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히딩크
'한국 축구가 기술은 괜찮은데 체력이 형편 없다'라고 말한 것을 그 문장 자체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거라 봅니다. 그의 말은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서 1승이라도 거두려면 지금 매달려봤자 소용 없는 기술 향상에 집착하지 말고, 체력이라도 비약적으로 이끌어 올려야 한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히딩크는 월드컵을 코앞에 두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긴급 공수된 청부사와 같은 신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축구에 대한 전반적 문제점을 진단한 것이 아니고, 월드컵이라는 단기 이벤트에 성과를 거두어야 하는 입장에서 진단한 겁니다. 계속되는 월드컵 출전에서 단 1승도 못한 허접한 약팀이 당장 세계 유수의 강팀과 겨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던 것이죠. 원래 히딩크가 체력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지옥훈련의 대명사가 아닙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히딩크가 단내나도록 선수들을 굴려서 성과를 냈다, 라는 얘기를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만약, 체력으로 중무장한 그때의 한국 대표팀이 단기에 3-5게임을 통해 성적을 가르는 월드컵이 아니라, 프로스포츠처럼 긴 시즌을 통해 리그 경기를 벌였다면, 과연 32팀 중에 4등을 할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아마, 그래야 했다면, 히딩크는 조금 다른 처방을 적용했을 거 같습니다.
히딩크가 실시한 '파워 프로그램'의 정교함이야 이미 다 알려진 것이고(축구에 하루 종일 뛸 수 있는 체력이 필요해? 아니야, 필요한 건 순발력, 근력, 근회복력!), 또 하나 간과하기 쉬운 뚜렷한 차별점은 어떤 지옥훈련이든, 정확히 계획된 프로그램 안에서의 훈련이었다는 겁니다. 선수들에게 미리 고지한 훈련량 안에서 집중력을 통해 마지막 한계를 다할 것을 주문했고, 때문에 선수들이 언제 끝날 지 모르는 훈련 속에서 요령을 부리며 체력을 비축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꼴찌는 한 바퀴 더.. 이따위 삽질은 체력훈련이 아니란 거죠. 정해진 시간, 량, 이거 굉장히 중요하죠. 훈련의 효율과 동기부여의 핵심이라 봅니다.
이와 대별되는 위성우 감독의 인터뷰 한 꼭지.
“아침 6시부터 한 시간 반 동안 슈팅 600~700개를 쏘고 식사를 먹는다. 오전 9시30분부터 3시간은 아침 운동이다. 오후 3시30분부터 3시간 동안 오후 훈련이지만 6시30분에 끝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보통 오후 8시, 9시에 마친다. 밤 10시에 끝난 적도 있다.”
그는 “한 게 없고, 향상된 게 없는 것 같은데 정해진 시간이 됐다고 찝찝하게 훈련을 그만둘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며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식당 아줌마들이 퇴근이 늦다며 그만두겠다고 해서 난리도 아니었다”며 웃었다.
2. 우리은행
그럼, '우리은행에서 실시된 체력 프로그램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느냐', 는 질문은 사실 제가 하고 싶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체력이 향상되었으니, 잘한 거는 맞는데, 그 비법은? 유감스럽게도 저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위성우 감독이 단기간에 이루어낸 놀라운 성과를 인정하고 또 궁금해 합니다. 근데, 알려진 게 없어요. 알려진 건 이런 겁니다.
선수 생활 수십 년 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전주원 코치가 "나도 선수시절 악독한 감독들 만나서 체력 훈련 많이 했는데, 그때 최고 레벨이 3 이라면 지금 위감독은 7", 발목이라도 부러졌으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 차라리 개가 부러움, 트레이드 알고 죽고 싶었음, 오후 훈련의 공포 때문에 낮잠을 못잠, 집에 1년 동안 못 갔음, (올스타 브레이크 때 뭐 했냐?) 일단 많이 뛰었음, 훈련 너무 많이 해서 지쳤음 등등...
