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146. [역경의 열매] 조서환 (1-14) 내 삶의 위기 극복… '생각의 태도'가 좌우했다
KTF 부사장 사직후 무작정 중국으로 화장품 사업 도전… '근성'으로 성공해
2010년부터 중국에서 화장품 사업을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중국 사업을 시작한 것 자체가 대단한 용기요, 무모한 결심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나는 8조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던 KTF의 부사장이었다. 시스템이 잘 갖춰진 이 회사에서 마케팅 지식과 경험을 발휘해 사업을 성장시켰지만 KT와의 합병으로 나와야 했다.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을 때 중국에서 화장품 사업을 해보자는 제안을 받고 무작정 중국으로 갔다.
중국사업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막상 가 보니 판매할 제품도, 인재도, 광고비도 없었다. 게다가 언어, 문화, 중국인들의 습성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마케팅을 하려니 막막했다. 정말 나를 힘들게 한 건 힘들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는 점이었다. '마케팅의 귀재'라 별명을 지어준 이들이 비웃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결국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이유를 찾았다. 바로 내 삶 전반을 관통한 키워드, '근성'이다.
누구나 살면서 위기를 겪는다. 얼마나 큰 위기냐, 빨리 왔느냐 늦게 왔느냐의 차이는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위기를 모두 몇 번쯤 겪는다는 사실이다. 내게 위기는 매우 일찍 왔다. 팔팔한 스물세 살 육군 소위, 초급장교 시절이었다. 수류탄 폭발 사고로 오른손을 잃었다. 엄청난 좌절에 빠져 허우적거렸지만 내 인생의 구원자인 아내 덕분에 삶의 목표가 생겼다. '이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자'란 명확한 목표를 세우자 어떤 난관도 헤쳐나갈 수 있었다. 아내의 도움으로 구원도 받을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손 없는 세월을 어떻게 인내하며 사셨습니까." "수많은 장애물을 어떻게 헤쳐나갔나요." 생각해 보면 내게 위기는 한쪽 손을 잃은 것만이 아니었다. 첫 직장 면접에서 좌절을 겪고 막다른 데까지 몰려 비관적인 생각을 했었다. 수많은 상품을 히트시키면서 겪은 우여곡절, 정보통신(IT)에 대해 전혀 모른 채 들어간 KTF에서 좌충우돌하며 지냈던 8년. 직장생활을 하며 맛볼 수 있는 극한의 절망과 희열을 모두 느낀 시간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세라젬 헬스앤뷰티 사장으로 조직을 이끌며 중국대륙에서 진검 승부를 펼치는 지금은 순간순간이 긴장과 위기의 연속이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즐겁다. 스스로를 행운아라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하지만 진실로 매사에 감사할 일이 넘친다. 하나님 은혜를 많이 받고 살아와서다. 그렇다고 저절로 행운이 내게 오길 무작정 기다리지는 않았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배웠고, 후배가 들어오면 마지막 한 톨의 지식까지 다 털어서 가르쳤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대개 참았지만,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는 CEO에게 거침없이 따졌다.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세상살이가 팍팍해지자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처세 잘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절망하고, 자신의 꿈을 펼칠 곳이 없다며 방황한다. 내 진가를 몰라준다며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분들께 간곡히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인생은 멘털 승부'라고.
돌이켜 보면 내가 마케팅 영역에서 이만한 위치에 오르고 멘토라는 말을 듣게 된 것도 결국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생각의 태도' 덕분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순간도 있었고 커리어 생명이 끊어질 위기도 맞았지만 오로지 '나는 될 것이다'라는 마음가짐 하나로 이겨냈다. 인생에서 위기는 계속되지만 생각의 태도를 바꾼다면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 [역경의 열매] 조서환 (1) 내 삶의 위기 극복… '생각의 태도'가 좌우했다
* [역경의 열매] 조서환 (2) 소위 임관 기쁨도 잠시… 수류탄 사고로 한 손을
* [역경의 열매] 조서환 (3) 초등 1년때 만난 아내, 오른손 잃은 나의 청혼에…
* [역경의 열매] 조서환 (4) "한 손밖에 없어 안된다" 취업 냉대를 극복하다
* [역경의 열매] 조서환 (5) 면접장 소동에 애경 장영신 회장 "영어로 해보세요"
* [역경의 열매] 조서환 (6) 1980년대 초반 '마케팅'에 내 삶의 미래를 걸다
* [역경의 열매] 조서환 (7) 준비된 마케팅·영어 실력으로 '하나로샴푸' 대박
* [역경의 열매] 조서환 (8) 이직 4년째 애경 장 회장 콜에 '돈보다 의리' 선택
* [역경의 열매] 조서환 (9) "불가능은 없다" 한손으로 골프 입문 87타까지
* [역경의 열매] 조서환 (10) 1등을 따라하는 '미투 전략' 대신 '1등 전략'을
* [역경의 열매] 조서환 (11) 갑작스런 대기발령… '위기는 기회' 새 인생 준비를
* [역경의 열매] 조서환 (12) 난공불락 中 시장… 매일 "길 열어주세요" 기도
* [역경의 열매] 조서환 (13) 교회 출석 30년만에 중국서 '회심의 눈물' 펑펑
* [역경의 열매] 조서환 (14·끝) 한 손으로 일군 '마케팅 1인자'… 주님 감사합니다
◇약력=1957년 충남 청양 출생. 경희대 영문과 졸업. 경희대 경영학 박사. 81년 애경유지 입사. 92년 다이알코리아 이사. 94년 한국로슈 이사. 96년 애경산업 상무. 2009년 KTF 부사장. 현 세라젬 헬스앤뷰티 대표이사. 서울 서초교회 집사
***[역경의 열매] 조서환 (2) 소위 임관 기쁨도 잠시… 수류탄 사고로 한 손을
칠갑산 산골마을서 8남매 중 다섯째로 주위 분들 "너는 될성부른 놈" 늘 칭찬
나는 청양고추로 유명한 충남 청양 칠갑산 자락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늘 하늘이 푸르고 햇볕이 좋아 우리 고장 고추와 구기자는 유난히도 맵고 빨갰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집은 이곳에서 대대로 고추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어머니는 자그마치 자녀를 10명이나 낳으셨다. 어려서 두 명이 죽고 8명만이 살아남아 성장했다. 우리는 대개 두 살 터울이다. 어머니는 무려 20년간 애를 낳은 것이다.
나는 8남매 중 5번째다. 무척이나 가난한 형편 탓에 아버지는 8남매를 모두 학교에 보낼 수 없었다. 지금도 작은누나가 중학교 안 보내준다고 슬피 울던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늘 부족한 형편에도 어머니는 머리에 쌀을 이고 십리 밖의 절에 꼬박꼬박 공양미를 바쳤다. 자녀들이 잘되게 해달라고 빈 것이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불교 집안에서 자란 내가 크리스천 아내를 만나 예수 믿는 사람이 된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다.
아버지는 형제들 중 나를 유난히 잘될 놈으로 믿었다. 골목대장으로 애들을 호령하고 다니며 또래보다 기골이 장대한 모습 때문에 대장 감으로 보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에 대해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혼은 자주 내면서도 웃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어서다. 그래서일까. 내 기억 속 아버지는 매우 권위적인 분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가끔 나를 칭찬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쯤의 일이다. 내 손을 잡고 서울에 다녀온 아버지께서 식구 앞에서 내 칭찬을 했다. "허허허, 얘는 서울 데리고 가도 서울 놈들하고 하나 다를 게 없어. 서울 시내를 자기가 앞장서 가는 거야. 어깨 쫙 펴고 신세계백화점도 막 휘젓고 돌아다니고. 얼굴도 그렇지, 이놈은 크게 될 거야."
