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살고 있는 네 식구의 사람 냄새 나는 초가살이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초가집을 짓고 사는 가족이 있습니다.
불편하지만 생태적으로 살겠다는 네 식구의 사람 냄새 나는 초가살이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강원도 영월에서 고씨동굴로 향하는 길은 남한강을 따라 구불구불 나 있는 산길입니다. 길은 좁고 험하지만 오른편으로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비단처럼 펼쳐 있어 눈이 절로 뜨이는 절경입니다. 영월군 하동면의 가재골은 산세 좋고 물 좋은 이곳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 곳입니다.
보기만 해도 아찔하게 산을 타고 이어진 좁은 시멘트 도로로 접어들면,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사는가 싶을 정도로 깊은 골짜기가 나옵니다. 그나마 이 좁은 도로도 작년 6월 수해로 길이 잠긴 후에야 포장된 것이랍니다. 시골도 이런 시골이 없습니다.
도시 사람들은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발이라도 한번 담가보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계곡들이 이곳에는 지천입니다. 십여 가구가 골짜기 곳곳에 띄엄띄엄 살고 있는 곳, 아직까지 옛날 우리 흙집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이곳이 바로 정영주씨 가족이 살고 있는 가재골입니다.
현실에 대한 회의로 귀농 결심
정영주, 엄정미 씨 부부와 솔이와 다운이 두 자매가 이곳 가재골에 터를 잡은지도 3년이 되었습니다. 정영주 씨는 대학에서 교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삶에 대한 고민을 치열하게 하던 시기에 생태 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후 조금씩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던 것이 2000년부터는 부인 엄정미 씨에게 시골로 내려가자고 본격적으로 조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반대를 하던 엄정미 씨도 2년간의 설득 끝에 결국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실은 남편의 설득에 못 이겨서라기보다는 현재 삶에 대한 후회가 귀농을 결심하게 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입니다.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고 조리사로 근무하기도 한 그녀지만 정신없이 일과 사람에 쫓겨 살다보니 이러고 살아야 하나 하는 후회가 문득 들었던 것입니다.
부부는 2002년 영월에 땅을 사고, 1년 동안 귀농을 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영월은 두 사람의 고향이었고, 특히 엄정미 씨의 친정에서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정영주 씨는 실상사 귀농학교에서 3개월 동안 숙식하며 농사 기술과 집 짓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기술만으로는 부족해 귀농인의 집을 전문으로 지어주는 목수를 따라다니며 실습도 하고, 품을 팔아 돈도 벌며 차근차근 집 지을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불편하게 살고 맛 없는 것 먹고
정영주 씨 가족이 가재골에 들어온지는 3년이 좀 넘습니다. 본격적으로 집을 짓기 전에는 지금 집터 옆에 있는 폐가를 수리해서 살았습니다. 말이 집이지 오랫동안 방치되어 형태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낡은 집이었는데, 이웃들의 도움을 얻어 수리를 했더니 쓸 만한 농가가 되었습니다. 이런 집도 고쳤는데, 새집이야 못 짓겠나 싶어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초가집을 지은 것은 작년 여름부터입니다. 귀농 준비를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과 함께 뼈대를 세웠고, 나머지 벽체와 마감은 정영주 씨와 엄정미 씨가 직접 했습니다. 흙벽에는 야자 섬유인 수사와 밀가루풀을 섞어 마감했는데, 이렇게 하면 마를 때 금이 가지 않고 물에도 강해집니다.
방에는 천연염색을 한 광목을 바닥에 바르고, 콩땜을 했습니다. 밖에서 보면 자그마한 집이지만, 복층 구조에 큰 가구가 없어 들어서면 집이 훨씬 넓어보입니다. 16평이라도 네 식구 살기에 결코 작지 않은 알찬 집입니다.
집에 들어서면 제일 눈에 띄는 것이 거실에 놓인 항아리 아궁이입니다. 방에 군불을 때면서 벽난로 역할도 하고, 오손도손 둘러앉아 고구마나 고기를 구워먹는 데도 제격입니다.
전통가옥 하면 흔히 떠올리는 기와집이 아니라 초가집을 지은 이유는 초가집이 우리 서민집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와는 한장을 만들 때마다 에너지를 소비하지만, 볏집은 가을걷이를 하고 나면 자연히 남는 것이라 생태적인 삶을 실천하자는 의미에서도 초가집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불편하게 살고 맛없는 걸 먹자’가 정영주 씨 가족의 모토입니다. 차를 타면 될 걸 걸어서 가고, 따뜻하게 살기보다는 추운 듯이 살고, 사 먹는 예쁜 음식들 대신 직접 만든 투박한 음식을 먹겠다는 것입니다.
집을 지을 때에는 가족들 각각 원한 게 있습니다. 엄정미 씨는 방에 구들을 놓을 것을 원했고, 정영주 씨는 툇마루를, 아이들은 다락방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가족들의 바람을 모아 지은 집입니다.