만약, 히딩크가 했던 과학적인 체력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이때까지 저런 말들 빼고 과연 알려진 것이 하나도 없었을까 싶습니다. 감독, 코치, 선수, 모두 압도적인 훈련 강도만 얘기할 뿐, 그 외에 특별한 '새로움', '다름'에 대해서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습니다. 기자들도 정말로 알고 싶은 부분일 테고, 클릭수 올리기 좋은 주제인데.. 그에 대한 간단한 언급조차 없습니다. 왜일까요..? 과연 있는데,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개인 성적과 승부의 압박감이 없는 비시즌은 그렇다 치더라도, 시즌에 돌입해서 훈련량을 조절하지 않는 것은 위험하다고 봅니다. 그냥 비시즌 훈련하는 것과, 반복되는 경기를 통해 완전히 체력을 소진한 상태에서 하는 훈련은 차이가 많죠. 부상을 방지하고 체력을 끌어올리는 방법에는 훈련이 제 1원칙이지만, 휴식을 통한 회복이라는 제 2원칙도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동안 우리은행 선수들이 여러번 직접적으로 감독에게 휴식을 요구하는데,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걸로 압니다. 이렇게 되면, 팀 사기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처음 2-3년은 달라진 성적으로 보상 받고, 감독의 에너지에 감화 되면서 어떻게든 견디겠지만, 계속 죽을 것 같은 '사점'이 체내와 멘탈에 누적됐을 때, 과연 괜찮을까.. 이런 우려가 있는 겁니다. 우려가 심화되면서 비판적 시각이 찾아드는 거고..
무리한 훈련으로 폭망.. 이에 실증적 근거를 요구하셨는데, 사실 실증적 근거를 대기가 쉽지 않은 것이, 프로스포츠에서 그런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이죠(제가 몰라서 없다고 하는 지도 모르겠지만). 프로 역사가 100년이 넘는 mlb나 epl에서 선수들을 단체로 단내나도록 굴려서 명장이 되거나 명문팀이 된 사례가 있는지.. 프로의 성적은 돈질이지만, 돈질 말고 시즌/비시즌 가리지 않고, 1년간 집에도 갈 수 없는 압도적인 훈련량으로 일정 성적을 계속 보여주는 사례가 있는지... 안 그래도 세계 최고 레벨의 훈련량을 자랑하는 한국에서 그동안 난다 긴다 하는 독종 감독들이 수두룩 했는데, 그 감독들과는 상대도 안 되는 훈련량이라면..
일반적으로 프로스포츠는 비시즌 훈련으로 몸 만들기, 7, 80% 컨디션으로 시즌 돌입, 시즌 1/3 지점에서 100%, 나머지 시즌 동안 그 100%를 최대한 길게 유지하면서 서서히 까먹기.. 가 이미 증명된 수순 아니던가요.. 특히나, 우리나라 프로 여농의 경우, 합숙이라는 '괴상한' 체제 속에 있기 때문에 선수들이 개인적으로 refresh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전혀 없습니다. 가족과 친구, 보편적 일상이라는 최고의 정서적 테두리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된 선수들입니다. 아주 극악하게 표현하자면, 승부를 위해 사육 당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이런 환경에서조차 한순간도 선수들을 놓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100% 하라고 훈련으로 몰아넣는다면, 위험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체력고갈과 부상, 선수생명.. 모두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있는 것인데.. 이것이 실증적 사례를 요구할만큼 상식에 반하는, 즉, 의문을 품어야 하는 문제인가 싶습니다. 우리은행의 체력 고갈 문제는 이미 감독도, 선수도 다 인정하는 문제였는데...(선수들의 반복되는 체력문제 호소, 감독 간접 디스는 다른 팀에선 찾기 힘듭니다) 위성우 감독만큼의 무리한 훈련을 통해 폭망 사례는 프로스포츠 자체에서는 아예 없는 형편이라 들기가 힘들지만, 대신, 경기 기용 혹사로 인한 부상, 폭망 사례는 너무나 많습니다. 혹사라는 것도 결국, 체력고갈이 그 핵심이죠.