네다섯 살 때 누가 장래희망을 물으면 매번 이렇게 답했다. "서울군수요, 서울군수." 서울군수가 뭔지도 모르면서도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그러자 할머니와 아버지도 '얘는 서울군수 될 놈'이라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춤을 잘 췄던 것도 가족에게 '될성부른 놈'으로 보인 한 요인이다. 시골에서 춤 경연대회를 하면 나는 항상 빠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려서부터 '서울 놈들과 맞붙어도 하나도 부족한 게 없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때부터 자신감이 커졌던 것 같다.
그렇지만 고등학교까진 시골에서 보내야 했다. 아버지는 공부도 공짜로 하고 취직도 동시에 되는 직업군인이 내 갈 길이라고 생각하셨다. 나는 육군3사관학교에 진학해 2년간의 훈련을 마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모든 일이 잘될 것 같았고 자신감 넘쳤던 내게 운명 같은 사고가 일어났다.
수류탄 사고로 손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이젠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아버지 심정은 어땠을까. 지금 생각해도 참 끔찍하다. 자식을 길러봐야 부모의 심정을 안다고 당시 내가 아버지였다면 정말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가장 기대했던 자식이 그리됐으니 얼마나 실망이 컸을까.
그때 난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봤다. 지금까지 우는 모습은 전혀 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아버지는 5분간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을 흘렸다. 보다 못한 내가 병상에서 아버지를 위로했다. "아버지, 군 생활은 더 이상 못하지만 저 살아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내가 자살할까 걱정됐는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전 재산 다 팔아 너 줄 테니 꼭 살아야 한다." "네, 반드시 멋지게 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부자간의 대화는 무거웠다. 손 잃은 소위가 아버지를 위로했다는 소식은 간호장교에 의해 온 병원에 소문이 났다. '대단한 육군 소위! 저 상황에 아버지를 위로하다니!' 존경심이었을까. 이후 모든 간호장교들이 잘해줘 투병생활을 조금이나마 편히 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조서환 (3) 초등 1년때 만난 아내, 오른손 잃은 나의 청혼에…
"아직도 나를 사랑해" 병상의 질문에 아내 "이젠 내가 당신 곁에 있을게요"
아내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1학년 때다. 어찌나 공부를 잘하던지 초등학교 때 그 사람 성적을 앞선 적이 없다. 어린 마음에 '저 애와 결혼하면 좋겠다'란 생각을 했다. 이 생각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변하지 않았다. 고교 졸업 직후 육군3사관학교에 입교했을 때는 연애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고1 때부터 펜팔 친구로 지낸 우리는 편지를 엄청나게 주고받으면서 지고지순한 사랑을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육군 소위로 임관한 지 얼마 안돼 오른손을 잃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입원해 있는데 그 사람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렇지만 머리와 팔에 붕대를 칭칭 감은 모습을 보이려니 덜컥 겁이 났다. 한 손이 없는 상태로 그녀를 어떻게 만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머릿속에 세 가지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첫째, 나를 본 순간 놀라 도망칠 것이다. 둘째, 이게 웬 날벼락이냐며 엉엉 울 것이다. 셋째, 기가 막혀 멍하니 서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반응을 보이든 내 가슴이 미어질 것만은 확실했다. 연락하자니 두렵고, 안 하자니 보고 싶고. 하지만 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인지라 힘들게 연락을 했다. 그녀가 왔을 때 내 왼손엔 링거가 꽂혀 있고, 오른팔은 붕대로 감겨 있었다. 양손을 쓸 수 없어 어머니가 떠주는 밥을 먹고 있었다. 고향 뒷산에 흐드러지게 핀 산도라지꽃색의 코트를 입은 하얀 얼굴의 그녀가 통합병원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그 모습이 눈부시게 예뻤다. 그런 그녀가 날 본 뒤 아무 말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데 가슴이 미어졌다. 세 번째 시나리오가 맞았다. 병실 안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다. 어머니는 밥을 먹여주다 멈췄고, 병실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이야기하라며 자리를 피했다.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자존심 탓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존심보다 더한 것은 두려움이었다. 만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쩌나. 나는 아무 말 못하고 그저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했다. 불쌍해 보일 내 처지보다 저 사람이 왜 그렇게 안타깝고 딱해 보이는지,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짧은 시간에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다. 날 사랑하느냐고 묻고 싶다가도, 다른 사람에게 보내줘야 하는데 누가 나만큼 사랑해줄까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말없이 바라만 보기를 30분째. 용기를 내어 겨우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나 사랑해?" 그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지금도 그 모습을 잊지 못한다.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천사 같았다. 세상을 다 얻어도 이보다 기쁠까. '불행의 깊이만큼 행복을 느낀다'고 하지만 정말 그때 느꼈던 행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왼손만 가지고 이 예쁜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텐데. 이건 너무 이기적이다. 진짜 사랑한다면 그만 보내줘야 한다.' 나는 "얼굴 봤으면 이걸로 끝내자"는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 그러자 아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진 당신에게 내가 필요 없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지금부턴 당신 곁에 내가 있어야 해요." 이 말을 듣자마자 어떻게든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생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 큰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그때부터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불굴의 거인'이 깨어났다. 모태신앙인 아내는 날 위해 매일 새벽 기도를 했고 나는 링거를 꽂은 왼손으로 글씨 연습을 했다. 항상 아내는 내가 뭐든지 할 수 있다며 격려와 지지를 보냈다. 이후 내 인생의 목표가 된 아내는 지금까지 매일 소중한 조언을 해주고 있다. 사업상 힘들 때도 꼭 아내와 상의한다. '백발백중' 명답을 말해 하나님 음성처럼 듣고 산다.
***[역경의 열매] 조서환 (4) "한 손밖에 없어 안된다" 취업 냉대를 극복하다
"일은 손만이 아니라 머리·가슴으로" 면접관에게 따지자 애경유지 "합격"
수류탄 사고로 22세에 상이군인이 됐다. 1초만 늦게 수류탄을 집었으면 내 몸은 그대로 공중분해됐을 것이다. 간호장교는 머리에 파편이 너무 많이 박혀 얼마나 더 살지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 신의 가호가 있어 날 살렸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오른손 외에는 모든 것이 그대로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삶의 전략을 다시 짜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 하루빨리 재기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우선 나는 왼손으로 글씨쓰기 연습에 돌입했다. 지금도 생각해본다. 만일 내게 크리스천인 아내가 없었다면 어찌 됐을까. 매일 기도하는 아내를 둔 건 정말 큰 축복이다.
장인어른은 나와의 결혼을 크게 반대했다. 하지만 장인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딸에게 가난한 오른손잡이가 오른손도 없이 청혼했다. 이런 남자와 기어코 결혼하려는 딸이 얼마나 딱하고 한심스러웠을까. 하지만 딸의 계속된 설득에 결국 결혼을 허락했다. 만약 내 딸이 아내와 같은 선택을 했다면 난 장인어른과 같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리라. 장인어른이 참 위대한 분이란 생각이 든다.
