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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1
세상이 탄생될때부터 그는 존재하였고, 창조신 '라미루리'의 축복이자 저주에 걸린 그는 모든 인간이
원하고 바라는 영원한 삶의 굴레를 짊어지었다.
원하지 않아도 죽을수 없고, 모든 이들의 삶의 끝을 묵묵히 지켜봐야하는 그가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주신 '파라'의 특별한 사랑때문 일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억겁의 시간속에서 홀로 벗어나 있는 그를 가엽게 여기지는 못할망정 그의 거처를
찾기위해 무단한 노력과 시간을 들였지만 그가 거주한다 알려진 '그림자의 숲'은 허락받은 자들에게만
그 굳게 닫힌 숲의 입구를 열어주었다.
그림자의 숲은 이름과는 다르게 도도하다는 엘프들마저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였고, 자연을 사랑하는
그린드래곤은 물론이고 난폭한 레드드래곤 마저 이 아름다운 숲에 자주 찾아들고는 했다.
그리고 어느날 여전히 고요한 그림자의 숲에 낯익은 방문자가 찾아들었다.
"주시자를 뵙습니다. 그동안 무후하셨는지요, 마스터."
새하얀 백발을 늘여뜨린 노인이 젊디 젊은 여인에게 공손하게 허리숙여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군, 실티. 자네는 여전히 노안(老顔)을 좋아하는군."
칭찬이라도 들은마냥 양볼을 붉히는 노인.........은 과히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노인은 투명할만치 신비로운 새하얀 눈동자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몇천년을 보아왔지만 이분은 자신이 갓 날개짓을 할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성숙해진
여인의 분위기가 풍겼지만, 외형만은 20대를 갓 넘긴 숙녀의 모습일 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은 저 여인에게 창조신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라고 했지만, 과연 드래곤인 자신
보다 오래살고 앞으로도 죽지 않을 인간이란게 존재할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인간이라고 칭할수 있는 것일까??
"자네만은 여전히 날 가여이 보는군."
여인의 아픔이 섞인 말투에 노인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굴었군요."
진심어린 사과임을 잘 알고 있는 여인은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저정도의 미소를
얻기 위해 노인의 노력은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
"앉아서 말씀들 나누시죠. 아직까지 서 있는건가요."
은쟁반위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찻잔과 간단한 쿠키를 들고오는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며 그들
에게 다가왔다.
언제나 저 웃는 모습을 볼때마다 노인은 속이 뒤틀리는걸 느낄수 있었다.
"아직도 안죽은게냐?"
노인의 가시섞인 말에 차를 들고온 남자는 고개를 팽~ 돌린채 여인에게 봄날의 꽃잎같은 미소를 날려
주기 바빴다.
"가온, 오늘은 그대가 좋아하는 스프를 만들어 두었어요. 후식으로는 칼메르 산맥에서 가져온 얼음으로
빙수를 만들어놨어요."
남자의 말에 놀란건 오히려 노인쪽이었다.
"칼메르 산맥? 마지가 승락했는가?"
언제나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산은 높기도 높았지만 그곳에 레어를 가지고 있는 오만한 실버 드래곤이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산에 누군가의 손길이 닿는걸 극도로 싫어하는 자였다.
노인의 걱정섞인 어투와는 달리 남자는 콧방귀를 뀌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흥~ 감히 누가 내 발걸음을 막는데?"
결론은 몰래 훔쳐왔다는 소리였다.
도대체 창조신 라미루리는 무슨 생각으로 저 오만방자한(누가 누구보고 오만방자라 하는지는 모르겠
지만) 유니콘이란 생명을 만들어 논건지, 노인은 혀를 차댔다.
드래곤과 비교해 뒤처지지 않는 마법력과 마법구사력을 지닌 유니콘은 드래곤의 강인한 육체와는 달리
새하얀 말의 형상이다. 이마에는 마법력의 결정체인 투명할만치 하얀 뿔이 있고, 어떠한 모습으로
바뀔수 있는 드래곤과 달리 태어날때 정해진 성별로 폴리모프를 할수 있었다.
