 건물에 내 선거사무실을 내면서, 내가 건물 주인인 나한테 임대료를 건네고 영수증을 끊어줘야 한다는 미국법을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무엇보다 선거관리위원회에 보고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이런 일이 터지자 모금을 가장 많이 해주던 중국인들의 후원이 끊겼다. ‘사흘이 멀다’ 하고 신문들이 선거자금 의혹에 대해 떠들어대는데 누가 후원금을 내겠는가. 10만 달러를 목표로 모금 운동을 펼쳤지만 모금액은 1만3000달러에 그쳤다. ‘제이 킴도 이젠 끝났다’라는 말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점점 더 의혹만 커질 뿐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생전 처음 당하는 일이라 너무 기가 막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창준 (17) 무릎꿇고 오만함 회개하니 ‘꿈의 3선 의원’ 허락
오랜만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렸다. 그동안 하나님을 잊고 살아온 나의 오만함에 대한 회개가 자꾸 나왔다. 한참을 기도하고 나니 마음속에 평안함이 샘솟는 것 같았다. 다시 기운을 차렸다. 그리고 나를 향한 공격에 꿋꿋하게 맞서기로 했다. 양심상 부끄러운 것도 없었고, 지역구민을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의정활동 틈틈이 지역구로 날아가 지역의 문젯거리를 처리했다. 그 결과 압도적인 표 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초선 때보다 더 열렬한 지지를 보내주었고, 3선에 도전해서 성공했다. 모두가 희망하는 ‘꿈의 3선 의원’이 됐다.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기는 참으로 힘든 모양이다. 나 역시 초심을 잃었었다. 처음 의원 선거에 나섰을 때 나의 두 가지 공약 중 하나는 ‘3선 이상은 안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4선을 앞둔 시점이 되었을 때 심한 갈등을 느꼈다. 이름을 날리겠다는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당시 정치자금 수사가 끝나지 않아 상당히 곤혹스러운 입장이었다. 만약 입후보하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불법자금을 썼기 때문이라고 단정할 터였다. 내게 뒤집어씌운 모든 의혹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만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41선거구 예비선거에 일단 등록을 했다. 예상했던 대로 선거운동은 악전고투였다. 상대 후보는 내가 곧 감옥에 갈 것처럼 흑색선전을 늘어놓았다. 선거운동은 시작됐는데 선거구에 가지 않는 조건으로 FBI 조사를 끝냈다. 이런 마당에 무슨 수로 선거에 이길 수 있겠는가. 분노가 치솟았다. 결국 득표 순위 2위로 패배했다.
선거를 치르는 중 나는 정치자금 사건을 경범죄로 종결짓는 ‘플리바겐(plea bargain·사전형량조정제도)’을 마지못해 수락했다.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범죄는 기록에 남지 않는다는 변호사의 끈질긴 설득에 굴복했지만 그토록 힘든 시간을 견뎌놓고 왜 마지막 순간에 양보했는지 지금도 나 자신을 용서하기 어렵다.
연방의원을 세 차례 하는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본회의 참석률 100%에다 최다발언의 기록을 남겼다. 선거가 끝난 후에도 끝까지 마무리를 잘해서 ‘우수의정상’도 받았다. 성공한 이민자들에게만 주는 ‘엘리스 아일랜드 명예훈장’도 수상했다. 뒤돌아보면 분에 넘치는 영예를 누렸다. 하나님께서는 이 즈음에서 내가 마무리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았다.
다른 인종, 다른 문화 속에서 주류가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 첫 번째 인물이 되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은 당사자가 아니면 설명하기 힘들다. 내 뒤로 연방의원이 될 후배들은 나를 징검다리 삼길 바란다. 내가 겪은 불이익과 고난을 훌쩍 뛰어넘어 한국인의 힘을 널리 펼쳐줬으면 좋겠다. 그것이 최초의 한국계 미 연방하원의원을 지낸 나의 유일한 소원이다.