결혼은 급속히 진행됐다. 우리는 약혼사진을 찍고 사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올릴 돈이 없다고 하니 불교신자인 큰형이 우격다짐으로 선택한 곳이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아내와 결혼한 곳이 하필 절이라니. 그럼에도 모든 것을 참아준 아내에게 정말로 고마웠다.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반드시 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오른손이 불편하니 손을 많이 안 쓰는 직업으로 미래를 구상했다. 손보다는 입을 많이 쓰는 영문과 교수가 되겠다고 고민 끝에 결정했다.
영문과 교수가 되기 위해 열심히 왼손으로 공부해 경희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꿈을 키우며 열심히 공부하는 도중 덜컥 딸 희수를 임신하게 됐다. 생활비가 없으니 낳지 말자고 했지만 아내는 절대 안 된다며 맞섰다. 하지만 고생하는 김에 일찍 애를 기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낳기로 했다. 아이 열 명을 낳은 어머니도 자기 먹을 것은 스스로 다 가지고 나온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던가. 낳고 보니 아이는 정말 귀엽고 예뻤다. 이와 함께 무거운 책임감도 느꼈다.
1년 뒤 아내는 아들 재영이를 낳아 덕분에 4학년 때 두 아이 아빠가 됐다. 가족 생계를 위해 유학을 가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취직하기로 했다. 하지만 어느 회사도 한 손 없는 날 뽑으려 하지 않았다. 과 동기들은 모두 일찌감치 취업했는데 나만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졌다.
벼랑 끝에 선 심정이었다. 1981년 하반기 채용의 마지막인 애경유지 면접에서도 손이 없다는 이유로 면접 현장에서 낙방 통보를 받았다. 지하철역에 서 있는데 문득 자살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이내 곧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생각났다. 도저히 그냥 돌아갈 수 없어 면접장으로 돌아가 면접관에게 따졌다. 일은 손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머리와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고. 일하는데 왼손이든 오른손 글씨든 무슨 상관이냐고. 다행히 이 용기를 장영신 회장이 높이 사 나는 졸업 전 입사에 성공할 수 있었다.
입사 후 다소 여유가 생긴 나는 새 전셋집에 내 걱정뿐이던 부모님을 모셔왔다. 그간 당신들이 흘린 눈물을 닦아 드리기 위해서였다. 취직 이후 참 신비스럽게 모든 일이 잘 풀렸다. 작은 성공이 큰 성공을 불러온 것도 있지만 장모님과 아내의 엄청난 기도 덕분이리라. 역경은 힘들지만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만약 사고로 손을 잃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까. 그래서 고난도 축복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역경의 열매] 조서환 (5) 면접장 소동에 애경 장영신 회장 "영어로 해보세요"
"장애인 차별 안돼" 면접관에게 일갈… 장 회장, 껄껄껄 웃으며 "잠깐만요"
사회는 국가유공자와 가족을 우대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면접에서 자꾸 떨어지자 취직도 못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점차 무서워졌다. 낙방 통보 후 면접장으로 다시 돌아간 것도 앞으로의 삶을 위해서였다. 사회정의 측면에서 이러한 처사는 옳지 않다는 걸 면접관에게 꼭 말하고 싶었다. 전철역에서 번민하며 열차를 기다리던 나는 다시 회사로 뛰어갔다.
회사 앞에 도착하니 여러 사람이 날 막았다. 처음에는 수위가 막고 다시 비서실에서 막았다. '신입사원 면접 본 사람인데, 꼭 해야 할 말을 못해서 그러니 잠시 들여보내 달라'고 했다. 젊은이가 하도 애원을 하니 이들도 전화로 물어본 뒤 길을 열어줬다. 면접을 마무리하고 좋은 인재를 많이 뽑았다며 담소를 나누던 면접관들은 나를 보더니 멈칫 놀라는 듯했다. 회사까지 달려오느라 얼굴이 빨개져 있었기에 상이군인이 술 마시고 행패 부리러 온 줄 알고 겁을 먹은 것이다. 이들 앞에 다시 앉은 나는 차분하게 할 말을 전했다.
"우선 전 깡패짓을 했거나 교통사고로 오른손을 다친 것이 아닙니다. 민족을 위해 군에 갔고, 또 희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왜 면접이 중단되는 설움을 받아야 합니까? 두 번째, 이곳 입사지원서엔 분명히 '국가유공자 우대, 10점 가점'이라 쓰여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걸 지키셨습니까? 세 번째, 글씨 쓸 때 양쪽 손에 펜 잡고 동시에 글 쓰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왼손잡이는 왼손으로, 오른손잡이는 오른손으로 씁니다. 여러분과 제가 뭐가 다릅니까. 물론 차 밑에 들어가 양손으로 차를 고치거나 무거운 짐을 나르진 못합니다. 하지만 모두 손으로 일하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머리로 일하는 것이죠. 여러분이 저보다 머리 좋다는 증거가 없다면 저를 떨어뜨릴 어떤 명분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도 군대에 갔거나 갈 예정인 자식들이 있을 겁니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앞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누가 예측하겠습니까. 혹시 자녀가 저 같은 입장이 됐을 때도 면접 중간에 내보내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이건 사회정의가 아닙니다. 합격시켜 달라고 말하러 온 거 아닙니다. 이래서는 안 되기 때문에 왔습니다. 혹시 저 같은 사람이 면접을 보러 오면 최소한 따뜻하게라도 대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사람들인데 갑작스럽게 면접을 중단하고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하는 것은 해선 안될 행동입니다. 회사가 발전하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고 걸어 나오는데 누가 나를 불러 세웠다. 장영신 회장이었다. 그때는 그분이 회장인줄도 몰랐다. 그는 껄껄껄 웃으며 다음과 같은 말로 갑작스럽게 상황을 반전시켰다. "영문과 나왔다고 했지요. 지금까지 얘기한 거 영어로 한번 해보세요." 화가 나서 쏘아붙인 얘기라 말하고도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났다. 내 이야기니 영어로 못할 건 없지만 하자니 창피했다. 그렇다고 안 하자니 실력이 없다고 할 것인지라 진퇴양난이었다. 더구나 사회정의 차원에서 이야기했다고 해놓고 회장이 시키는 대로 영어로 이야기하면 뽑아 달라고 구걸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실력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내 뒤에 올 국가유공자에게도 안 좋을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어차피 영어로 말해도 알아들을 사람 없을 텐데'란 배짱이 나를 담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장 회장은 미국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었다. 영어로 이야기하던 도중 장 회장이 말을 끊었다. "나 혼자 뽑는 건 아니니까…. 이제 가 보세요." 돌아서는 그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봤다.
이때 내가 얻은 것이 있다. '근성'과 '포기하는 것을 포기하라'란 가르침이다. 그날 나 스스로에게 말한 말이자 평생 기억할 다짐의 말이기도 하다. 지금도 어려울 때마다 그날의 용기를 생각하곤 한다.
***[역경의 열매] 조서환 (6) 1980년대 초반 '마케팅'에 내 삶의 미래를 걸다
입사후 공항서 외국손님 맞이가 전부 그들 명함엔 생소한 '마케팅' 단어가…
참으로 힘들게 취업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지만 어려움은 계속됐다. 입사 동기들은 모두 생산·구매·회계 등 고유 업무가 있었지만 나는 특별히 맡은 일이 없었다. 그저 이 부서, 저 부서의 문서를 영어로 번역하거나 외국 손님을 공항에서 맞이하는 일이 전부였다.