작년 11월에 이사를 했는데, 아직 흙벽이 완전히 마르지 않아 도배를 하지 못했습니다. 단열을 위해서 나중에 한지로 도배를 할 예정이라고 정영주 씨가 말하자, 엄정미 씨는 흙벽 그대로 두어도 좋지 않냐며 아쉬워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부부가 함께 의논하여 정할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의견을 나누며 다듬어나가는 게 진짜 사람 냄새가 나는 집이 아닐까 합니다.
체험행사를 통해 사람과 정 나누기
여태까지는 남의 집 지으랴 자기 집 지으랴 바빠 다른 일에는 신경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텃밭에 직접 먹을 채소와 산나물 등을 재배하고 있지만, 땅이 척박하여 농사를 크게 짓지는 못하는 곳입니다.
대신에 정영주 씨 부부는 산골 초가집의 특성을 살려 체험행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동강보존본부와 영월자활후견기관과 연결하여 생태체험 프로그램을 몇 번 실시했는데, 매우 반응이 좋았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기존의 농촌체험행사처럼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가족 단위로 놀러와 산골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준히 가꾸어갈 계획입니다.
요리에 자신이 있는 엄정미 씨는 직접 된장과 술을 담그고, 맷돌을 갈아 두부도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이런 일들을 체험해보면서 천연염색도 하고, 산나물도 캐고, 개울에서 물놀이도 하려고 합니다. 전통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꺼리는 무궁무진합니다. 이엉을 엮어 초가지붕을 새로 올리는 것 역시 매년 가을 훌륭한 체험이 될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삶이 돈벌이가 된다는 것 자체가 고민스럽기도 합니다.
“그래도 사람은 사람하고 살아야지, 아무리 자연이 좋아도 산하고 물만 갖고는 못 살아요. 이렇게 손님들이 찾아와 이런 저런 일을 함께 하다보면 정도 생기고 좋은 관계도 자꾸 만들어지더라구요. 지속적으로 실천하면 생태적인 삶을 널리 퍼트리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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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간에 이해도 깊어져
시골로 내려와서는 가족들이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직장을 다닐 때는 저녁 먹을 때만 얼굴을 볼까말까 했는데, 이제는 부부와 아이들이 하루 종일 얼굴을 맞대고 사니, 가족이라도 그 동안 서로에 대해 참 몰랐구나 하는 걸 느낍니다. 매일이 새로운 발견입니다.
육식을 하지 않는 정영주 씨는 대신 직접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어 먹습니다. 부부가 마주 앉아 밤 늦도록 맷돌을 돌리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면 십여년을 함께 살았어도 몰랐던 일이 저절로 이해가 됩니다. 옛 어른 말씀이 부부는 20년을 살아봐야 안다던데, 그 말을 이제야 알 것 같답니다. 모든 가족들이 이렇게 살면, 이혼률도 뚝 떨어질 거라는 게 이들 부부의 웃음 띤 설명입니다.
올해 초등학교 5학년과 4학년에 올라가는 솔이와 다운이 자매는 멀리 떨어진 학교에 다닙니다. 큰길까지는 통학버스가 다니지만, 집에서부터 큰길까지만 해도 한시간 이상을 걸어야 합니다.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는 달리 아이들은 “놀면서 가니까 한시간 반도 더 걸려요!” 하면서 재잘재잘 웃습니다.
조금 있으면 중학교에 올라가는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걱정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지금 이대로 시골 학교에 다니는 것도 괜찮고, 대안학교나 홈 스쿨링에 대해서도 고려해보고 있다고 합니다. 좋은 대학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고 싶다는 말입니다.
TV도 없고, 다양한 장난감도 없지만 마냥 밝고 바른 자매들을 보고 있으니 의미 없는 질문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번 제도권을 벗어나니까, 그 다음부터는 두려움이 없어지더라구요. 우리 힘으로 집 짓고, 농사 지어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기니 어디 갖다놔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산골에서 한 20년을 살고 난 뒤에는 바다에서 20년을 살고 싶다고 농담처럼 엄정미씨가 말합니다.
작년 여름 가족들은 영월에서 태백산을 넘어 동해안까지 국도를 따라 도보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텐트에서 자기도 하고 친구의 집에서 자기도 하면서, 길을 걷다 비가 오면 우비를 입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으며 꼬박 나흘 동안 100km를 넘게 걸었습니다. 가족 간에 신뢰도 깊어지고, 깊은 성찰도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여행이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꿈도 못 꿨을 일이지만, 시골로 이사와 여러 가지 일을 해내면서 용기가 생겼습니다.
더 많고 더 빠른 걸 원하는 요즘 세상에서 이들 가족의 삶은 반대로 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고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풍족하지도 않고 편하지도 않은 삶이지만 그것이 정말 밝고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 전원희망(田園希望):Happyt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