드래곤과 같은 점이 참 많은 생명체임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다른 한가지가 있었다면, 그들은 숯처
녀와 숯총각에 목숨을 건다는 사실이다. 남성체의 유니콘은 순결한 처녀만 보면 모든것을 다 (생명마
저) 줄 정도로 그 집착력은 대단한게 유명한 사실이다. 물론 여성형 유니콘은 순결한 남자만 보면 그
러니..
유니콘이 바람둥이란 말은 그다지 틀리지는 않는다.
그런 유니콘이 몇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녀의 곁이 있다는건 아직 처녀라.....는 사실을 상기한 노인의
새하얀 얼굴이 보기좋게 익은 사과마냥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일부러 나이와 맞지않게(?) 노인의
얼굴을 하는 것은 저 삶의 희망을 잃은 여인을 품지못함인데, 아직도 처녀라니.
쿡. 혼자 망상의 나래를 펼치는데 노인의 옆구리를 남자가 찔렀다.
"가온은 내가 먼저 찜했다고. 넘보지마, 이 도마뱀아."
낮게 으르렁 거리는 유니콘의 모습을 보자 화이트 드래곤 실티의 이마에는 십자가 모양의 혈관이 튀어
나왔다.
"저분께서 널 그저 몸종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걸 모르냐, 이 망아지야."
"뭐야!!! 가온은 날 좋아해!!!"
"그저 말 잘듣는 집사겠지."
"이....이..."
유니콘은 순수한 생명체이다. 그러므로 욕설은 잘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한다. 얼굴만 붉어진채 씩씩
거리는 모습에 가온이 차를 홀짝이다 작고 하얀 손으로 쇼파를 가볍게 두어번 치자, 귀 좋은 두 종족 중
한명은 무슨뜻인지 모른다는 표정으로 가온을 바라보았지만 한명만은 잽싸게 날아가 가옥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작고 긴 손가락이 유니콘에서 강아지로 변해버린 남자의 푸른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고귀한 생명체라 자부하던 유니콘이 여인의 손끝에서 한낱 강아지로 바뀐걸 창조신이 본다면 땅을치고
통곡을 할지도 모른다.
허나, 그 모습을 바라보며 부러움에 몸서리를 치는 이가 있었으니...
"부러운놈..."
들리지 않게 중얼 거렸지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가온과 원래부터(본체가 말인) 귀가 좋은 남자는
똑똑히 들렸다. 연분홍빛 혀를 낼름 거리는 남자와 여전히 멍한 표정을 고수하는 가온을 바라보는
실피로서는 부아가 치밀러 올랐다.
"실피... 자네도 와서 앉지?"
"아, 감사합니다."
어느새 가온의 가녀린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건방진 유니콘.
"오늘은 무슨일로 온거지? 약속의 날은 아직 기한이 남은걸로 알았는데..."
"약속의 날로 온것이 아닙니다. 긴히 마스터께 상의할 문제가 있어 이렇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미안한 듯이 고개를 숙이는 실피를 향해 가만있을 유니콘이 아니었다.
"그럼 가버려!!! 신혼집(?)에 불쑥 찾아오는건 예의가 아니라구!"
빠직.
언젠가는 저 건방진 망아지 새끼를 통구이로 만들어 버리리라고 다짐하는 실피였다.
"샤인, 자꾸 그러면 쫓아낼꺼야."
"잘못했어..."
"착한 아이는 그러면 못써."
"응!!! 샤인은 착한 아이야!!"
자신이 인내심이 강한 화이트 드래곤임을 감사하는 실피였다. 가온의 반응은 이해되지만 저 빌어먹을
망아지의 이중성은 도저히 눈을 뜨고 볼수 없을 정도다.
"대화를 끊어 미안하군."
"아닙니다. 제가 상의 드리고 싶은건 저희 종족에서 이번에 새 생명들이 태어난걸 아십니까?"
한손으로는 샤인의 푸른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찻잔에 입을 대는 가온의 고개가 끄덕였다.