픽업맨 생활을 계속하니 팔이 너무도 피곤했다. 한 손으로 피켓을 드는 건 무척 힘들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내가 심부름센터 직원인가. 이 짓 하려고 영문과 나왔나.' 일에 회의를 느끼자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생각을 바꿔라. 이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다.' 운동하는 셈 치자고 생각을 바꿨다. 그러자 안 보이던 게 보였다. '저들 때문에 내가 고생이다'라며 외국 손님들이 건네는 명함을 받는 족족 찢어 버리던 내 눈에 '마케팅'이란 단어가 들어왔다. 이들의 명함에는 하나같이 이 단어가 들어 있었다. 이때가 1980년대 초반으로 우리나라엔 마케팅이란 용어조차 잘 쓰지 않을 때였다. 알고 보니 이들 모두가 마케팅 전문가가 아닌가. 생소한 이 단어를 보자 동물적 감각으로 느낌이 왔다. '여기에 내 미래가 걸려 있다.' 이것이 내가 추후 마케팅 전문가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세상에 하찮은 일이 어디 있나. 일을 하찮게 여기는 생각이 하찮을 뿐이다.
생각이 바뀌었어도 길이 저절로 순탄하게 열리진 않았다. 담당 과장은 내가 공항이나 호텔로 나돌아 다닌다며 나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게 내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인사고과 때마다 동기들은 A나 B를 받는데, 나만 항상 C나 D를 받았다. 매번 이런 평가를 받으니 호봉도 동기의 절반 정도고 봉급도 크게 차이가 났다. 진급에서도 번번이 누락됐다. 나는 C나 D를 맞을 정도로 업무태도가 형편없거나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장은 내 약점을 이용했다. 어차피 누군가는 낮은 평점을 받아야 하는데 그럴 바엔 최하점을 줘도 못 나갈 내게 준 것이다. 물론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낮은 인사고과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D를 줘도 다른 회사로 못 갈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낮은 고과를 준 건 정말이지 억울했다. 자식이 둘이나 되는 손 하나 없는 놈이 어디를 가겠나 싶어 D를 몰아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야비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내가 회사를 그만두지 않은 건 '나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나는 그 과장을 반드시 굴복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가족에 대한 강한 책임감도 이유였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나를 이 세상 최고라고 여기는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했다. 나를 향한 아내와 아이들의 믿음은 나를 강인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나도 벌떡 일어나서 "야, 이 자식아, 너 같은 저질하곤 일 못해"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래도 '언젠가는 내 밑에 들어올 것이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오기가 발동했고, 더 열심히 일했다. 그러자 내가 대리로 진급할 때 과장은 공장으로 발령이 났고, 내가 과장으로 부장 업무를 수행할 때 그 과장은 고참 차장으로 과장직을 맡았다. 만일 무너지는 자존심을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면 지금 내 모습은 어떻게 되었을까. 진정성을 가지고 진실하게 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소중한 계기였다.
이 땅의 수많은 후배 직장인들에게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진정한 자존심이란 무엇일까. 책임감을 갖고, 악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강하게 단련해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이다. 무조건 분에 못 이겨 때려치우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극복 방안을 세우고 이에 따른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이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자 성공의 지름길이다.
***[역경의 열매] 조서환 (7) 준비된 마케팅·영어 실력으로 '하나로샴푸' 대박
'마케팅이 나의 미래'란 깨달음을 얻은 뒤 관련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낮에는 일을 해야 하니 야간경영대학원을 알아봤다. 하지만 비용이 문제였다. 월급 절반을 저축하고 절반은 자녀 양육비와 생활비로 썼는데 추가로 학비를 지출하려니 막막했다. 고민하던 어느 날 불현듯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 지원 프로그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알아봤더니 놀랍게도 국가유공자 본인은 대학원 학비도 전액 지원해준다는 게 아닌가. 바로 성경 말씀이 생각났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 7:7)
마케팅 전공의 석사과정에 돌입하면서 주경야독이 시작됐다. 퇴근 후 동기들은 술집이나 노래방, 디스코장 등으로 갔지만 나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계속 공부에 매진했다. 하지만 그것도 결코 순탄치 않았다. 직장 상사가 '회사 일에는 신경쓰지 않고 퇴근시간 땡 하면 학교에 가느냐'며 퇴근시간쯤 30쪽가량의 영문 번역물을 준 것이다. 혼자 밤을 새워도 모자랄 분량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부탁해 내가 문서를 번역하면 이를 받아 적으라고 시켰다. 밤을 꼬박 새워 기어이 번역을 끝내자 나를 골탕 먹이려던 상사는 오히려 내게 감동을 받았다.
입사한 지 3년쯤 지났을까. 장영신 회장이 유니레버 조인벤처 기념식에서 통역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별도로 마련된 원고도 없었다. 통역은 입사 이후 계속해 온 일이긴 하지만 만일에 대비해 회장이 말할 만한 내용을 모두 글로 적었다. 그리고 이를 영어로 옮긴 뒤 전부 외웠다. 사실 한 문장씩 회장이 한 말을 옮기는 건 내겐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회장이 한꺼번에 연설을 다하고 요약하라 한다면 당황할 수 있으니 그때는 외운 것을 모조리 읊자고 생각했다.
두 번째 예상이 맞았다. 정말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15분 정도 회장이 연설을 하더니 청중에게 요약해 전해주라고 했다. 나는 즉시 외웠던 것들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혹시 실수할까 불안해하던 직원들은 내가 발표를 마치자 우레와 같은 박수를 터뜨렸다. 그때부터 사내에서 '영어 조'란 별명이 붙었다. 이후 회사 사람들은 모르는 영어는 죄다 내게 물었다. 이들은 내가 밤새 연설문을 준비해 외운 것은 모르고 그냥 머리 좋은 천재라고 생각했다. 이때 나는 깨달았다. 진정한 용기는 필요한 실력을 갖출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라고.
사내의 인정을 받으면서 자신감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자신감은 동기유발의 근원이자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실력을 겸비한 자신감만 있으면 세상에 안 될 것이 하나도 없다.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게 유일한 문제다.
이 경험은 나의 미래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영국 유니레버와 손잡은 회사는 마케팅과 영어 실력을 갖춘 인재를 요구했다. 이때부터 나는 회사에서 그야말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문무겸장으로 인정받았다. 마케팅 석사과정을 마치자마자 회사는 마케팅 실무자로 발령을 냈다.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맘껏 발휘할 기회가 온 것이다. 네덜란드인 부장, 프랑스인 상무 그리고 영국인 부사장을 상사로 모시고 '럭스' '비놀리아' '썬실크' 브랜드 매니저를 맡았다. 나는 이때 '하나로샴푸'란 히트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외국인 상사들의 반대에도 뚝심으로 밀고 나가 성공을 일궜다. 럭스 같은 해외 상품이 아니라 순수 우리 제품과 브랜드로 좋은 성과를 거둬 더 감회가 새로웠다. 하나로샴푸 성공 후 나는 회사 이익 증대에 기여한 공로로 창립기념일에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으로부터 공로상을 받았다.
