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ㆍ김용섭 전 연세대 교수 회고록
역사학자 김용섭 전 연세대 교수(80·사진)가 팔순을 맞아 회고록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지식산업사)를 펴냈다.
부제가 ‘해방세대 학자의 역사연구 역사강의’인 회고록은 역사학자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과 한국 농업사 연구에 투신하게 된 계기, 이를 바탕으로 식민주의 역사관을 극복해 온 여정 등이 망라돼 있다. 회고록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그가 1959년부터 75년까지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다가 왜 연세대 교수로 옮겨야 했는지를 밝힌 대목이다.
서울대에 있을 수 없던 사정으로 김 교수는 1960년대에 전개하기 시작한 ‘문화 학술운동’을 들었다. ‘한국사 또는 한국문화는 주체성 없이 타율적으로 움직여 왔고 내적 발전이 결여돼 있다’는 식민주의 역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그의 활동이 기성세대의 반발을 불렀고 서울대 문리대 내부, 특히 사학과 내부에서 적지 않은 알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회고록에 따르면 학과 동료 교수이자 선배인 고 한우근·김철준 교수에게 강한 질책을 받기도 했다. “(김철준 교수가) 한 번은 나를 보고 웃으시며, ‘김 선생, 김 선생 민족주의는 내 민족주의와 다른 것 같아’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은 노발대발하시며, ‘이○○ 선생에 대해서 무슨 글을 그렇게 써!’ 하시며 질책하셨다.” 한우근 교수도 여러 사람이 있는 가운데 “김 선생, 우리 이제 민족사학 그만하자”고 했다고 회고했다.
회고록에서 놀라운 점은 식민주의 역사학의 당사자인 일본 학자들이 김 교수에게 압박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너덧 명의 중년·노년 교수가 내방하였다. 노크를 하기에 문을 열었더니, 김원룡 교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제 때 경성제대에서 내가 배운 스에마쓰 선생님인데, 김 선생 강의를 참관코자 하시기에 모시고 왔어요. 김 선생 되겠지?’ 하는 것이었다.” 스에마쓰 야스카즈는 조선총독부 관리이자 경성제국대학 교수로서 임나일본부설을 체계화하는 등 식민주의 역사학을 수립한 중심인물이다. 당시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교수인 김원룡은 경성제국대학 시절 스에마쓰의 제자였다.
이렇게 학교 안팎에서 압박이 거세지자 “그리하여 나의 문화 학술운동은 사실상 끝이 났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서울대학교의 관악산 이전을 계기로 나도 이 학교를 떠났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1975년 서울대를 떠난 그는 서울대 사범대 시절 스승인 고 손보기 교수가 재직 중인 연세대 사학과로 자리를 옮겨 일하다가 97년 정년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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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학이 우리나라 사학계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일생을 한국농업사에 바친 김용섭 전 연세대 교수님의 고초가 얼마나 심했을지.......
이번 기회에 김 교수님의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를 꼭 사서 읽어야 겠습니다.
참고로, 저 기사에 언급된 김원룡 교수는 고고미술사학계의 대부로 을지문덕 장군읯 출자가 선비족이라 주장하신 분이죠.
타 카페에서 퍼온 내용 입니다만..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좀 심각한거 같은데..
울나라 사학의 시작부터 그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실 분이 계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댓글 일제시대 식민사관이란건 실제로 존재하는데요, 하지만 무슨 사실 중국은 우리나라땅이였는데 갑자기 일본이 뒷통수쳐서 갑자기 한반도로 몰아넣어서 중국이 독립하고 무슨 말같지도 않은 궤변의 빌미가 돼는 황당한 경우가 많아서..
식민사관의 존재 이유가.. 황당한 궤변의 주장들이 많아서라는 말씀이신지..--;; 죄송하지만..머라 하시는지 잘 이해가 안가네여...