음. 저는 춘천을 사랑하는 춘천시민입니다. 옛날에 삼성전자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좋아하는 선수들 다 떠나고 프로화 되면서 농구 보기를 그만 뒀다, 올해부터 여농 보는 소위 '뉴비'인데요.. 시즌 초반에 어떤 팀을 응원할까, 아무런 선입견, 편견 없이 여러 경기를 관찰해보았습니다. 근데, 우리은행은 농구를 너무 잘하더군요. 붙는 팀들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경기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춘천시민이지만, 이 팀을 제 응원팀에서 제꼈습니다. 저는 우승이 너무 가깝고 당연한 팀보다는 지금은 별로지만, 우승했을 때 정말 기분이 좋을 것 같은, 간절하게 우승을 바랄 수 있는 팀이 좋거든요. 대신, 세컨팀으로 우리은행을 쟁겨놨죠.
근데, 우리은행의 그 압도적인 경기력이 어느 순간부터 줄곧 하향하고 있습니다. 다른 팀도 마찬가지라고 하셨는데, kb는 최근 절대 지분을 차지했던 에이스의 부진탓이라고 보고, 삼성생명, kdb는 전반기 보단 경기력이 올라왔다고 판단합니다. 물론, kdb는 올라온 경기력만큼 승수를 못 올리고 있긴 하죠. 그에 반해 우리은행은 경기력은 하향하지만, 꾸준히 승수를 적립하고 있는데, 저는 그 이유가 결국 체력이 다 털린 결정적 순간에 우리은행 선수들이 보여주는 작전수행력과 집중력이라고 보는데요.. 부진한 경기력 속에서도 결국 이기는 유전자를 심어준 것이 위성우 감독의 커다란 능력이라고 봅니다. 체력훈련을 잘 시키는 건 남들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저 이기는 유전자는 절대로 아무나 심지 못하는 것.. 다만, 하향의 이유를 생각해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팀에는 없는 '특별함'에 눈이 갔습니다. 다른 이유들은 잘 찾아지지 않아서.. 지옥훈련도 그 전까진 이들이 써낸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일부로 보았지, 딱히 문제라고 보진 않았었습니다.
나머지 써주신 본문글은 절대 동감하고요, 딱히 철회 근거로 쓴 건 아닙니다. 원래 가졌던 위성우 감독과 우리은행을 좋은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들었던 제 생각(주장도 아님), 우려, 안타까움을 조금 더 펼쳐보인 것에 불과하죠.
저도 요약 들어가요.
1. 히딩크 단기 처방 적용은 무리
2. 체계적인 특별한 프로그램, 없는 것으로 보인다(애석하게도..)
3. 휴식 없는 훈련 혹사도 혹사다.
마지막으로, 글 써주셔서, 웰컴입니다...^^
첫댓글 정성스런 댓글... 이 아니고 답글, 잘 읽었습니다. ^^
올려주신 내용중 한국프 로스포츠의 고질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심히 공감하는 바이구요 (합숙문화로 대표되는, 진정한 프로답지 않은 여러 모습들 등)
사실 이런 체력훈련이 실시되는 것 자체가 선수들의 기본기를 강화하고 기술을 연마/실행하기 위한 밑바탕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몸이 재산인 프로라면 체력훈련 정도는 알아서 해야 하지 않나' 라는 입장이고, 그래서 더더욱 선수들과 구단들의 마인드 전환이 필요하다고 보는거죠.
드릴 말씀은 많습니다만, 또 너무 길어질 것 같고... 춘천에 사신다니, 제가 직관하러 가게되면 언제 한번 뵙고 말씀나누고 싶네요. ^^ 바룬님과 함께라면 왠지 재미있는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