인생에서 큰 믿음을 갖고 기도하며 나갈 때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경험을 수없이 했다. 그래서 나는 위로가 필요할 때 다음 말씀을 큰 소리로 외우곤 한다. "너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역경의 열매] 조서환 (8) 이직 4년째 애경 장 회장 콜에 '돈보다 의리' 선택
30대에 마케팅 분야서 뛰어난 성과를… 중역 제안에 4년 약속하고 회사 옮겨
장영신 회장의 인정을 받았지만 국내 기업 분위기상 30대에 임원 자리에 오르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하나로샴푸로 소위 대박을 치자 회사는 '이미 부장급 능력이 있는데 과장으로 두기는 아깝다'며 그룹 최초로 과장이면서 부장 업무를 하도록 했다. 네덜란드인 부장을 거치지 않고 프랑스인 상무에게 직접 보고하는 '생활용품 마케팅 헤드'가 된 것이다. 이 소문이 헤드헌팅 업계에 퍼져 이런저런 제안이 들어왔다. '발전을 위해 회사를 떠날까, 의리상 애경에 머물러야 할까.' 고민이 많았지만 '변화는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고 창조하는 것'이란 신념에 따라 다이알코리아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장 회장에겐 '유학 가면 4년 정도 걸리니까 그 기간 외국 기업에서 마케팅 기법을 배우고 오겠다'고 말씀드리고 이직을 감행했다.
다이알코리아는 6개월 뒤 성과를 보고 중역 직함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사무실과 비서, 차 등의 대우는 모두 중역급으로 제공하겠지만 공식 직함은 성과를 본 뒤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직 후 나는 6개월간 매달 한 개씩 신제품을 냈다. 성과를 확인한 회사는 마케팅 중역인 마케팅디렉터로 발령을 냈다. 이때 내 나이가 35세였다. 젊은 나이에 중역이 되자 성취감이 대단했다. 이 모습을 장인어른께 꼭 보여드리고 싶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회사로 초청해 사무실을 보여드린 뒤 호텔에서 식사를 대접했다. 아내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드리고 싶어서였다. 두 분의 표정은 참 밝아 보였다. 사위가 사무실을 혼자 쓰면서 비서까지 두고 있는 걸 보시고 당신 딸이 큰 고생은 안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셨으리라.
돈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버는 것이다. 나만 행복하려고 일하고 돈을 벌면 뭘 해도 재미가 없다. 나로 인해 가족과 상사, 주위 사람이 행복해하면 훨씬 더 보람 있고 힘이 난다. "왜 이렇게 많이 썼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한 일이다. 같이 써줄 사람이 있어 행복한 것이지, 번 돈을 모두 쌓기만 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2년 뒤 나는 한국로슈 마케팅 이사로 다시 이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장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분명 외국 회사에 가서 배우고 다시 온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제 4년 됐으니 다시 오십시오." 회장이 직접 한 제안이긴 했지만 월급을 절반 이하로 줄여야 했으므로 고민이 됐다. 하지만 나를 알아보고 기회를 준 장 회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느 회사도 뽑아주지 않아 정말 힘들 때 '저 사람만은 해낼 것'이라며 의심 없이 믿어준 은인이 아닌가.
'돈보다 의리란 생각'으로 갔지만 돌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 세계에선 상사한테 인정받는 것 이상으로 큰 기쁨이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상사가 날 믿고 맡긴 모든 일이 의도한 방향으로 척척 들어맞는데다 적자를 내던 회사가 1년 안에 흑자로 전환되자 그렇게 통쾌할 수 없었다. 매일 아침 무슨 일을 할까 기대되고 즐거운 나날이 이어졌다.
나는 직원이 자질을 제대로 갖춰야 회사의 미래가 밝다고 믿는 사람이다. 애경에 돌아가자마자 부하직원을 대상으로 마케팅 교육을 시작했다. 애경-유니레버 합작 당시 유니레버는 마케팅 스쿨을 운영했는데 6개월에 한 번씩 아·태지역 마케터를 모두 불러 1주일간 마케팅 이론을 가르쳤다. 현장의 마케터에게 마케팅을 다시 가르치는 게 굉장히 신선했다. 로슈와 다이알에서도 마케팅 스쿨을 몇 차례 다녔다. 당시 국내에 나만큼 현장에서 마케팅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선진 마케팅 기법을 전수하겠다는 사명감으로 매주 마케팅 스쿨을 열어 후배들에게 마케팅의 기초부터 철저히 가르쳤다. 또 '시키는 대로 일하지 마라' '자신감 있게 제안하라'는 경험이 담긴 조언도 아낌없이 전수했다. 이는 훗날 애경이 '마케팅 사관학교'라는 애칭이 붙는 계기가 됐다.
***[역경의 열매] 조서환 (9) "불가능은 없다" 한손으로 골프 입문 87타까지
장영신 회장 권유에 '한손 골프' 성공 100대 1 경쟁뚫고 KTF 마케팅 상무로
왼손으로 골프를 치는 조서환 대표. 그는 "한 손으로도 글씨를 쓰고 운전할 뿐 아니라 골프도 87타를 기록한다"며 "스스로 한 손이 없다는 걸 잊고 살 정도"라고 말했다.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고질병은 안 된다고 미리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뭔가 시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다고 여기고 돌진할 때 문이 열리는 걸 수없이 많은 경우에서 확인했다.
애경에서 일하던 어느 날, 장영신 회장이 나를 불러 골프를 권했다. 한 손 없는 사람에게 골프를 치라니 한숨만 나왔다. 그런데도 장 회장은 왼손 하나면 칠 수 있다며 자꾸 권했다. 단순히 격려 차원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뜻이 있으리라 생각해 하루에 3번씩 골프연습을 했다. 그 결과 현재 골프는 나의 취미가 됐다. 만일 시도하지 않았다면 친구들과 어울려 그린 미팅을 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KTF 마케팅전략실장 상무 면접을 볼 당시 얘기다. KTF 명성에 걸맞게 경쟁은 치열했다.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서류전형을 통과한 뒤 몇 차례 전형을 거친 4명의 후보가 최종면접을 봤다. IT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내가 준비한 답을 하려면 면접에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면접장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질문을 던졌다.
"왜 6만명의 직원을 두고 외부에서 사람을 뽑습니까? 회사에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당시 이용경 사장은 016, 018 번호에 자부심이 없고 통화 품질이나 가입자 구성이 좋지 않다고 답변했다. 나는 즉석에서 마케팅 아이디어를 냈다. 직장인이 선호하는 이동통신사도 아니고 KTF 임직원들이 번호에도 자부심을 갖고 있지 않으니 아예 번호를 없애자고 제안했다. 경쟁사와 비교해 통화 품질에 별 차이가 없는데도 통화 품질을 좋지 않다고 자평하는 건 사장님 이하 모든 직원이 회사에 대한 프라이드가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가입자 구성비가 좋지 않은 것은 기업고객 확보가 충분히 되지 않았다는 것이니 이 3가지를 개선하자고 했다. 입사 후 면접 때 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후임 이경준 사장이 오자마자 번호를 없애는 작업에 돌입했다. 이는 오늘날 010이 태어나고 번호이동제가 생기게 된 동기가 됐다.
뉴스 내용을 바꾼 적도 있다. 화장품 성분 중 레티놀은 피부가 탱탱해 보이는 효과를 낸다. 애경을 비롯한 여러 화장품 회사가 경쟁적으로 레티놀 제품을 출시했다. 그런데 '시민단체 조사 결과 각 화장품 회사들이 저급한 레티놀을 사용하는 데다 양도 허위로 표기한다'는 보도가 애경 제품을 선두로 뉴스에 나간다는 게 아닌가. 방송이 나오기 전부터 직원들은 모두 포기하는 심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나는 '미리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일단 최선을 다하자'고 다그치며 각 방송사를 직접 찾아가 시민단체뿐 아니라 회사의 입장도 함께 보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뉴스 내용은 정정됐고 일방적으로 불리한 기사는 나가지 않았다.