이해한 바로는.. 만일 식민사관의 존재 이유가.. 황당스런 극단적 민족주의 사관 때문에 존재하신다는 뜻으로 말씀하신건지요? 그렇다면 식민사관은 반대로 극단적인 민족비하사관 이라는 뜻도 되는 건지요?
머 제 궁금한건 이런 내용은 아녔지만..
자유기사님 말씀은 한국인을 입맛대로 통치하기 위해 역사를 날조한 식민사관이 존재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오늘날 그게 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혹은 할 생각도 없는) 환빠들이 얘기하는 '원래 중국까지 모두 우리땅이었는데 ~~ (이하 중략) 등' 말도 안되는 개소리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거지요.
+ 식민사학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시다면, 금서룡과 복전덕삼이 한 말에 대해 찾아보시면, 대충 이해가 가실겁니다..
지금은 수십년에 걸쳐서 식민사관의 잔재를 없앨려는노력으로 인해 많이사라진상태입니다. 극단적인 민족비하사관이란게 '우리가 중국에 땅을 차지하였고 만주전역과 몽골을먹었고' 등의 영토나 대물주의 사관에 대해 부정하는것이 아닌 임나일본부나 그런것에 대해서라면 지금 현존하는 사학계에선 거의 없다고 보입니다.
음.. 식민사관을 극단적민족주의사관 쪽에서 악용해 왔다라는 내용은 이해가 가네여...단지 식민사관의 형성과 뿌리에 대한 질문 과 더불어 현재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알고 싶었던 건데..쌩뚱맞은 답을 달아주신거 같아서...
여튼..제가 여쭙고 싶은건 위에 쓴데로 울나라 식민사학의 과거와 현재... 인데여.. 저 윗 기사대로라면 70년대 중반까지도 식민사학의 영향이 주류 사학에 깊게 영향을 미친거 같은데..
카즈사노스케 님 말씀대로라면.... 식민사관이 존재하기는 하였다고 하셨다는 표현 대로라면.. 지금은 식민사관을 극복했다는 말씀 같은데... 어떤 과정 등을 통해 이를 극복하게 된건가여?
아 그리고 정보 감사합니다~
식민사학의 거두라고 재야사학이 비판하는 이병도 부터가 민족주의적 성향을 심하게 띄고있는분이였던걸 보면 해방직후부터 일제시대의 그것으로 따지자고한다면 거의 사라져가기시작했다고보아야됩니다.
근데 제가 답변을 좀쌩뚱맞게 달았나요?;;; 제 의견도 같이첨부해서그런건지; 그냥 궁금해서물어봅니다. 뭐 어쨌거나 답변이되서 기쁘군요^^.
아 실시간 댓글이..ㅎ 감사합니다.
근데.. 제가 알기론 말씀하신 소위 대물주의 사관에 입각한 소위..머 우리가 중국 땅을 지배했고 몽골 먹었고 그런 내용은 주류 사학인적도 없었잖아여? 가령 대부분의 국사 교육을 받게되는 중/고교 교과서에서 그렇게 가르친적도 없고 걸로 알고 있는데여...해방 직후부터 여튼 식민사관을 극복했다손 쳐두.... 그렇다면 대물주의에 입각한 사관이 주류에 존재했었던적이 있었던 건가여?
또한 위의 기사에 따르면.. 70년대까지 식민사관의 잔재가 있었다고 김용섭교수란 양반이 야그하고 있는데 이분은 걍 주류에 밀려 나와서 하는 투정인건가여?
아뇨 제말은 그런 대물주의에 입각한사람들이 역사교수들을 비판할때 종종쓰는말이 식민사학이라는겁니다. 주류에 밀려서 썼을가능성도 농후한데 왜냐면 지금 현재에서조차도 주류에서 잘받아주지않았던 이희진 역사학자라든가 방송에서 취재했을때 식민사학에 관해언급한적있거든요. http://cafe.daum.net/shogun/1Db/4237 여기글을 보시면 예시가될수있을거같네요.
아 또 임나일본부 나 이런 주장이 현존 사학계에는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반대로.. 그런 주장을 우리 교과서 등에서도 가르치거나 한적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여?
