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특별히 부주의한 것도 없는데 미추부터 요추 통증 때문에 우울한 주말입니다. 가족들이 살짝 보고 싶었지만 곧 괜찮아졌어요. 어머니 환갑잔치를 삼베 모시 옷을 입고서 나윤 부패에서 했는데 눈 깜빡할 사이에 30년이 사라졌습니다. 90살 노모의 여름 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지척에 두고 가지 않는 호래자식을 용서하지 마시라! 우리는 매일 수많은 <부주의>라는 폭력을 부지 부식 간에 저지르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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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 입구에 앉아 있는 노숙인을 볼 때, 그의 구체적인 삶과 고통을 마주하기보다 '도시의 문제'라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그를 밀어냅니다. 신문을 통해 전쟁과 기아에 시달리는 소식을 접할 대 잠시 안타까움을 느끼기는 하지만, 이내 그들을 불쌍한 난민이라는 익명의 집단으로 분류하고 다음 뉴스로 시선을 옮깁니다. 이처럼 타인의 고통을 편리한 꼬리표 뒤로 숨기거나, 통계 수치로 환원하거나, 해결해야 할 문제로 대상화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주의 폭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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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강도 만난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보고도 그냥 지나쳤습니다. 보지 못해서 지나친 게 아니라, 보고도 지나쳤습니다. 시몬 베유는 바로 그런 행동이 바로 (부주의의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리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부라입니다. 아브라함은 한 가족의 가장이고 한 부족을 책임지는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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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게 집과 집 사이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와 다른 타자이며, 이질적인 존재에 불과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부람은 아브라함으로 그 이름과 존재가 바뀝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입니다. 아브라함은 집에서 출발했지만 마침내 도착한 곳은 집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폭력의 근원에는 내 가족, 내 나라, 내 종교만을 사랑하는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모든 폭력의 근원에 ‘내 가족, 내 나라, 내 종교만’을 절대화하는 좁은 사랑이 있다면, 그 경계를 넘어서는 첫걸음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어텐션! 잠시 멈추는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일까, 아니면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도 나와 상관없는 일로 만들어버리는 ‘부주의’일까?
2.
보고도 지나치는 것은 폭력인가? 특별히 부주의한 것도 없는데 미추부터 요추까지 통증이 있어서 우울한 주말입니다. 가족들이 살짝 보고 싶었지만 곧 괜찮아졌어요. 어머니 환갑잔치를 청량리 부페에서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눈 깜빡할 사이 30년이 사라졌습니다. 그때 함께했던 사람들이 문득문득 그리워집니다. 다들 보고 싶어요. 시간이 참 이상합니다. 하루는 더디게 지나가는데 30년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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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것을 보았느냐보다 "무엇을 제대로 바라보았느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부주의’의 폭력을 부지불식간에 저지르며 살아갑니다. 지하철역 입구에 앉아 있는 노숙인을 보면서 그의 이름과 살아온 시간, 지금 그곳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사정을 생각하기보다 ‘도시의 노숙자 문제’라는 추상적인 개념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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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소식을 접할 때도 잠시 안타까워하지만, 곧 ‘난민 몇만 명’, ‘사망자 몇백 명’이라는 숫자로 환원하고 다음 뉴스로 넘어갑니다. 사람을 보았지만 한 사람을 보지는 않은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시몬 베유의 사유가 날카롭게 들어옵니다. 베유에게 인간에 대한 진정한 관심, 즉 주의(attention)는 단순히 오래 쳐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판단과 욕망을 잠시 내려놓고 타자가 자기 모습 그대로 내 앞에 존재하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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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랑의 반대편에는 증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주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떠올려봅시다. 강도 만난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못 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들이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말합니다. 보았지만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도 똑같은 사람을 봅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하나입니다. 그는 불쌍히 여겼습니다. 같은 눈으로 보았지만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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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에게 쓰러진 사람은 자신의 일정에 끼어든 장애물이었을 수 있고, 레위인에게는 위험하거나 번거로운 존재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에게 그는 어느 집단의 구성원이기 이전에 지금 내 앞에서 피 흘리고 있는 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거대한 감정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멈추어 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시몬 베유의 언어를 빌리면 사랑은 타인을 나의 생각 속으로 끌어오는 일이 아니라, 내가 잠시 비켜서서 그 사람이 존재할 공간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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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주의 깊게 바라본다’는 행위는 윤리적 사건이 됩니다. 여기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의 이름 변화도 흥미롭게 연결해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브람’은 흔히 '높임받는 아버지’,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의미로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이름의 변화는 단순히 한 부족장의 성공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한 사람과 한 가족을 넘어 열방을 향해 확장되는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은 집을 떠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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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단순히 지리적으로 집을 떠났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 것’이라는 경계를 넘어서는 삶으로 부름받았다는 것입니다. 내 가족, 내 민족, 내 종교, 내 편만 사랑한다면 사랑은 쉽게 폭력의 명분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타인의 가족을 무시하고, 조국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다른 민족의 고통을 외면하며, 신앙을 지킨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면 사랑은 이미 자기모순에 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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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가족만 인간이고 남의 가족은 숫자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착하게 살자”는 도덕 이야기를 넘어섭니다. 예수께서 처음부터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에 이웃의 범위를 정해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마지막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고 질문의 방향을 뒤집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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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베유의 ‘주의’와 놀랍도록 만납니다. 타인을 불쌍한 사람, 노숙자, 난민, 외국인, 환자, 가난한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규정하지 않고 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추상적인 ‘타자’가 아닙니다. 얼굴이 생깁니다. 이름이 생깁니다. 이야기가 생깁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이전처럼 쉽게 지나갈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어쩌면 폭력의 시작은 주먹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타인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것에서 폭력은 이미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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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모든 노숙인을 돕고 모든 난민을 구하고 모든 전쟁을 멈출 수도 없습니다. 그런 요구는 인간에게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내 앞에 나타난 한 사람을 너무 빨리 ‘문제’와 ‘통계’와 ‘집단’으로 바꾸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사랑은 세상을 한꺼번에 구하는 능력이 아니라 내 앞의 한 사람을 지워버리지 않는 능력인지도 모릅니다. 30년 전 가족들이 모여 어머니의 환갑을 축하하던 장면이 문득 그리워지는 것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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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거대한 사건보다 사람의 얼굴입니다. 함께 밥 먹던 사람, 웃던 사람, 이름을 불러주던 사람입니다. 결국 인생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지나쳤느냐보다 <몇 사람 앞에서 멈추었느냐>로 기억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브람은 집을 떠나 아브라함이 됩니다.사마리아인은 길을 가다가 멈춤으로써 이웃이 됩니다. 그리고 시몬 베유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아니, 누구를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가?
2026.8.15.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