"모처럼 4명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마치 자신의 아이인거 처럼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실피를 바라보며 가온은 짙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4명이나 태어나다니, 그대들의 신께서 이번엔 기분이 좋았나보군."
다른 사람이 저 말을 한다면 농이거나 그저 예의상 말하는걸로 들리겠지만, 인간으로써 신과 마 그리고
용족과 기타등등 인간으로써는 일생에 단 한번도 만나기 힘든 이들을 너무 자주 보는 가온의 말이라면
지극히 진심이다.
실피 역시 이번에는 자신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신룡)께서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나보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어째서?"
이번에 대답한 것은 호기심이 무척이나 왕성한 유니콘 샤인이 짙은 녹색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대답했
다. 잠시 대답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실피였다.
"플리타나가 태어났습니다."
"플리타나?"
궁금해하는 샤인은 두명을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대답을 해주지 않고 그저 심각한 표정
을 짓고 있기만 했다.
"신탁은?"
"그게... 신룡께서 보내신 천인이 있긴 했지만.... 플리타나의 어미가 잡아 먹어버렸죠."
신탁을 가져다준 천인을 잡아먹었다는 것은 신룡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고 해석하기 딱 좋았다.
"부모가 누구지?"
마치 곤란한 질문이라도 받았다는 듯 실피의 안색이 낯빛으로 굳어져 버렸다.
"그린족의 세이마린과 블랙족의 타미야 입니다."
'둘다 성격 고약한 녀석들이잖아!!!'
라고 외치고 싶은게 샤인의 심정이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대로 블랙드래곤은 그 성격이 포악하고 흉폭하여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자자
했고, 의외로 숲을 사랑하는 그린드래곤은 숨겨진 심성이 음흉하며 다혈질 이었다.
"그럼 신의 사자는 타미야가 먹어치운 거겠군."
"네..."
깊은 한숨과 동시에 떠오른 것은 자신이 수장으로 있을때 이런 골치를 안겨준 신룡께 욕지거리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분의 성격상 능글능글하게 대처해 자신의 연약한 신경을 파괴할게 뻔했다.
"문제는 그 사자가 신룡께서 보내신건 맞지만... 뮤디엘님 휘하에 있던 자인터라..."
"소멸하겠군."
"휴우...네."
드래곤은 모계사회다. 자식을 어머니가 돌보며 500살, 성인식까지 어머니의 품에서 보살핌을 받고
아버지는 절대 관여하지 않아야 된다.
그런데 지금 아이의 어미인 블랙드래곤 타미야가 신의 사자를 죽였다. 현재 수장인 실피는 헤츨링에게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빼앗을수 없었다. 하지만 신의 사자를 죽인건, 그것도 잘근잘근 씹어 먹은걸 알게
된다면 전쟁의 신 뮤디엘이 가만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분명 인계(人界)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천군과 드래곤들의 싸움이 벌여질 것이다. 그것은 중간계를 파괴
하는 일이므로 중간계(=인계)의 대표자 격인 가온에게 조언을 구하러 온것이다.
"중간계에서 전쟁을 하겠군."
냉정한 가온의 말에 실피는 고개를 떨군채 죄지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될거 같습니다.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신들은 인간들을 앞세울테고, 마족마저 이 틈을 타서
저희와 신족 모두를 몰아낼려 하겠죠."
"내가 전면으로 나섰을때의 파장은 예상한건가?"
"모르는게 아닙니다. 신족, 마족, 인간들 뿐만아니라 미물까지도 가온을 괴롭히겠지요. 알기에 염치
불구하고 찾아온겁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마스터."
깊은 한숨을 내쉬는 실피와 걱정스런 눈빛을 하는 얌전한 샤인. 그 둘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들고있는
하얀 찻잔을 뚫어져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한참이 흐른 후에나 무겁게 닫혀있던 가온의 붉은 입술이 들썩였다.
"드래곤의 수장께서 청하신 문제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첫댓글 길어서 좋아요! 재미있습니다.
와!! 댓글달릴줄 몰랐어요 ㅠ_ㅠ 감사합니다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