그냥 잠시 지나가는 것으로, '일본 사학계가 광개토대왕비를 가지고 임나일본부를 주장하는데 거의 거짓에 가깝다' 뭐 이렇게 비슷하게 나옵니다. 참그로 임나일본부는 현존 사학계에 없는 것이 아니라 변형된 형태로 지금 논란 중이지요. 현재 영산강이나 가야 지방에 왜계 유물이 상당히 많이 발굴되고 일본도 역시 韓계 유물이 많이 발견되니 임나일본부를 완전히 부정하기는 힘듭니다. 다만 전에 일본이 주장하는 것 같이 '아, 위대한 여결인 신공황후가 삼국 정벌했다' 나 '임나일본부는 일본이 세운 식민지' 이런 주장은 현재 일본 학계에서도 거의 사라진 주장이지요.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신공황후 하니까.. 예전에 읽은 책중에 색다른 주장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여.. 부여기마민족과 왜라는 책이였던가? 주류 사학자는 아니였던거 같던데.. 여튼 신공황후는 부여 기마민족 출신으로 고구려? 등의 세력에 밀려 남하하여 백제 중재로 가야의 한 연방 중 어떤 왕이랑 결혼하고 이후 일본으로 정복해 들어갔다.. 이를 통해 부여계 문화권의 왜 정부가 200년간 세워졌고 이후 백제계로 물갈이? 됐다라고 주장하던데... 이 학자 주장에 따르면..한마디로 왜와 반도 남부 일부는 일정 시간동안은? 동일한 문화권이라는 야그가 되는듯한데.. 머 이 사람 개인의 주장이니까여..
머 제 개인적으로는.. 현 일본에서 대규모 왕릉부터 해서.. 많이 있지만.. 그게 일본 열도에 있다고 해서.. 일본인? 들의 업적이냐...? 그렇게는 생각이 안들어여..
그 주위에는 태반이 백제귀족들 무덤에.. 일본 정부에서도.. 왕릉 몇개 발굴했는데 한반도계 유물들 쏟아지고.. 그이후 천황 무덤은 발굴 못하게 하고.. 하는 등을 봐서는 일본에서의 자연적 고대국가 형성 및 그 에따른 정복 활동 등의 주장에 대해서는.. 별로 믿음이 안가긴 해여..
아예없다는게 아니라 거의 일제시대의 임나일본부 일본이 식민지를삼았다는식의 설은 '거의'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는말이였습니다.
로스차일드님 답글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 이후.. 식민사학의 색을 벗어 났으나...
이후 소위 대물주의 입각한 재야 사학자들이 주류사학을 까기위해서 식민사학이라는 말을 끌어다 썼다는 말씀이시군여..
잘 알겠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40년 전 얘기라는 것에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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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이 한 때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역사학자들의 세대교체 및 역사학적 방법론의 발전과 함께 당차게 극복해낸지가 이미 수 십년 전인데 아직도 저걸 '현재진행형'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문제죠.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예) 조선은 스스로 근대화 할 수 없는 역사적 풍토(무능한 정치, 무식한 백성등등)를 가지고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근대화를 이룬 이웃국가(내선일체에 따르면 형제국가)가 도와주어야 조선이 근대화될 수 있고 그렇게 동양이 힘을 키워 서방의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다.- 아주 극소수이긴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긴 있죠
예2) 일본에 의해 연구된 한반도 역사가 정설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저 김용섭에 의해 주장된 자본주의 맹아론과 경영형부농론이 김용섭이 떠난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거의 종교교리수준으로 신봉되고 있답니다.
조선사회정체성론의 극복에 있어서 김용섭은 대단히 비중있는 인물이지만, 그게 과잉된 자본주의 맹아론 덕택에 여러모로 학론적으로 까이고 있죠. 1983년에 제기된 이영훈의 소농사회론부터 시작해서..
서울대 -> 경성대(일본대) 인증인가요? 실망스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