이후 나는 ‘정치인 제이 킴’을 버렸다. 섭섭했지만 홀가분했다. 성공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털어버리고 모든 걸 비웠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거리를 찾아 나섰다. 3선의 미 연방하원의원을 지낸 경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더 늦기 전에 나의 경험을 조국의 젊은이들에게 돌려주자.’ 또 다른 출발선 앞에 서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언론에 칼럼도 쓰고 인터뷰도 하고 강연도 다니며 책도 썼다. 한국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내가 경험한 실제 미국정치를 한국정치와 제도적으로 비교하면서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김창준 정경아카데미’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역경의 열매] 김창준 (18) 정치도 하나님 사업…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를
2년 전 출범한 ‘김창준 정경아카데미’는 요즘 가장 역점을 두는 일이다. 반세기 가까이 미국에 살면서 사업을 일구고 미국의 중앙정치무대를 경험한 유일한 한국인인 내가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고자 만든 기구다.
미국을 바깥에서 보고 평가하는 건 수박 겉핥기일 수밖에 없다. 제대로 알기 위해선 미국 의회 안에 들어가서 한국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아카데미의 목적은 한국 정치의 선진화와 올바른 정치인 양성, 그리고 선진국형 경제인 양성에 있다. 하나님 사업을 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일 것이다. 나는 아카데미를 통해 그 사명을 감당하고 싶었다.
아카데미와 더불어 대통령 경제자문 기관인 국민경제자문회의에도 몸담고 있다. 공정거래분과 자문위원으로서 정부 규제를 줄이는 방법과 중소·중견기업들의 성장을 위해 국가 방침을 어떻게 정할지에 대해 자문하고 있다.
정치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서 보니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간과했던 주위 사람들의 소중함과 그들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들을 빼놓을 수 없다. 가장 먼저 꼽을 이는 제니퍼 안(한국명 안진영), 바로 내 아내다. 실용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용기를 북돋아주는 존재다. 항상 명랑하게 웃으면서 “뭘 그런 걸로 걱정하세요”라며 토닥여주는 그녀와 함께 살다 보니 툭하면 화를 내던 내 성격도 많이 수그러들었다.
아내는 10남매 중 넷째로 맏언니인 고 안진현씨와 많이 가까웠다. 처형인 안진현씨는 ‘국민가수’ 조용필씨의 부인이었다. 처형과 아내는 외모는 물론 성격까지 비슷했다. 두 가정 모두 워싱턴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다. 조용필씨는 손윗동서이지만 내가 나이가 더 많다며 항상 깍듯이 대접해줘서 흐뭇했다.
처형은 평소 심장이 약했다. 2002년 12월 심장 수술로 유명한 미국 클리블랜드 병원에서 수술을 마치고 메릴랜드 포토맥 자택에서 요양하던 중 이듬해 1월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때가 54세였다.
생전의 처형은 한국과 미국을 한 달에 한 번꼴로 오가며 바쁜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 사업도 잘 일궜다. 자선단체에 기부도 많이 했다. 조용필씨도 처형을 많이 의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도 한국에 오면 조용필씨를 자주 만난다. 공연 때마다 티켓을 보내줘서 콘서트도 관람한다. 아직도 처형 산소에 가서 벌초도 직접 하며 아내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볼 때 천재적인 가수 이전에 자상한 남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업무적으로 보면 뉴트 깅리치 전 미연방하원의장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공격을 받고 어려울 때마다 항상 내 곁에서 나를 지켜준 사람이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정치는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마음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나를 따르는 지지자들을 더욱 견고히 단결시키고 한 명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대만이 핵폐기물을 북한에 팔아넘기려고 했을 때 이를 막느라 동분서주하는 나를 도와준 동지이기도 하다.
내 선거운동을 도와줬던 선거 캠페인 매니저 밥 가우티도 잊지 못할 사람이다. 그는 말을 짧게 하지만 주저하지 않고, 원하는 말을 언제 어디서든 하고야 마는 사람이다. 정치 신념도 뚜렷하다. 그 덕분에 나의 정치적 신념 역시 더욱 뚜렷해졌고 미국 정치의 어두운 단면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다. 주일 설교를 위해 밤을 새워 준비하시는 신학대 교수 출신 목회자로 메시지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본이 되시는 분이다. 이들을 만나게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