나는 모든 직장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다. 어떤 역경 속에도 안 된다고 미리 결론을 내지 말고 최선을 다해 전략을 짜내라고. 길은 있다. 길이 없으면 찾아라. 그래도 못 찾으면 길을 만들라. 안 된다는 결론을 미리 내는 건 스스로 절망을 만드는 것과 같다. 1%의 가능성만 있으면 된다. 그에 따른 전략 전술을 구상한다면 이 세상에 못할 일은 없다.
사람이라면 인생에서 크고 작은 시련을 겪기 마련이다. 그 시련이 오히려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종종 시련을 계기로 우리를 더욱 담금질하여 강하게 만든다.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기회는 없다. 상사의 말 한마디가 부하 직원이 천당과 지옥을 오가게 만드는 걸 많이 보지 않는가. 말의 힘은 이렇게 세다.
그러니 할 수 있다고 외쳐라. 기적 같은 일도 애초부터 안 된다고 예단하지 말자. 주 예수를 의지하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선포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역경의 열매] 조서환 (10) 1등을 따라하는 '미투 전략' 대신 '1등 전략'을
KTF 시절 3G 시장 선점으로 1등을… 진정한 리더는 희망·비전 주는 사람
한 조서환 대표. 3G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의지로 이순신 장군 복장을 했다.
2001년 11월, 애경을 떠나 KTF 마케팅전략실장 상무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KTF는 매출 5조원의 거대 공기업이었다. 그러나 이동통신 시장에선 2등 회사였다. 마케팅 수장으로 입사하자마자 냉정하고 주도면밀하게 시장 경쟁 구도를 살폈다. 그 결과 10여년간 1위를 선점한 SKT를 쉽사리 이기기 어렵겠다는 판단이 섰다. 전화를 많이 쓰는 비즈니스맨 대부분은 SKT를 썼다. 지인에게 처음 나온 KTF 컬러 휴대전화기를 선물했는데 1주일 만에 그들의 부인이나 자녀들 손에 가 있었다. 번호를 바꾸기 힘들다는 게 이유였다. 번호를 바꾸지 못하게 하는 제도가 문제였다. 이는 내게 번호이동제의 필요성을 절감케 하는 계기가 됐다.
문제의 원인을 알았으니 이기는 전략을 세워야 했다. 고민 끝에 나는 1등을 따라하는 '미투 전략' 대신 '1등 전략'을 쓰기로 했다. 당시 정보통신부에서 통화품질 측정 결과가 발표됐는데 KTF가 SKT보다 딱 1점 더 높았다. 신문과 TV 등 모든 광고매체를 동원해 '통화품질 1등, 대한민국에서 가장 우수한 통화품질 KTF'라고 광고했다.
광고 후 두 가지 반응을 예상했다. 소비자는 'KTF가 통화품질 측정 결과 1등을 했다'고 인식하겠고, SKT는 분명 다른 이유를 들어 우리에게 대응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여지없이 맞았다. SKT는 광고에서 '고객만족도 1위'라며 맞섰다. 그러나 자료의 객관성 면에서 우리가 더 유리했다. KTF는 정보통신부 발표를 인용했고 SKT는 소비자 조사 결과를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사의 신뢰도 경쟁이 목표는 아니었다. 서로 1등이라고 함으로써 소비자에게 누가 1등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심는 게 내 의도였다.
두 번째 싸움은 비즈니스위크지 기사에서 시작됐다. 그 즈음 비즈니스위크는 '전 세계에서 성장률과 수익률 면에서 최단기에 가장 크게 성장한 회사는 KTF'라고 보도했다. 우리는 '비즈니스위크에 의하면 KTF가 성장률, 수익률 모두 1등'이라는 TV 광고를 했는데, 이에 맞서 SKT는 '재무제표를 조작해 1등이 됐다'는 신문 광고를 했다. 결국 '이유 없는 경쟁사 비방광고'로 SKT는 그 당시 사상 최대 과징금이 부과됐다. 소비자에겐 또 1등과 2등이 서로 다투는 것으로 비쳤다.
2등은 장점을 최대한 살려야 산다. 1등과 비슷한 점만 있어도 자신감 있게 싸워야 한다. 하지만 안락한 2등에 익숙해져 싸울 용기조차 내지 않는다. 이것이 2등이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기에 2등은 1등 했을 때 대내외로 이를 표명해야 한다. 그래야 경영자, 직원, 소비자 모두 확신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는 SKT와의 싸움에서 항상 1등 전략을 썼다. 어느 회사든 2등일 수밖에 없는 분야가 있다. 나는 '1등 하는 부분만 더 강조해라. 그러면 진짜 1등 한다'는 생각을 했고 이대로 밀고 나갔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시장을 아주 세분화해 1등 전략을 펼쳐야 한다. 이것이 2등이 취할 전략이다. 애경이나 KTF나 업종은 다르지만 마케팅 방법은 하나도 다를 게 없었던 이유다.
나는 경쟁사를 이기기 위해선 KTF가 무조건 3G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당시 사장에게 강력히 건의했다. "대한민국 마케팅 교과서에 기록될 만한 브랜드와 회사를 만들겠습니다. 3G로 과감히 이동하시지요." 이렇게 KTF '쇼(SHOW)' 브랜드가 탄생했다. 쇼로 1위를 탈환한 우리는 2008년 이유재 서울대 교수의 서비스마케팅 강의 자료에 성공 사례로 소개됐다.
2등에 안주하지 않고 1등을 넘어서는 전략을 펼칠 수 있는 용기와 열정은 의지에 달렸다. 세라젬 H&B에서도 같은 전략을 쓴다. 신생 기업이 처음부터 1등일 수 없다. 그러나 직원들에게 계속 우리는 '세계 1등 회사'란 것을 강조한다. 어차피 우리가 1등이 될 테니까. 진정한 리더는 직원들에게 희망과 비전을 잘 심는 사람이다.
***[역경의 열매] 조서환 (11) 갑작스런 대기발령… '위기는 기회' 새 인생 준비를
KTF와 KT 통합 과정서 한직 발령… 1년후 세라젬으로 옮겨 새출발 시동
2008년 KTF 부사장 시절 나는 인생의 정점을 달리고 있었다. 저서 '모티베이터'는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일간지에 인터뷰 기사도 크게 실렸다. 어디 이뿐인가. KBS 아침마당에 출연한 뒤 각종 TV와 라디오 출연 제의가 쇄도했다. 여기저기서 최고경영자 과정 강의를 부탁하기도 했다. 어리둥절할 정도로 인기가 급상승했다.
그런데 2009년 초 KT와의 통합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고위직이던 나는 예감이 썩 좋지 않았다. '설마 나 같은 유명인사를 어떻게 하겠어?'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회사는 보직을 주지 않고 '연구위원'으로 대기발령을 냈다. 2007년부터 2년간 내 업적은 창사 이래 전무후무한 최고의 성과였다. 그런데도 1년간 매달 월급을 줄 테니 일하지 말고 놀면서 대기하라는 것이다. 나는 너무도 당혹스러웠다.
나는 노는 연습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다. 갑자기 놀자니 죽을 것 같았다. 나는 안 놀고 오히려 더 바쁘게 살기로 했다. 아내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보살필 거야. 걱정 말고 하나님께 맡기세요.' 아내 기도에 힘입은 나는 스스로를 어떻게 '마케팅' 할지 고민했다. 남이 알아줄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지인에게 터놓고 알릴 것인지를 두고 선택해야 했다.
나는 스스로 알리는 편을 택했다. 우선 내가 설립한 '아시아태평양마케팅포럼'에 내 상황을 알렸다. 역발상 마케팅의 효과는 매우 컸다. 많은 회사에서 CEO 영입 제의가 들어왔고 밤낮으로 기업에서 특강 및 컨설팅 요청이 들어왔다. 매사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보살핀다는 아내의 말이 맞는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였던 대기발령 때 오히려 나는 가장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묘했다. 세상을 겁내지 않고 담대하게 돌진하면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크게 깨달았다.
대기발령 후 50대 중반인 나는 인생 2모작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대학교수로 갈까? 교육사업을 할까? 마케팅 컨설팅 회사를 경영할까?' 결국 내가 가장 즐길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글로벌 마케팅을 꿈꾸던 나는 전 세계 72개국에 진출해 있는 세라젬 그룹의 러브콜을 받아들여 화장품 사업을 하기로 했다. 갈 길을 굳힌 나는 2009년 10월 KT에 등기 속달로 사표를 제출했다. 그리고 이튿날 세라젬에 입사해 3개월 만에 중국과 한국에 각각 회사를 설립했다.
한 기자가 인터뷰 도중 들려준 호박벌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여름 호박벌은 일주일에 1600㎞를 난다. 하지만 호박벌은 태생적으로 날 수 없는 신체구조다. 몸통은 뚱뚱한 데다 날개는 너무 짧고 얇아서 공기 저항을 이겨낼 수 없어서다. 그런데 호박벌은 날 수 없게끔 태어났다는 사실을 모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오로지 꿀 따는 것만 집중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문득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시골에서 태어나 돈도, 배경도 없이 오로지 호박벌처럼 목표를 세운 뒤 쉬지 않고 뛰었다. 내 환경은 일류로 살기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한 처지를 무시한 채 오로지 초일류로 살겠다는 흔들림 없는 목표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됐다. 미물도 목표가 뚜렷하게 있는데 어찌 사람이 목표 없이 성공할 수 있을까.
여행할 때 행선지를 뚜렷하게 정해야 목적지에 이르듯 인생도 목표가 있어야 제대로 살 수 있다. 목표가 있어야 항해할 때 겪는 거친 풍랑과 고난을 극복할 힘이 생긴다. 따라서 직장 후배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우선 분명한 자기만의 인생목표를 세우고 전진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절반은 성공한다. 아니 이미 성공한 것처럼 즐겁게 살 수 있다.
***[역경의 열매] 조서환 (12) 난공불락 中 시장… 매일 "길 열어주세요" 기도
유통채널 없고 높은 진입장벽에 낙담 철수 고려 중 아내 "포기는 안돼" 일침
새로운 기회의 땅, 중국! 거대 시장에 호기롭게 덤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준비 없이 무턱대고 뛰어드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사장을 하기로 결정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무를 수도 없고 참 난감했다.
중국 화장품 시장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나는 전 세계 꼴찌로 진출하는 셈이었다. 그런데 참신한 아이디어도, 제품도 없었다. 화장품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곤 회사에 나뿐인데 정작 중국시장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무엇보다 유통 채널이 없으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큰소리를 쳤으니 어떻게든 책임은 져야 하는데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내가 최악의 수를 뒀다. 뒤늦게 인생 2모작으로 너무 무모한 도전을 해 실패를 하는구나.' 무(無)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음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팔 물건이 없어 그런가' 싶어 작은 회사를 인수해 제품을 출시했다. 그런데 조금 인기가 있다 싶으면 금세 '짝퉁'이 나와 피해를 입기 일쑤였다. 제품이 없어도 걱정이고 있어도 걱정이었다.
결국 아내에게 조심스레 심경을 밝혔다. "그동안 어떻게든 회사 잘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이번엔 힘들 것 같아. 서울로 가야겠어." 잠자코 내 말을 듣던 아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 여기 와서 맨땅에 헤딩한다고 하셨죠. 내가 보기엔 아직 이마에 작은 상처도 안 난 것 같은데, 벌써 포기한다고요?" 그때 아내의 말이 내겐 '하나님 말씀'처럼 들렸다. 매일 나를 위해 기도하던 아내의 입을 빌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으리라. 내가 진짜 사장이 된 것은 그날부터였다.
아내의 일침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회사를 본격적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회사와 나에 대한 신뢰를 쌓고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중국 전역을 돌며 판매원 교육을 했다. 그러면서 매일 틈만 나면 기도를 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찾으시며 죽은 자를 산 자같이 부르는 분'이 아니던가. 1급 지역이 어려우면 2급 지역에 팔고, 설비투자가 어려우면 생산은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해결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고생은 그때부터였다. 중국 화장품 시장의 진입장벽은 엄청났다. 선크림 하나 허가 받는 데 3년이 걸렸다. 또 다른 문제는 공장이었다. 자체 설비를 갖추기는 시기상조여서 다른 공장에 생산을 위탁했는데 물량이 많지 않으니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공장 책임자를 찾아가 '당신 회사 회장과 친하다'는 압박 아닌 압박까지 해야 겨우 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제품생산 뒤 본격 프로모션 단계에 들어가자 자금이 문제가 됐다. 제품이 좋아도 홍보할 돈이 없었다. 유통 상인들의 마음을 얻어야 매장에 제품이 입점되는데 방법이 없었다.
나는 매일 '길을 열어 달라'는 내용의 기도를 했다. 그러자 좋은 생각이 났다. 오래된 간판을 우리 브랜드를 넣은 새 간판으로 교체해 주겠다는 제안을 하고 제품을 매장에 입점했다. 성공 사례가 하나 둘 생기니 우리를 찾는 상인은 늘고 매출도 덩달아 점점 증가했다. 중국 전역에서 강연하며 회사를 알리는 데도 주력했다. 화장품 대리점 사업자 수백명을 호텔 연회장에 모아놓고 이전에 출연한 방송 영상을 틀었다. 사회자가 중국 CCTV 격인 KBS에 세 번 소개된 '마케팅의 전설 조서환 사장'이라고 말하자 이들은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믿을 뿐 아니라 우리 제품을 신뢰하게 됐다.
이전엔 내 힘으로 해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주께서 함께하시니 회사가 더 융성할 것이라 믿는다. 중국 비즈니스에 성공해 '글로벌 비즈니스맨'이 되면 그 다음 목표가 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날까지 계속 노력하며 나아가는 것이 내 사명이다.
***[역경의 열매] 조서환 (13) 교회 출석 30년만에 중국서 '회심의 눈물' 펑펑
새벽예배 설교에 감동 눈물이 비처럼… 이후 '100만 위안 달성' 기도에 응답이
나는 30여년간 아내와 함께 교회를 다녔다. 그럼에도 '은혜를 받았다'거나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체험을 해 본 적이 없어서다. 내가 교회에 간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한 주라도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아내가 1주일간 계속 불편해했다. '집에서 자나 교회에서 자나 마찬가지'란 생각으로 나갔다. 어쩌면 절실하게 기도할 일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간 모든 일이 잘 풀린 게 다 내 능력이라고 착각하며 30년을 살았다. 십일조도 계속했지만 믿음이 있어 한 게 아니었다. 아내가 좋아하니까 아깝지 않았을 뿐이다. 아내는 "그 오랜 기간 어떻게 믿음이 안 생길 수 있느냐"며 나를 딱하게 여기곤 했다.
하지만 중국에 가서 내가 얼마나 미약하며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한국에 돌아가자니 '마케팅 귀재'라며 치켜세우던 사람들이 전부 비웃을 것 같았다. 내가 많이 힘들어하자 아내는 중국에서 새벽예배를 나가기 시작했다. 아내는 오전 5시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4시30분에 일어나 한인교회까지 25분을 홀로 걸어갔다. 컴컴한 새벽길을 혼자 걸어 다니는 아내가 안쓰럽고 걱정스러웠다. 동행해야겠다는 생각에 나간 것이 내 생애 첫 새벽예배가 됐다.
어느 날 새벽예배를 이끄는 한인교회 목사가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을 주제로 설교를 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는 가지니…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런데 그 말이 꼭 나한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 다음 주 예배 때 마가복음 4장 39절 말씀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갑자기 비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교회에서 우는 사람을 볼 때마다 정상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나님 아버지, 지금껏 내가 해왔고, 또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야 깨닫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도하다 보니 저절로 통곡과 절규가 나왔다. 인간으로서 할 수 없다는 것이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하나님 은혜를 구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렵거나 새로운 일을 할 때면 대화하듯 기도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그냥 기도하지 말고 기도제목을 정한 뒤 하라"고 조언했다. 당시 한 달에 100만 위안(1억7000만원) 매출 달성이 내 목표였다. 이를 놓고 기도하자 하나님이 정말 이를 달성케 해주셨다. 하루는 중국 저장성 호텔에서 꿈을 꿨다. 내가 친 골프공을 찾으러 산 중턱에 가니 공 주위에 8개의 다른 공이 있어 모두 줍는 꿈이었다. 그날 매출 80만 위안을 달성했다. 또 그달에 기도제목이던 100만 위안을 달성하기도 했다. 이후 매출을 30% 더 올려 달라고 기도하니 138만 위안으로 매출이 올랐다. 신기해서 아내에게 왜 이렇게 기도가 잘 이루어지는지 물었다. 아내는 "당신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신앙적으로 아기다. 아기가 울면 부모가 젖을 주듯 하나님도 그렇게 아기인 당신의 기도를 들어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일 이후에도 매출에 관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정확히 응답해 주셨다.
그러면서 나는 깨달았다. 내가 여태까지 왜 승승장구했는지를 말이다. 내 성공은 장모와 아내의 엄청난 기도 덕에 가능했다는 것을 30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진실로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다. 직접 기도응답을 받은 뒤에야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닫게 됐으니 말이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날 중국에 보낸 뜻도 알 것 같다. 절실한 상황 속에서 내가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신 것이리라. 이때부터 전도를 시작했고 모든 의사결정을 할 때 기도를 한다. 그리고 수시로 '우리 가족의 3종 기도세트'인 주기도문, 야베스의 기도, 시편 23장을 외운다. 하루에도 7번 이상 기도할 정도다. 내 안에는 이런 확신이 있다. '기도하는 기업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진정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을 계속 찬양할 것이다.
***[역경의 열매] 조서환 (14·끝) 한 손으로 일군 '마케팅 1인자'… 주님 감사합니다
향후 중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가는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KTF 수도권마케팅본부장 시절 한 골프장에서 이환성 세라젬 회장을 만났다. 대기발령 중이란 소문을 들은 이 회장이 내게 '골프나 한번 치자'고 연락한 게 계기였다. "세라젬은 국내 중견기업 중 해외에 많이 진출한 기업입니다. 두고 보세요. 언젠가 대한민국 최고 글로벌 인재들은 내가 다 데려올 겁니다." 당시 그의 말을 들을 때 과장이 심하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 회장의 호언장담도 나름 타당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72개국에 진출해 온열기 분야에서 넘버원 브랜드를 만들었다. 그의 사업 명분은 '인류의 건강증진'이었다. 제품을 고객이 직접 체험해 보고 좋으면 사도록 해 고객의 만족도도 매우 높은 편이었다.
나는 자부심과 긍정의 정신, 태도로 무장한 이 회장이 참으로 인상 깊었다. 긍정적인 사람은 결국 성공하게 돼 있다. 설령 그의 말에 과장이 섞였더라도 나는 '글로벌 인재 욕심'을 표현한 그의 말이 좋게 들렸다. 그래서 기꺼이 세라젬의 자문위원장을 맡았다. 김일섭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총장과 애경 재직 시절 선배였던 서충석 CHD메딕스 대표이사 등 예닐곱 사람을 기업자문위원으로 모시고 열심히 활동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회장이 내게 엉뚱한 제안을 했다. "내가 중국에서 온열기로 큰 성공을 했는데 화장품으로 중국을 한번 더 뚫으면 어떨까요?" 온열기는 내구재여서 언젠가는 한계에 부닥칠 수 있었다. 속으로는 그도 걱정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차기 사업으로 화장품을 염두에 두고 첫 진출국으로 중국을 점찍었다. 내가 좋은 생각이라고 칭찬하자 말 나온 김에 화장품 사업을 직접 해보라고 제안했다. 온열기의 '온'자도 모르는 나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한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화장품이면 내가 잘 아는 분야이고 국내에서 성공 경험도 있으니 나나 회사나 이보다 더 좋은 파트너를 구하기도 어려울 터였다. 막연하게 그리던 글로벌 시장에 진출할 기회가 온 것이다. 오랜만에 의욕이 솟구치는 기분이 들어 두말 않고 세라젬 헬스앤뷰티 대표직을 받아들였다.
2009년 당시 중국 화장품 시장의 연간 성장률은 10%가 넘었다. 2012년이면 시장 규모가 250억 달러를 넘어설 것이라고 전망됐다. 이런 시장이 전 세계에 어디 있겠는가. 무엇보다 화장을 한 중국 여성이 아직 많지 않다는 게 큰 기회로 여겨졌다. 아프리카에 신발 신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두고 어떤 사람은 신발 시장이 없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잠재시장이 크다고 한다. 나는 당연히 후자였다. 안후이성과 장쑤성, 산둥성을 방문해 시장조사를 해보니 화장한 이들이 많지 않았다. 비교적 늦은 시기에 중국에 진출한 우리 회사가 글로벌 기업이 시장을 독점한 베이징과 상하이를 목표로 진출하면 실패 확률이 높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장조사를 했던 2급 도시들로 출발선을 조정했다. 만약 대도시에 진출했다면 세계 유명 브랜드 탓에 아마 지금 같은 사업을 일구지 못했을지 모른다. 이런 지혜와 명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던 인생길이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던 인고의 세월이었으나 역경을 이기는 신앙 덕에 오늘날이 가능했다. 앞으로의 길은 더 멀고 멀 것이다. 그러나 걱정 하나 없이 가려 한다. 하나님이 계시니까. 많은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베풀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 간절히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한다.
좌충우돌 미천한 경험과 작은 믿음을 독자에게 간증하게 돼 그저 감사할 뿐이다. 긴 세월을 기다려 주고 참아준 주님께 두 손 모아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부르시고 믿음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부르신 뜻대로 사용해주소서. 내가 죄인일 때부터 내 인생 가운데 당신이 계셨음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은혜입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